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 (Shin Yun-hee) RAW novel - chapter 120
평생 좁은 나라에서, 더군다나 천것이라 갇혀만 지내다가 비교적 자유롭게 타국을 드나들 수 있게 되자 부사리는 포구에 드나드는 온갖 배를 타고는 이곳저곳 온 데를 마음껏 유람하고 있었다. 무자리는 그런 부사리의 건강이 늘 염려스러웠으나, 바람처럼 떠도는 아비를 붙들어 둘 수는 없었다.
하면 술이라도 끊으면 좋으련만, 밤이면 달이 뜨고, 가을바람에 살사리꽃이 하늘거리는 한 제 아비가 어디 술을 끊을 수가 있겠는가. 죽어 그 달보다 곱다던 이를 만나지 않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일 터였다.
그리하여 무자리의 걱정은 더 깊어졌다.
그런 서방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는 서현은 저를 든든하게 감싸고 있는 무자리의 굵은 팔뚝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맞다. 서방님, 화령군 대감이 오셨습니다.”
“또?”
웬만해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제 서방의 음성이 사뭇 높아지자 서현이 큭 하고 웃음을 삼켰다.
“하, 그 녀석은. 그래 아직도 군부인과의 사이가 그러한 것이오?”
“아무래도 두 분이 여전히 서로 마음을 보이지 못하고 있어 그런 듯합니다.”
“그런데 군부인께서 화령군을 내내 연모하였다는 것이 참이오?”
“예, 지난번 서찰에 그리 적혀 있었답니다. 예전에도 어렴풋이 눈치는 챘으나 그리 오래된 깊은 마음인 줄은 저 또한 몰랐지요.”
“그야말로 부창부수로군.”
혼인을 올려 군부인이 되었으나 민 씨 처녀는 화령군이 책임감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고, 격도 맞지 않는 저와 어쩔 수 없이 혼인하였다는 생각에 움츠려 있었다. 또한 화령군은 일찌감치 상처하여 홀아비였던 제가 열 살도 더 어린 꽃 같은 처녀의 처지를 이용해서 억지로 혼인을 밀어붙였단 생각에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유 녀석은 그 마음을 전혀 모른다?”
무자리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취중에 하는 소리를 듣자니 녀석은 군부인께서 본래 마음에 두고 있던 다른 이가 있었다고 알고 있던데.”
“그러니 그것이 다 오해인 것이지요. 그 마음에 둔 분이 바로 화령군 대감이시랍니다. 어린 소녀 시절에 저를 구해 주고 다정하게 위로하여 주었던 그분을 군부인은 내내 연모하여 오셨다고 합니다.”
“아니, 그런데 유는 어째서 군부인이 다른 이를 연모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아마도 진 대인과의 혼인을 만류하는 화령군께 군부인께서 그리 말씀하신 모양입니다. 마음에 품은 이가 있지만 처지가 이러니 진 대인과 혼인하는 것이 옳다고요.”
“저런.”
무자리가 안타까움에 혀를 차자 서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두 분을 도와 드리고 싶으나, 서로의 마음을 남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데다 군부인께서 극구 말리시니…….”
서로 연모하면서도 자꾸만 멀어지며 생으로 가슴앓이하는 두 사람이 서현 또한 참으로 안타깝고, 참으로 안쓰러웠다. 하여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제가 화령군께 넌지시 말씀을 건네 볼까 합니다.”
“내버려 두시오! 그 우둔한 놈은 말해 주어도 모를 것이오. 어쩐지 처남 바라보는 눈길이 묘하더라니.”
“네? 원우를요?”
“아마도 내 멍청한 아우 놈이, 군부인이 마음에 둔 이가 원우라고 생각하는 것 같소.”
“세상에나!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신답니까. 둘은 그저 동무인 것을요.”
놀란 서현이 고개를 돌리자 찰박 물결 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자리는 한 팔을 그녀의 허리와 허벅지에 감아서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잡고 있었다. 서현의 풍만한 젖가슴이 뭉클하게 무자리의 가슴에 짓눌렸다.
