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97
* * *
“···여기까지다.”
이야기를 끝마친 칼트가 짧게 숨을 뱉었다.
잠깐의 침묵 후 라크가 입을 열었다.
“살아남았을 확률이 높다는 거군요.”
“그렇겠지. 정황상 살아있을 거라고 본다. 그리고 저번보다 더 강해졌을 것이고.”
“···이건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라크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마수의 왕은, 저와 칼트 님이 있는 곳에 다시 나타날 거란 생각이 듭니다. 재앙이며 짐승이지만, 그건 재결전을 바라는 검사이기도 하니까요.”
긍지를 아는 검사.
그런 존재라면, 아마도 분명···.
“끝맺지 못한 결투를 끝맺으러 저희를 노릴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곳이 어디든 간에.”
“마수의 왕에게 집착 당하고 싶진 않은데.”
칼트가 쓰게 웃었다.
라크의 추측에 칼트 또한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래도 부상을 회복하는 데까진 시간이 좀 걸릴 거다. 아무리 그래도 반신이 통째로 날아갔으니.”
칼트가 제 칼자루를 툭툭 두들겼다.
“그동안 조금이라도 더 성장해야 할 테고.”
“그래야지. 알케이아 섬멸전을 위해서라도.”
뒷말을 이어받은 것은 라니엘이다. 라니엘이 길게 숨을 뱉으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라니엘의 눈동자가 차게 가라앉았다.
“앞으로 6개월이다.”
6개월, 반년.
“반년 뒤면 마경의 심부에 있는 알케이아에 돌입하게 될 거고, 서류를 보냈듯이···.”
라니엘이 나티다와 라크를 바라봤다.
서류에 실어놓았던 두 사람의 역할. 그것을 떠올린 라크와 나티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의 역할이 중요하지.”
그리 말한 라니엘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마치 뭔가 아니꼽다는 듯 라크와 나티다를 흘겨보던 라니엘이 결국 입을 열었다.
“연애하는 거로 뭐라 할 생각은 없는데, 혹시나. 아주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 거다.”
라니엘이 눈을 부릅떴다.
“때와 장소를 가려라. 남들에게 아니꼬울 상황을 제공하지 마라. 그, 예를 들자면 천막에서···.”
“거기까지 합시다, 선배님.”
“아니, 말은 해놔야 할 거 아냐.”
“보통은 안 그럽니다. 보통은.”
라니엘이 구체적인 예시를 드려는 것을 칼트가 간신히 뜯어말리는 가운데, 이야기를 엿듣던 나티다가 쓰게 웃었다.
“명심할게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나티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모두 용사님 덕분이에요.”
교단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준 것. 갈 곳을 잃은 자신을 보호해준 것. 라크와 만나게 해준 것. 수많은 부분에서 나티다는 라니엘에게 빚을 졌고, 그것을 다만 빚으로 남겨둘 생각은 없었다.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티다가 미소 지었고, 라니엘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티다를 흘겨보다가 이내 쓰게 웃었다. 나티다의 표정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기에.
‘원래 저렇게 웃는 애가 아닌데.’
그래, 행복하면 된 거지.
라니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건전한 연애 해라.”
제발 내 앞에서 염장질은 하지 말고.
3.
전장에 위치한 잿빛 마탑의 제 4지부.
본래는 레스티가 종종 찾아와 관리하던 제 4지부에는 새로운 책임자가 찾아왔다. 잿빛 마탑주인 레스티 엘레노아와,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의 추천을 받고 들어온 정체 모를 인물.
갑작스레 나타난 인물에 마탑의 마법사들이 당황하기를 잠시, 그가 로브를 벗고 이름을 밝힌 순간 마법사들은 곱게 입을 닥칠 수밖에 없었다.
“반갑다. 나는 아르미엘이다.”
아르미엘. 잿빛의 초대 마탑주.
실종됐다고 알려진 마탑주가 수백 년 만에 후배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허언이라 여기는 이들이 있었으나, 카르디는 실적으로서 모든 걸 증명했다.
지금은 마법을 못 쓰게 됐다곤 하나, 한때는 대마법사라 불리던 인물이다. 그런 카르디가 지닌 마학적 지식은 여타 마법사들이 쌓아온 지식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짧은 대화와 증명.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애초에 용사와 잿빛 마탑주의 추천 덕분에 그 신원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잿빛 마탑의 4지부를 카르디가 휘어잡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고작 열흘 만에 마탑을 아주 휘어잡았네?”
“이 시대의 마탑주가 교육을 잘해놓은 덕분이다. 마탑은 이런 분위기여야 하지.”
“어떤 분위기?”
“실력지상주의. 모든 건 실적과 지식으로. 뛰어난 이가 있으면 신분과 출신에 개의치 않고 위로 올려라. 이게 내가 마탑을 지으면서 강조했던 것이었으니까.”
마탑을 찾아온 라니엘은, 최상층에서 차를 홀짝이며 연구를 진행하는 카르디를 흘겨보며 웃음을 흘렸다.
“소속된 마법사들도 움직임이 빠르고 말을 잘 알아듣더군. 그럭저럭 만족스럽다.”
“그건 다행이네.”
라니엘이 품에서 파손된 성배를 꺼내 들었다.
이를 회수하는 데 제법 많은 사고가 있었지만, 라니엘은 그것을 구태여 언급하진 않았다.
“회수해 왔다. 성배의 파편.”
계획의 마지막 조각.
그것을 바라본 카르디가 엷은 웃음을 흘렸다.
“고맙다.”
그리 웃으면서도 카르디는 한시도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회로도를 그리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최상층의 연구실은 어딜 둘러보아도 연구의 흔적밖에 보이지 않았다.
