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96
차가운 촉감과 고요한 주변이 어우러져 묘한 포근함을 낳았다.
‘그런데 어차피 상대역도 없겠다, 시험 해봐도 되지 않을까······?’
-태화씨 너머로 슬레이트 음이 들리면 바로 시작해 주세요.
귀에서 스텝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축 늘어져있던 태화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제 형태를 지켰다.
그는 갈등했다. 이 봉인된 장소엔 해조밖에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본성을 보여야하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그래서 선명하고 딱딱한 소리가 고막을 울렸을 때.
태화는 지금껏 만들어 뒀던 꼬리를 전부 보이기로 결심했다.
끝
ⓒ 마늘소금
죽은 듯 잠들어있던 해조는 코를 간질이는 익숙한 향기에 잠시 콧등을 찡그리고 닫혀있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는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며 그것을 시야에 담았고 손의 움직임을 확인한 뒤 지문의 끝을 손톱으로 비벼 감각을 일깨웠다.
그렇게 정신을 일깨우고 육체를 깨운 해조는 양팔로 바닥을 집어 상체를 일으켰다. 팔에 묶인 금빛 새끼줄이 육체를 구속하고 있었으나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마치 늦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
“흐읍.”
마치 냄새를 음미하듯 해조는 깊게 숨을 들이 쉬며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을 채웠던 잠기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안을 반짝이는 무언가가 대신하고 있었다.
“하아······.”
해조는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나른하면서도 만족스러워 보이는 그의 표정은, 한밤중 침대 속 사정을 닮아있었다.
* * *
“하나에 하나에 하나!”
슬레이트를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PD와 스텝들은 송출되고 있는 영상에 집중했다.
깊게 잠든 듯 미동도 하지 않던 화면 속 남자가 몸의 말단부터 움직이며 굳어있던 신체를 풀어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 행동이 참으로 느긋해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 같으면서 이상하게 짜증났다.
아니, 짜증이라기보다 애간장이 탔다는 게 맞았다.
“몇 초야?”
“대략 30초 나왔습니다.”
“흠······.”
편집할 수준으로 길게 잡아먹지 않았다는 사실에 PD 박형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화면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적어도 2분은 소요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적힌 기록은 정상 범위 안의 수치였다.
‘괜찮군······.’
스텝의 대답을 듣고 형진은 턱을 쓸며 분할 화면을 응시했다.
생각하는 것보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너무 지루해서.
다른 하나는 다음이 너무 보고 싶어 안달이 나서.
화면 속 배우, 태화가 보이는 연기는 명백히 후자였다.
‘예산 좀 아껴보려고 고른 배우였는데 의외로 복덩이야.’
중국과 판권 계약을 마친 상태에서 태화를 캐스팅했으나 당시 촬영 예산은 지상파 월화 드라마의 평균을 약간 웃도는 정도였다.
원작의 인기와 화제성에 비해 신상아라는 카드가 중국 측에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저장성도 원작의 인기에 기대 본전치기할 생각으로 판권 계약을 한 것이지 작품의 완성도를 고려한 것은 아니었기에 배우에 대해 뭐라 말하진 않았지만, 어찌 됐든 높으신 분들이 조금 나눠먹고 내려온 자금은 세트장 조성과 정규직들 월급, 그리고 출연료까지 정산하고 나면 A급 남자 주연을 뽑기에 조금 아슬아슬했다.
그런 상태에서 원작가가 부르짖는 구자준이란 카드는 그림의 떡 그것도 상한 떡이었다.
손해를 감수하면 힘겹게 뽑을 순 있어도 이후 시청률이 망하면 꼼짝없이 독박을 쓸 패(牌).
전체 제작 이후 방영하는 것이기에 중간 수정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형진은 남이 좋아한다고 자기가 죽을지도 모를 선택을 할 바보가 아니었다.
그래도 계약 조항이 걸려 완전히 안 된다는 말은 못하고 이리저리 회유를 거듭하며 다른 배우를 권하던 어느 날, 돌연 원작가가 고집을 꺾고 ‘이태화’라는 카드를 열렬히 외쳤다.
그다지 관심이 있는 배우는 아니었으나 PD는 당장 이태화 측에 제의를 넣었다.
특색 있는 분위기와 공급을 웃도는 수요 탓에 아주 비싼 구자준에 비하면 태화의 출연료는 반도 안 되는 비용이었기 때문이다.
‘받아들이기 잘했어.’
부디 선봉을 맡아달란 국장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의 메가폰을 잡았지만 현진은 웹툰이나 장르 소설의 영상화라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원작에 비해 짧게 제작되니 많은 부분이 잘라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아는 사람만 아는 내용이 될 게 뻔하며 무엇보다 원작의 팬들이 귀찮게 할 게 보지 않아도 선했으니까.
