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79
79화. 백보신권(百步神拳)
소명은 마당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수면을 포기한 대신에 차라리 앉아서 금강권과 백보권에 대해 궁리했다.
소림으로 오는 내내 고민하던 일이기도 했다.
‘백보권, 백보권이라.’
백보권. 한 호흡의 권경으로 백보 밖의 상대를 격살한다는 권법. 소림 칠십 이종의 절예 중에서도 그 명성이 천하에 드넓은 권법이기도 했다. 헌데, 그러한 것을 자신이 연성했다는 것을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펼친 것은 백보권이 아닌 금강권 상의 금강포추에 지나지 않았다.
“흐음.”
내내 궁리해도 어찌 답이 나지를 않았다. 소명은 슬쩍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는 흘깃 앞에 뻗은 지객당의 넓은 마당을 바라보았다. 저기 끝에 흩어진 돌멩이 몇이 눈에 들어왔다. 별생각 없이 그쪽을 향해 주먹을 가볍게 뻗었다. 마치 툭 털어내는 듯한 동작이었다.
팟!
순간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돌멩이 하나가 힘차게 튀어 올랐다.
소명은 계속해서 주먹을 가볍게 뻗어 갔다. 그때마다 돌멩이는 계속해 튀어 올라 높이까지 솟구쳤다. 소명은 손을 멈췄다. 돌멩이는 툭 하고 떨어져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소명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것을 대체 어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는 숨 쉬듯 자연스러워 전혀 의식되지 않는 금강권이었다. 극둔(極鈍)에서 태만(太慢)으로, 태만에서 다시 완둔(頑鈍)의 경지로 나아가고 있었다.
얼핏 보자면 느리게 금강권을 펼치는 것처럼 보일 뿐이나, 실제로는 그보다 더한 공이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내재한 공력을 자유자재로 펼치고 거둘 수 있었다. 금강권에 관해서는 그뿐이었다. 다르게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여공의 비법을 가까이 한 덕에 몸이 바른길을 아는 것이었다. 공전무융의 비법을 익혀 단을 이뤘기에 내력, 심부의 길에 거스름이 없을 뿐이었다. 이를 어찌 몇 마디 말과 글로써 전할 수 있을까.
“하아.”
입을 여니 나오는 것은 한숨이었다. 소명은 온통 까만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내 혀를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매달렸던 고민은 한쪽에 접어 두었다.
소명은 걸치고 있던 장삼을 한쪽에 내려놓고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금강권이었다. 아니, 시작은 금강권이었으되 점차 이어지는 것은 나한곤이었고, 백가창이었으며, 단전도와 월녀검이기도 했다. 그는 맨손으로 병장기의 투로를 밟아갔다. 이제껏 익혀왔던 모든 무학들이 금강권이라는 바탕 위에서 가지를 뻗어 갔다.
파, 파팡! 파파팡!
느리게 뻗어 가던 손발이 타격점에 이르러서는 세찬 경력을 발했다. 이는 바람이 터져나갔다.
권로는 계속해서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조금의 멈칫거림도, 어색함도 없었다. 소명의 눈은 손을 쫓았고, 소명의 손은 눈을 따랐다.
멀리 불어가던 바람결이 권로에 이끌려 주변을 거세게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명은 합장하며 멈춰 섰다. 권로에 따라 휘돌던 바람이 멈춰선 소명을 중심으로 빠르게 맴돌았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머리 위의 하늘이 밝았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함께 새벽 연공하는 소림 제자들의 힘찬 소리가 들려왔다.
밤을 꼬박 무련하는 것으로 지새운 것이었다. 소명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당의 흙바닥이 마치 빗자루로 열심히 쓸어낸 것처럼 소명을 중심으로 말끔한 원형을 그리고 있었다. 바람이 남긴 흔적이었다.
잠시 둘러본 소명은 곧 한쪽에 내려놓은 장삼을 집어 들었다. 옷자락은 새벽이슬에 축축했다. 그는 장삼을 탁탁 손으로 털면서 발길을 돌렸다.