난잡하고, 발 디딜 틈도 없는 연구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생기가 느껴지는 장소였다. 지금의 카르디가 머무는 연구실을 바라보며 라니엘은 본래 카르디가 있던 낡은 가게를 떠올렸다. 구석진 골목길, 햇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은 곳에 놓여있던 가게.
그 가게에선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일선에서 물러선 이가 머무르는 곳.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서히 죽어가는 곳. 그곳에서 카르디는 하루하루를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라니엘. 네가 말한 대로다. 여기서 이걸 이런 식으로 연결하면···.”
카르디는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더는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향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라니엘은 무심코 웃었다.
“잘 됐네.”
다시 한 번 살아보기를, 나아가기를 결정한 고대의 마법사를 보며 라니엘은 웃었다. 웃으며 연구에 몰두하는 카르디의 어깨를 두들겼다.
“난 가볼게.”
“벌써?”
“너나 나나 할 일이 많으니까. 각자 할 일에 최선을 다 해야지.”
라니엘이 로브를 둘렀다.
지금 카르디가 입고 있는 로브와 닮은 로브가 바람에 펄럭였다. 펄럭이는 로브를 끌며 라니엘은 카르디와 다른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6개월의 시간.
누군가에겐 수백 년 동안 기다려온 날이, 누군가에게는 복수의 날이, 누군가에게는 맹세를 지킬 날이, 누군가에게는 스승에게 증명할 날이.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른다.
알케이아 섬멸전이 계획된 날을 향하여.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여름이 가고 가을로 접어들 무렵, 라니엘은 신문을 펼쳐보았다. 각지에서 보내오는 전장의 소식을 확인했다. 이제는 자신의 이름보다 다른 이름이 더 자주 보이게 됐는데, 그 사실에 라니엘은 만족스레 웃었다.
용의 후예, 벨노아 반 드라고닉.
격류(激流), 클로에.
단 둘로 이루어진 군단.
두 사람은 극히 소수의 인원만을 데리고 움직이며 각 전장에서 유격대로 활동했다. 과거 카일과 라니엘을 중심으로 한 부대가 그랬듯이, 둘은 용사의 역할을 훌륭히 이행해내고 있었다.
마왕군이 그 두 사람을 가리켜 부르는 이름을 보며 라니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검은 악몽, 벨노아.”
검은 폭풍을 끌고 다니는 초인.
용(龍)과 관련된 마수라면 모조리 벨노아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악명 높은 와이번 부대는 벨노아의 존재로 인해 가치를 상실했으며, 제공권을 빼앗긴 마왕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마녀, 클로에.”
상식에 구애받지 않는 마법사.
동격의 주문, 혹은 더 상위의 주문으로 상쇄하려 하나 상성의 주문마저 모조리 힘으로 짓눌러 버리기에 붙여진 이름이 마녀.
그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전장은 빠르게 확대됐다. 라니엘이 앞장서 걷고 있지만, 그 둘은 이미 라니엘의 바로 뒤까지 쫓아오고 있었으므로.
만족스레 웃으며, 라니엘은 신문을 접었다.
따라오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라니엘은 다시 앞으로 걷는다. 그들보다 한 발짝 앞선 곳에서 걷기 위해.
···그렇게 시간은 또다시 흐른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온다.
땅에 떨어진 낙엽이 바스러져 사라지곤, 그 위로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살을 에는 추위가 찾아오는 겨울날에 라니엘은 다시금 신문을 펼쳤다.
클로에와 벨노아의 활약상.
레스티를 주축으로 한 잿빛 마도사들의 활약.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쓰여 있는 것은 몇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영웅의 이름이다. 새롭게 대두된 영웅의 이름을 라니엘은 확인했다.
격멸, 라크 반 그레이스.
격멸(擊滅)이란 섬뜩한 이름에 어울리게도 라크가 근 몇 달간 이루어낸 업적은 과격하기 짝이 없었다. 크렘펠리아를 탈환하고자 밀려드는 마왕군을 상대로 단신으로 출정. 군세를 섬멸하고 상처 하나 없이 귀환.
이후 크렘펠리아 인근에 자리 잡은 마왕군의 본거지까지 성녀만을 대동한 채 급습. 하룻밤 만에 마왕군에게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혀···.
쏟아지는 글귀들은 모조리 라크가 이루어낸 과격하기 짝이 없는 업적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라니엘은 웃음을 흘렸다. 이제 더는 라크는 수호자라 불리지 않았다. 라크가 무언가를 지키는 방법은, 방어가 아닌 공격이었기에.
격멸(擊滅). 쳐서 멸한다.
라크는 언제나 가장 선두에 서서 출정했고 상처 하나 없이 생환했다. 그 모습을 보며 라크와 함께하는 기사들은 라크를 승리의 상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과거 어느 용사를 그렇게 불렀듯이.
“성장했네.”
라니엘은 미소 지었다.
라크 반 그레이스. 벨노아 반 드라고닉. 클로에. 레스티 엘레노아. 자신이 길러 낸 아이들의 활약상은 과거 존재했던 용사들과 비교해도 더는 꿇리지 않는다.
···세간은 지금을 가리켜, 인류의 황금기라 부른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마(魔)와의 투쟁이 이어진 가운데, 인류가 이렇게까지 마의 군세를 압도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몇 차례고 재앙을 격퇴하고, 재앙을 토벌했으며, 하물며 마왕에게까지 상처를 새겼다.
그렇기에 지금이 기회다.
지금이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시간이다.
