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33
엄청난 공을 들여 염색했다는 유명의 도포자락이 파랗다 못해 시퍼렇게 윤이 났고,
이에 대비되는 한성의 도포는 보라빛이 감도는 쨍한 남색이었다.
그리고, 방 안의 소품들은 붉디 붉은 칠과 천들이 겹치고 겹쳐져 타오르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오직 눈을 식혀주는 것은 후원의 초록빛.
후원을 마주한 별당.
얕은 내울이 흐르는 바깥 풍경을 담으며 문은 활짝 열려 있다.
그 곳에서, 10년만에 독대하고 앉은 전前 스승과 제자의 대화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유명아.”
“네, 형.”
“고맙다.”
한성의 뜬금없는 인사에 유명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고,
그는 천천히 한 문장씩 솔직한 마음을 표현했다.
“연기를 시작하기 직전까지도, 완성된 버전이 예측이 되지 않는 건 처음이야.”
“상대역의 연기도, 그리고…내 자신의 연기까지도.”
“그게 무서우면서도, 미칠 듯이 신난다. 최근에는 내가 살아있구나-라는 게 매분 매초마다 와 닿아.”
“같이 가보자. 한 판 시원하게 놀아보자고.”
한성이 자신이 꺼낸 말이 조금 낯간지러운지 뺨을 긁적이며 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유명은 그 손을 꽈악 붙잡아 세게 흔들었다.
그런 날이 있다.
감정이 고양되어, 술을 먹지 않아도 솔직해 질 수 있는 날.
따가운 햇볕과 조명 아래, 수십 명 스탭들이 주변에 있는 이 풍경에서, 한성이 조용히 유명에게만 들려준,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말이 유명의 가슴마저 두근대게 했다.
혀에 심은 칼에 기름을 발라보자.
맨질하고 윤이 나는 살덩이가 상대를 애무하듯이 매끈하게 쓰다듬다가,
종내에는 푸욱- 하고 궤뚫기를.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파야 하는,
오늘은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는 날이다.
“스탠바이-”
“액션!”
*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그렇군. 이 별채도 참으로 오랜만이네 그려.”
이상할 정도로 오늘 정몽주의 기분은 좋아보인다.
‘스승’이라는 표현에도 예전처럼 선을 긋지 않는다.
그 이유를 알면서도, 왜 마음이 기꺼운가.
만들어낸 마음이 아닌,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감정. 슬쩍 그리움이 깃들었다 사라지는 유명의 감정 표현에 손감독이 흠칫했다.
‘어떻게 나도 의도치 않았던 디테일한 감정들까지 집어 오는지.’
“강녕하십니까.”
조르르-
입으로는 안부를 물으며 손으로는 차를 우린다.
다구의 뜨거운 물로 우아하게 차를 우려낸 방원이 두 개의 잔에 차를 따른다.
정몽주는 그것을 따라 입에 머금는다. 은은한 향기가 코 속을 가득 머물렀다가 목 뒤로 꿀꺽 넘어간다. 그리고 그가 꺼낸 말은,
“자네의 활약 덕에 강녕할 수가 없으이.”
거침없이 내밀어진 한 수.
방원의 표정이 움찔한다.
의도는 아마 자신을 격동하여, 외부의 상황에서 관심을 떼게 하려는 것.
“다된 밥이다 싶었는데, 제가 아버지를 모셔와서 계획이 틀어진 것 때문입니까?”
정몽주는 정치가. 평소라면 이리 원색적인 공격을 할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잘 되었다. 드디어 오늘은 그와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을지도.
“아니라고는 못하겠군. 송헌대감이라면 좀더 미적거리셨으라 생각했는데, 자네라는 변수를 과소 평가했어. 그 판단력에 감탄했다네.”
“그 판단력의 태반은, 스승님이 키워주신 거지요.”
“그랬던가···”
정몽주가 씁쓸히 웃는다.
과연, 적을 키워낸 것이 제 자신이다.
처음에, 저 총기넘치는 눈빛이 섬찟하게 느껴졌을 때 그만뒀어야 하는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흡수하는 것을 보고 흥에 취해 그만···
“그렇기에, 저는 스승님이 ‘탐이’ 납니다.”
번들거리는 욕심을 감추려 하지도 않고, 방원이 역공을 했다.
이미 신료들 중 최고의 자리에 올라있는 정몽주를 한참 직급이 낮은 26세의 젊은이가 탐을 내다니, 이것의 의미는 단 하나밖에 없다.
제왕.
제 아비를 도우면서도, 이미 왕좌를 탐내는 자.
자신이 가르친 제자의 장성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정몽주가 나직히 말했다.
“유덕(*이방원의 자). 그대의 야욕이 그대를 죽이거나, 그대 주변의 모두를 죽일 것일세.”
고요한 촬영장.
말이 창칼이라도 되는 듯 벌이는 합들이 보고있기에 숨이 찬다.
그럼에도 아직 둘은 상처조차 입지 않았다.
이 장면 후에 바로 이어지는 씬11은 원래 1367년의 회상 씬이었다.
으앙- 하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질 것이다. 그 소리를 배경으로 성균관에서 강론 중인 정몽주의 모습이 보여질 것이다.
복구된 성균관에서 정몽주가 학자로서 이름을 드높였던 해이자, 이방원이 태어난 해.
하지만, 오늘의 촬영은 다음의 다담씬으로 건너뛴다.
씬 16.
정몽주의 예언같은 말에 화내지 않고, 방원은 하하- 웃으며 옛날 이야기를 꺼낸다.
“야욕, 하하. 제 야욕에 상당부분 기여하셨던 분이 할 얘기는 아니실 것 같은데.”
