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ve too many Talents RAW novel - chapter (288)
제295화
295화
‘볼리칸 평원’의 내부는 한국에서 비슷한 풍경을 찾아보기 힘든 너른 초원이었다.
‘당연히 평원이라고 했으니.’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정현은 그 평원의 한쪽 지평선을 풀과 흙 대신 다른 것이 채우고 있음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부우우우-
낮으면서도 우렁우렁한 소리가 마치 평원의 지면을 휩쓸듯 정현과 헌터들에게로 다가왔다.
‘진짜 인간을 상대하는 건 맞네.’
정현은 평원을 뒤덮고 있는 색색의 장막을 황망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면 그 장막은 수없이 많은 각각의 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거, 본 적 있어요?”
“아뇨.”
정현의 뒤에서 수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모습을 본 적 있냐고?
그럴 리가.
적게 잡아도 만 명이 훌쩍 넘는 인파다.
그 이상은, 세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대격변 이전에야 그 정도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가 적지 않았다고 하나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저게 바로 7레벨에서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이에요.”
얘기는 충분히 들었다.
7레벨 게이트에서는 사람을 상대해야 할 거라고.
하지만 정현이 생각한 건 어디까지나 상식적으로 상상이 가능한 범위의 숫자였다.
“저 사람들을······ 다 죽여야 한다고요?”
“아마도.”
수지는 담담하게 답했다.
그녀는 원래부터도 진심을 알아채기 힘든 사람이었다.
게이트에 들어온 뒤로는 특히나 더 그랬다.
사람이 아니라 마치 인형, 혹은 기계 같다.
정현은 뿔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쪽, 그러니까 수만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쪽을 가만히 살폈다.
“저 사람들, 정규군이 아닌 모양이네요.”
그의 시력이라면 그들이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지 못한 채 엉성하게 서 있는 것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애초에 정규군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의 집단이었다면 사람을 재료로 펼쳐진 장막이 색색으로 빛날 리가 없었다.
“맞아요. 아마 전력은 별 볼 일 없을 거예요. 헌터가 상대한다는 게 민망할 만큼.”
수지도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그녀가 이제껏 7레벨 게이트에서 만난 군대는 대부분 저런 꼴이었다.
그나마 정예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한 줌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전투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있나 의심될 정도의 징집병들.
헌터가 손 한번 휘두르면, 눈길 한번 주면 공포에 질려 사분오열될 집단이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정현이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전부 죽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여기서 나가려면요.”
“왜요?”
실용적인 의미의 질문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이런 상황을 마주한 헌터들이 으레 보이는 반응이기도 했다.
수지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헌터가 언제는, 이유를 따져 가며 싸웠나요?”
질문의 형식을 띤 답변에 정현은 마침내 생각을 굳힌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궁- 궁- 궁-
뿔피리와는 명확히 구분되는 북소리가 울리나 싶더니.
“으아아아!”
가만히 진을 치고 있던 군대의 전열이 서서히 한 방향으로 허물어졌다.
당연히 그 방향은 정현을 비롯한 6명의 헌터들이 자리한 곳.
수지는 정현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올려놓고 말했다.
“최대한 고통 없이.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공략하는 편이에요.”
그렇게 정현의 첫 7레벨 게이트 공략.
‘볼리칸 평원’의 임무가 시작되었다.
***
사람이 많았다.
많아도 너무나 많았다.
‘X같네.’
정현은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푹-
“컥!”
방금 또 한 명의 사람이 죽었다.
아니, 사실 매초, 매 순간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하릴없이 죽어 갔다.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마치 그 크기의 인형을 하나씩 거꾸러뜨리는 것만 같다.
천으로 외형을 만들고 솜으로 그 속을 채운 연약한 인형처럼 사람은 쉽게도 죽었다.
무엇보다도 정현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내면이 잔인하리만치 침착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게 된다면 뭐라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최소한 일말의 머뭇거림이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정현은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 도덕적 책임감을 느꼈다.
우르릉-
담벼락이 또 한 번 벽을 일으켜 세웠다.
저 볼품없는 생명들은 그 벽을 깨부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손에 들고 있는 창과 검으로 부딪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차피 턱도 없는 짓임을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비록 벽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감각은 인간들의 미세한 머뭇거림마저 빠짐없이 잡아낼 수 있었다.
푸화악-
한편, 청설모의 검기는 한번 방출될 때마다 족히 수십의 육체를 양단하고 있다.
너덜너덜한 짐승 가죽 갑옷, 잘못해서 제 살이 긁혔다간 파상풍을 의심해야 할 것 같은 녹슨 금속 갑옷 따위는 그 앞에서 장애물조차 되지 못했다.
파도처럼 밀려온 인파는 그렇게 파도처럼 사라졌다.
S등급 헌터 앞에서, 몬스터도 아닌 인간들은 고작해야 그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정현의 감각에는 그 두 사람보다 더 큰 존재감이 하나 잡히고 있었다.
‘바람 마법 특성에 왜 검을 가지고 있나 했더니······.’
바로 수지였다.
