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63
운동화를 신고 먼저 나왔던 유명은, 버스정류장까지 와서야 대본을 두고 온 것을 깨닫고 되돌아 갔다.
비어있을 줄 알았던 연습실에는 지젤의 선율이 흐르고 있었고,
탁- 타닥- 탁-
연습실 창문으로 달빛이 내리는 가운데,
유리문 너머로 한 발레리나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달빛이 번져 하얗게 빛나는 곧은 팔.
그 팔이 크고 둥근 원을 그리고 내려앉는다.
양 팔이 가슴 앞에 가득 모아졌다가, 갈구하듯이 하늘을 향해 뻗는다.
허리를 젖히고, 후두부에서 허리까지 역반원을 그리는 조금도 일그러짐 없이 유려한 곡선.
다시 뻗은 양 손이 가슴 앞으로 끌어모아지면서 표현되는,
지젤의 배신감. 절망. 간구.
손끝 한마디까지도 희게 정화된 듯한 극상의 예술성은 아까의 대역 발레리나가 감히 견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저렇게 잘하는데…할 수 없다면…’
가슴이 저릿하다.
보는 사람의 가슴까지 미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지젤이 허리를 굽혀 토슈즈를 신었다.
‘응···?’
푸앵트(pointes: 발끝으로 서는 동작).
오른쪽 다리가 덜덜 떨린다.
그 상태에서 프레파라시옹(*préparation: 준비 동작) 후,
그랑 쥬떼(grand jete: 큰 도약).
‘어…안돼!’
유명이 그제서야 그녀가 하려는 짓을 깨닫고 문을 열고 뛰어들어갔지만,
쿵-
세련은 착지에 실패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누나···!”
그녀는 잠시 오른발을 감싸쥐고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겨우 진정이 된 후에야, 유명을 올려다보며 민망한 미소를 짓는다.
“어…집에…안 갔어?”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
“…”
“나도 쥬떼…정말 잘 했었는데···”
달빛이 눈에 어리어 뚝- 하고 떨어졌다.
*
“발레는 중력을 부정하는 춤이야.”
“그래요?”
“19세기에 마리 탈리오니가 푸앵트(*pointes: 발끝으로 서는 동작) 기술로 처음 각광을 받았다고 해. 그 춤은 정말 요정같이 가볍고 아름다워서 체중없이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고 하지.”
“아 그래서 발레가…근데 그거 엄청 힘들어보이던데요.”
“후훗. 발레를 배우면서 마리 탈리오니를 원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걸. 발톱이 빠지고 피가 나고 진물이 슈즈 안에서 굳어서 벗을 때 살점이 떨어지기도 해. 말 그대로 울면서 배우지.”
“그렇게 힘든데 꼭 그걸 해야 할까요?”
“발레는 끝없이 하늘을 향하는 춤이거든.”
“…”
“허리를 펴고, 골반을 들어올리고, 팔 끝을 한계까지 펼치고 종내에는 발끝으로 서면서,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춤.”
“…그렇군요.”
“그런데, 나는 이제 푸앵트를 할 수 없대.”
달빛이 흐르는 연습실의 한쪽 벽면에 두 사람이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밤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든다.
“균형을 잡는데 중요한 인대라서, 재활을 열심히 해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더라고.”
“…”
“그래도 나는 해보려고 했는데, 아빠가 격하게 반대했어.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남은 외동딸이라 자식사랑이 지극하시거든. 그 때 아빠 회사에서 아저씨 따라온 거 봤지.”
유명은 가만히 세련의 말을 들었다.
“그러고 벌써 2년이 지났네. 아빠가 팔불출이라 그렇지 꽉 막힌 분은 아니셔서, 발레할 때 못해본 거 다 해보라고 종용하셨어. 체중 걱정없이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클럽도 가고, 화려한 페디큐어도 하고···”
“그런데, 아무 것도 재미가 없더라.”
씁쓸한 웃음이 스쳐지나간다.
“어떤 날은 울었고, 어떤 날은 미친년처럼 웃었어. 그러다 손에 잡히는대로 펼쳐든 동화집에서 빨간구두 이야기를 봤지.”
“분하더라고. 나라면, 춤만 출 수 있다면, 밤낮없이 춤만 춰야 한다고 해도 절대 발을 자르지 않았을텐데.”
달칵-
레코드판이 한 곡을 종료하고 다음 곡으로 넘어간다.
1막 라스트.
알브레히트의 배신에 미쳐 죽어가는 지젤의 무곡.
“팬텀오브오페라의 크리스틴도 마찬가지야. 음악의 신에게 선택받았는데 그깟 흉측한 얼굴이 무슨 상관이며, 그깟 사랑, 왜 그런 걸 택했을까. 아무에게나 오는 기회가 아닌데.”
