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88
여왕의 시선이 흔들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당신에 대한 충(忠)을 잃지 않은 수호단장,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을.””
그녀가 어느샌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에는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라니엘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과 달리 라니엘은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동료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어느 미련한 엘프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미련한 엘프.”
어울리지 않은 별명이지만, 그 별명의 주인을 아크리엘은 알 것만 같았다.”
“카르디가 부탁했습니다. 당신을 구해달라고.””
카르디 반 아르미엘.”
“당신을 인간으로 되돌리는 방법은, 쉽지 않았습니다. 정말로요. 다른 이들보다도 더 까다로웠어요.””
왕국의 깊은 곳에 있는 제단을 불태워야 했다.”
그것도 마왕의 힘이 한껏 약해진 그 순간에, 마왕의 토벌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했다. 그렇기에 카르디는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건 일부에 불과하다.”
라니엘은 알고 있다. 카르디가 견뎌온 일천 년을. 고대의 영웅들이 맺었던 계약을. 그들이 자신들이 모셨던 왕을 막아내기 위해 어떠한 희생을 견뎠는지. 그 모두를 라니엘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고 있었기에.”
“당신만큼은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겁니다.””
이 세상 모두가 그 사실을 모르더라도.”
눈앞의 당신 만큼은 알아야 했다.”
이곳까지 도달하기 위해, 일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엘프가 있음을. 영웅들이 있음을. 그들의 삶과 그들이 걸어온 길을.”
“그리고 말이에요.””
라니엘이 길게 숨을 뱉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왕에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한낱 인간에게 라니엘은 이야기했다.”
“이야기 아직 안 끝났는데.””
“···안 끝났다니?””
“일천하고도 백십 년 까지만 말했잖아요. 아직 남은 칠 년간의 이야기를 안 했잖아요?””
라니엘이 제 양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일곱 손가락을 쫙 펼쳐 여왕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요 7년이 핵심인데. 안 들으실 거에요?””
소설로 따지면 한 500화 분량은 나올 거 같은데.”
“무엇보다 이 이야기, 해피엔딩이거든요.””
라니엘이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일천백하고도 십칠 년.”
1117 년의 시간.”
“요 7년이 핵심인데.””
일곱 손가락을 펼친 채 라니엘이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아크리엘이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라니엘이 흠흠 목소리를 다듬고선 입을 열었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영웅담이요, 듣다 보면 감탄이, 박수가, 눈물이, 전율이 절로 튀어나오는 시대의 명작···.””
“알았네, 알았으니까 이야기해 보게.””
질린 눈으로 여왕이 손짓하자 그제야 라니엘은 웃음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의 서두를 어떻게 열어야 할까요. 이런 건 자고로 서두가 중요한 법인데.””
“···대충 시작해도 되지 않나?””
“뭘 모르시네. 도입부에서만큼은 힘을 팍 줘야 하는 법입니다.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턱을 매만지며 한동안 고민하던 라니엘이 아, 하고 짧게 탄식을 뱉었다. 이야기의 서두로 삼을 문장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역시 이것만 한 게 없지.’”
칠년 전 어느 날 중얼거렸던 자신의 독백을 떠올리며 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입을 열어 발음했다. 이야기의 시작을 여는 문장을.”
“마왕의 멱을 따기 위해 결성된 파티가 있었다.””
이야기의 서두(書頭).”
가장 먼저 던져지는 문장.”
‘···내 멱을?’”
무심코 여왕이 제 목을 더듬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다소 살벌한 시작이었다.”
서두와 함께 라니엘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가 걸어온 길이요, 그녀의 삶이자 그녀를 스쳐 지나간 인간들의 이야기다. 영웅담이라면 영웅담이었고, 군상 극이라면 군상 극이었으며··· 또한 인간의 성장을 담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한 명의 등장인물.”
라니엘 반 트리아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이어졌다.”
독선적인 마법사는 홀로서 길을 나아간다. 수많은 짐을 끌고 다만 홀로서 완벽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마법사는 망가졌다.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짓궂은, 이야기는 그렇게 끝을 맺지 않았다.”
