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the supporters are hammocked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누나라고 불러
심문에 가까운 사정 청취가 끝나고, 우리는 교무실을 나섰다.
당규영과 나란히 걷다가 내가 질문을 던졌다.
“다시 번화가 가요?”
“응, 가서 마무리해야지. 근데 천천히 가도 돼.”
채다빈에게 지휘권을 넘긴 데다 졸업생들도 남아 있다.
급한 시기도 다 지나갔으니 설렁설렁 가도 상관 없단다.
해서 우리는 산책하듯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당규영이 문득 길목에 있는 벤치를 발견하곤 입을 열었다.
“나 다리 아파. 앉아서 쉬었다 가자.”
“그럽시다.”
상처는 보급형 엘릭서로 모두 회복했으나 누적된 피로는 별개의 문제다.
당규영은 하루 내내 블랙 마켓을 운영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며, 혈교 장로와 목숨을 건 사투까지 벌였다.
그러니 긴장이 풀린 지금 쌓였던 피로가 몰려올 만도 했다.
마침 바로 앞에 자판기도 있어서 당규영이 그 앞에 섰다.
“뭐 마실래? 커피?”
“커피 좋죠.”
– 덜컹,
당규영이 캔커피 두 개를 뽑아 하나를 건네고, 우리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캔커피를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캔을 이리저리 기울이던 당규영이 말문을 열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올해 블랙 마켓은 성공이네.”
“그렇네요.”
도둑 동아리와 선도부가 블랙 마켓을 두고 치열한 눈치 싸움과 견제를 벌이던 중이었는데, 혈교 장로가 등장하면서 그대로 판이 엎어져 버렸다.
적대 세력의 던전섬 침입은 만사를 제쳐 두고 다뤄야 하는 최우선 사항.
블랙 마켓은 그에 비하면 사소한 해프닝 수준이다.
번화가 곳곳에 퍼져 있던 선도부원들이 불심 검문과 거래소 수색을 일제히 중단하고 이 사건에 투입되었을 것이다.
죽립인의 아주 작은 종적이라도 짚어 나가기 위해서.
이렇게 번화가가 졸지에 빈 집이 되어 버렸기에, 도둑 동아리 입장에서는 마음 편히 블랙 마켓을 운영하게 된 셈이고.
아마 올해 블랙 마켓 검거율은 유례 없는 최저치를 기록하지 않을까 싶다.
“……결과만 놓고 보면.”
혼잣말처럼 되뇌이는 당규영.
안색이 밝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눈치다.
“김호야, 나 지금에서야 생각난 건데.”
“네, 선배님.”
“그 낙서, 네가 원하는 대로 시간이랑 장소 고친 거잖아.”
“그랬죠.”
“그거, 왜 오늘로 정했어?”
“오늘이어야만 했습니다.”
혈교 장로급 고수를 상대하려면 학부생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반드시 졸업생 이상급의 도움이 필요했다.
따라서 졸업생들이 던전섬을 떠나기 전에 결판을 지어야 했으며, 번화가에 졸업생과 선도부가 가장 많이 몰리는 날을 골라야 했다.
그것이 바로 번화가 장터와 블랙 마켓이 열리는 오늘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이용한 거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당규영의 안색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불만스럽게 캔커피를 이리저리 기울이다가 또 묻는다.
“만약에, 내가 안 도와준다고 했으면 어떻게 했을 거야?”
“다른 방법을 알아봤겠죠.”
이 기회에 무슨 수를 써서든 죽립인을 쓰러뜨려 놔야 했으니까.
내가 가진 패를 일부 공개하는 한이 있어도 선도부나 졸업생 등의 도움을 받았을 거다.
대답을 듣고 당규영은 무언가 깨달은 듯했다.
캔커피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본다.
“너 혹시, 나 시험한 거야?”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라는 눈빛.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빴네, 진짜.”
채다빈이 죽립인을 발견하고 나에게 언질을 준 시간, 즉 혈교 장로를 약속 장소로 유인한 시간은 블랙 마켓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이었다.
