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cension Through Skills RAW novel - Chapter 429
제 429화
429. 84층, 레비네노프의 세계 (2)
잿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느끼려는 듯이 숨을 죽이고 호흡을 골랐다.
“……느껴져. 당신이 이곳에 오고 있다는 것을.”
소녀는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즐거움과 기대가 담겨 있었다.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나를 저주할까? 아니면 연민의 반응을 보일까? 분노를 토해내며 그에게 나를 죽이라 할까?”
소녀는 키득거렸다. 마치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만족스럽다는 듯이.
“나는 물러서지 않아. 그러니 빨리 이곳으로 와. 나의 왕자님.”
소녀의 앞에는, 인간의 형태를 한 무언가가 있었다.
* * *
태산은 84층에 발을 내디뎠다.
[84층 퀘스트 시작.]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심연을 상대로 승리해라.] [보상 : 무기의 각인.] [비밀 보상 :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발바밤바가 나타났다.
“자주 보이네.”
[그만큼 네가 한 일들이 많다는 의미지. 너를 이대로 84층에 내려보낼 수는 없다. 평범한 84층은 너에게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마법사는 말했었다. 미궁의 난이도를 태산에게 맞춰서 변경하겠다고. 84층이 바로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마침 아인츠하르가 적당한 것을 주었더군. 아인츠하르가 너에게 준 퀘스트. 그것을 84층의 퀘스트로 변경하겠다.] [84층 퀘스트 시작.] [아인츠하르의 퀘스트를 성공시켜라.] [보상 : 무기의 각인.] [비밀 보상 : ???]쿠구궁!
미궁이 변화한다. 태산 하나에 맞춰 흔들리고 움직인다. 그리고 움직임이 멈춘다.
[통로를 지나면 보일 거다.]태산은 발바밤바의 말대로 변화한 미궁에 발을 내디뎠다.
적당한 거리의 통로를 지나 문을 여니, 그곳에는 일렁이는 공간의 통로가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무너져 내린 세계가 있었다.
모든 것이 흑색으로 물들어버린 레비네노프의 멸망한 세계.
고신에 의해 완벽하게 멸망한 세계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너를 저곳에 보내고 싶지 않다.]발바밤바는 말했다. 관리자인 그가 퀘스트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이고 있었다.
[저곳은 고신들에게 먹힌 세계. 더 이상 이 세계의 땅이라 할 수 없다. 그것들의 영역에 가깝지. 그렇기에 고신들의 영향력이 우리보다 강하다.]통로 너머의 세계는 무척 이질적이었다. 아룰리아에서 보았던 고신의 영역. 그곳과 느낌이 비슷했다.
[고신들의 시선이 저곳에 모여 있겠지. 네가 발을 내딛는 순간 바로 움직임을 보일 거다.] [물론 위험하겠지만, 목숨을 건 투쟁이 미궁의 목적 아니었어?] [그는 저곳에서 죽지 않는다.]발바밤바는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담담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문제가 되지.]“……고신들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는 뜻인가?”
생각해보면 이전에도 그랬다.
마계에서 만났던 고신, 옛 마신.
그는 태산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태산을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마치 죽이는 건 자신들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진실.
[하지만 이대로 저 세계에 가봤자 버틸 수 없겠지. 그러니 우리는 너에게 가호를 내리겠다.]발바밤바의 권능이 발현된다. 미궁의 관리자인 그가 신들을 대행하여 가호를 태산에게 내려준다.
[사용법은 머릿속에 떠올랐을 거다. 한 번뿐인 가호니 신중하게 사용하도록.]태산이 만난 신들. 그 모두의 가호가 태산의 안에 깃든다.
[하지만 가호들을 발동해도 고신이 작정하고 너를 노린다면 아무 의미가 없지. 그러니 신들이 직접 움직일 거다.]끼이이이익!
통로 너머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거대한 힘의 충돌이 느껴졌다.
[신들이 고신들의 직접 개입을 막을 거다.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테니 빠르게 처리하고 오도록.]“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인가?”