수락의 이유도 원작이 인기가 거세 저장성처럼 이쪽도 본전치기는 가능할 거라 생각해서 그리한 것이지, 드라마화 한 작품이 대박 날거란 망상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태화라는 카드를 뽑자 상황이 급변했다.
먼저 중국의 투자자가 늘었고 관심이 커지자 환경도 나아졌다.
게다가 주먹만 한 루비를 닮은 배우가 품 안에 들어왔다.
‘연습 날 왜 그런 사고가 났는지 알 거 같군.’
일주일 전 신상아의 코에서 피가 났을 때 그는 태화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맞은편에 서 있던 이들의 표정이 급변하고 상아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결국 코피까지 났기에 ‘뭔가 일어났구나’했을 뿐, 한 스텝의 침 튀기는 설명을 들으면서도 참 과장되게 말한다는 감상밖엔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했던 말에는 과장이 없었다.
오히려 축소된 감이 없지 않았다.
-······.
“읏······. 아, 죄송합니다.”
화면 속의 남자가 깊게 들이 쉬었던 숨을 나른하게 뱉자 풀 소리밖에 나지 않던 공간에 참는 듯한 신음이 단발마처럼 울렸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니 한 여성 스텝이 석류처럼 붉어진 얼굴로 방해해서 죄송하다며 허리를 숙였다.
형진은 찬찬히 다른 이들도 훑었다.
화면을 보고 있는 여성 대다수 그리고 몇몇 남자 스텝들이 얼굴을 붉힌 채 태화의 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미쳤군.’
주변을 매운 기묘한 집중력을 확인하고 그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어떤 배우가 음성도 없이 단순히 몸짓만으로 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데뷔한지 1년도 되지 않은 배우가 해냈다.
‘아깝다. 아까워······.’
스텝들에게서 시선을 땐 현진은 다시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요요히 웃으며 손목에 감긴 금줄은 쉽게 찢어버리는 그는, 인간답지 않은 그러니까 원작 속 구미호와 같은 매력을 아낌없이 발산하고 있었다.
연출을 기획했을 때 현진은 카메라를 필요한 각도마다 설치해 5분도 되지 않을 이 장면을 쉽게 가려했다.
그랬는데, 한 명의 배우가 그런 식의 작업에 호승심을 심어줬다.
“······아까우면 담아야지.”
“네? 뭐라고······.”
“아무 것도 아니야.”
저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에 옆에 있던 AD가 의아한 눈으로 현진을 바라봤으나 그런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 사당의 문을 응시했다.
스크린에서 문을 열고 뒷모습을 보이는 배우, 이태화가 몽롱한 눈빛으로 하늘을 살피고 있었다.
* * *
‘으으······. 춥다.’
바깥 공기를 접한 태화는 몸을 떨지 않고 초연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NG없이 다 왔는데 여기서 실수할 순 없었다.
‘왜 빨리 컷을 외쳐주지 않는 거지······. 제발 컷 좀······.’
비단 옷은 보기만 좋을 뿐 바람에는 아주 연약했다. 특히 이런 날씨에서 입고 있기엔 전혀 좋지 않았다.
‘······고개 돌려도 되지 않을까.’
점점 얼얼해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도, 그는 표정만은 ‘해조’를 유지했다.
돈 받고 일하는 프로답게 컷이 외쳐지기 전까진 자의로 무대에서 내려와선 안 됐다.
“······컷!”
“현규 형. 옷 좀.”
“어어! 알았어! 여, 여기! 핫팩, 핫팩도 손에 대.”
“고맙습니다. 아······. 살 거 같다.”
그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서야 PD는 컷을 외쳐 분위기를 깼다.
종료가 외쳐지기 무섭게 손으로 팔뚝을 감싼 태화는 시선을 돌려 매니저를 불렀다. 아까보다 더 쌀쌀해진 온도에 몸이 시렸다.
핫팩으로 손을 감싼 태화는 노곤하게 풀린 얼굴을 한 채 만족한 고양이 같은 표정을 한 채 볼에도 핫팩을 댔다.
그 모습을 보며 현규는 침을 삼켰다.
그는 태화가 BGA에서 소개해준 수상한 사람을 만난 이후 색기 연기를 펼치는 걸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믿었던 배우의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며 잘 풀렸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태화의 해조 연기는 숨이 막혔다.
배역마다 다른 사람 같은 매력을 뽐내긴 했어도 사람은 사람이었는데, 이번 역할은 구미호인 탓인지 화면에 비치는 모습도 인간 같지 않았다.
‘역시 굉장해······.’
