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75
허둥대는 나래에겐 미안한 일이나 그는 지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으며 다른 배우들의 과거 경력과 연극의 기본 지식을 다시 훑느라 바빴다.
“아, 그래······. 우리 숍 갈 건 들었니?”
“네. 그 부분은 나래 누나가 잘 해주겠죠.”
“······.”······.”
믿고 맡기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그냥 귀찮은 부분을 떠넘기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스텝의 일이 그런 것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너무나 ‘외골수’인 태화를 보며, 그녀는 3년씩이나 그를 보조해 온 현규가 존경스러워졌다.
***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그들은 뷰티숍으로 향했다.
태화가 한눈을 파는 사이 정말로 내기가 성립한 탓이었다.
「오, 신이시여······. 저 사람 진짜 순수한 한국인입니까?」
눈썹만 염색하더라도 걸리는 시간은 일반 염색과 비슷하다.
당연히 비효율적이었으며 알렉산더도 ‘시간을 버리는 일’임을 자신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그는 의외의 결과물을 보고 침묵해야만 했다.
눈썹을 염색하고 금빛 가발을 뒤집어쓴 태화가 정말로 다른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동양인들이 금발을 하면 싸구려 염색 같았는데, 마치 제 색인 것처럼 소화하는군······.’
허무맹랑하다 생각한 나래의 주장도 납득이 갔다.
금발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남자가 한국 여권을 들고 비행기에 타려 들면 수상하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겼죠? 음, 태화야. 지금 그 가발 꽤 잘 어울리니까, 오늘은 그걸 베이스로 꾸미자.」
「저 지금 쉬러 뉴욕에 온 건데요······?」
루이와는 또 다른 느낌에 신기해하며 거울을 응시하던 태화는 미묘한 시선으로 나래를 바라봤다.
빨리 극장에 도착해서 록셀을 보고 싶은 그에게 시간을 잡아먹을 그녀의 제안은 ‘상당히’ 흥미롭지 못했다.
「할리우드 가기 전 선행 학습이라 생각해. 그리고 아무리 땅 넓고 주변에 관심 없는 미국이라지만 너 알아볼 사람이 하나 정도 있을지도 모르잖아.」
「글쎄요······.」
한국 공항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 넓고 복잡한 곳에선 어련할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태화는 실랑이를 벌이는 대신 얌전히 자신의 얼굴을 제공했다.
꾸미는 것에 관해선 그녀를 이기기 힘들다. 그렇다면 언쟁을 버리느라 쓸데없이 흘러갈 시간이 아까웠다.
고용주의 뜻에 따라 나래는 순식간에 화장을 마쳤다.
화장까지 끝낸 태화는 영락없는 서양인이어서, 알렉산더는 다시 한번 신을 찾았다.
***
“완벽해······. 영상은 록셀의 매력을 반도 못 담은 거였어.”
공연이 끝나 떠나는 이들로 소란스러운 극장에 앉아, 태화는 첫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얼굴로 여운을 만끽했다.
연극은 완벽했다.
다른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이 연극의 아름다움을 퇴색시키는 것이라 느낄 만큼, 록셀의 공연은 굉장했다.
‘이런 작품이 내년에 사라진다고?’
태화는 사랑하는 연인이 시한부란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충격과 공포에 잠겼다.
록셀은 오는 7월, 정확히 7월 13일 저녁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회귀 전 많은 연극 팬들과 자신을 슬픔에 잠기게 만든 끔찍한 죽음이었기에 착각할 리 없었다.
‘어떻게 막을 수 없나? 이렇게 록셀을 잃는 것은 세계적인 손해잖아.’
록셀은 훌륭한 연극인인 동시에 많은 예술가들의 뮤즈였다.
매년 이 정기 공연을 예매하는 15퍼센트가 감독과 프로듀서, 작가라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그의 공연에서 영감을 얻는 이들이 많았다.
태화 또한 그의 연기를 보고 올라가야 할 계단을 좀 더 명확하게 보게 되었으니 록셀은 태화의 뮤즈이자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다.
‘BBA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했지.’
BGA를 통해 부탁했던 브로드웨이의 다른 공연 티켓들을 건네주며, 알렉산더는 백 스테이지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을 전했다.
BBA의 힘이 부족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직 미국에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애매한 패를 위해 거기까지 힘쓰는 건 곤란하단 의미였다.
‘하긴 배우들이 유일하게 쉬는 곳이니.’
연극계에 몸을 담았던 태화도 백 스테이지가 굉장히 예민한 장소임을 알았다.
