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Tycoon Wizard RAW novel - Chapter 78
78화. 더 크게, 더 깊이. (2)
LA에서는 그나마 가장 큰 헐리우드 볼(Hollywood Bowl) 야외 공연장.
클라리아의 매니저는 지금의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왜 첫 콘서트를 한인타운으로 한 거야? 최대 인원이 겨우 만 칠천 명이잖아. 너는 좀 더 큰 곳에서 해도 충분히···!”
“언니, 그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했잖아. 오늘 투어 콘서트 첫 날인데, 또 그 이야기야?”
“정말 이해가 안 되니까 그렇지.”
매니저가 화를 내는 이유는 자기를 너무 아껴서 그런 거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매니저의 반응에도 클라리아는 싱긋 웃었다.
“그야, 한국 사람들이 좋은 걸 어떡해. 노래할 때 반응을 봐. 전 세계 어딜가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호응해 주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나도 그건 알지만···. 첫 일정이 한인타운이라고 다들 뒤에서 말이 얼마나 많은 지 알아?”
“참 할 일들도 없다. 남 일에 뭘 그리 관심들이 많아?”
“넌 네 일에라도 제발 신경 좀 쓰지?”
“헤헤-.”
살짝 혀를 빼물고 웃는 클라리아의 모습에 매니저는 피식 웃어버렸다.
누가 보더라도 아마 자신과 비슷한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리아야. 근데 너 설마 아직도 그 남자를 생각하는 건 아니지?”
혹시나 싶어 말을 하던 매니저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양쪽 모두 유명인이고, 그 한국 남자는 불과 며칠 전에 캘리포니아에 왔다는 기사가 나왔던 게 떠올라서다.
“너 설마! 그 사람이 여기 오는 거 알고···?!”
“아, 아냐. 기사는 콘서트 장소를 정하고도 한참 뒤에 나왔잖아.”
“···그렇네. 그럼 그냥 우연인가? 그 사람, 혹시 여길 오는 건 아니지?”
“그야 나도 모르지.”
탐스러운 금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는 클라리아를 보면서 매니저는 결국 이마를 짚어야 했다.
“나는 널 이해할 수가 없다.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겠지만, 얼굴도 평범한 동양 남자가 뭐가 좋다고···.”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뭔가 운명적인 만남이랄까. 언니는 그런 사람 없었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갑자기 심장이 쿵 내려앉을 정도로 한 눈에 반해버린 사람.”
“나라고 없었겠니? 근데, 그거 지나면 다···.”
똑똑-.
“클라리아 씨, 공연 시작 30분 전이요.”
“네. 준비는 다 됐어요.”
지나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저 잠깐의 추억으로 남을 뿐이라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공연장 스태프가 방해를 해버렸다.
그렇다고 다시 이어서 말하기도 애매하고, 굳이 뒤의 말은 하지 않아도 알아들었겠지 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점검을 시작했다.
‘설마, 진짜로 여기서 다시 만나거나 하는 건···.’
에이-.
말도 안되는 상상이라며, 매니저는 머리를 털어버렸다.
***
스테이지의 바로 앞 VIP 좌석 중에서도 가장 앞 열.
대체 어떻게 이런 명당 자리를 예매한 건가 궁금했다.
예매를 시작하자마자 1분도 되지 않아서 매진이 됐다고 들었는데.
“난 심 비서가 이런 일에 그렇게 열정적인 줄은 미처 몰랐네.”
꼰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 때는 분명 업무시간이었다.
뭐, 겨우 1분도 걸리지 않았을 시간이긴 하지만.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예매를 한 건 아닙니다.”
“아, 혹시 같이 온 친구가 한 건가?”
“아뇨··· 사실은 개발팀 표진수 과장이 알고리즘을 만들어 주셔서 슈퍼컴퓨터를 잠시···.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아아, 괜찮아. 아니, 오히려 잘했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기특하기도 하다.
아무렴, 내 비서라면 슈퍼컴퓨터 정도는 가볍게 써먹을 줄 알아야지.
어차피 하루 종일 써먹는 것도 아닌데.
‘표진수 과장도 의외네.’
평생 기계만 만지던 사람이라 이욱기 과장처럼 꽉 막힌 타입일 줄 알았는데, 이런 센스도 있는 사람이었나?
슈퍼컴퓨터를 고작 티켓 예매하는데 썼다는 게 알려지면 욕을 먹을 테니, 이건 비밀로 해두자.
우웅-.
