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마도의 그림자
어디 같이 묶으려고 하느냐는 듯이. 여기 없는 당민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 뻔하다. 이청은 또 무슨 책을 잡힐지 몰라, 말끝을 흐렸다.
“한 놈은 어린 시절을 잊지 못하고서 내내 가슴에 품고 있고, 딴 놈은 덥석 상전의 스승과 그렇고 그런 관계고. 나만 이게 뭐냐?”
탁연수는 뒤로 몸을 젖히면서 한탄 조로 불평했다.
이청은 크흠, 헛기침을 삼키고 몸을 돌렸다. 호충인도 덩달아 얼굴이 붉어지기는 했지만, 호락호락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는 탁연수를 유심히 보더니, 히죽 웃었다.
“이거 부러워하는구만.”
“뭐?”
“그래, 말이 좋아서 신비이세 어쩌고 하지. 강시당이라고 하면 무시무시하다는 반응들인데.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냐. 쯧쯧, 너도 이제 고생길이 훤하다.”
탁연수의 훤한 이마에 푸른 핏줄이 돋았다. 그것도 잠시, 호충인이 실실 눈웃음을 그리며 넌지시 말했다.
“그런 의미로 어떠냐, 사람 한번 안 만나 볼 테냐?”
“뭐? 누구?”
“누구기는, 네가 말한 상전이시다.”
“응?”
탁연수는 퍼뜩 눈살을 찌푸렸다. 호충인은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본당의 아가씨 말이다. 껙!”
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충인은 벌러덩 앞으로 나자빠졌다. 쓰러진 옆으로 주먹만 한 짱돌 하나가 데구루루 굴렀다. 돌이 뒤통수를 호되게 때린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에 탁연수와 이청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여기 모인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가. 이렇게 속절없이 당할 리가 없는 일인데, 어디도 다른 기척이 없다.
호청연은 눈만 끔뻑였다. 그녀는 치켜든 제 손을 흘깃 보았다. 주먹만 한 짱돌이 그대로 들려 있다. 아직 그녀가 던지기도 전인데, 목표한 오라비가 돌에 맞아 나자빠졌다.
그녀는 눈을 한번 깜빡이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녹색 가면 하나가 둥실 떠 있었다. 누구라도 기겁할 만한 모습이었다. 귀신 장난처럼 보였지만, 녹면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었다. 한 걸음 다가선 그녀는 호청연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 깜빡였다. 그 눈빛에는 장난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호청연은 손에 쥔 돌을 툭 던져 놓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르는 얼굴이 아니다.
“당 언니.”
여인은 하얀 손을 들어 얼굴 가린 녹면을 벗었다. 그러자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면서 하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눈썹은 짙었고, 붉은 입술은 뚜렷했다.
여기에 없던 두 사람 중 하나, 당민이었다.
관중에서의 일을 모두 마무리 짓고, 파촉(巴蜀)으로 돌아갔다던 그녀가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입가에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쉿.”
반기던 호청연은 그녀의 손짓에 흠칫 입을 다물었다. 당민은 다시 웃었다. 눈매가 초승달을 그리면서 다시금 개구쟁이 적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하얀 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달그락 소리가 울렸다.
당민은 퍼뜩 눈매를 날카롭게 뜨며, 손을 뻗었다. 한 주먹의 조약돌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그런데 곧장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각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멋대로 날았다. 어느 것은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뚝 떨어졌고, 어느 것은 크게 돌아서 날았다.
이것이 당가의 암기술인가. 호청연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서 사방으로 정신없이 날아가는 돌멩이를 보았다.
“우악! 뭐야? 습격이냐!”
“웬 놈들이냐!”
한 번 당했으니. 셋은 벌떡 일어나 대비했다. 모두 고수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다. 어둠 속에서 마구 날아드는 돌멩이를 받아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살기나, 공력이 실려 있었다면 더욱 쉽게 받아 냈으려나, 그저 복잡하게만 날아드니.
다만, 개중에 꼭 한둘은 다른 수법으로 펼치는 것이라. 어김없이 사각을 파고들었다.
“끅!”
특히 아픈 것은 호충인이다. 다른 둘이 고작해야 하나, 둘을 맞은 것에 비하면 호충인은 눈에도 한 대, 코에도 한 대, 머리에도 한 대씩 골고루 맞아서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참 난리가 끝나고서, 호충인은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제기! 웬 놈이냐!”
날아든 돌무더기를 한 움큼 그러쥔 이청이 눈빛을 번뜩였다.
“저기다!”