세간이, 민중이, 역사가들이, 기사들이, 지휘관들이 입을 모아 부르짖었다. 영웅들의 이름을. 이 시대를 견인하는 용사의 이름을. 라니아 반 트리아스의 이름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신문을 접어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이 아니면 끝낼 기회는 없겠지.”
천막을 걷어내고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지난 수개월 동안 라니엘은 공격적으로 전선을 확장했고, 기어코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마경의 심부. 라니엘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붉은 달이 떠오른 하늘.
붉은 하늘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새하얗지만은 않다. 마기에 닿은 눈은 검고 붉게 물들었다. 검붉은 눈이 비처럼 내리는 가운데 라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앞을 바라봤다. 절벽 아래로 보이는 것은 드넓게 펼쳐진 숲.
그 숲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있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한 거대한 구멍.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수직굴.
심연으로 향하는 통로와도 같은 그 수직굴에 붙여진 이름을 라니엘은 소리 내 발음했다.
“신앙하지 않는 이를 위한 땅.”
모든 구정물이 향하는 곳, 알케이아.
인류는 어느덧 심연 앞에 도착했다.
어느덧, 6개월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2.
약속된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알케이아 섬멸전이 열흘 앞까지 다가온 가운데, 각 전선을 담당하던 주요 전력들이 한 장소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현세대에선 가장 오래된 용사요, 동부 전선의 총책임자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하기야, 워낙에 얼굴 보기가 힘든 분이시니 뭐.”
비굴의 데스텔.
이제는 현세대를 기준으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용사가 된 그가 털썩, 하고 라니엘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기어코 여기까지 확장했구만.”
“말했잖아. 반년 안에는 여기까지 올 거라고.”
“말이 쉽지, 말이.”
데스텔이 쓰게 웃으며 앞을 바라봤다.
제 앞에 앉아있는 것은 현재 인류 최대의 전력이라 불리는 라니아 반 트리아스요, 그 정체는 잿빛 마법사 라니엘이다.
말도 안 되는 무력을 지닌 존재.
옛날부터 상식을 벗어난 녀석이긴 했지만, 이제는 그때와 비할 바가 못 된다. 신위에 도전하는 마법사라 불리고 있는 마당이지 않은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지만···.’
훨씬 먼 곳에 있지만···.
“계획은 순조롭냐?”
“순조롭긴. 죽을 맛인데?”
라니엘이 한숨을 내뱉으며 서류를 탁, 내려두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피곤한 기색이 여력했다. 그 모습을 보며 데스텔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때보다 훨씬 먼 곳에 있긴 했지만, 그때만큼 거리가 멀게 느껴지진 않는다. 제 앞에 앉아있는 건 특별한 존재가 아닌 자신과 같은 인간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아서 좀 일찍 왔다. 손이나 좀 거들려고.”
사무쪽으로는 잔뼈가 굵은 데스텔이다.
장식으로 동부 전선의 총책임자로 수년을 보낸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데스텔이 서류를 한 뭉치 가져가 확인하고 있자니, 라니엘이 문득 입을 열었다.
“작전에 참가하겠다고 한 거, 후회 안 해?”
알케이아 섬멸전에 대한 이야기다.
한참 전 이 작전을 데스텔에게 전달하며 라니엘은 확실하게 경고했다. 작전의 위험성에 대해. 그리고, 원한다면 이 작전에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첨언했다.
「작전이 시작되면, 인류의 모든 전력이 한군데에 집중될 거야. 그러니 당연히 빈틈이 생기겠지. 이건 마왕군의 입장에선 기회가 될 거고.」
그러니 그 빈틈을 채우는 역할을 맡아도 된다.
라니엘은 그렇게 말했었다. 목숨을 걸고 싶지 않다면 작전에서 빠져도 된다고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제안에 데스텔은···.
“후회하지. 후회하는데.”
이렇게 답했었다.
“여기서 빠지면 더 후회할 것 같으니까.”
그때와 같은 대답.
라니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는 과거 데스텔의 질문에 자신이 들려주었던 대답이었으니까. 그렇게 라니엘이 웃음을 흘리고 있자니 데스텔이 탁, 하고 테이블에 서류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야, 내가 요즘 뭔 소리 듣는 줄 아냐?”
데스텔이 조금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차세대 용사들은 모조리 영웅담을 남겼는데, 내가 남길 건 비굴이란 이름밖에 없다고 누가 그러더라. 아니, 비교 대상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그가 손가락을 하나 펼치며 말했다.
“갈라할 그 자식은 단신으로 배교자를 토벌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차세대 용사를 구해냈다는 업적을 세웠지. 게다가 가장 용사다운 용사라는 명예까지 더해져 그놈 이야기로 나온 동화만 해도 수십 권이야.”
하나 더.
“거기에 카일 그놈은 또 뭐냐? 흑룡의 목을 떨궜지. 거기에 죽음의 칼한테 상처도 입혔어. 어디 그뿐이냐? 마왕도 한번 반으로 싹 갈라줬다며.”
두개의 손가락을 내보이며 데스텔이 말했다.
“그놈들이 말도 안 되는 거지, 내가 막 그렇게 못난 건 아니지 않냐···?”
세상이 나를 억지로 깎아내리는 기분이다.
그리 중얼거리는 데스텔을 쳐다보며 라니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렇게 말을 하고 있긴 하지만, 저게 반쯤 농담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인식을 고칠 수 있음에도.
데스텔은 구태여 오해를 고치고자 하지 않았다.
자신에겐 그 정도 위치가 딱 적당하다는 것처럼.
결정적인 때가 오면 겁에 질려 도망치고 말 자신에게, 세간에서 너무 많은 기대를 걸면 안 된다고 데스텔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라니엘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 두 놈이 말이 안 되는 거니까.”