[마스터, 부모님은 한인타운의 한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뒤, 갤러리아 쇼핑센터로 이동하실 예정입니다.]서이환의 짧은 보고에 나는 스마트폰을 닫고, 주변을 둘러봤다.
경호인력은 밖에서 대기중이라, 안에 들어온 사람은 나와 심 비서, 동생들 셋과 심 비서의 친구뿐이다.
사람이 꽤 북적거렸는데, 다행히 VIP석에서도 가장 앞이라 직접 사람들과 부딪힐 일은 거의 없었다.
“대표님, 이거···.”
심 비서가 부끄러운 듯 내민 건 작은 형광봉이었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게 마치 어린 시절 보던 만화영화의 여자 주인공이 들고 나오던 마술봉처럼 생긴···.
“···이걸 나한테 왜 줘?”
“입구에서 나눠주길래 받아왔습니다. 다들 하나 씩 받는 거라, 대표님 것도 제가···.”
“오빠! 원래 이런데 오면 이런 것도 흔들고 그러는 거야!”
공연장의 입장은 진작에 끝났는데도, 사람들이 저마다 조금 뒤에 있을 콘서트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공연장은 전체적으로 꽤 시끄러웠다.
“난 이런 건 해본 적이 없는데···.”
“괜찮아요. 사람들 하는 거 보고 따라하면 되죠.”
“···우리가 제일 앞인데?”
이거 괜히 망신만 당하는 것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한인타운이라 입장한 사람들 대부분이 검은 머리였고, 실제로 몇몇은 날 알아보기라도 한 건지, 자꾸만 내 쪽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SW 공업사 임선우 대표, 한인타운 클라리아 콘서트 장에서 열띤 반응]이런 식의 기사가 나가는 건 그다지 원치 않는다.
혹시 클라리아가 보면 날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하긴, 나 같은 사람이야 벌써 잊어버렸겠지만.’
우연히 만났던 사람이 자기 콘서트까지 쫓아다닌다고 생각하면 왠지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 않은가.
스치듯이 지나간 인연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하니까.
‘마스크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슬쩍 심 비서의 옆 자리에 있는 친구를 돌아봤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늘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맨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사람.
혹시 여분의 선글라스가 있으면 달라고 해볼까 고민을 하는데.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어서 가방에 넣었다.
‘···하긴, 이런데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면 그게 더 눈에 띄겠네.’
“너 ···벗어도 괜찮겠어?”
“응, 괜찮아. 어차피 우리가 맨 앞 줄이고, 또 이런 공연을 선글라스 쓰고 보는 건 말이 안되잖아.”
“그렇긴 한데··· 혹시라도 누가 알아보면 곤란해지지 않아?”
‘···친구가 유명한 사람이었나?’
심 비서와의 대화 소리는 작았지만, 내 청력은 일반인들과 사뭇 다르다.
그래서 지금 공연장 안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두 사람의 대화는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아무리 어두운 실내지만 대놓고 쳐다보기는 조금 민망할 것 같아, 곁눈질로 슬쩍 심 비서의 친구를 살폈다.
혹시 연예인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
“···이서연 씨?”
“앗!”
내 물음에 얼른 가방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지금 이 상황에 그게 의미가 있을까요?
이서연.
연예인은 아니지만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예쁜 외모로 한 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일성전자 이수용 회장의 딸이다.
“그쪽이 어떻게 여기··· 심 비서랑 친구였어요?”
“저랑은 한국대 영문학과 동기예요. 제가 출발 전에 말씀드렸는데, 기억 안 나세요?”
얼핏 이름을 듣긴 했지만, 설마하니 ‘그’ 이서연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아니, 집에 전용기를 몇 대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 미국에 전용기타고 간다고 그걸 얻어탄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설마, 이수용 회장님 딸이라는 생각은 못했죠.”
막내딸이라고 그렇게 끔찍하게 아낀다는데.
‘설마 이수용 회장님도 알고 있나?’
미국에 도착한 뒤에 입자 가속기 문제로 연락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아무런 말이 없었던 걸 보면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이서연 씨는 지금 일성 SDS의 사장 아니었나요?”
“맞아요. 사실 그래서 임선우 대표님의 팬이 된 것도 있거든요.”
일성 SDS는 지금 기업 전문 클라우드 시스템과 데이터센터, 네트워크를 담당하는 회사로, 민간 기업중에서는 최초로 ‘데이터전문기관’으로 선정된 곳이다.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에 그런 회사의 사장이 된 것은 분명 이수용 회장의 딸이라는 게 가장 컸겠지만, 그녀 스스로의 능력도 증명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수용 회장은 절대 혈연 하나만 보고 그런 자리를 맡길 사람은 아니니까.’