이렇게 많은 신들이 개입하는 건 신들의 전장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들이 태산을 총애한다고 해도 퀘스트 클리어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도와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번 퀘스트는 신들에게도 의미가 있다. 레비네노프는 고신에게 오염된 신. 초월자들도 어찌하지 못했지. 그 가능성의 확인이라면, 충분히 투자할 만하지.]그런 의미라면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레비네노프가 미궁에 자리 잡은 이후 마법사와 초월자들도 이런저런 방법을 썼겠지만, 레비네노프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걸 태산이 해낼 수 있다면 신들의 입장에선 충분히 힘을 소모할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너 스스로 진실을 알게 하려는 심리도 있겠지. 타인의 입으로 말해주기보다는 직접 깨닫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울 테니.]발바밤바는 통로를 확장했다.
태산이 통로 너머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무척 이질적인 감각이 전신을 덮쳤다. 마치 우주 공간으로 내던지는 듯했다. 세상의 법칙이 먹히지 않는, 중력이 사라지고 마찰이 존재하지 않는, 그런 세계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태산이 신성을 전신에 두르고 통로를 넘어섰다.
그리고 그는 흑색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세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숲도, 바위도, 평야도 모두 흑색으로 물든 것을 제외하면 본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초목의 냄새도 자연의 바람도 없었다.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이곳은 바로 고신에 의해 멸망한 세계였다.
태산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곳에는 거대한 존재들이 충돌하고 있었다. 주변에 퍼져나오는 여파만으로도 능히 별을 부술 위력이 담겨 있었다.
저들의 싸움이 끝나기 전에 퀘스트를 끝내야 했다.
퀘스트는 멸망한 세계에 남아 있는 레비네노프의 성물을 찾는 것.
목적지는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세계에서 신성이 느껴지는 장소가 있었다. 저곳이 바로 레비네노프의 성물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태산은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세계에 퍼져 있던 어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태산의 전신에 달라붙어 그 색을 물들이려 했다.
태산이 신성을 끌어올려 막아내려 했지만, 신성마저 검은색으로 물들어 효율이 상당히 나빴다.
잠시 고민한 끝에 태산은 검은색을 발현했다.
검은색이 태산의 전신을 둘렀다. 그러자 어둠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태산은 빠르게 목적지로 향했다. 레비네노프의 세계는 지구보다 넓었지만, 지금의 태산에게 물리적인 거리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태산의 시야에 신전으로 보이는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검게 물든 저 안에서 신성이 느껴지고 있었다.
태산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태산을 기다리고 있는 자가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
흑색의 남자가 태산을 반겼다.
[비어있는 흉물의 화신이 등장했다.]* * *
그는 훤칠한 인상의 남자였다.
외모에 대해서 말하자면, 잘생긴 축에 속했다. 시원스러운 웃음은 사람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명이 아니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끔찍한 무언가가 모습을 흉내 내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불멸?’
아니, 아니다. 그 잔재가 보이긴 하지만 전혀 다른 것을 뒤섞은 것처럼 비틀려 있었다.
그는 태산을 두른 검은색을 보더니 탄성을 터트렸다.
“대단해. 그분들에게 자신을 바친 이 세계의 존재는 제법 있지만, 너처럼 그 힘을 자유롭게 다루는 자는 극히 드물어. 하물며 너는 자신을 바치지도 않았지. 그분들이 흥미를 보이는 이유도 이해는 가네.”
태산은 검을 꺼냈다. 눈앞의 존재는 고신 측의 존재. 즉 그의 적이었다.
남자는 황급히 손을 들었다.
“너무 그러지 마. 너와 나는, 한 편이 될 수도 있다고?”
“개소리를.”
“신들이 어째서 너를 이곳에 보냈는지 궁금하지 않아?”
남자는 히죽 웃었다.
“어차피 급할 이유는 없잖아? 적당히 이야기라도 해보자고.”
잠시 고민한 태산은 순순히 검을 내렸다.
