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166
그 점에선 외려 데이포보스가 나보다 빠르게 납득해낸 것 같았다.
가끔씩, 이 세계가 나와 3,000년이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곱씹게 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럴 때였다.
게다가···
-똑. 똑. 똑.
“이렇게 찾아와서 송구합니다만. 트로이아에서 온 손님들께 만찬을 열어드리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부디 귀한 이들을 접대하는 영광을 나눠주시겠습니까?”
텔라몬이 우리를 피한다.
아니, 정확히는 피한다기보다는 우리를 만나기를 망설인다 해야 하나? 아무튼 자기 역시 복잡한 심경이 드는지 우리를 만나기를 조금씩 꺼렸다.
헤시오네의 반환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 잠시 대화가 이어지다가도 직접 헤시오네를 만나볼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 등으로 이어지면 텔라몬도 고민 끝에 화제를 돌렸다.
딱, 아가멤논이 이야기해준 그대로였다.
한발짝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 한발짝을 어떻게 건너 뛸지는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오늘도 우리는 온갖 만찬과 사냥에 불려다니다 지쳐서 돌아왔다.
특히 손님들을 가장 많이 상대했던 헥토르와, 이런 자리에 익숙지 않은 데이포보스는 기운이 떨어졌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들었다.
그렇게 늦은 밤이 되었고, 나만이 잠에 들지 못한 채 정원을 서성였다. 정원에는 웃기게도 히아신스 꽃이 많이 심겨져 있었다. 이래서 아이아스가 죽었을 때 신들이 그를 히아신스 꽃으로 바꿔주었나 보다.
그런 못된 생각이나 하면서 기다란 의자에 걸터앉아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지금, 옆에 자리 남습니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내 눈을 띄웠다.
옆을 돌아보자 테우크로스가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우리에게 제대로 말도 붙이지 않았던 그 왕자가.
자신의 존재가 트로이아에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기에 알아서 몸을 사렸었는데.
그가 내 앞에서, 공손한 인사를 올리며 다가왔다.
“···자리 남습니다.”
그리고 내가 말을 끝내자 그는 내 옆에 걸터앉고는 조용히 읊조렸다.
“지금 파리스 님을 만나고 싶어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
“누군지는, 아마 잘 아시겠지요.”
듣자마자 짐작해버렸다.
내가 뭐라 입을 떼지 못하고 있자 테우크로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간다.
“정확히는 트로이아에서 온 사절단 중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 밖에 나와 계시는 게 파리스 님 한 분뿐이군요.”
테우크로스는 빠르게 주위를 훑으며 뭔가를 계산하듯 눈을 굴렸다.
그분을 지키고 있던 보초들이 지금 시간대쯤 교대합니다. 여기서부터 빠르게 걸어가면 그 사이에 그분을 뵈러 갈 수 있겠군요.”
“빠져나올 때는?”
“아침이 올 때 한 번 더 교대합니다. 그때 나가지요.”
나는 왜 내가 가야 하느냐고도, 어디로 가야하느냐고도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우크로스 역시 자리에서 일어선 뒤 소리를 죽이고 걸음을 걸었다. 나는 그의 뒤를 쫓았다.
몇 번이나 함정인가 의심했지만, 텔라몬이 그런 심오한 외교적 함정을 팔 것 같지도 않았고, 실제로도 복도는 테우크로스의 장담처럼 비어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발걸음소리가 긴장감을 더할 뿐 우리의 움직임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테우크로스는 왕궁의 안쪽으로, 더 깊은 속으로 움직이다가 어느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작지만 단단하게 잠긴 나무 문이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물론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부인처럼 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살라미스의 공주와 결혼하고서 그 왕위를 물려받으신 분이니까요.
그래도 어머니를 학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평소에는 이렇게 비좁은 곳에 어머니를 가둬두지 않으십니다. 지금은 그저··· 모두의 심경이 복잡할 뿐인 겁니다.”
“···.”
“저는 젊습니다. 늦게 태어났다는 말이죠.”
나는 순간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그는 말을 잇는다.
“그냥 아버지는,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셨다고만 알아주십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 문이 열린다. 혹시나 돌쩌귀에서 요란한 소리라도 안 나나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나이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테우크로스, 잠시··· 나가 주겠니?”