“제일 말이 안 되는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까 더 초라해지는 기분인데.”
툴툴거리면서도 데스텔은 서류를 확인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멈칫, 하고 서류를 넘기던 데스텔의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었다.
“작전서를 읽어서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말야···.”
데스텔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진짜 괜찮겠냐?”
데스텔이 들어 올린 서류.
그 서류에는 어느 초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검귀(劍鬼), 드라카.」
종속 계약에 묶여있는 초인.
통제되지 않는 초인에게 과거 라니엘은 목줄을 채워 놓았었다. 드라카 스스로가 원해 맺은 종속계약. 그 계약에 따라 드라카는 자아를 빼앗겼다.
별에 의해 빼앗긴 자아.
섭리에 의해 봉인된 자아.
본래대로라면 드라카가 그것을 돌려받을 수단은 없다. 종속 계약이란 본디 그런 것이었으니. 하지만, 라니엘은 그 계약을 느슨하게 만들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정말 목줄을 풀어줄 생각이야?”
데스텔이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로 드라카의 목줄을 풀어줄 생각이냐고.
“완전히 풀지는 못하고.”
라니엘이 제 목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어느 정도 자아를 돌려주는 데 그치겠지.”
데스텔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라니엘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면 통제하고 말고는 별 의미가 없어. 여기야말로 검귀가 가장 원했을 무대이니까.”
배교자 토벌.
그것은 드라카의 염원이기도 했다. 그 하나의 소망을 위해 드라카는 제 삶을 깎아왔으니.
“그리고···.”
라니엘이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천막에 가려 보이지 않는 하늘. 하지만 라니엘은 그보다 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하늘 위에 떠있을 별. 그 별이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최초의 인도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에 대해서.
“혹시 모르잖냐.”
복수귀. 복수를 바라왔던 인간.
“변수라도 만들어낼지.”
3.
두번째로 도착한 것은 칼트였다.
칼트는 북부에서 드라카를 회수한 뒤, 드라카와 함께 전장에 도착했다. 마차의 문을 여는 순간 풍겨오는 것은 짙은 피비린내.
터벅.
피의 향을 끌며 드라카는 걸음을 옮겼다.
실이 끊어진 인형과도 같은 모습. 명령에 따라 막사로 들어가기 직전, 드라카가 걸음을 멈췄다. 드라카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지평선의 너머.
우거진 숲의 한가운데에 뚫린 거대한 수직굴이다. 수직굴을 바라보는 순간 드라카의 눈동자가 잠시나마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길지 않았다. 본래대로 돌아온 드라카는 막사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막사의 안에 들어선 순간이다.
드라카는 고개를 들었다.
퀭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것은 막사의 안에 홀로 앉아있는 인간. 라니아 반 트리아스가 드라카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계약의 주인.
그녀가 망가진 인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 * *
목적을 위해서라면 인간은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 얼마든지 끔찍해질 수 있다. 드라카는 그 누구보다도 그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드라카 본인의 삶이 그랬으므로.
잃고, 잃고, 잃고, 또 잃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머지 더는 잃을 게 없어진 드라카는 핏물로 물든 길을 걸었다. 자신의 복수만을 위해 살았다. 복수만이 살아갈 이유였으므로.
피로 물든 길. 비뚤어지고 잘못된 길.
그 길의 끝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드라카는 안다.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멸이다. 언제나 파멸을 보고 드라카는 달려왔다. 그리고, 파멸은 드라카의 예상보다 더욱 빨리 다가왔다. 헛된 희망을 품은 탓이었으리라.
딸 아이의 얼굴을 다시 보고자 했지만.
세상은 드라카에게 기적을 허락하지 않았다.
희망을 빼앗긴 순간 드라카의 길은 무너졌다. 가장 끔찍했던 순간을 다시 맞이하게 된 순간 드라카의 정신은 바스러졌다. 그렇게 바스러진 자아는 영혼의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자아를 빼앗긴 채 드라카는 검을 휘둘렀다.
인형이 된 채 숱한 전장에서 검을 휘둘렀다. 쉴 새 없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서.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지금, 드라카는 최전선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자신이 잃어버린 목적이 있었다.
“드라카.”
누군가 드라카를 불렀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드라카의 영혼이 출렁였다. 그 목소리가 드라카에게 물었다. 네 목적이 무엇이냐고.
바스러진 영혼에도 목적은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드라카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이자, 드라카가 걸어온 길에 붙여진 이름이었으므로. 자아가 무너졌다 한들 드라카는 그를 잊지 않았다.
“바라는 것은···.”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인형의 목소리.
그러나, 그런 드라카의 목소리에 잠시나마 열기가 깃들었다. 오랜 세월 동안 식지 않은 열기가, 아직 타들어 가기를 망각하지 않은 심지가 거세게 타올랐다.
“복수.”
망가진 삶. 망가진 검. 망가진 길.
부러진 칼날이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내 모든 것을 앗아간 이에게, 복수를.”
복수를 위해 살아갔던 인간은 더는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기적을 바라지도 않는다. 바라는 것은 복수. 그것이면 족하다.
끈적하게 늘어지는 살기.
무심코 숨을 헛삼킨 라니엘이, 잠깐의 침묵 후 하늘로 향했던 손가락을 비스듬히 휘둘렀다. 손가락이 닿은 순간 드라카를 옭아매던 계약이 다시 쓰였다.
드라카는 계약에서 자유로워지진 못했다.
라니엘이 만들어낸 것은 작은 틈새에 불과하다.