물론, 배우의 지인이나 가족이 안까지 찾아와 꽃다발을 건네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데뷔와 같은 기념적인 날에나 그러했지, 다른 배우들에게 폐가 되는 행동이기에 연극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일수록 그런 월권을 지양했다.
‘그래도 만나고 싶어.’
신화에 등장하는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은 예언을 뱉었던 카산드라’가 될지 모른다.
과거 고민했던 것처럼 용의자로 지목될지 몰랐다.
그럼에도, 태화는 그의 죽음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일단 가보자.’
안 되면 팬레터라도 보내자 결심하고 태화는 입구에서 보았던 지도를 떠올리며 백 스테이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무대 뒤편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았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경호 인력도 당연히 존재했다.
「꽃다발이나 편지도 힘든가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무처를 이용해 주십시오. 저희는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둘로 이뤄진 건장한 경호원들은 앵무새처럼 매뉴얼에 적힌 말을 반복했다.
어떤 물음에도 ‘떠날 수 없다’, ‘선물은 사무처에’라는 말을 반복했고, 그 앞에 막힌 팬들은 약간 시무룩한 모습으로 떠나갔다.
‘역시 최선은 BBA를 통해 전달하는 건가······.’
사무처에 넘긴다면 그쪽에서 미리 체크를 할 것이고 ‘7월이 교통사고가 날지 모르니 조심하라’ 같은 말을 협박으로 받아들여 폐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어떻게 받아들이든 일단 록셀이 읽어 주길 바라는 태화로선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다.
「안녕, 아까부터 쭉 입구를 보고 있던데.」
태화가 직접 말하는 것은 포기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아, 죄송합니다. 팬으로서 약간 미련이 남······!」
「쉬잇. 내가 잘생기긴 했지만 그러면 딴사람들도 알아차려서.」
또 다른 경호원이라 생각해 사과를 건넨 태화는 시야에 들어온 얼굴을 보고 크게 눈을 떴다.
오늘 록셀의 아들 역할을 맡았던 배우 케빈 글렌이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감격하는 것도 당연한데 사인 요청은 구석에서 받아 줄······. 응?」
장난스럽게 말하던 케빈은 갑자기 태화의 양쪽 뺨을 잡더니 심각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관찰했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당황한 태화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케빈의 양손을 붙잡았다.
아는 사이라 할지라도 불쾌한 행동인데, 초면에 이러는 이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거 놓으······.」
「설마 이태화!? 와, 진짜 실물인가!」
「어······?」
「글렌이다.」
「꺄악! 케빈! 사인해 주세요!」
「케빈 글렌? 어디, 어디?」
케빈의 비명 같은 환호에 나가고 있던 관객들의 시선이 둘을 향했다.
방금 전까지 감동을 전해 준 주연 중 하나의 깜짝 등장하자, 출구로 향하던 이들이 기대감 섞인 눈으로 둘을 향해 다가왔다.
「어쩐지 사고 친 거 같네.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자고. 클락, 이 친구도 같이 좀 들어갈게.」
「외부인은······.」
「아이, 어쩔 수 없잖아. 그럼 우리 갈게. 사람들 좀 부탁해. 모두 방문해 줘서 고마워!」
태화가 예상치 못한 일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케빈은 그런 태화의 손목을 붙잡고 백 스테이지의 계단을 통과했다.
보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과 눈앞에서 놓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인지라, 관객들은 애꿎은 경호원들을 괴롭혔다.
***
「하하하! 진짜 미안해! 내가 정말 한국 팬이거든! 케이팝도 좋아하고, 트로트도 좋아하고, 영화, 심지어 한국 웹툰 좋아해! 요즘엔 한국 드라마에 꽂혀 사는데 정말 당신 팬이라서 보자마자 흥분해 버렸어! 이건 다음 작품에 쓰는 얼굴이야? 진짜 서양인 그 자체잖아! 정말 대단한 걸!」
‘······과장이 심한 사람이네.’
몇 번이나 반복되는 ‘really’란 단어를 들으며 태화는 한 걸음 물러섰다.
미국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거니와 화장까지 한 자신을 알아볼 거라곤 더더욱 예상치 못한 탓에 기분이 묘했다.
게다가 반짝이는 눈은 살짝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뭘! 나야말로! 와아, 어쩌다가 미국에 와 있는 거야? 난 정말, 정말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 현처럼 할리우드 영화에 참여하는 거야? 오오! 제목이 뭐야? 내가 친구들에게 열심히 선전할게! 아, 혹시 빌이 보고 싶어서 서성였던 거야? 빌이 대단하긴 하지!」
‘말도 참 많고······.’