“세상 어느 사내가 아리따운 여인과 동무로 지낼 수 있단 말이오? 하, 말도 안 되지. 나는 유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오.”
무자리의 오만한 말에 서현은 예전에 화령군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역시 형제로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아무튼 이번에는 서방님도 화령군께 말씀을 잘해 주시어요. 예?”
“알았소. 남녀 간의 일이니 함부로 상관해서 안 될 테지만, 그놈이 워낙 우둔하니 어쩔 수 없지.”
무자리는 툴툴거렸지만, 서현은 누구보다 동생 내외가 행복하길 바라는 제 서방이 화령군에게 퍽 긴요한 충고와 조언을 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참, 그리고 우리 갓난이들 이름을 지어 봤소.”
“정말요?”
그리고 이어진 무자리의 말에 서현이 반색했다. 이미 태어난 지 백 일이 넘은 셋째와 넷째의 이름을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차였다. 고심하다 제가 먼저 시(詩) 자를 정하였고, 무자리가 그에 맞춰 각각 이름자를 정하기로 했다.
“어찌 정하셨나요?”
“셋째는 보배를 뜻하는 진 자를 써서 시진(詩珎), 넷째 역시 보배나 옥을 뜻하는 경 자를 써서 시경(詩璟)이라 하면 어떻겠소? 두 아이 다 내게는 더없는 보배이니 말이오.”
“어머, 좋아요. 아주 좋은 이름이어요.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서현이 좋아하자 흐뭇해서 덩달아 미소 짓던 무자리가 문득 퍽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흠, 수와 완이처럼 나중에 어찌 제 이름자를 이리 지었냐고 원망은 안 하겠지?”
글을 일찍 깨우친 수와 완은 저희 이름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지하였을 때 무자리에게 저희 이름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자신이 지었다고 답했더니, 두 녀석 다 짧게 알겠다고만 답하였다. 기뻐하지도 않았지만 화를 내거나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무자리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우리 수와 완이 이름이 어때서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서현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어렸다. 산꼭대기를 뜻하는 수(厜)와 높은 산을 뜻하는 완(岏)을 아이들 이름으로 정한 것은 무자리였다. 그리고 서현은 조금의 불만도 없었다.
주변에서는 이름자로는 잘 쓰지 않는 한자이니 좀 더 좋은 뜻을 가진 글자로 바꿔 주라고들 하였다. 하지만 그 이름에 담긴 의미는 서현과 무자리, 두 사람에게 무척이나 애틋하고 귀한 것이라 두 사람은 그대로 아이들 이름으로 정했다.
“수와 완이도 자기들 이름을 좋아하는걸요.”
“정말이오? 내게는 아무런 내색도 없던데.”
“참입니다. 언젠가 어째서 아버지가 그런 이름을 지었는가 묻기에 사실대로 답해 주었더니 참으로 기뻐했어요.”
“아, 그런 일이 있었군.”
그제야 무자리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어렸다.
“두 아이 다 산처럼 크고 강하며,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을 만큼 깊은 사람으로 잘 자라 줄 겁니다.”
그리 말하고 서현은 한 손으로 제 서방의 가슴팍, 심장 언저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온갖 상흔이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는 탄력 있는 살갗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그 깊은 산에서 저는 서방님을 만났고, 하여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얻었으니 우리 아이들에게는 참으로 알맞은 이름이지요. 또한 저는 그 이름이 참으로 좋습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현의 아름답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에 담긴 짙은 애정에 무자리는 가슴이 벅찼다.
“나 또한 그렇소.”
그리하여 언제나처럼 제 모든 진심을 담아 열렬하게 고백했다.
“사모하오, 부인.”
“저 또한 사모합니다, 서방님.”
그렇게 다정하게 바라보며 두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오로지 서로가 있기에 느낄 수 있는 행복이며, 고단했던 지난날이 그들에게 준 가장 완벽한 축복이었다. 그들이 사는 내내 함께 꾸고 또한 이루어 나갈 더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꿈이었다.