세상과 유리된 무언가의 얼굴을 했었으면서 컷이 외쳐지자마자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태화가, 현규는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태화씨. 다시 한번 갑시다.”
“······네? 제가 무슨 실수했나요?”
따뜻한 외투에 둘러쌓인 채 스스로가 잘했다 생각하며 뿌듯해하던 태화는 NG를 외치는 PD의 말에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이것보다 더······? 허들이 너무 높지 않나?’
참 눈이 높다고 생각하던 찰나 현진은 고개를 흔들며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이번 현장에서 꺼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마이크가 폴대에 장착돼 정비를 받고 있었다.
“몇몇 클로즈 업 장면만 다시 갑니다. 이번엔 음향 장비가 같이 들어갈 거예요.”
문을 열고 촬영하면 마이크가 들어갈 수 있다 말하는 PD를 보며 태화는 복잡한 심정을 애써 감췄다.
지금도 이리 추운데 조금 냉혹한 결정이었다.
‘그래도 작품 향상을 위한 거니까······.’
한숨과 호흡도 대사이니 반드시 잡아야 한다 말하는 감독의 목소리엔 묘한 고집이 담겨있었다.
단순한 아집이 아닌 장인정신의 발로라는 걸 깨닫고 태화는 뭐라 말을 붙이는 대신 얌전히 사당 안으로 돌아갔다.
작품을 위한 결정이라면, 으슬거리는 추위정돈 근성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 * *
[안녕하세요 구미호 스텝입니다 저 또 왔어요]안녕하세요 팬텀, 아니 타미 여러분. 저번에 태화 배우 소식을 전했던 스텝입니다< 사실 이 글을 올려야 하나 엄청 고민했는데 저만 귓구멍 폭행을 당할 순 없다는 생각에 이리 찾아왔습니다.
오늘 드라마 크랭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해조가 사당 봉인에서 풀어나는 장면을 촬영했는데······.
저 오늘 느꼈어요. 어쩌면 이태화 배우는 인간이 아니라 진짜 여우일지 모르겠다는 걸요.
인간을 홀리는 여우 말이에요(소근) 사당 장면은 원래 대사가 없던 만큼 드라마에서도 대사가 없었는데, 그 대사가 오늘 어쩌다보니 생겼습니다.
일단 들어보고 이야기 하죠?
(이태화 사당 대사.mp4)
들으셨나요? 후후후 저만 당할 순 없잖아요?
전 듣는 순간 다리가 풀렸어요 ㅇ<-< 아니 무슨 인간이 한숨을 침대 위에서 흘리는 신음처럼 내뱉나요?? 저건 인간이 아니에요! 진짜 와······. 이건 혼자 들어선 안된다 생각해서 몰래 들고 온 거니까 절대 외부로 유출 안 되도록 조심해 주세요 ㅠㅠㅠㅠ저 걸리면 잘려요 ㅠㅠㅠㅠㅠㅠㅠ └녹아버린 타미입니다.
└저도 사망2222222
└구미호 타미님 감사합니다 ㅠㅠㅠㅠㅠㅠ 진짜 ㅠㅠㅠㅠ 이건 ㅠㅠㅠㅠㅠ역대그뷰ㅠㅠㅠ └미쳤네요. 이거 진짜인가요? 무슨 한숨 하나에 귀가 저릿하죠? 다시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요새 님 덕에 살 맛나네요 ㅠㅠㅠ엉엉 3월까지 어떻게 기다려 ㅠㅠㅠ?
└남자를 게이로 만드는 음성이다 └윗 타미님 동성애 언급 자제해주세요. 마레드는 그 어떤 가상의 커플링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냥 다리 풀리는 음성이란 뜻 아닌가요? 되게 빡빡하네 ㄷㄷㄷㄷ └아마 그런 밈이 치명적으로 변할 수 있어서 그러는 듯. 내 마음에 치명적★
“킥킥, 반응 괜찮네.”
보안과 관심 사이에 관심을 택하고 드라마 정보를 일부 유출시킨 스텝, 김아림은 빠르게 달리는 댓글을 확인하며 만족스레 웃었다.
아직 신상아의 스케줄이 완전히 준비가 되지 않아 태화가 나오는 장면만 4씬을 촬영했으나 그 네 장면 모두 범상치 않았다.
사당에서 나오는 장면에선 고고하고 아름다운 여우의 매력을 제대로 발산했고 통신사에서 대포폰을 마련하는 부분에선 요물 특유의 위험한 매혹을, 아영이 없는 사이 집으로 부하들을 부르는 두 장면에선 악의 보스와 같은 음흉함과 거만함을 남김없이 뽐냈다.
그 중 첫 장면인 사당은 충격이 어마어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