지객당을 나선 소명은 아침 공양을 챙기고 약왕전으로 향했다. 헌데 법현의 모습이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깊이 생각할 틈은 없었다. 걷다 보니 약왕전이 코앞이었다. 그곳은 이른 시간임에도 부산스러웠다. 새벽 걸음으로 찾아온 모양인지 환자들이 곳곳에서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을 돌보느라 다른 승인들은 정신이 없었다. 아침 공양이나 제대로 챙겼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안으로 들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법수가 멀리서 소명을 알아보고 냉큼 달려왔다.
“아니, 소명 시주!”
“법수 스님.”
“와주셨군요, 아미타불.”
법수는 소명을 크게 반겼다. 얼굴에 화색이 가득했다. 말한 대로 다시 찾아오다니. 채약당 제자 열 몇이 밤새 달려든다 하여도 여러 날은 족히 걸릴 만한 일을 반나절 만에 뚝딱 해치운 소명이었다. 어찌 반기지 않을 수 있을까.
법수는 염치 불고, 체면 불고, 당장 소명을 이끌었다. 일 많은 곳이었다.
무릇 도와주는 손 마다치 않고, 없는 손도 어디선가 끌어다 오는 것이 약왕전 제자의 바람직한 자세인바, 법수는 그 본분에 충실했다.
소명 역시 싫은 기색 없이 법수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소란한 약왕전을 두리번거렸다. 이른 시간임에도 속인들이 바글거렸다.
“오늘도 환자가 많은 모양입니다.”
“근동에 빈한한 병자들은 다 본사를 찾는답니다. 달리 돕는 손도 없거니와 의원들도 태부족하여.”
말하며 법수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곧 밝은 얼굴로 말했다.
“법현 사형께서도 아직 일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소명 시주께서 일을 거드시면 사형도 참 좋아하실 겁니다.”
그 말에 소명은 잠시 멈칫했다. ‘아직’이라고 하는 말이 크게 걸렸다.
약왕전 우물가로 향하고 보니 산더미처럼 쌓인 광목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래에 쪼그려 앉은 법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등을 보이고 앉은 채 규칙적으로 빨랫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퍽, 퍽, 퍽.
빨랫감에서 울리는 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축 늘어진 뒷모습만 보아도 지금 상태를 짐작할 만했다. 아침나절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이 이 때문이었다는 말인가, 소명은 말을 잃었다. 법수가 법현을 외쳐 불렀다.
“법현 사형!”
“으, 응?”
법현은 멍청하게 앉아 손만 움직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파리한 얼굴에 두 눈자위가 퀭했다. 법수가 웃으며 말했다.
“소명 시주께서 도우러 오셨습니다.”
법현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손에 들고 있던 빨랫방망이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는 소명을 알아보고는 울 듯한 얼굴로 소리를 높였다.
“소, 소명 시주!”
고생이 그리 심했던가, 아니면 서러워 그러한가. 법현의 울먹이는 얼굴에 소명은 난감하여 애써 웃어 보였다.
“하, 하하.”
소명은 곧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일을 도왔다. 아울러 법현의 하소연도 같이 들었다. 그는 밤늦게까지 붙잡혀 있었고, 또 새벽부터 끌려와서 이렇게 일을 하고 있었다. 안쓰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소명은 법현이나 법수의 기대만큼 일을 돕지 못했다. 얼마 있지 않아 한 승인이 소명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약왕전 우물가에 덩치 큰 승인이 들어섰다. 그는 문턱에 머리가 닿을세라 슬쩍 고개를 숙이고 들어선 그는 소명을 향해 묵직한 불호를 읊으며 합장해 보였다.
“아미타불, 소명 시주.”
“예, 스님.”