따라서 당규영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나를 혼자 보내고 블랙 마켓을 마저 운영하는가, 아니면 나를 돕는가.
그러나 당규영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자신과 뺀질이 선배가 빠짐으로서 생길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따라왔다.
그런데 막상 나는 당규영을 시험한 거였다니.
“사람을 막 이용하고, 시험하고 말이야. 나 화내도 되는 거 맞지?”
“제 잘못이 맞습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해야만 했던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효율만 중시한 것도 사실이었다.
잘못을 인정하자 당규영이 몸을 내쪽으로 기울이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콩 부딪쳤다.
콩, 콩, 콩.
몇 번 더 머리를 부딪친 당규영이,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말했다.
“다음부터 그러지 마. 말했잖아, 공범이 돼 준다고. 난 네가 뭐라 말하든 믿을 텐데, 넌 왜 날 못 믿고 시험해?”
“…….”
“나도 조금만 더 믿어 주면 안 돼?”
“이제는 저도 믿겠습니다. 약속.”
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당규영이 그걸 보곤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정말?”
“정말이요.”
당규영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마주 걸었다.
“도장도 찍어.”
“그럽시다.”
그리고 당규영의 요구에 따라 새끼손가락을 건 채 엄지까지 맞댔다. 도장 꽝.
당규영의 안색은 언제 어두웠냐는 듯 환해진 채였다.
어느 새 캔커피가 다 비었기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하면 쉴 만큼 쉬었기도 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당규영이 가까이 붙으면서 또 말문을 연다.
“야, 근데 우리 슬슬 호칭 바꿀 때도 되지 않았냐?”
“호칭이요?”
“응. 선배님은 좀 거리감이 있잖아.”
“저는 선배님도 괜찮은 거 같은데. 그럼 뭐라고 불러요.”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당규영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누나~ 해 봐, 규영이 누나.”
“싫습니다. 선배님.”
“아, 왜!”
“그냥 싫어요.”
“아니이,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저는 어렵네요. 차마 입이 안 떨어지네.”
“아, 한 번만!”
당규영이 내 팔을 잡아당기고 이리저리 흔들며 졸라댔다.
대개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면 금방 수긍하고 떨어지는 편인데, 오늘은 평소와 달리 끈질기다.
한참이나 벤치 근처에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마침내 당규영이 한 걸음 물러났다.
“진짜 안 할 거야?”
입술이 조금씩 삐죽거리고, 볼이 작게 부풀어 오르려 한다.
삐지기 일보 직전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누나 소리가 듣고 싶은가?
“그래요, 제가 졌습니다.”
사실 당규영의 말마따나, 호칭 조금 바꾸는 게 어려운 요구도 아니기는 했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졌다.
“빨리 가요, 누나.”
“……!”
잠시 동안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당규영.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나 싶더니,
“흐흫, 흐흫흫.”
얼굴에 약간의 홍조를 떠올린 채 실실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흐흫흫, 흐흫흫흫.”
“아니, 당신이 하라며.”
“좋아서 그러지. 한 번만 더 해 봐. 빨리 가요 누나~”
“싫습니다, 선배님.”
나는 정색하며 거절했다.
* * *
던전동.
지하층의 어느 던전.
거친 무복을 입은 사내가 모래사장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면 아래에는 온갖 다양한 해양 몬스터들이 득실거렸으나, 놈들은 감히 모습을 드러낼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그만큼 사내의 무위가 압도적이라는 뜻이었다.
그가 멀거니 서서 파도가 치는 양을 구경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밀회할 장소로는 나쁘지 않지요?”
“확실히 그런 듯하오.”
사내가 긍정하며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여성이 서 있었다.
사내의 무복과 마찬가지로 거친 재질의 로브였으나, 언뜻 로브 사이로 장신구 같은 무언가가 번쩍거리는 듯했다.
“학교가 세워지기 전에는 온갖 악인들이 여기 다 모였다네요.”
“숨을 구석이 많기는 하더군.”