이내 무자리와 서현은 천천히 서로를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입술을 겹쳤으니 높이 달린 좁은 창에서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이 그런 두 사람을 내내 비추었다. 감미로운 입맞춤만큼이나 다사로운 어느 봄밤이었다.
::: 작가후기 :::
제가 모자란 솜씨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올해로 꼭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제 이름을 단 열 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바로 ‘추(追)’랍니다. 이럴 때 감개무량하다고 하는 거겠죠? 정말 감개무량하네요. 하하.
흔히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던데, 되돌아보면 저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글을 쓸 때면 막막하고 두렵습니다. 마치 입구와 출구만 있을 뿐, 가는 길을 알 수 없는 복잡한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말이죠. 그 짙은 안개를 헤치고 길을 찾아 나가는 것은 오롯이 제 몫이니 늘 열심히 걸어가려 애쓰지만, 좀체 능숙해지진 않네요. 애초에 너무 능력 부족이라 그렇습니다.
그래도 한 걸음 한 걸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저는 참 좋습니다. 마침내 미로를 빠져나와 출구에 섰을 때 느끼는 희열도 결코 포기할 수 없고요. 그러니 제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앞으로도 저는 계속해서 그 길을 걷고 또 걸을 겁니다.
물론, 그런 저를 지켜봐 주는 분들이 없다면 아예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할 테죠. 앞으로도 힘내서 걷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계속 지켜봐 주세요.
제가 무자리와 서현의 이야기를 처음 떠올린 것은 막 글을 쓰기 시작한 10년 전의 일입니다.
그사이 시간이 흐르면서 서현은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고, 이야기도 꽤 달라졌습니다만 무자리만은 변함이 없었답니다. 단 하나, 이름만 바뀌었군요.
사실 무자리란 캐릭터를 떠올린 것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습니다. 어릴 적에 누구나 아는 그 유명한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를 읽고, 또 ‘철가면’ 이야기를 접하면서 제 상상이 시작되었으니까요.
최초의 상상은 저와 꼭 닮은 공주님의 가짜 노릇을 하는 제 자신의 모습이었답니다. 그것이 모든 이야기의 시발이었죠. 물론, 무자리와 달리 화려한 궁중 생활에 넋이 나간 저는 그대로 쭉 가짜 공주님 노릇을 하고 싶긴 했습니다. 하하.
그러다 살면서 하나둘 알게 된 우리네 천민들의 신산한 삶의 모습이 합해져서 마침내 ‘추(追)’라는 글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모자람 많은 글이지만, 제게는 퍽 어여쁘고 의미 있는 글로 말이죠.
하지만, 제가 그려 낸 무자리와 서현의 사랑 이야기를 여러분이 어떻게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못났다 눈살을 찌푸리신 분도 있을 테고, 가당치 않은 얘기라며 혀를 차신 분도 있을 테죠. 그래도 끝까지 읽으셨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또한 저는 여러분이 제 글을 읽는 잠시나마 조금이라도 즐거우셨기를 바랍니다. 첫 책을 낼 때부터 쭉 변하지 않는 제 마음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테고요. 부디 그러시길 바라고 또 바랍니다.
끝으로 여러분께 시 한 편을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화가이자 동화 작가이며, 시인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이수동 작가님의 ‘동행’이란 시입니다. 어느 분께서 무자리와 서현을 보고 나서 떠올리셨다며 알려 주신 시랍니다. 저는 처음 읽는 순간, 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아무리 모진 풍파를 겪어도 변하지 않는 우직한 나무처럼, 봄날에 핀 어여쁜 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무자리와 서현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고, 한 손에 잡힐 듯해서 눈물도 조금 났고요. 주책이죠…….
그럼, 여기까지 읽어 주신 모든 분들 정말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고요. 정말 고맙습니다.
2017년 여름, 신윤희.
::: 참고문헌 및 영상목록 :::
* 각주의 낱말 뜻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사용하였습니다.
* 한시, 시조,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은 원문을 참고하여 번역하였습니다.
* 네이버 지식 백과의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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