그 틈새 사이로 새어나오는 끈적하게 늘어지는 살기다. 라니엘이 문득 드라카의 눈동자를 보았다. 초점이 잡히지 않던 눈동자가, 지금은 시뻘겋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핏발이 선 눈동자는 마치 짐승의 것과도 같았다.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를 필두로 인류가 지닌 모든 전력이 투입되는 대규모 작전.
알케이아 섬멸전.
그렇게 이름 붙여진 이 작전의 목표는 배교자가 거하는 수직굴 알케이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섬멸하는 것이요, 그곳의 주인인 배교자의 토벌이다.
이는 인류의 염원이자 숙원이기도 하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이가 배교자에 의해 고통받았던가. 얼마나 많은 이의 긍지가 짓밟히고, 그들의 삶이 모욕당했던가. 죽음의 안식조차 얻지 못한 채 괴물의 일부가 되어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이들은 또 얼마나 많던가.
배교자(背敎者), 글레투스.
하늘의 가르침을 어긴 이단자.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역사에 악몽으로서 자리 잡은 재앙 중 하나를 토벌한다. 이는 흑룡, 벨리알을 토벌한 ‘베르타 협곡 섬멸전’ 이후 처음으로 시행되는 재앙의 토벌전이다.
“남김없이.”
재앙의 흔적을, 재앙이 살아왔던 역사를.
“이 땅에서 모조리.”
그 모든 것을.
“몰아내리라.”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는 서신을 보낸다.
서신에 적혀야 할 글귀를 그녀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화려한 문장도, 사기를 고양시키는 글귀도, 길고 긴 미사여구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한 줄의 문장만을 편지에 새겼다.
『집결하라.』
-라니아 반 트리아스.
* * *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집결하라.』
편지를 펼쳐보면, 보이는 것이라곤 짧게 쓰인 한 문장뿐이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길게 말하지 않는다. 어째서 집결해야 하는지, 집결해서 무엇을 하는지, 그 어느 것도 적어두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을 테니.
이 날,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이들에게 긴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집결하라는 짧은 명령뿐. 편지에 적힌 것은 한 줄의 문장뿐이지만, 편지의 새하얀 공백을 채우는 것은 ‘라니아 반 트리아스’라는 존재가 지닌 명성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으로 이야기했다.
자신의 이름 아래 모이라고 명했다.
편지를 읽으며 켈르할름은 웃음을 흘렸다.
마지막으로 제 옛고향, 학원도시 아르티아에 들른 켈르할름은 묘비 앞에서 맹세를 다졌다. 감았던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걷기 시작할 무렵, 켈르할름은 더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집결한다.
모여든다.
그녀에게 빚을 진 사람이, 그녀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이, 그녀 덕분에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었던 이가, 수많은 이들이 전장으로 집결한다.
『집결하라.』
불사(不死)의 카리옷은 십자가의 검을 짊어지고 전장으로 향한다. 자신의 마음에 품은 신(神)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카리옷은 십자가를 들어 올렸다.
검성(劍聖)의 이명을 물려받은 검의 초인, 칼트는 제 스승이 남긴 검을 허리춤에 찬 채 전장으로 향한다. 자신의 선배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긍지를 더럽혀진 제 스승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자신이 걸어온 검의 길을 증명하기 위해서 칼트는 검을 들었다.
검귀(劍鬼) 드라카는 제 삶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전장으로 향한다. 비뚤어진 길. 망가진 삶. 그럼에도 그는 결코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손가락질받고 비난받을지라도 드라카는 자신의 종착지를 향해 걷는다.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재앙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드라카는 부러진 칼을 들어 올렸다.
광인(狂人) 켈르할름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장으로 향한다. 밀려드는 광기에 저항하며 살아온 백 년의 삶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맺은 약속을 망각하지 않았다. 그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날 더럽혀졌던 아이들의 긍지를 되찾기 위해 켈르할름은 회로를 새겼다.
신궁(神弓) 레미아는 스스로에게 떳떳해지기 위해 전장으로 향한다. 빛나는 이들을 동경하고 질투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빛나기 위해 그녀는 활시위를 당겼다.
비굴(卑屈) 데스텔은 더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전장으로 향한다. 두렵다. 너무나도 두려우나 자신보다 어린 후배들마저 전장에 서는 지금마저 도망칠 수는 없다. 한번 정도는 영웅이 되기 위해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 데스텔은 성의(星衣)를 어깨에 둘렀다.
일찍히 이전 세대를 책임지던 초인들이, 용사가, 강자들이 전장으로 모여든다. 그들은 무언갈 잃음으로써 깨달은 이들이요, 앞장서 걸었던 선배들이다.
그들은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자신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자신들이 걸어온 길에 무언가 의미가 있음을 바라면서.
『집결하라.』
그들의 뒤를 따르는 것은 이번 시대의 영웅들이다.
잿빛 마녀, 레스티 엘레노아.
격멸, 라크 반 그레이스.
성녀, 나티다.
용의 후예, 벨노아 반 드라고닉.
격류, 클로에.
때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때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시련을 건너온 이들. 이 시대를 견인할 이들이 선배들의 곁에 섰다. 성장하고 성장해 같은 무대에 서서, 이제는 같은 경치를 볼 수 있게 된 아이들이다.
그리고.
모여든 이들의 시선은 단상의 위를 향한다. 그곳을 향해 누군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또각, 하는 걸음 소리.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잿빛 머리칼.
라니아 반 트리아스.
이들을 이 자리에 집결시킨 용사가 단상에 섰다.
2.
모든 준비는 끝났다.
수년 간 준비해왔던 계획의 결실을 맺을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내뱉은 숨결에 새하얗게 김이 서렸다.