독선적인 길을 걸었다 한들, 그것은 타인을 위한 길이었다. 마법사는 언제나 타인을 위해 희생했다.”
그녀가 걸어온 길에 의미는 있었다. 그를 증명하고자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마법사에게 도움을 받았던, 혹은 마법사에 의해 살아남았던···.”
수많은 이들이 마법사를 돕고자 모여들었다. ”
그들에 의해 마법사는 다시 한 번 살게 된다. 그리 손에 넣은 두 번째 삶에서 마법사는 홀로서 완벽함을 추구하진 않았다. 그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
여왕은 마법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어쩌면 자신의 머나먼 후손의 이야기에.”
‘···닮았군.’”
여왕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눈앞의 마법사가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는, 우습게도 자기 자신의 삶과 닮아있었다. 자신 또한 독선적인 삶을 살았으니까.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홀로서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초의 광인에 대항할 수 있는 존재는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자신뿐이리라 여겼다. 허나 아니었다. 결국 마지막 순간 광인을 대적하게 된 건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광인에게 마지막까지 대적한 건···.”
“서기관 루그란.””
자신이 길러 낸 인재들이요.”
자신의 이름 아래 모여든 신하들이었으니.”
“벨리알 반 드라고닉.””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
오랜 시간이 흘러 태어난 어느 후인(後人)의 입에서, 자신이 아는 이들의 이름이 들려왔다. 여왕은 눈앞의 후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조금 더 귀 기울였다.”
흥미로웠다. 즐거웠다.”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후인이 걸어온 길에는 제 신하들의 흔적이 가득했으니까. 후인이 걸어온 길마다, 제 신하들의 발자국이 깊게 찍혀 있었다. 카르디 반 아르미엘이 이어놓은 길을 따라 후인은 달렸으니까.”
“아하.””
구겨졌던 표정은 어느샌가 펴졌다.”
여왕은 웃음을 흘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듣는데 그치지 않고 한두 마디씩 덧붙였다.”
“과연, 카르디 경은 그리 고집스러운 부분이 있긴 했지. 솔직히 말하면 같잖았어.””
“그때도 그랬어요?””
“무얼, 더 그랬지. 내 아래 처음으로 충성을 맹세했을 당시 녀석의 나이가 백이었나, 이백이었나 했을 거다. 엘프치고는 어린 편이었지.””
“그래요?””
“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은 아닌 것 같지만, 본녀가 살았던 시대에는 천 년은 기본으로 먹고 들어가는 엘프들이 수두룩했으니까.””
여왕이 미소 지었다.”
“그런데도 내 앞에서 한 몇천 년은 산 것처럼 무게를 잡더군. 이백 년도 안 살아본 애송이가 말이다.””
“애송···이?””
“당시 나는 이미 구백 년을 넘게 살았으니까. 내 입장에선 애송이가 맞지. 어찌나 우습던지.””
라니엘이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여왕은 어깨를 으쓱였다. 예나 지금이나 그치는 변한 게 없다고.”
“아무튼, 그래서···.””
라니엘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연하게도 즐겁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늘에 물든 제 신하들이 저지른 죄를, 그들의 과오를 들을 때마다 여왕은 신음했다.”
그 죄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이야기가 있었다.”
검의 귀신이 되길 바란 어느 초인에 대해 라니엘은 이야기했다. 광기에 물들었으나 결코 광인이 되지 않았던 마법사를 이야기했으며, 스러져간 수많은 영웅들을 이야기했다.”
그들로 하여금 길은 이어졌다.”
어느 대마법사가 후세로 이어지게 만든 별빛, 그 별빛을 이어받은 용사들에 대해 라니엘은 말했다. 결코 스스로를 굽히지 않은 비굴(非屈)의 용사를, 위업을 새긴 역천(逆天)의 용사를, 가장 용사다운 용사를.”
그들로 하여금, 길은 이어졌다.”
이야기는 중반을 넘어 종막으로 달려갔다.”
재앙들이, 자신의 신하들이 마주한 최후에 대해 여왕은 들었다. 그 최후에 여왕은 탄식했으며 또한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