분명 오늘의 주연은 케빈이고 태화는 일개 관객일 뿐인데 주객이 전도됐다.
그렇게 느끼면서도 태화는 차근차근 그의 질문에 답했다.
답변 하나를 하면 질문이 다섯 개씩 튀어나오는 탓에 정신이 혼미하긴 했지만 자신의 팬이라고 기뻐하는 케빈과의 시간이 싫지만은 않았다.
‘우연이 겹쳐서 록셀과 실제로 만날 수 있게 되다니 이런 일도 정말 있구나.’
록셀과 대면할 수 있게 됐다는 점도 태화를 적극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복도가 시끄러워서 나왔더니 역시 케빈 자네군. 자넨 나이를 어디로 먹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빌! 이쪽은 태화 리, 한국에서······.」
30분 넘게 케빈과 떠들던 태화는 갑자기 등장한 사내를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월리엄 록셀.
태화가 연극에 뜻을 두고 내내 동경했던 배우가 눈앞에 있었다.
끝
ⓒ 마늘소금
예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정정하게 활동을 이어가는 배우답게, 록셀은 몸이 좋았다.
피부에 주름도 적었고, 머리는 염색으로 균일한 색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살은 적당히 보기 좋게 올랐다.
결정적으로 눈이 크고 색이 선명해서, 겉으로 보기엔 서른 대 후반이나 사십 대 정도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반갑네. 월리엄이라고 하네.」
「아······. 이태, 아니 태화 리라고 합니다. 만나서 정말 영광입니다.」
태화는 내밀어진 손을 굳게 맞잡으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록셀을 응시했다.
그는 세잔의 포토그래퍼 장 피엔과 비슷한 ‘여유’를 풍겼다.
자신의 경지와 위치에 확고한 자신감을 가진 이들만이 품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기백도 젊은 사람들 못지않고. ······정말 이십 년은 더 무대에 설 것 같은 배우야.’
[언젠간 자신도 저렇게 되고 싶다.]록셀은 젊은 배우에게 그런 꿈을 품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
태화는 록셀의 팬답게 사인부터 요청했다.
연극에 대한 감상도 빼놓지 않았으며 상기된 얼굴로 그가 하는 말들에 맞장구쳤다.
옆에 있던 케빈이 ‘열정이 굉장하네. 역시 내가 좋아하는 배우!’라 감탄할 만큼, 자신이 가지 못한 경지에 대해서도 집요할 정도로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두루뭉술했으나, 태화는 그의 말을 통해 어렴풋이 느꼈던 ‘깨달음’의 실마리를 잡았다.
「젊은 친구가 굉장하군. 한번 실력을 구경하고 싶어.」
자신의 말을 반 이상 알아듣는 태화를 보고 록셀은 감탄했다.
아직 ‘스물’도 안 된 젊은이가 벌써부터 ‘어떠한’ 경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게 소름 돋으면서도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빌! 내가 태화의 영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보여줄······.」
「티켓, 보내겠습니다.」
옆에 있던 케빈이 포교활동을 할 수 있다고 신나하던 차, 자신의 연기를 보고 싶다는 록셀의 말에 태화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운 영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완성되면 월리엄에게도 보내고 싶습니다.」
「음. 태화 자네는 한국인이라 그랬지? 미안하지만 난 일정이 바빠서 한국에 방문하는 건······.」
「이곳, 뉴욕에서도 상영될 것이니 상관없습니다.」
태화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디션의 통과만을 생각하며 준비했고 그는 누구보다 합격할 자신이 있었다.
‘일주일 내내 브로드웨이에서 살려고 했는데 반으로 줄여야겠네.’
조금 더 빨리 LA로 출발해야겠다 결심한 그는 굳은 눈으로 록셀을 쳐다봤다.
「그러니 보러오겠다는 말만 해주시면 됩니다.」
스무 살의 패기는 타오르는 불꽃과 같아서, 록셀을 잠시 눈을 가늘게 뜬 채 태화를 응시했다.
이런 열정으로 가득 찬 배우를, 록셀은 참으로 좋아했다.
「좋네. 그리 말한다면 그때까지 기대하도록 하지. 자네에게 연락할 방법은······. 그래, 내 인증 글을 파랑새에 올릴 테니 팔로우를 걸게.」
「······파랑새요? 파랑새하세요?」
비장미 넘치던 태화는 록셀의 파랑새 발언에 당황해 되물었다.
공식 계정만 둔 그는 메신저를 제외한 어떠한 소셜 미디어도 즐기지 않았다.
파랑새에 대해서 들어만 봤을 뿐, 조작 방법 따윈 모른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