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Degree RAW novel - Chapter 54
54화. 청안진인(靑顔眞人)
“대형이 수도계의 잡다한 사정을 물어보는 걸로 보아, 설마 막 하산하여 처음 길을 나서는 것입니까?”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기라도 한 듯, 소년이 돌연 눈을 굴리며 물어왔다. 이에 한립이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소형제를 속이려는 마음은 없었으나, 저도 수도계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염려가 되어 말을 아꼈습니다.”
“에이,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대형 이름은 알려주셔야죠? 앞으로 저는 그냥 소산이라 불러 주시고, 말도 편히 하셔요.”
“하하! 그래, 난 한립이라 하네. 수도계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소산 아우가 많이 좀 도와주게.”
한립도 만소산의 편한 태도에 호감이 생겨 말투에서도 친근함이 묻어났다.
“당연하죠. 한 형, 무엇이든 물어봐요! 헤헤! 이 만소산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쳐줄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물어볼 것이 있으면, 꼭 소산에게 물을게. 그런데 우리 어서 곡에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한립이 하늘을 가리키며 웃음 지었다.
“이런!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네요!”
만소산이 한립의 손을 따라 하늘색을 보더니 허둥지둥 거리기 시작했다. 소년이 몸을 뒤적거린 지 한참이 지나서야 품에서 부적을 꺼내 들었다. 그가 부적에 손짓으로 획을 그린 후, 낮은 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공중으로 날려버리자 부적이 한 줄기 빛으로 변해 운무를 뚫고 사라졌다.
“한 형, 잠시만 기다려요. 통음부(通音符)가 곡 내에 전해지면, 사람들이 진법을 풀어 우리를 들여보내 줄 거예요.”
“그렇군.”
소년이 간단히 설명을 하고는 다시 입을 떼었다.
“한 형, 태남곡에 왔으니 교환할 물건들은 가져 왔겠죠? 저는 초급 하계용 공백부(空白符) 한 묶음, 초급 하계용 은신부(隱身符), 둔지부(遯地符) 두 장씩, 초급 중계 연계뢰부 한 장, 초급 하계 빙탄부 한 묶음, 철모 한 덩이, 초급 주사(朱砂) 한 병, 요수 삼미묘(三尾猫)의 수염 한 다발, 약초…….”
만소산은 얼이 빠져 아무 말도 없는 한립을 발견하지 못하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한 무더기의 물건들을 늘어놓았다.
“이게 다예요. 이제 한 형이 말해 봐요! 어? 한 형,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해졌어요?”
소년이 눈을 깜빡이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한립을 바라보았다.
“설마 태남곡에 들어가려면, 꼭 그런 물건들을 가져가야 해?”
“그런 규정은 없지만…….”
만소산이 명쾌히 답하자, 일순 한립의 안색이 나아지려 했다.
“그래도 이왕 태남곡에 왔으면, 태남소회에 참가해야죠. 5년마다 단 한번 남주 청년들이 다양한 물건을 교환하는 성회인 걸요. 게다가 이번엔 승선대회(升仙大會)도 남주에서 열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거예요. 설마 한 형은 태남소회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것이 아닌가요?”
소년이 놀라 말도 안 된다는 눈빛으로 한립을 바라보자, 한립은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소산 형제, 난 여기서 태남소회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네. 그저 수도자가 기거한다는 것을 알고 교류하러 왔을 뿐이야. 그러니 어떻게 뭔가를 준비했겠어?”
“그랬군요! 진짜 아깝네요. 한 형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거잖아요. 자신에게 부족한 물건이나 재료를 구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인데.”
‘그래도 교환할 물건이 하나도 없진 않지. 적어도 부적 두 장은 있잖아? ’
한립이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그때 한립 앞에 돌연 농무가 사라지며 길이 나타났다.
“됐다! 우리 이제 가요.”
