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Degree RAW novel - Chapter 16
16화. 비급의 내력
려비우는 곧바로 흥미를 잃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립에게 서둘러 이 비급들을 베껴 다음에 빠짐없이 갖고 오라고 당부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이렇게 많은 양이 한꺼번에 비어있으면 언젠가는 발각될 수 있었다.
려비우가 떠나자 한립도 서둘러 짐을 챙겼다. 온 산에 옅은 안개가 내려 앉아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협소한 산길 쪽에는 침엽수림이 울창해 바람이 수풀을 스치자 ‘솨!솨!’하는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들려왔다.
나뭇가지들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입을 벌려 달려드는 요괴 같았다. 한립은 이 기괴한 풍경을 지나 서둘러 신수곡으로 향했다.
* * *
깊은 산속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한립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열어 사방을 경계했다.
산짐승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칠현문이 노을산에 기틀을 잡은 후로는 산중에 크고 작은 짐승뿐만 아니라 갖가지 독충들도 대부분 칠현문 제자들의 영약이 되어 없어졌다.
그가 이렇게 눈과 귀를 열어 놓는 것은 습관 때문이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문 대인의 비밀을 알게 된 후부터 본능적으로 길러진 것이다.
이런 습관은 그에게 닥칠 위험을 최대한 낮춰 주었다. 그러자 보통의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산길이 대낮처럼 분명하게 느껴졌다.
산바람이 점점 강해져 한 번 산을 스치고 지날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는 어서 이 숲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이렇게 깊은 숲속을 홀로 빠져 나오는 것은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립은 서둘러 숲의 가장자리로 빠져 나와 한숨을 쉬었다.
별안간 돌풍이 몰아 닥쳤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자 한립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눈썹을 찡그리며 귀를 기울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립은 어둠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지만, 커다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 앞을 지나간다 해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시각에 누구지? 이렇게 외진 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니.’
흔한 행동은 아니었다. 분명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이들임이 분명했다. 그들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고 대화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전해졌다.
“…하산하여… 준비해야 합니다. 시각이… 인물이… 방주(幫主)….”
산 위의 거센 바람이 말소리를 광풍 속으로 빨아들여 단지 일부분만이 한립의 귀에 전해졌다.
한립은 엄청난 비밀을 듣고 말았다. 이 일대 수백 리 밖에서 방주라 불리는 자는 아랑단의 방주인 금랑(金浪) 가천룡 뿐이었다.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주의 깊게 들어둬야 마땅한 일이었다. 칠현문 제자들에게 가천룡은 미친 마두(魔頭)였다.
그는 체격이 건강하고 아주 흉악하게 생겼는데, 하루 세끼를 전부 사람 고기를 먹고 사람의 피를 마신다고 하였다. 이런 그의 존재는 문파 내의 어린 제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를 본 적이 있는 려비우는 그가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결코 사람을 위협할 만한 장신은 아니며, 매우 마르고 수려한 외모를 가졌고, 겨우 서른 살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는 성정만은 소문 그대로여서, 아랑단 내에서도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외모로 마적 출신인 아랑단의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었겠는가.
한립이 가천룡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고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호흡 역시 더 천천히 느리게 쉬었다.
“…이번에… 명부를 훔쳐… 손을 써야….”
다시 한 번 숨죽인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전보다 또렷한 것이 한립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자신이 여기서 발각된다면 바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분명 아랑단이 보낸 간자들이었고, 절대 제3자가 자신들의 비밀을 알게 놔둘 생각이 없을 것이다.
“계획을 서둘러…….”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다시 작아지기 시작했다. 수풀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들은 이미 한립이 숨어 있는 수풀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고 그림자도 멀어졌다.
하지만 한립은 한참이 지나도록 나무 뒤에서 숨어 있었다. 장춘공을 이용해 그들이 멀리 갔음을 확인한 후에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행이 그들의 기척을 미리 감지해 겨우 생명을 부지했지만, 한립의 실력으로는 그들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나눈 대화를 추측해 볼 때 상대는 짧은 시일 내에 칠현문에 불리한 모종의 행위를 할 예정인 듯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명부와 관계가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나 모습을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둘 중 한 사람의 목소리는 그가 아는 인물이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그는 주방관사에서 일하는 일꾼이었다.
대화를 많이 나누지는 못했지만, 한립에게 토끼를 구해줬던 인물이 틀림없었다. 크게 놀랐지만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빈번하게 밖을 오가며 소식을 전해도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신수곡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문 대인은 한립이 오가는 것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좋은 약제를 보내주는 것 외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한립은 문 대인이 보내주는 진귀한 약제들이 눈에 차지 않았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삼켜버리고는 했다.
그는 돌아오는 내내 길에서 만난 첩자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했다.
자신이 비록 칠현문에 깊은 애착은 없었지만 반쯤은 내문제자였다.
그러니 칠현문을 해하려는 움직임을 알고도 상관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일을 해결할 인물도 미리 골라놓았다. 그는 바로 려비우였다.
한립이 보기엔 려비우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야심도 커서 항상 칠절당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 했다.