“그러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자 오히려 남자가 껄끄러워했다.
“……뭐, 좋아. 네가 이 세계에 왔다는 건 바라는 것은 하나뿐이겠지. 이리로 와.”
남자는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태산은 담담히 그 뒤를 따라갔다.
“저것이 네가 바라는 거지?”
신전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하나의 성유물이 있었다.
작은 기둥의 형상을 한 성유물. 그 안에 담긴 것은 초월자의 잔재였다. 지금의 태산보다도 높은 격을 가지고 있었다.
‘저거라면.’
레비네노프를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다.
태산이 성유물을 가져가려는 순간 남자는 태산을 막아섰다.
“그 전에, 이야기를 좀 하자고.”
“나한테 뭘 바라는 거지?”
“어렵지 않아. 강태산. 뒤섞인 존재.”
남자는 웃으며 제안했다.
“우리와 함께하지 않을래?”
* * *
“고신의 편을 들라는 건가?”
“부정하지는 않겠어.”
“헛소리.”
태산은 일축했다. 고신은 그의 세계를 무너트리고 그를 노리는 자들. 그들과 함께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네 감정도 이해해. 그분들은 세계의 파괴자지. 이 세계를 무너트리고 망가트리고 계셔. 그 과정에서 너 또한 피해를 봤을 테고. 하지만 달리 생각해 봐.”
남자는 손을 들었다.
“너는 살아있어. 죽어 나간 이들은 너와는 관계없는 것들이지.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보자고. 아무 문제 없잖아?”
태산은 말없이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입가를 비틀었다.
“무엇보다 넌 착각하고 있어. 그분들의 잘못이 아니야. 이 약해빠진 세계가 잘못된 거지. 이 세계는 너무나도 연약한 세계라고 생각하지 않아?”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간들은 아무 의미도 없이 죽어가고, 드높은 경지에 도달한 이들마저 신들의 변덕에 목숨을 잃지. 설령 불멸자가 되어도 다르지 않아! 초월자의 가벼운 손짓에 자신이 쌓아온, 그리고 노력해 온 모든 것이 사라져버려!”
그가 분노를 담아 외쳤다.
“이 세계는 그릇되어 있어! 잘못된 세계야!”
태산은 남자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당장 추락의 신이 남자가 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재능 있는 필멸자들의 가능성을 가로막고 자신의 장난감으로 다루었다.
굳이 추락의 신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베궤세타의 마족들은 그곳의 신. 하몬에 의해 멸족에까지 몰렸다. 그리고 하몬은 베궤세타와 함께 마신에 의해 짓이겨졌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이 죽었으리라.
대부분의 초월자들은 필멸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것이 태산이 내린 결론이었다. 마신도 마족을 아낄 뿐이지, 인간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태산은 남자를 바라봤다.
“너는 불멸자였군.”
“그래. 하지만 빌어먹을 초월자의 장난질에 모든 것을 잃을 뻔했지. 그 과정에서 위대한 분이 나를 구원해주셨어.”
남자는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분들에게 나 자신을 바쳤지. 위대한 분의 화신이 되어 그분의 뜻을 대행하는 자. 그것이 나란 존재야.”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태산은 무심히 말했다.
“고신은 추방당한 존재지. 세상에 어찌어찌 개입하고 있지만, 결국 패배자란 건 변함이 없어.”
“아니.”
남자는 웃었다.
“태산. 너라면 느끼고 있을 거야. 그분들의 영향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고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그분들을 추방한 초월자들의 봉인이 약해지고 있다는 뜻이지!”
쿠우웅!
하늘 저편에서 거대한 힘의 파장이 터져 나왔다.
검은색이 우주 너머에서 세상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초월자로 보이는 존재들이 억압했지만 검은색은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남자는 광소를 터트렸다.
“그분들은 머지않아 돌아오실 거야! 자신들이 추방당한 이 세계로! 그리고 모든 것을 짓밟고 세상이 본래 갖추어야 할 모습으로 되돌리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