던전동 지하층은 너무나도 광활하고 깊어, 방범용 수정구를 설치하고 교직원들이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아도 허술한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허술한 부분을 파고들어 던전에 입장하는 것은 이 두 사람에게는 매우 손쉬운 일이었다.
로브 여성이 본론을 꺼냈다.
“소식 들었어요. 최 장로가 당했다지요?”
“그렇소. 인간 백정이 나섰다더군.”
“우리 계획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그녀의 눈은 섬뜩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무복 사내와 로브 여성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
던전섬에 잠입하기 전에 몇 가지 계획을 함께 세워 두었다.
그런데 그 계획에 ‘최 장로’가 붙잡히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질책 겸 묻는 것이다.
물론 무복 사내로서도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속으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병신 같은 놈. 왜 그 시간에 거길 기어들어 가서는.’
암호문으로만 소통하고 움직이기로 정해 놓고 왜 갑자기 단독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무복 사내는 이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무덤덤한 얼굴을 유지하며 답했다.
“우려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오만 계획에는 차질이 없을 거요. 내 보장하리다.”
“글쎄요, 장로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저는 믿고 싶은데, 이번 일로 신뢰에 조금 금이 가서요.”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미리 그쪽의 패를 보여 주셨으면 좋겠네요.”
로브 여성이 빙긋 웃었다.
계획을 세우며 각자 역할을 분담했으나, 세부 사항은 서로 공개하지 않은 상태.
소속된 집단의 비전(祕傳)이 담긴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복 사내 측이 일방적으로 신뢰를 깨뜨린 상태라, 무마하려면 최대한 상대방의 요구를 맞춰 주어야 했다.
그가 인벤토리에서 서류 가방을 꺼내 열었다.
안에는 서류가 아니라, 피처럼 새빨간 액체가 담긴 주사기들이 가득했다.
“본교의 혈폭단(血暴丹)이라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그런데 이건 단환이 아니지 않나요?”
“사용이 편하도록 액체 상태로 가공했소.”
“그렇군요.”
로브 여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혈교 측이 계획에서 분담한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지, 보다 자세한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좋아요, 저도 믿고 손을 써 드리죠. 중간고사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시길 바랄게요.”
“바랄 필요 없소. 이미 정해진 일이니.”
무복 사내의 음성은 절대적인 자신감을 담고 있었다.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정장 차림을 하고 허리에는 검을 찬 사내.
그는 용살학원 교직원 중 하나로, 지하층을 순찰하던 도중 우연히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하고, 그들을 따라 이 던전에 입장했다.
그리고 그의 짐작대로 두 남녀는 적대 세력 소속.
중간고사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듯하다.
‘즉시 돌아가서 보고해야 한다.’
“뭘 그렇게 재미있게 보시나요?”
– 쐐액!
정장 사내는 등 뒤에서 목소리가 울리는 즉시 그곳을 베었다.
발검하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쾌속한 일검.
그러나 그의 검은 그저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다음 순간, 사내는 복부를 부드러운 손길이 쓸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 부글부글부글!
손길이 닿은 복부가 무서운 속도로 썩어들어가며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사내의 피부가 삽시간에 검게 변색되고 혈관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그는 이런 스킬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네크로맨서 근접전 스킬.
‘네크로그라스프……!’
그렇다면 로브 여성이 소속된 집단 역시 유추가 가능했다.
그녀는 짐작보다도 훨씬 위험한 존재였다.
사내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와중에도 젖 먹던 힘을 다해 땅을 박찼다.
조금이라도 더 그들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귀환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직도 저리 달릴 힘이 남았다니, 의기만은 높이 살 만하군.”
“그러게나 말이에요.”
이상하게도 두 남녀의 대화 소리는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추격을 포기했을 리가 없는데.
사내가 의아함을 느끼던 그때, 어디선가 딱, 하고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자 썩어들어 가던 복부가 풍선처럼 맹렬한 속도로 팽창해 갔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또 다른 스킬의 이름이었다.
‘부패…… 폭발…….’
– 펑.
서포터가 다 해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