그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테우크로스는 밖으로 나섰다. 내가 방으로 들자마자 등 뒤로 문이 닫힌다. 그제야 나는 방 안의 광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방 안에는 창문들이 몇 개씩 나있었고, 동방에서 온 이런저런 보물들이 곳곳을 장식했다. 특히나···
“이 도자기는 트로이아산이군요.”
트로이아의 물건이 많았다.
“···.”
그리고 나는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는, 머리가 하얗게 센 어느 노파를 마주하기 위해서.
“동향 사람을 만나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구나.”
“고모님을 뵙습니다.”
내가 입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가 서두를 열자 나 역시 급히 무릎꿇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그녀는 소리내어 웃으며 깍지 낀 손을 풀고는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고모라니. 그런 호칭으로 불리게 될 거라고는 평생 생각도 못했는데.”
“혹시 불편하시다면 헤시오네 님이라 불러드리겠습니다.”
“아니다. 그런 게 아니란다. 그저···”
헤시오네는 잠시 말을 멈추며 눈을 꿈뻑거린다.
“그저, 고향의 말씨를 쓰는 사람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리고 그 꿈뻑거리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그냥 무슨 말이든 해다오. 무슨 말이든 괜찮단다, 아가야.”
“아버지께서는 헤시오네 님을 많이 그리워하십니다.”
“나도, 많이 그리워한다.”
내 얼굴을 쓰다듬던 손이 떨어져나가고, 곧 내 손을 마주쥐어본다.
“고향의 해안은 여전히 푸르를지, 무너졌던 고향이 새로 새워졌다면 얼마나 내 머릿속 기억과 달라져 있을지, 내 막내동생이 어떻게 늙었고, 어떤 배우자를 맞이했고, 어떤 자식들을 낳았을지가 너무도 궁금했단다···.”
손은 따뜻했다.
“잘생겼구나.”
“···.”
“네 아버지를 쏙 빼닮았어. 그거 아니? 네 아버지가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잘생겼었단다.”
몰랐다.
프리아모스는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특히 트로이아가 재건되기 이전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내가 어찌할 줄 몰라 그저 반쯤 굳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헤시오네는 무언가 깨달은 듯 내 손을 놓고 베일 자락으로 눈물을 훔친다.
“아니다. 내가 너무 감상적으로 굴고 있구나. 신경쓰지 말거라. 이런 두서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너를 부른 게 아니니. 밤이 짧은데, 늙은 여자가 젊은이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구나.”
“아닙니다. 저희의 목숨을 구해주신 분을 위해서 뭔들 못하겠습니까?”
“말은 예쁘게 하는구나. 그래, 그것도 네 아버지를 닮았어. 전부.”
헤시오네는 붉어진 눈가를 비비며 조용히 웃는다.
“텔라몬이 너희를 피하겠지? 아마?”
“···.”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고, 또 무슨 말로 설득해야 할지도 아마 잘 모를 게다.”
“···그렇습니다.”
텔라몬을 마주칠 때의 그 막막한 기분을 혈육의 목소리로 설명받자 나는 탁 막혀 있던 속이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를 비난하지 말거라.”
“예?”
“그의 영광이 누군가에게는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지 말거라. 그것이 아마 그 늙은 가슴을 괴롭히는 이유일 테니, 죄책감 대신 그가 젊었을 적 가졌을 영웅적인 마음에 호소하거라.”
“···.”
“그것이 그의 전부란다. 그리고.”
헤시오네는 갑자기 내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당황한 내가 팔을 휘젓는 틈에 그녀는 목적한 물건을 내 품에서 빼낸다.
“이걸, 왜 쓰지 않고 있느냐?”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은 아노이토스가 준 선물이었다.
그녀가 검집을 뽑아내자 단검에 음각된 글씨가 희미하게 빛났다.
-‘알크메네의 아들, 헤라클레스의 것’
“벗의 유품이라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가 무릎 꿇을 때 속에 든 물건이 보이더구나.”
“그러면, 그 외관만 보고서 아신 건···”
“나는 말이다?”
헤시오네가 단검의 검날을 이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물건을 살피듯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헤라클레스가 옛날 이야기 속 멋진 구원자인 줄 알았다. 포세이돈께서 보내신 괴물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나를 구해줬을 때 말이다.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 순간의 모든 것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단다.. 그 남자가 내 양팔을 묶고 있던 밧줄을 무엇으로 끊어내었는지도.”