쏟아지는 눈싸락.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최전선으로 하나둘 모여드는 이들. 나와 같은 전장에 섰고, 등을 맞대고 싸웠던 이들. 달리 말하자면 나의 동료였으며 같은 꿈을 꾸는 몽상가였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재앙이란 강대한 존재여서, 닿을 수 없는 존재여서, 고개를 들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상식에서 벗어난 나머지 그 어떠한 무기로도 인류는 재앙에게 상처 하나 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재앙은 재해와도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그것을 토벌한다는 상상을 감히 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는 비굴해졌다. 무릎을 꿇고 재앙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베르타 협곡 섬멸전.”
하지만.
“수백 년을 군림하던 악룡의 목을 떨어트렸던 그날을 기억하는가?”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용사가 흑룡의 목을 벤 그날 인류는 환희했다. 그날부터 우리는 하나의 꿈을 꾸었다. 모든 재앙을 쓰러트리고 마왕의 목에 칼을 겨누는 꿈을.”
나는 말했다.
“누군가는 그 꿈을 몽상이라 말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 말했다. 하지만 어떠한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특별한 강자들뿐만이 아니다. 특별한 힘도, 신기에 가까운 기술도, 별과 관련된 어느 축복도 받지 못했지만··· 하루하루를 버텨왔던 기사들 또한 이곳에 있다.
“흑룡은 목이 잘려 죽었다. 배교자는 심장이 꿰뚫린 채 제 공방에 숨어들었다. 그 죽음의 칼마저 피를 흘리지 않던가? 마왕은 용사의 칼에 의해 갈라지지 않았던가.”
이곳에 있지 않더라도, 먼 곳에서 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이들이 있다. 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기록한 신문을 읽을 이들이 있었다. 전보로 나의 말을 전해 들을 병사들이 있었다.
“재앙이란 더는 상대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더는 재해가 아니다.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다.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이들.
나를 위해 피를 흘렸을 이들.
나를 보고 있을 그들을 향해 나는 말했다.
“보아라. 우리는 이 자리에 도착했다. 마경의 심처에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선 채 우리는 재앙의 둥지를 바라보고 있다.”
내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심연의 끝.
글레투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보아라. 나는 여전히 몽상가인가? 여전히, 나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는가? 인류의 칼날은 여전히 재앙에게 닿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리라.”
“더는 몽상이 아님을 나는 증명하리라.”
콱, 하고 알케이아를 가리키던 손을 내가 움켜쥐었다. 움켜쥔 손가락에서 별빛이 새어나왔다.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수백 년의 역사가 있었다. 모욕당한 그들의 삶을, 바스러진 그들의 생명을, 잃어버린 역사를 우리는 되찾아야만 하리라. 그것이 피로 물든 길을 걷는 우리의 역할이자···.”
백금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별빛이 마경에 드리운 어둠을 한 줌 걷어냈다. 해는 뜨지 않았지만, 이곳에는 그보다 더 찬란한 별빛이 있었다.
“용사인 나의 역할이리라.”
별빛을 끌며 내가 말했다.
“우리는 오늘, 재앙을 토벌한다.”
알케이아 섬멸전.
“배교자, 글레투스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섬멸하리라. 재앙이 존재했다는 흔적마저 모조리 불사르리라. 그것은 죽어간 이들에 대한 추모이자, 재앙을 향한 인류의 복수가 되리라.”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쿵, 하고 내디딘 한 걸음.
“알케이아 섬멸전은,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전쟁을 마무리 지을 첫걸음이 될 것이다.”
내가 나의 이름 아래 모여든 이들을 보았다.
그들과 시선을 마주한 채 내가 미소 지었다.
“가자.”
가야할 곳은 한군데뿐이었다.
“우리의 전장으로.”
3.
용사의 연설 아래 기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이 쿵, 하고 내디딘 걸음에 땅이 울렸다. 그들은 알케이아 섬멸전에 참가하진 않지만, 영웅들이 다시 돌아올 순간까지 전장을 지키고 있으리라.
영웅이란 특별하고 높은 존재가 아니다.
그저 인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이일 뿐이다.
기사들의 경례 아래 영웅들은 마경의 심처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모든 구정물이 향하는 곳. 신앙하지 않는 이를 위한 땅, 알케이아를 향해 영웅들은 걸음을 옮긴다.
검성(劍聖), 칼트.
불사(不死), 카리옷.
검귀(劍鬼), 드라카.
광인(狂人), 켈르할름.
구세대와 현세대의 초인이.
용사, 데스텔.
신궁, 레미아.
이전 세대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전장에 선 용사와 용사의 동료가.
격멸, 라크 반 그레이스.
성녀, 나티다.
용의 후예, 벨노아 반 드라고닉.
격류, 클로에.
재의 마녀, 레스티 엘레노아.
지금의 시대를 견인하는 새로운 영웅들이.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들 모두를 한 자리에 집결시킨, 인류가 지닌 최강의 전력이 심연을 향해 나아간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기사들은 경의를 담아 고개를 숙인다. 그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기사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이 또한 있는 법이다. 선두에 서서 걸음을 옮기던 라니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준비는 됐어?”
그 목소리에 누군가 답했다.
“물론이다.”
라니아의 곁에 서 있던 인물이 로브를 벗었다. 위장이 벗겨지며 드러난 것은 잿빛의 머리칼. 평소와 같은 은발이 아닌, 짙은 잿빛의 머리칼을 나부끼는 엘프가 엷은 웃음을 흘렸다.
“이날, 이 순간만을 수백 년 동안 기다려왔다. 준비가 안 됐을 리가 없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영웅.