신이 난 소년이 먼저 길을 따라 나서자, 한립도 겨우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보기에는 길어 보였으나 잠시 후 길의 끝에 다다랐다. 길이 끝나자 눈앞이 순간 밝아지며 녹음이 푸르른 산골이 펼쳐졌다.
산곡의 삼면은 산으로 둘러서 쌓여 있었고, 유일한 출구는 한립이 방금 빠져 나온 농무가 덮인 산비탈이었다. 면적은 상당히 커서 거의 백 묘(畆)에 이르렀고, 중앙에 거대한 옥으로 만든 계단을 지나 궁전식의 누각이 있어, 다양한 복식을 한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리고 누각 앞, 빈 땅에는 벽돌이 박힌 널따란 광장이 있어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소상인처럼 노점을 만들어 물건을 팔고 있었다. 각 노점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물건을 구경하거나 몇 마디 묻는 것은 보였지만, 정말 거래가 성사되는 경우는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런 광경 앞에 한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 번에 이리 많은 수도자를 보니 얼떨떨할 뿐이었다.
한립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 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신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은 누구라도 손쉽게 자신을 없애버릴 실력자들이다. 반드시 경거망동을 삼가고 신중히 행동해야 했다.
한립은 고개를 돌려 사라져 버린 입구를 한 번 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막 몇 걸음을 떼었는데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요, 한 형!”
한립이 말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만소산이 청삼(靑衫)을 걸친 노인 곁에서 자신을 향해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만소산의 모습에 한립이 걸음을 재촉하며 다가섰다.
“이분께서 태남곡의 청안진인이십니다. 제 가부(家父)의 지기시고, 몇몇 다른 어르신들과 이번 태남소회를 공동으로 주최하셨어요.”
만소산은 한립이 가까이 오자, 노인의 정체를 밝히며 말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 청산을 걸친 진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노인은 키카 크고 말랐으며 넓은 어깨에 큰 손을 갖고 있었다. 입고 있는 청삼은 신선의 분위기가 났다. 다만 얼굴이 푸른색으로 얼룩덜룩해 조금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한 형이랑은 곡 외에서 만난 사이예요. 산수(散修)이지만 저랑 말이 아주 잘 통해요. 세백(世伯)께서 잘 좀 챙겨주세요.”
소년이 노인을 향해 이야기를 하자, 청안진인 역시 한립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린 친구가 목(木) 속성의 공법 수련을 잘했구나. 어린 나이에 이미 팔(八)성이라니, 이런 수준은 수도가문 내에서도 흔치 않지.”
진인의 칭찬에 한립이 속으로나마 쓴웃음을 지었다. 대량으로 영단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8성은 커녕 3성이나 4성 사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과찬이십니다, 청 어르신. 운이 좋았을 뿐인 걸요.”
청안진인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만소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아, 네 가문 사람들은 벌써 도착해서 널 기다리고 있다.”
“설마 일곱 번째 누나랑 아홉 번째 형도 온 건 아니죠? 두 사람의 잔소리가 제일 무서워요. 안 가면 안 될까요?”
청안진인의 말을 듣고 울상을 한 만소산이 약간의 희망을 갖고 물었다.
“네 생각에는 어떻겠느냐?”
“안 되겠죠?”
결국 만소산이 고개를 숙였다.
“쯧쯧. 감히 집안사람들을 속이고 몰래 도망치다니. 중간에 마음이 바르지 못한 수도자를 만났다면, 넌 이미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른다!”
소년을 꾸짖으며 청안진인이 슬쩍 한립을 곁눈질했다.
‘저 노인은 분명 내가 마음이 올바르지 못한 수도자라는 걸 알고 있구나. 내가 고의로 만소산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 겨우 마음에 드는 수도가문 도련님을 만났다 했더니, 잠시 떨어져 있어야겠군! 안 그랬다가는 이 청안진인이란 자에게 해코지를 당하겠어.’
이야기를 듣던 한립이 노인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만 형제가 가족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니, 난 이만 이곳을 돌아볼게. 다시 기회가 되면 이야기 나누자.”