“···.”
“자, 돌아가거라. 이제는 네 지혜와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겠구나.”
나를 일으켜세우며 그녀는 다시 웃어보인다.
수십년 동안 거친 파도에 깎인 바위처럼, 둥글둥글하면서도 단단한 미소였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네 아버지와 가족들을 위해서 하거라. 부탁이다.”
나는 이 대답에 실릴 무게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유산 (2)
“파리스.”
“아, 형님.”
내가 멍하니 서 있자 헥토르가 살짝 어깨를 치면서 내 주의를 되돌린다. 긴장해 있던 어깨와 목근육이 풀리고, 덩달아 바짝 쫄아 있던 마음도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긴장했느냐?”
“아. 예, 뭐··· 그렇습니다.”
열흘도 넘게 이 살라미스 섬에 있으면서, 텔라몬은 기를 쓰고 우리와의 대화를 회피하고, 우리와의 면담 자체를 거부했다.
아가멤논 역시 당황하여 텔라몬을 붙들고 이야기해본 것 같지만 큰 소용은 없는 듯했다.
그러나 그 짓을 영영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는 주인이고 우리는 주인의 초대를 받은 손님이니까.
이 시대에 손님을 모욕하는 일은 곧 부모를 모욕하고, 자신의 주군을 모욕하며, 나아가 접대의 관습을 수호하는 제우스를 모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텔라몬이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를 피해다닌 것도 꽤나 담 큰 짓이었다.
헥토르와 데이포보스, 아가멤논 모두가 이미 거의 결정되다시피 한 헤시오네의 반환을 미루려고 이렇게까지 하냐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하지만 나는 그가 이런 희극을 벌인 이유를 안다.
-“그의 영광이 누군가에게는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지 말거라.”
나는 헤시오네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면서 헥토르, 데이포보스와 함께 연회장의 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제일 먼저 거구의 아이아스가 눈에 띄고, 다음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 옆에 선 테우크로스가 나를 향해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연회장에 도착한 아가멤논 역시 우리에게 차분히 목례한다.
마지막으로, 연회장의 정중앙에 앉은 이가 슬그머니 우리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잔을 들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연회장의 모두가 함께 기립하니.
“이제 있어야 할 이들이 모두 모였으니. 신들의 영광을 위하여, 건배하겠소.”
살라미스의 왕 텔라몬의 말에 우리 모두 텔라몬과 같은 식탁에 앉아 시종들이 건네는 잔을 받아 들어올렸다.
“하늘의 계신 신들을 위하여, 그리고 불멸하는 그들의 왕이자 손님들을 수호하는 위대하신 제우스를 위하여.”
“제우스를 위하여.”
“제우스를 위하여,”
모두가 제우스의 이름을 예찬한 뒤 잔의 내용물을 마시고 각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옆과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 대화를 시도하기 시작한다. 대부분 날씨 얘기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이다.
그러다 그 모든 소리가 점차 사그라든다.
그들은 그제야 내 쪽을 돌아본다.
유일하게 자리에 앉지 않은 나를.
이 자리의 모두가, 테우크로스, 아가멤논, 헥토르, 메넬라오스, 그리고 텔라몬과 여남은 사람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난 뒤 나는 잔을 들어올렸다.
“제우스를 위하여. 언제나 영웅들을 아끼시는 그분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께 아낌받을 영웅인 이 집의 주인을 위하여.”
“···.”
“···.”
물론 그 건배사를 꺼내고 난 뒤에도 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당연히 모두가 당혹하여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 나라의 왕이자 연회의 주인인 텔라몬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 테다.
“···트로이아의 예절이 우리네의 것과 많이 다른 모양이군.”
“아닙니다.”
“뭐?”
이 돌발상황을 그저 좋게좋게 넘기려던 자신의 말마저 가로막자 텔라몬이 인상을 쓰기 시작한다. 흘깃 고개를 돌려 헥토르를 바라보자 그는 당황했을 뿐 나를 말리지 않는다.
나를 신뢰하니까. 내 행위에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니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살라미스의 왕이시여. 당신께서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훌륭한 만찬에 대해서도, 말끔한 거처에 대해서도 모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가?”
텔라몬의 일그러진 눈썹은 원래대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트로이아에서는 본래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가?”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아닙니다.”