역사에서 잊힌, 고대의 영웅.
“네 말대로다.”
대현자, 카르디 반 아르미엘.
“나 또한 오늘 증명하게 되겠지.”
다시 걷기를 결심한 구세대의 영웅이 미소 지었다.
“내가 꾸었던 꿈이, 다만 몽상이 아니었음을.”
라니아 반 트리아스와 같은 위치에 서서 그는 걸음을 옮겼다. 똑같은 속도로, 똑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이곳에 있는 모두가 같은 곳을 보았다.
심연의 끝.
재앙이 있는 곳을.
알케이아 섬멸전의 개시로부터 3일 전.
“일찍이 언급했듯이 알케이아로 들어가는 길은 두 군데야. 하나는 수직굴. 다른 하나는 비탈길.”
섬멸전에 투입될 인원을 한 자리에 모은 채 라니엘은 작전을 복기했다. 그녀가 검지와 중지를 쫙 펼친 채, 다른 한 손으론 펼친 검지를 툭툭 두들겼다.
“숲의 중심에 있는 수직굴. 이 수직굴의 벽면을 지키고 있는 갑각룡이 다섯 마리. 오차를 감안하면 대략 여섯 마리 정도 될 테고···.”
다음으론 중지를 건드렸다.
“비탈길에 있는 갑각룡이 일곱 마리 정도 되겠지. 물론, 이것들의 완성도는 본래 우리가 알고 있던 갑각룡과는 달라. 수백 년의 세월에 거쳐 깎아낸 걸작이 아닌 급조해낸 마수들일 테니까.”
그럼에도 갑각룡의 위험을 무시할 수는 없다.
심연의 끝인 알케이아에는 특수한 기류가 흘렀고, 그 기류를 활용해 배교자는 자신의 사역마들을 강화하고 있었으니까.
“작전의 첫 번째 고비는 이 갑각룡을 돌파하는 게 되겠지만, 그건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거다.”
하지만 라니엘은 단언했다.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거라고. 라니엘이 알케이아의 구조를 붙여둔 벽을 손등으로 툭툭 건드렸다.
“칼트, 드라카, 카리옷, 라크, 벨노아.”
근접전에 특화된 다섯 명의 초인.
“켈르할름, 레스티, 클로에, 나티다.”
지원사격과 보조에 특화된 마법사와 성녀.
그리고···.
“데스텔.”
그들을 지휘할 이 작전의 보조 지휘관까지.
이만한 인원이 모였다면 갑각룡 대여섯 마리 정도는 능히 뚫어낼 수 있으리라. 그리 판단한 라니엘은 짝하고 박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방금 호명한 너희가 진입할 곳은 수직굴이다. 수직굴의 입구에서 신호를 기다려.”
작전 인원의 태반이 수직굴로 진입한다.
그렇다면, 비탈길로 진입하는 건 누구인가.
“비탈길로 진입하는 건 레미아와 나, 이렇게 둘이다.”
신궁, 레미아.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
단 둘이서 일곱의 갑각룡을 상대하겠노라 그녀는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라니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비탈길로 진입하기 직전, 하늘을 향해 신호탄을 쏠 거다. 하늘에 빛 무리가 보이면···.”
까딱, 하고.
라니엘이 손가락을 아래로 휘둘렀다.
“데스텔의 지휘하에 진입해.”
그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진입해서.”
아래로 휘두른 손가락. 아래를 향한 손. 그 손을 콱, 하고 라니엘이 주먹을 쥐듯이 움켜쥐었다.
“모조리 갈아버려.”
2.
뒤틀리고 망가진 숲.
알케이아와 맞닿아있는 숲에는 제대로 된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은 마경의 주민들조차 꺼리는 곳이니. 이곳에 있는 것이라곤 배교자가 빚어낸 뒤틀린 사역마들뿐이다.
그륵, 그르륵.
숲을 배회하는 사역마들.
시체 수확자를 비롯한 온갖 사역마들이 무심코 제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하늘에서 내리는 검붉은 눈.
그리고.
그것들 사이로 회색의 잿가루가 내리고 있었다.
* * *
쐐엑, 콱!
뒤틀린 나뭇가지들을 밟고 도약하며 레미아가 화살을 쏘았다. 화살 끝에 이어진 강선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길을 이었다. 강선을 밟고 달리며 레미아는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댔다.
강선에 새겨진 것은 라니엘의 회로.
강선이 달린 화살을 연달아 쏘아대며 레미아는 숲 전체에 그물을 쳤다.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는 강선이 숲을 한 바퀴 에워싸기 시작한다. 충분히 그물이 촘촘해졌을 때, 레미아는 마지막 한 발을 쏘았다.
콱.
사선으로 쏘아진 화살이 틀어박힌 곳은 비탈길의 초입이다. 비스듬히 이어진 강선을 타고 레미아가 비탈길의 초입에 착지했다.
“라니엘.”
레미아가 착지한 곳에는 이미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용사의 정복을 펄럭이며, 장갑을 쭉 끌어당기고 있는 라니엘. 레미아의 부름에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준비는 끝났어.”
“수고했다.”
라니엘이 짧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앞을 향했다. 지하 깊은 곳까지 이어진 비탈길. 어둠에 삼켜져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쏴.”
짧은 한마디.
레미아는 곧장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활시위를 쫙 잡아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에 매겨진 화살촉이 향하는 것은 하늘.
퉁.
레미아가 활시위를 놓았다.
월광(月光)을 끌며 달빛 화살이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치솟았다. 찌르르, 하고 빛의 꼬리를 물며 쏘아진 화살. 그 화살이 충분한 높이에 도달한 순간 폭발했다.