그는 퍼뜩 한구석을 향해서 받아 든 돌멩이를 다시 떨쳤다. 어지럽게 날아드는 것이 아니라, 곧게 날아서 밤하늘을 꿰뚫었다. 실린 공력이 간단치 않아서, 파공성이 날카롭다. 그런데 응당 들려야 하는 타격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허공중에 불쑥 튀어나온 하얀 손이 날아드는 돌멩이를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척척 받아 냈다. 뒤에 숨긴 돌멩이마저도 깔끔하게 받아 쥐자, 이청은 급한 숨을 들이켰다.
“이런.”
생각보다 더 대단한 고수이다. 지금 펼친 한 수는 요지선자의 절기 중 하나인 유성투(流星投), 이청이 금(琴)만큼이나 공들인 절기였다. 그런 것을 어린아이 장난처럼 받아 내다니.
하얀 손의 주인이 차츰 불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 가린 녹색 가면이 먼저 보였다.
이청은 손을 펼친 채 바로 굳어 버렸다. 유성투가 힘을 못 쓴 것보다 등장한 이의 모습에 더 놀라고 말았다. 녹면에 백옥처럼 하얀 손. 바로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사천의 녹면옥수(綠面玉手).
돌덩이인 양 굳어 버린 이청을 놓아두고, 좌우에서 탁연수와 호충인이 빽 소리쳤다.
“망할! 아민, 너였냐!”
“야, 넌 몇 년 만에 만나서는 첫인사가 돌팔매질이냐!”
성질부리듯이 외치는 소리가 거칠었다. 그러나 둘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 * *
날 밝기가 무섭다.
은연중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던 남악도문의 쪼개진 산문 너머로 한 무리의 인영이 운무를 뚫고 성큼성큼 내려왔다. 그러자 황보세가 외운당 무사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적도들이다! 적도들이 내려오고 있다!”
뎅뎅뎅!
외침과 더불어서 경종이 세차게 울렸다.
웅성거림은 잠깐에 불과했다. 외운당은 황보세가의 정예답게 바로 자리를 찾아서,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살기를 뿜어냈다.
며칠 동안 이어진 대치가 드디어 깨어지는 순간인지.
긴장할 새, 저쪽에서 사람의 윤곽이 드러났다. 앞장선 것은 소명과 위지백이고, 이쪽에서 앞장선 것은 소천룡 회와 황보영운, 그리고 백소설이었다.
남악도문의 일이었지만, 황보세가 외운당의 영역이기도 하다. 황보영운은 퍼뜩 불길이 이는 눈으로 태평한 위지백을 노려보았다.
‘저자…….’
남악도문을 처음 찾았을 적에 단박에 외운당 정예를 때려누였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자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절정의 도객이다. 그래도 가슴에서 치솟는 열기가 뜨거웠다. 그때, 짧은 목소리가 들끓는 황보영운의 성질을 붙잡았다.
“당주.”
“으흠.”
황보영운은 헛기침을 흘리며 흔들리는 눈동자를 다잡았다.
험악한 눈초리는 멀리서도 선명하다. 그러나 소명이나 위지백이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기왕지사, 마음을 다잡았다면 바로 이행하는 편이 백번 낫다. 위지백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앞장섰다.
그리고 대여섯 걸음을 남겨 둔 채, 서로 마주했다.
“소명 공.”
험악한 말이 터질 듯했지만, 소천룡이 먼저 나섰다. 그는 소명을 향해 먼저 두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옆에서 태연한 위지백을 향해서도 두 손을 맞잡았다.
“서장제일도 위지 선생이시군요.”
“음, 그대가 소천룡이시구만?”
“소생입니다.”
“저 뒤에 반가운 얼굴들도 있고.”
위지백은 무리 중에서 익숙한 천룡세가 양 당주의 얼굴을 흘깃 보고는 말했다. 히죽 웃는 낯이나, 찰나 번뜩이는 눈빛이 날카롭다.
사마청, 이충도는 벌게진 낯빛으로 위지백의 눈빛을 마주했다. 저도 모르게 움켜쥔 두 주먹이 뻐끈하고,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찰나에 불과한 마주침이었으나, 두 사람은 위지백의 호된 손속을 뼛속 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제, 젠장!’
위지백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나선 소천룡과 황보영운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인사치레는 이쯤 하십시다. 당사자를 만나고 싶으니. 관계없는 두 분은 비켜 주시지.”
“당사자?”
“관계가 없어?”
“그럼, 설마하니. 황보 어쩌고 하는 댁들이 남악도문의 주인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그, 그것은.”
말문이 막힐 사이, 소명이 위지백을 거들었다.
“자자, 잠시 물러나 주시구려.”
졸지에 아예 상관없는 부외자 꼴이다.
앞선 모두가 당황했지만, 소명은 개의치 않았다. 황보영운과 소천룡 사이로, 백진자가 얼결에 나섰다.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일이 어찌 돌아가려는가.