소명은 빨랫감을 내려놓고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이 소명을 내려다보았다. 소명도 작은 키가 아니건만 승인은 거의 머리 두엇만큼이나 컸다. 옆에 법현이 승인의 모습에 덜컥하고 놀란 얼굴을 했다. 그는 불안한 모습으로 물었다.
“아니, 법공 사형. 사형이 여긴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음, 법현 사제.”
승인, 법공은 법현에게 알은 체를 하고는 바로 소명을 돌아보았다.
“소명 시주, 빈승은 나한당의 법공이라 하오.”
“법공 스님이시군요.”
소명은 젖은 손을 급히 털어내고 마주 합장했다. 고개를 숙였던 그는 문득 기이한 느낌에 슬쩍 눈을 들었다. 앞에 선 법공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합장한 손 너머로 뚫어져라 소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치뜬 두 눈이 뜨거운 열기를 품었고 바위 같은 두 어깨 위로 기세가 스멀스멀 일었다. 합장한 손은 경련을 일으키듯 움찔거렸다. 마치 생사대적(生死大敵)이라도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고리짝 같은 눈으로 지그시 노려보는데다가 꾹 다문 입매가 꿈틀거렸다. 소명은 위험을 감지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법공은 투기(鬪氣)를 있는 대로 발하고 있었다. 기세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명은 당혹감을 드러내며 눈치를 살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당황하는 데에 법공은 뜨거운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방장께서 시주를 찾으신다오.”
“그렇군요.”
“그런데 우선 빈승과 한판 붙어봅시다.”
“예, 한판 붙어…… 예?”
소명은 움찔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싶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법공이 히죽 웃고 있었다. 악문 이가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무섭게 끓어오르는 두 눈의 열기라니. 말 그대로 달려들 기세였다. 그때 법현이 목 놓아 부르짖었다.
“아이고오! 법공 사형!”
그는 안고 있던 빨랫감을 내팽개치고는 허겁지겁 법공의 앞을 막아섰다.
“사형! 이러지 마십시오!”
“비키게, 법현 사제.”
“아니, 사형!”
“자, 소명 시주. 사양치 말고 한번 겨루어 봅시다.”
법공은 막아선 법현을 밀쳐가며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은 이미 돌아간 상태였다. 법현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그러자 법현이 버럭 소리쳤다.
“사형! 정히 이러실 겁니까? 방장께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겁니다!”
“괜찮네, 괜찮아. 당당 남아끼리 교류하고자 함인데 뭐가 문제인가.”
우이독경(牛耳讀經)이 따로 없었다. 법공은 법현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의 막무가내에 법현은 크게 얼굴을 붉혔다.
“사형!”
그는 화난 얼굴로 쩌렁하게 소리쳤다. 아울러 기세마저 발하니 법공은 움찔하며 법현을 돌아보았다. 치뜬 법현의 두 눈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법공에 못지않았다. 그는 흘러내린 젖은 소매 자락을 거칠게 걷어붙였다. 나한승의 강인한 팔뚝이 새삼 드러났다.
“정히 하시겠다면 소제 먼저 쓰러뜨리십시오!”
“법현 사제, 그리 나오면 내가 못할 것 같은가?”
당황은 잠시에 불과했다. 법공은 히죽 웃으며 솥뚜껑처럼 거대한 손을 들어 보였다. 당장 장심에서 일렁임이 일었다. 법공의 주공인 대력금강장의 공력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법현은 입매를 일그러뜨린 채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금강나한기공의 공력이 들불처럼 일어섰다. 그 뒤에서 소명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보다 못한 소명이 서둘러 나섰다.
“저는 괜찮습니다. 법현 스님.”
“엑?”
법현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가 싶었다. 놀란 눈으로 돌아보는 법현을 향해서 소명은 담담한 얼굴로 슬쩍 미소 지어 보였다.
“그저 겨루어볼 뿐인 것을요, 법현 스님.”