폭발하며 쏟아지는 것은 은은한 달빛.
달빛 화살이 폭발하며 은백색의 섬광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어둠에 잠긴 마경이기에 달빛 화살이 내뿜는 은은한 빛은 더욱 돋보인다.
신호탄은 쏘아졌다.
이는 아군에게만 알리는 신호가 아니다.
숲 속을 배회하던 마수들이 기척에 반응해 몰려들기 시작한다. 숲에서 쿵, 쿠웅 하는 시끄러운 발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그녀가 발을 들어 올렸다.
“알케이아 섬멸전을 시작한다.”
내디딘 발을 쿵, 하고 라니엘이 내려찍었다.
그녀가 짓밟은 것은 지면에 박힌 레미아의 화살이요, 화살 끝에 연결된 강선이다. 자신의 회로를 새겨넣은 강선을 밟은 채 라니엘이 눈을 감았다.
한 번의 호흡, 한 번의 눈 깜빡임.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그녀의 몸 위로 피어오르는 것은 막대한 마나다. 억누르고 있던 마나가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숨기고 있던 기척이, 재앙에 필적하는 존재감이 숲을 무겁게 짓눌렀다.
구웅, 하고 일대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거대한 존재의 등장에 숲이 더욱 소란스러워진다. 침입자를 배제하기 위해, 명백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배교자가 풀어놓은 마수들이 모조리 라니엘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숲이 흔들리며 마수들이 튀어나오려는 순간이다.
틱, 하고.
불똥이 튀어 올랐다.
라니엘이 밟고 있던 강선. 강선에 새겨진 회로가 치이이이이이이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작전 개시."
숲을 에워싼 그물. 그물에 새겨진 회로. 숲에 흩뿌려진 잿가루. 작은 불씨만을 기다리던 도화선에 불이 옮겨붙었다. 레미아가 귀를 틀어막고 몸을 웅크린 순간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숲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3.
수직굴의 앞, 기척을 죽인 채 숨어있던 이들은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을 향해 찌르르 치솟는 달빛 화살. 작전의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모두의 시선이 데스텔에게 향했다.
하늘을 바라보던 데스텔이 앞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진입을 알리는 신호. 이윽고 위장을 벗어던지고 초인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한다. 그들이 숲에서 벗어난 순간 숲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세찬 섬광, 뒤이어 들려오는 것은 굉음.
섬광과 굉음이 잦아들 무렵 뒤를 돌아보면, 보이는 것이라곤 불길에 집어 삼켜진 숲의 모습이다. 거센 불길 아래 수많은 마수가 타들어 간다. 배교자의 흔적이 용사가 피워올린 불길에 그을려 재로 변하고 있었다.
넓디 넓은 숲이 모조리 불에 타들어 가고 있다.
섬멸전(殲滅戰). 단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게걸스럽게 숲을 집어삼키는 화마를 뒤로한 채 데스텔이 다시 손을 휘둘렀다. 일찍이 정해놓은 신호.
“소환(Summon).”
잿빛 마녀, 레스티 엘레노아.
그녀가 휘두른 손가락을 따라 공간이 갈라졌다. 이계(異界)와 연결된 통로가 열리고 그 안에서 사역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선두를 이루는 것은 와이번.
와이번이 작전에 투입된 인원들을 태운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와이번은 수직굴의 상공에서 날갯짓하며 멈춰 섰다.
“······.”
데스텔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출렁이는 어둠과 짙은 안개에 가려진 수직굴. 심연으로 향하는 통로를 바라보며 데스텔이 숨을 삼켰다. 데스텔은 각오를 다졌다.
“성의(星衣).”
별의 옷에 새겨진 별자리가 찬란히 빛났다.
“모방, 광휘의 하톤.”
불러오는 것은 광휘의 하톤.
400여년 전, 불굴의 기사들과 함께 전장을 휩쓸었던 용사의 무구다. 하톤이 가진 별의 무구는 깃창. 별의 문양이 새겨진 깃창을 휘두르며 하톤은 ‘이렇게’ 말했다.
“별이 우리와 함께한다.”
하톤이 지닌 별빛은 광휘.
전장에 선 기사들에게 하톤은 축복을 내린다. 데스텔이 깃창을 움켜쥔 채 크게 휘둘렀다. 깃창이 펄럭이며 원을 그린다. 원에 포함된 것은 작전에 투입되는 전원이요, 와이번에 올라탄 일당백의 초인들이다.
번쩍.
별빛이 초인들의 몸에 깃든다. 별빛이 가져오는 것은 육체 능력과 반사신경의 극대화. 와이번에 올라탄 검의 초인들이 검(劍)을 뽑아들었다.
스릉, 하고 검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데스텔은 깃창을 놓은 채 다시 입을 연다.
“모방, 명궁 에프타.”
나타난 것은 백금색의 활.
수직굴을 내려다 본 채 데스텔이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활시위에 맺힌 별의 화살이 찬란히 빛났다.
“작전 개시.”
데스텔이 활시위를 놓았다.
수직굴을 향해 별의 화살이 찌르르, 빛의 꼬리를 물며 쏘아졌다. 그렇게 어둠 속에 잠겼던 화살이 번쩍! 하고 섬광을 토해내며 수직굴을 드리운 어둠을 잠시나마 걷어냈다.
섬광과 함께 드러나는 것은 갑각룡의 모습.
하늘을 올려다본 채 갑각룡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치솟기 시작한다. 다가오는 모든 것을 갈아버릴 기세로. 그리고, 그런 갑각룡을 향해 뛰어드는 이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