“나도 알고 있네. 트로이아에 가봤으니까. 손님으로서는 아니었지만.”
“···.”
“···.”
다시 좌중의 공기가 얼어붙는다.
갑자기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설전이 벌어지고 있나 생각하겠지.
그러나 내가 의도한 바는 언쟁 따위가 아니다. 텔라몬이 무언가 입을 떼려고 하자 나는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내 자리를 떠나 그의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지자 모두의 얼굴이 긴장하면서 나와 텔라몬 사이를 바쁘게 훔쳐보기 시작한다.
텔라몬 역시 앉아 있던 상태에서 나를 올려다보게 되면서 크게 긴장하다가···
“왜 그러지? 증오스럽나? 고향을 망쳐서?”
갑자기 체념한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모두의 경악 속에서 그는 잔을 들어 내용물을 홀짝이면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보지 못했겠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명예로운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가 설마 제우스 님의 뜻을 거스르고 손님으로서 주인을 해하지는 않을 거라 믿네만.”
잔을 든 그의 손이 살짝이지만 파르르 떨렸다.
“그날의 싸움은 정당했고, 고로 그날 우리가 얻은 모든 것은 정당한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일세. 나는 누구에게도 사과할 것 없이 당당···”
“위대한 영웅께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나는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텔라몬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보며 나는 품속에서 ‘그것’을 꺼내다 바친다.
“···.”
텔라몬의 말문이 막힌다. 다른 이들은 내 품속에서 칼이 나오자 긴장하기 시작한다.
이 자리에서 침착한 것은 오직 나와, 텔라몬과···
“선물?”
아가멤논뿐이었다.
아가멤논은 텔라몬의 바로 옆 상석에 앉아서는 나와 텔라몬의 표정을 빠르게 훑어보고 난 뒤 여상하게 말을 잇는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 역시 텔라몬이 그대로 굳어버린 것을 보아 이 물건이 심상찮은 것임을 눈치챈 듯싶었다. 저 질문은 명백히 지원사격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이 단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연다.
“내 벗의 몇 안 되는 유품이지.”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텔라몬이 먼저 말해버린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에 놓인 단검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리더니, 단검을 검집으로부터 천천히 분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희미한 빛이, 마치 저 머나먼 천구(天球)의 별들처럼 아스라한 빛이 뿜어져나온다.
그 빛의 형상은 명백했다.
-‘알크메네의 아들, 헤라클레스의 것’
“···맙소사.”
“저게, 저건···.”
텔라몬과 가까이 앉은, 그러니까 상석에 앉은 이들은 모두 그대로 얼어붙고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고 멀리에 앉은 이들은 호기심에 몸과 목을 길게 빼어 이 곳으로 시선을 집중한다.
“이걸, 어떻게···”
“정말로 ‘어쩌다 보니’라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군요.
제 근처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헤라클레스와 영웅들을 숭상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트로이아인이죠.”
“트로이아인이? 알크메네의 아들 헤라클레스를?”
“그리고, 당신도 말입니다. 살라미스의 왕이시여. 그 친구가 ‘그 텔라몬’을 만나러 간다는 소식에 뭐라 말도 못하고 뜀박질치던 것을 보셔야 했는데 말입니다.”
“···.”
텔라몬은 단검의 빛에, 아니면 내 말에 넋을 놓은 듯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내 말을 놓치지 않으리라 확신했기에 말을 이었다.
“텔라몬. 제우스의 손자, 아마존과 트로이아의 정복자, 헤라클레스의 가장 지친한 벗.”
“···.”
“당신은, 당신의 과거를 부끄러운 것으로 남기고자 하십니까? 도망치고 또 도망쳐서 아예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자 하십니까?”
내 말에 텔라몬은 입을 웅얼거리며 어떻게든 말을 꺼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울먹임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막혀 음성으로 나오지 못한다.
“그렇다면 아이아코스의 아들이시여, 당신의 삶은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삶입니까? 영광과 모험이 아니라 죽음과 치욕을 흩뿌리는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러면 당신의 벗 헤라클레스는 어떻게 됩니까?”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다. 세상 그 어느 소란보다도 시끄러운 침묵이었다.
그리고 곧 고요처럼 조용한 목소리가 텔라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울먹임과 함께.
“나, 나는 죽였단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