어쩔 수 없이 한립이 포권을 하고는 만소산과 청안진인을 향해 인사를 했다.
“에이, 그렇게 급히 갈 것 없어요. 소개 시켜 줄 사람들이…….”
“이 친구는 따로 볼일이 있는 듯하니, 괜히 성가시게 굴지 말거라.”
만소산이 떠나려는 한립을 말리려 하자, 청안진인이 재빨리 그를 잡아채고는 말을 잘랐다. 그런 모습에 한립은, 그저 만소산을 향해 맑은 웃음을 보이고는 계속 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소년은 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처럼 청안진인의 뒤를 따라 천천히 누각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한립은 청안진인의 이런 대접에도 그다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자기 집안 아이에게 내력을 알 수 없는 벗이 생기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만소산 가문과 같은 수도계의 유명한 일족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한립은 정말 만소산에게 악의가 없었다. 그저 그의 도움을 받아 수도계의 사정을 파악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제 청안진인이 끼어들어 선을 그었으니, 눈치를 보아가며 행동할 때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광장에 다다랐다.
수도자들이 연 노점이 사방을 둘러싸고, 두 줄로 늘어서 전체적으로 회(回) 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물건을 구경하는 이들은 몇 사람씩 같이 다니며 노점을 둘러보았는데 속세의 시장과 비슷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광장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새로 노점들이 생기기도 하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더욱 많아져 광장 안이 북적거렸다. 한립은 광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곳을 드나드는 수도자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았다.
광장 내에 노점을 운영하는 이나, 물건을 사려고 돌아다니는 이들은 모두 열 몇 살 혹은 스물 몇 살 정도의 청년들뿐이었다. 삼십 세가 넘어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제야 만소산의 말이 떠오르며 이 태남소회는 5년에 한 번 열리는 아래 배분 인물들의 행사라는 설명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높은 수준의 수도자는 이곳에 없다는 것이다. 아까 만난 청안진인은 주최자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한립을 한결 편하게 해주었다. 연배가 높은 이들은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웠고, 자신을 쉽게 처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수도자들이 약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한립도 이들 중에서는 겨우 중간 정도인 데다가, 일전에 보았던 남의인과 같은 수준의 높은 수도자도 종종 눈에 띄었다.
* * *
“대형은 어찌 홀로 이곳에 서계시죠?”
갑작스레 청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립이 서서히 몸을 돌리니 멀지 않은 곳에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중 스물 예닐곱 정도로 보이는 도사 복장의 수도자가 말을 건 것이었다.
그는 얼굴이 아주 하얗고 이목구비가 뚜렷했으며, 팔에는 불진(拂塵)을 끼고는 한립을 향해 웃고 있었다.
“도장께서 무슨 일이신지요?”
상대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고, 한립이 표정 없는 얼굴로 반문했다.
“하하! 오해 마십시오. 우리는 무슨 악의를 갖고 대형을 찾은 것이 아니니까요. 그저 대형이 홀로 태남소회에 참가한 산수(散修)분이 아닌가, 추측했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 모두 산수이거든요.”
“당신들 모두가 산수란 말입니까?”
도장이 선의를 내보이자, 한립이 어리둥절해졌다.
“그래요. 당신도 산수라면 함께 하는 것이 어때요? 그렇게 하면 이번 소회에서 서로 얼굴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에요.”
이번에 말을 꺼낸 것은 흉터를 지닌 젊은 부인이었다. 옆에는 부부인 듯 보이는 수염 가득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렇습니다. 왕년에 홀로 이런 소회에 참여한 산수들은 세력이 없어, 종종 큰 가문의 일족에게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답니다.”
말을 맺는 도사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권하자 한립도 상대의 의도를 이해했다.
이번에 소회에 첨가한 산수들은 다른 이들의 괴롭힘을 피해, 자기들끼리 무리를 이룬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 같이 홀로 떨어져 다니는 산수에게 말을 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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