그러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겐, 엄청난 공로를 세울 좋은 기회였다. 이것으로 잡안검법을 얻게 해준 은혜에 보답하는 셈이었다.
잡안검법을 생각하자 한립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 잡안검법에 대해 려비우가 물었을 때 검법의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못했지만, 그곳에 기록된 내용들은 정말 보통의 무공들과 크게 달랐다.
한립이 보기엔 검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검의 기술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듯 했다.
그 검법은 천기, 지리, 인물 등의 다양한 요인을 모아 사람을 살해하는 비술(祕術)을 다루고 있었다. 정말 희귀한 검법서임이 틀림없었다.
검법는 풀과 나무 등 다양한 땅의 지형과 광선의 강약, 각도의 상이함 등을 이용해 적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일순간 적의 약점을 잡아 공격해 순식간에 상대를 찔러 죽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이것은 무척 정교한 기술로 뛰어난 오감과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야만 익힐 수 있었다. 만약 이 조건이 다였다면 누구나 이 검법의 위력을 탐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검법은 더 가혹한 수련 조건을 갖고 있었다.
바로 이 비기의 수련자는 내력에 정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힘을 발휘하고 정교한 기술을 행하는데 문제가 생겨 버린다.
만약 요행으로 이 관문을 통과했다 하더라도, 실제 싸울 때는 진기로 인해 움직임이 왕성해져, 검법이 뒤틀려 상대에게 수많은 허점을 내 보일 수 있었다.
이 조건만으로도 대부분의 수련자들은 이 검법을 익히려고 하지 않았다. 이 검법을 익히기 위해 지금까지 쌓은 내력을 포기한다면 엄청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이 천부적 자질이 있고 진기도 문제없다 하더라도 최후의 관문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검법이 너무 방대하고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려비우에게 받아온 책 보따리만 봐도 그랬다.
엄청난 양만 보더라도 보통 사람들은 겁을 먹고 도망갔을 것이다. 서책 한권에 한 가지의 검술을 다뤘는데 각 검술의 종류가 백여 개가 넘었다.
또한 각각의 초식이 다른 환경과 기후에 따라 발휘될 때마다 달라지는 부분까지 신경 써야 했다.
이상 기이한 조건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칠현문의 자제들이 이 검법을 익히기를 포기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칠현문의 대부분 사람들이 이 검법에 흥미를 잃어갔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아무도 찾지 않는 물건이 되었던 것이다.
이 검법을 창안한 장로는 본래 높은 내공의 소유자였다. 어느 날 강호에서 혈투에 휘말려 상대에게 내공을 전부 잃고 말았고, 그 후 어떤 방법으로도 내가진기를 수련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칠현문 내에서 위신이 떨어질까 두려워, 자신의 일을 함구했으며 무공에서 큰 업적을 이룬 척 행동해 문파 사람들의 눈을 속여 왔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발각돼지 않도록 외부에 몸을 드러내는 일을 줄였다. 장로는 자신의 내력을 회복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러나 포지하지 않고 그는 작은 문파들을 습격해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도 운용 가능한 무공 비법을 찾아내려 하였다.
그는 수년간의 많은 불가사의한 무공을 알게 되었지만 그에게 맞는 무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자신들이 모은 비급들을 살펴보다가 놀랍게도 자신만의 절기를 만들어냈다.
이런 생각을 했을 때는 그 자신조차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만의 무공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모든 무인들의 꿈이었다.
그는 모든 마음과 시간을 무공을 만들어 내는 것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속세의 일은 모두 뒤로 하고 폐관수련에 들어가 외부의 일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진기를 사용하지 않고, 온갖 비법을 포함하는 절기를 만드는 것은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일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는 반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잡안검법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기쁜 소식을 문파 내의 사람들에게 전하였을 때 칠현문은 크게 쇠락하고 있었다. 다른 크고 작은 문파들의 협공으로 멸문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이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만든 무공을 이용해 연이어 강적들을 처리하였고, 남아 있던 고수들을 이끌어 칠현문을 겹겹이 감싸고 있던 적들을 뚫어 활로(活路)를 마련하였다.
덕분에 칠현문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지만, 그의 몸은 한계에 이르렀고, 자신이 만든 검법을 전수하라는 유언만 남기고는 세상을 떠났다.
한립은 누가 이 검법을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는 이 검법이 자신을 지켜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 등불의 빛을 빌려 계속 서책들을 읽어나갔다.
그는 비상한 기억력을 이용해 통째로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하면 흔적을 남길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고 혹시나 비급을 수행한다는 사실이 세어나갈 위험도 없었다.
새벽이 다가왔지만 한립은 계속해서 이 검법 속으로 빠져 들었다. 기이한 기술들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립이 고개를 들자 창밖으로 눈부신 햇살이 비추었다.
한립은 서책을 모두 통달하였다. 밤새 사람을 해하는 기술을 연마했다니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듯 했다.
그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으니 순식간에 정신이 맑아졌다.
장춘공을 운용해 운기행공을 하자 하룻밤 쌓였던 피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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