백진자는 위지백을 마주하면서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서장제일도의 이름을 이제 알았지만, 그보다 남악도문이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 눈앞의 이 한 사람 때문이라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만 할 수도 없는 것이.
황보세가의 외운당마저도 위지백의 칼등을 피하지 못했다.
백 년 내 제일 도객이라고까지 불린다는 것이 영 괜한 소리가 아님을 이제 알 수 있었다.
“아니라면, 그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본문이 형편없다는 것인가.”
백진자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남악도문 장문인, 백진자라고 합니다. 위지 선생.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군요.”
“크흠, 흠. 그렇지요.”
위지백은 불편한 헛기침을 흘렸다. 흘깃 소명의 눈치를 살피니, 그는 다른 곳을 보면서 영 딴청이다.
‘제길.’
위지백은 속으로나마 한숨짓고,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치뜬 눈매로 마주한 백진자를 직시했다.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백진자는 일순 가슴이 서늘했다.
위지백은 번쩍 두 손을 맞잡고는 백진자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천산 백금장주 위지백, 남악도문 장문인께 삼가 사죄드리오.”
“아니, 이 무슨?”
본산을 범한 참람한 대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할 줄이야. 누구라고 알았을까.
백진자는 황망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아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왈칵 화를 낼 수도 없었고, 대범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저 쳐다만 볼 뿐이다. 백진자만이 아니었다. 군웅 사이에 섞여 있는 남악도문 제자들은 물론, 황보 외운당 무사들과 여러 호남 무인들까지.
자리의 모두가 입을 굳게 다물고는 눈만 끔뻑였다.
“이 위지 모. 귀파에 무슨 악한 심정이 있던 것은 아니외다. 무슨 말을 한들, 어디 되돌릴 수 있는 일이겠느냐만, 그저 이 사람의 불찰이고, 잘못이오.”
조용할 새, 위지백은 경망스러운 기색을 싹 거두고,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기에 답하는 사람이 없다. 황당한 침묵이 장내에 내려앉을 사이에, 소명이 입을 열었다.
“자아, 장문인. 이제 어찌하시겠소.”
그는 백진자는 물론이거니와, 황보영운과 백소설, 그리고 소천룡까지 죄 둘러보았다. 전날 산에 올라가는 소명이 장담한 것처럼 된 것이다. 크게 다툼할 것도 없이, 끌고 내려와 고개를 조아리게 하겠다고 하더니. 말 그대로였다.
또한, 위지백 뒤에서는 강량과 황보도옥, 그리고 황가련 도객들도 아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날 큰 충돌 없이 마무리 짓겠다고 하더니, 설마 이렇게 고개 숙일 줄이야.
“허, 허허.”
강량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라면 여기서 다른 말없이 다 제 불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 있을까.
그는 미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칼자루는 백진자에게 쥐어진 셈이다.
일대고수가 직접 하는 사죄를 그대로 받을지, 아니면 다 필요 없다 하고 다시금 칼날을 들이밀 것인지. 어느 쪽이든 백진자는 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진자는 혈기가 올라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위지백을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눈길은 험악했지만, 살기마저 머금지는 않았다. 그는 복심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는 뜨거운 열기를 꾹꾹 눌러 담았다.
형산 일대에서 오랜 명문인 남악도문이었지만, 영명은 이미 땅에 떨어졌다. 더 잃을 것이 무엇일까. 제자에게서 말썽이 시작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것을 무턱대고 덮을 수도 없었다. 그리하기에는 상대가 상대였으며, 또 너무 늦고 말았으니.
위지백의 말대로라면 황가련이 끼어든 것은 그저 우연, 아니 악연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를 두고서 호남 무림을 업신여겼다고 우길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남악도문 제자 중 한 사람이 발끈하여서 빽 소리쳤다.
“닥치시오! 본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서, 몇 마디 말로 넘어가려는 것이오!”
그 기세가 사뭇 살벌하다.
도사는 불진을 세차게 떨치고서 당장 위지백을 향해 손을 쓸 것처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치뜬 눈매에 살기가 매섭게 어렸다.
위지백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앞으로 나선 도사를 보았다. 입가에 쓴웃음을 떠올렸다. 백진자가 머뭇거리는 것도 이해할 만했고, 젊은 도사가 분노하여 나선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위지백은 도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젊은 도사께서는 어찌하면 좋겠나?”
“본문 제자의 팔을 끊어 놓았으니, 그대 또한 마땅히.”
“허면 어디 끊어 보시게.”
위지백은 냉큼 팔을 내밀었다. 그것도 오른팔이었다. 도사는 그 말에 덥석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