혹시 일부러 접근을 한 건가 싶은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여행하는 동안에도 거의 심 비서나 아이들이랑만 어울렸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생각해보니 내 팬이라면서 정작 나에게는 너무 관심을 안 보인 게 약간 억울할 정도네.
“마지막 날 알게 되서 죄송합니다. 설마 이서연 씨라고는 생각을 못해서···.”
“그래서 그렇게 무관심하셨던 거네요? 보통 다른 남자들이었으면 어떻게든 접근하려고 난리였을 텐데.”
자신감 넘치는 말이다.
외모, 학벌, 배경. 무엇하나 꿀릴 게 없으니 보일 수 모습이겠지만.
“제가 다른 사람의 배경에 끌릴 이유는 없으니까요.”
아론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스카디를 계약하면서 지불한 돈만 2조에 달한다.
워낙 부품이 적게 들어가는 덕에 순수익만 따져서 당장 내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수천 억 단위.
‘거기다 이번에 마나 배터리 계약금까지 들어오면···.’
통장에 있는 돈이 얼마일지 나도 가늠이 안 될 정도인데.
이런 내가 굳이 다른 사람의 배경을 보고 호감을 느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훗.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사실 여행 내내 대표님이 저한테 관심도 안 주시길래··· 약간 서운했는데, 이제 이유를 알았으니까 용서해드릴게요.”
나는 용서를 받을 이유가 없는데.
어떤 성격의 여성인지 대강 알 것 같아서 그냥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게 놔두는 편이 제일 자연스러운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팍-.
그 순간 공연장이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이고, 그렇게 시끄럽던 공연장 안은 정말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단순히 조명이 고장난 게 아니라,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이 왔다는 걸.
천천히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반주 소리.
평소 음악을 들을 시간이 없던 내게는 상당히 낯선 선율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모두가 일정한 박자로 황금 색으로 빛나는 형광봉을 흔들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하늘에서부터 핀 조명이 떨어지고, 무대 아래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금빛 머리카락에 사람들의 손에 쥐어있던 형광봉이 더욱 힘차게 들렸다.
그리고 들리기 시작한 가늘고 슬픈 목소리로 노래가 시작됐다.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하나 둘 노래를 따라 부르자, 공연장의 거대한 스피커와 우퍼의 소리가 잡아먹힐 정도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야외 공연장이라 어디까지 퍼져나갈 지 문득 궁금할 정도로.
‘이거 가사가 어째···.’
에이-.
착각이겠지.
저런 사람이 날 아직 기억할 리가···.
등장과 함께 시작한 노래가 1절의 클라이막스로 향해 간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나는 내 바로 앞에 와있는 클라리아를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이 그녀의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황금색 머릿결에 푸른 눈을 한 그녀의 슬픈 눈동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던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려 다시 노래를 이어나갔다.
아주 잠깐 이상한 기류가 흐른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걸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나는 이미 잊힌 사람이구나 하는 걸.
“근데 공연 처음에 클라리아가 오빠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어?”
“그랬나? ···난 잘 모르겠는데.”
나야 콘서트라는 걸 처음 와봐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곳을 오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꽤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퇴장을 하기도 전부터 콘서트 이야기만 하더니, 끝이 날 줄을 모르고 이어졌다.
재잘거리는 다섯 명의 여성을 보호하듯, 출구로 향하려는데 주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은 뭔데 여자를 다섯이나 데리고 이런 데를 와?”
“얼굴이랑 몸도 그저 그렇구만.”
“냅둬. 돈이 많은가 보지.”
마치 들으라는 듯한 대화에 나는 황당함을 느껴야 했다.
사람들이 쳐다보던 게··· 이 이유였구나.
‘시비나 안 걸리면 좋겠는데.’
여기는 한인타운이긴 하지만 미국.
중간중간 같은 한국인의 피가 맞나 싶을 정도로 덩치가 큰 이들도 간혹 보였다.
이목구비가 한국인 같으면서도 약간 이국적인 게 아마도 혼혈.
공연장 외부에는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거기까지만 가면 문제는 없을 것 같아 서둘렀다.
아니, 서두르려고 했다.
“···선우?”
앵콜 공연까지 끝나고 이제는 비어버린 무대 위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기 전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