상하고하를 정하자는 것도 아니고 생사대결을 하자는 것도 아닌데, 굳이 몸 사릴 이유가 있겠는가. 법공의 호투심은 순수한 일면까지 보이고 있으니. 그러하나 법현에게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법공의 무지막지한 호투심은 노도와도 같았다. 자신을 주체할 줄 몰랐기에 언제나 상대를 상하게 만들었고, 자신도 상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법현은 소명의 무위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명 시주!”
“하하하.”
비명처럼 외치는 법현과 신이 나서 웃는 법공이었다.
법공은 큰 손으로 법현을 냉큼 밀쳤다. 그의 얼굴이 크게 들떠 있었다. 두 볼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고리눈이 반짝거렸다. 마치 아이와도 같았다.
“자자, 말로만 듣던 백보권 복원자의 솜씨를 보여 주시구려!”
법공은 소매를 팍팍 걷어붙이며 힘차게 말했다. 통나무 같은 두 팔뚝이 드러났다. 힘줄이 불끈 솟아서 꿈틀거렸다. 본격적인 기세가 일어났다.
소명은 웃음기를 지우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법공을 대했다. 그는 몰랐지만 법공은 나한당의 교두승. 이른바 나한을 가르치는 나한인 것이다. 법공은 다음 대의 나한당주요, 법자배 중에서 두 번째 서열이었다.
화드득 일어나는 기세가 법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소명은 젖은 소매를 차분하게 걷어 올렸다. 문득 법공의 뒤로 법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얼굴에 소명은 입매를 찌푸렸다.
‘이런, 이거 어째 미안한데.’
법현은 걱정하여 만류하고 나선 것이련만, 게다가 약왕전에 붙잡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 때문이 아닌가. 소명은 순간 눈동자를 굴렸다. 퍼뜩 떠오른 생각에 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머물렀다. 소명은 법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황소 숨을 훅훅 몰아쉬며 기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잠시만, 법공 스님.”
“흡! 왜 그러시오?”
법공은 움찔했다. 혹시라도 소명의 입에서 그만두자는 말이 나올까 두려운 기색이었다. 그에게 소명이 말했다.
“이대로 손속을 겨루기만 하면 제가 아무래도 손해 아니겠습니까?”
“그, 그야…….”
법공은 주저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는 난감한 듯 굵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빈승이 어찌하면 좋겠소?”
“여기 일을 해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소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 말에 법공은 주변 우물가를 둘러보았다. 빨랫감이 아직도 높이 쌓여 있었다. 그렇지만 법공의 눈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는지, 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가 지면 여기 일들을 하도록 하지.”
“그렇다면.”
소명은 두어 걸음 물러서서 법공과 마주했다.
“응?”
법공은 문득 소명의 선 자세에 눈을 끔벅였다. 단단히 주먹을 틀어쥔 그와 달리 소명은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였다. 방만하다 싶은 모습이었다.
“시주, 준비된 것이오?”
“예.”
“허, 참. 난 모르오, 이대로 공격할 것이오.”
“오시지요.”
소명은 차분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일점 공력조차 일으키지 않은 듯했다. 법공은 얼굴을 찌푸렸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집중하니 움켜쥔 주먹에서 가벼운 떨림이 일었다. 순간 눈을 부릅뜨며 일갈을 터뜨렸다.
“흐압!”
쾅!
힘껏 발을 구르니 땅이 크게 들썩였다. 동시에 법공은 소명을 덮쳐 갔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날랜 몸놀림이었다. 짧은 호흡을 끊어내며 두 팔을 냅다 후려쳐 왔다. 막강한 경력이 두 손에 어렸다.
소명의 머리 위에 법공의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문득 비스듬히 물러섰다. 그리고는 가볍게 손목을 털었다. 젖은 물기를 털어내는 듯했다. 실제로 물방울이 확 튀었다.
법공은 그렇지 않아도 부리부리한 눈을 더욱 크게 치뜬 참이었다. 몇 방울에 지나지 않았지만 절묘하게 시야를 가렸다. 촌음에 불과했지만 법공의 호흡이 흩어졌다. 소명은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