“그건 무슨 소린가.”
“그거 아십니까. 무가의 자제로 자라나 전쟁놀이에 열광하던 개구쟁이가 학문과 정치에 뜻을 둔 계기가 스승님의 화려한 외교술과 충정높은 의기에 반해서였다는 것을.”
“…그랬나.”
잠깐의 침묵.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신 방원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다.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
그 말에 정몽주가 담담히 대꾸한다.
“무슨 소리? 나는 못 들었네만.”
“밖이 좀 시끄러운 것 같은데…제가 좀 나가보고 오겠습니다.”
“밖은 아주 고요하네 그려. 그보다 그 얘기를 좀 해보게. 나에 대한 무슨 얘기를 들었다는 건가.”
이방원이 못이기는 척 정몽주의 제안에 응해준다.
“그야, 구국의 영웅담이지요.”
이 말의 끝에 명나라 씬이 삽입된다.
13일간 표류한 정몽주가 주원장에게 인정과 하례를 받은 씬.
이렇게 다담과, 젊은 정몽주의 업적이 교차되며 지나가던 씬들은, 어느 덧 둘의 첫 만남에 이른다. 이성계의 청으로, 방원의 개인교습을 하게 된 정몽주.
“그 때 스승님을 처음 만난 곳이 이 방이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왜 안나겠나.”
“그 때 스승님의 가르침이 아직도 선연합니다. 목적은 확고하게, 시선은 흔들림없이, 행동은 단호하게. 목표를 위한 수단이 결벽하지 않더라도 취하는 것이 현실정치다. 실제로도 그러셨지요.”
“자네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것을 나는 후회한다네···”
정몽주가 씁쓸히 웃었다.
자신이 키운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어리석음을 한탄하듯이.
그러자, 방원이 은근슬쩍 그의 의중을 떠 온다.
“똑똑한 사람이 하고싶은 일을 하려면 힘있는 곳으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일세.”
“그런데 왜 망해가는 고려에서 함께 침몰하시려는 겁니까.”
위험한 말이다.
이미 간접적으로 서로의 의사를 충분히 알고 있다지만, 직접적으로 주고받기엔 너무나 직접적인 말.
평소의 정몽주라면 못들은 걸로 하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겠지만, 과연 오늘의 그는 어떠할까.
방원은 여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과연 그는, 얼굴을 살짝 굳혔지만 자리를 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청을 했다.
“문을 닫아주겠나.”
딸깍-
방문이 굳게 닫히고, 더 이상 푸르른 정원은 보이지 않는다.
온통 붉은 배경 속에 나이가 지긋하고 수염을 조금 기른 학자풍의 정치가가, 자신의 학자적 논리일지 정치가적 논리일지 모를 의견을 펼쳐보인다.
지금부터가 바로, 손감독과의 첫 만남 때 유명이 ‘리액션’을 연기했던 씬.
이방원은 경청만 하고 있는 가운데, 정몽주의 정치관이 대담하게 펼쳐질 것이었다
“유덕(*이방원의 자),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체제라네. 능력이 출중할 수도, 부족할 수도 있는 군왕의 자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우수한 신료들이 합당한 결과를 도출해 나가는 체제.”
익숙한 대사.
그 장면을 바라보는 손감독의 표정이 우수에 차오른다.
같은 대사임에도 이렇게나 다르다. 목소리를 슬쩍 키우고 14년 전 어린 소년에게 강론하듯이 유려한 논리를 풀어놓는 노장 쪽의 존재감도,
“그런데 왜 혁명이 필요하겠는가. 왕도 왕조도 어차피 그 체제의 핵심은 아닌 것을.”
“이미 부패한 것은 도려내는 것이 빠르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담담히 받아치는 신성(*新星:젊은 별)의, 입을 닫고 있을 때조차 상대를 꿀꺽- 집어삼킬 듯 부푼 존재감도.
“도려낸다고 문제가 없겠는가. 새 국가를 일으키는 초대군왕은 언제나 능력있는 자일세. 그렇기에 신료들을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하는 체제가 성립되기 어렵지. 그러나 그 다음 왕은, 또 그 다음 왕은 능력이 있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렇습니까.”
“오히려 군왕의 힘이 가장 약해져 있을 때야말로, 신료 중심의 체제로 변화시키기 적절한 시점이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손감독이 꿈에 그려오던 그림.
고려의 조정이 아닌, 이 땅의 백성에게 충성하는 충신의 시대를 앞서간 발언과,
그런 그를 탐내는 미래의 왕의 감춰지지 않는 욕심이 에일듯이 교차된다.
“하지만 스승님, 이미 머리가 굳은 돌대가리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걸 언제 하나하나 바로잡고 있단 말입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방원의 무례할 정도로 과감한 발언에 분노한 상대가 조금 큰 소리를 낸다.
“이 나라를 집어삼키고 싶은 욕심을 그런 핑계로 정당화하지 말게!”
아니 그것은 정말 분노해서였을까.
쩌렁- 하고 톤을 높이는 상대에게, 방원은 더욱 소리를 낮추며 속삭인다.
“그리 목소리를 높이시는 것은 처음 봅니다.”
“지금 자네가 막말을 하고 있지 않나!”
점점 미소가 어린다.
“정말 그래서입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알아듣게 말을 하게!”
“저를 고이 따라오시고, 제 도발에 끌려와 주시고, 문을 닫아달라 한 후 열변을 펼치시고, 얼음같이 이성적인 분이 화까지 내시다니···”
“……”
“이렇게 미끼가 분전하고 계신데, 어째, 밖에서 ‘작전’은 잘 진행되어가고 있을까요?”
‘들켰구나···’
정몽주의 안색이 거멓게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