아무에게나- 라는 단어에서 지그시 힘이 들어간다.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썼어. 발레의 신에게 선택받는다면, 다른 것에 모두 눈감고 죄를 지어서까지도 발레에만 몸을 던질 수 있는 여주인공.”
“그게 내가 되고 싶은 윤화란이야.”
유명은 그녀가 모든 말을 토해낼때까지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이미 포기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누나는 지금이라도 재활하고 싶은 것 아닌가요? 조금의 가능성밖에 없더라도.”
“…글쎄···아빠는 내 손에 뭐라도 쥐어주려고 하고 계셔. 그게 발레가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그래서 내가 이 시나리오를 쓴 걸 발견하고 전액 투자하겠다고 빨리 찍으라고 하셨어. 작가의 길이든 배우의 길이든, 다른 데서 삶의 의미를 찾길 바라고 계신데…”
“…”
“그래, 의외로 시작해보니 재미있긴 해. 발레는…벌써 2년이 지났고, 희박하다는 가능성을 뚫고 재활에 성공한다 해도, 다시 예전같이 출 수 있을지…이제는 겁이 나기도 하네···”
유명이 잠시 말을 골랐다.
“저는 한때 아무리 해도 연기가 안 됐던 적이 있었어요.”
“…”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운명적으로, 내 뜻대로 연기할 수 있게 됐어요. 그래서 누나 얘기를 처음 알게 됐을 때 생각해본 적이 있거든요. 이미 연기의 맛, 인정의 맛을 봤는데, 다시 연기가 안 되는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과연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어떨 거 같은데?”
“힘들겠지만…저는 결국 그 길을 가지 않을까 싶어요.”
세련의 눈이 흔들렸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처럼 연기할 수는 없을 거라 하더라도, 15년은 더 노력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그 이상은 저도 겪어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지만요.”
15년.
유명이 전혀 볕이 들지 않는 음지에서 노력해온 기간.
그 기간만큼의 과장없는 진실.
그의 나이를 단순히 스물넷으로 알고 있는 세련은 그 의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알 수 있었다. 달빛이 증인이 되어.
“물론 정답은 없죠. 사람마다 답은 다 다르니까. 영화가 완성될 때까지 함께 고민해봐요. 누나는 내 파트너잖아요.”
그의 ‘첫’ 파트너. 아주 오랜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유명이 일어나며 그녀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세련이 그 손을 잡았고, 유명은 턴테이블에서 톤암을 옮겨 쭉 함께 연습해온 파드되(*2인 발레) 음악을 켰다. 둘의 얼굴을 각도에 맞게 따서 대역에게 씌우기 위해 꾸준히 연습하고 있는 곡.
달빛 아래 두 사람이 빙글 돌았다.
네 개의 발은 토슈즈를 신지도, 푸앵트를 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상반신만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지젤과 알브레히트였다.
*발레의 푸앵트(*pointes: 발끝으로 서는 동작). 토슈즈를 신고 있을 때(上)와 그 내부의 모습(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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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랭크 인
프리 프로덕션 1개월째.
요즘 기도한 감독은 나날이 살이 내리고 있었다.
“감독님, 좀 쉬면서 하세요.”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으아아.”
특유의 딱딱한 말투는 여전했지만, 워낙 자주 얼굴을 대하다 보니 대하는 태도는 많이 친근해졌다.
여주가 작가 겸 투자자이다보니 콘티 작업, 캐스팅 등에 의견을 물으러 연습실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곳에서 잦은 회의가 이루어졌다. 어느덧 세 사람은 함께 영화를 메이킹하는 공동체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타앗-
종이컵을 내려놓으면서 튄 커피방울이 기감독의 셔츠에 튀었다.
문제될 것은 없었다. 주름이 잡히지 않은 구깃구깃한 셔츠에는 이미 여기 저기에 얼룩이 묻어있었으니까.
저렇게 칠칠치 못한 사람이 영화와 관련된 일에만은 광적으로 꼼꼼한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발레단! 발레단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연습실 장면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야 따로 캐스팅을 한다지만, 영화에 포함되는 한두 씬의 공연 장면은 역시 발레단이 필요했다. 발레리나 수십명을 섭외해 지금부터 군무를 연습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국립발레단은 완곡히 거절했고, 서울 발레 시어터는 지젤이 최근 테마에 없어서 별도로 연습을 추가하는 건 무리이고···”
국내에 정통 클래식 발레의 규모를 감당할 수 있는 발레단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기도한은 ‘영화의 예술성’ ‘발레단 홍보 및 입지 상승’이라는 장점을 들어 발레단들을 설득하고 다니고 있었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러다 정말 광주까지 가서 찍어야 할 지도···”
광주시립발레단이 유일하게 긍정적인 사인을 보냈다고 했다. 그 쪽은 로케이션 헌팅 문제가 있어서 보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