그녀는 전투가 시작되자 가장 앞서서 달려 나갔다.
덕분에 지금도 파티 중 그 누구보다 적들의 중심과 가까운 위치에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 적극성은 차치하고, 정현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녀의 전투 방식이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반경 30m 정도는 거의 완전한 진공 상태다.
“커어-”
당연히 그 내부의 적들은 무기를 들기는커녕 갑작스러운 질식에 제 목을 잡고 컥컥거리는 데 정신이 없었다.
잘 훈련된 전사라 해도 호흡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격렬한 전투를 하기는 힘든 마당에 겨우 평민들을 징집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 수지의 역할은 단순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목숨을 최대한 빠르게 거둬들이는 것.
서걱-
고녀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평범한 철검을 휘둘러 한 번에 한 명씩, 기계적으로 목을 베어 냈다.
손에 닿지 않는 이들은 진공 속에서 맹수처럼 돌아다니는 몇 줄기의 바람이 심장을 정확히 꿰뚫어 버림으로써 대신했다.
최대한 고통 없이.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고통 없는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정현은 그녀의 고민이 결코 짧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죽음조차 축복일 수 있었다.
공포에 질려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릴 바에야.
차라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는 편이 나을지도.
물론 정현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었다.
푹-
그의 주변으로 열 자루가 넘는 단검들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다.
A등급 시너지의 효과로 암기술은 이제 암기를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정현의 의지가 확실하다면 열 자루의 단검이 열 명의 적을 동시에 노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사고 가속이 더해진 이상 정현을 향해 몰려오던 병사들은 단번에 수십 명씩, 자신이 죽는지조차 모르는 채 죽어 나갔다.
“으아아-”
교묘하게도 정현은 자신에게서 일정 거리 이상의 적만을 노리고 있었다.
아마 훈련되지 않은 저들은 옆에서 동료가 픽픽 쓰러져 나가도 그것이 마치 생명을 가진 듯 날아 다니는 암기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리라.
그러면 가까이 오는 적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퍽-
“으으······.”
정현의 주위로는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쳐진 듯 공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안에서 숨이 붙어 있는 이라곤 정현뿐이었다.
아니면 전부 들어오자마자 머리 사라진 시체가 되어 뜨거운 피로 평원을 검붉게 적셔야 했으니.
그의 손에 들린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몽둥이는 이제 그 모양만으로도 인간들에게 공포의 상징이 된 듯했다.
‘그런데 아무리 이렇게 잡는다곤 해도······.’
정현이 슬쩍 시선을 돌릴 때마다 그를 둘러싼 사람의 원이 출렁인다.
적어도 정현에게 느껴지는 정보만을 가지고 생각해 볼 때, 처음과 지금 적의 수는 변함이 없는 듯했다.
한 사람이 족히 수백 명이 넘는 인간들을 죽이고 있음에도 이렇다니.
이래서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반복하고 있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응?”
그때, 정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전까지와는 비교되지 않는 살기.
전투 감각의 반응은 그다음이었다.
‘이런 미친······.’
순식간에 정현의 눈이 닿는 모든 지면이 점점이 붉게 물들었다.
징집병들의 피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색.
그에게 위협이 될 만큼 진한 경고는 아니었지만.
보통의 인간에게는 충분한 사인(死因)이 되리라.
이런 대규모 전투에서 이 정도 범위를 감당하는, 그리고 이런 형태를 띠는 공격이라면 그 경우의 수가 많지는 않았다.
“화살!”
정현이 크게 소리쳤다.
징집병 다수가 그 바람에 크게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하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피잉-
동시에 아스라이, 활의 시위가 퉁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족히 수천, 혹은 수만에 달하는 시위가 거의 같은 시각에 화살을 날려 보낸 것이다.
순간적으로 정현은 하늘이 어두워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쐐애애액-
손바닥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수천 개의 손바닥이 모인다면?
수만 개의 손바닥이 모인다면?
혹시나 하늘이 가려질지도 모르는 법이다.
정현은 그 상상이 현실로 바뀌는 모습을 직접 보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화살들이 하늘을 뒤덮듯 포물선을 그리며 평원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 의도는 명백했다.
적이든 아군이든 가리지 않고 일제 사격을 통해 모두 죽인다.
모두 죽는다면 어차피 이득이다.
터무니없이 기계적인 사고방식, 아니, 어쩌면 무엇보다 인간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공격이었다.
정현의 꾹 쥔 주먹이 벌게지도록 힘이 실렸다.
그의 실력이라면 이런 눈먼 화살에 당할 일은 없었다.
애당초 이 정도 힘의 화살로는 일만 발이 한 점에 꽂히더라도 주갑에 흠집이나 낼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만에 하나조차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파앗-
정현의 후방에서부터 황금색 반원이 생겨나나 싶더니 이내 폭발적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이윽고 그 범위는 정현을 지나치고 더 나아가 가장 앞에 있는 수지까지 영향권에 넣었다.
세아의 특성, 「수호 영역」이었다.
티디디딩-
화살들은 황금색 반원의 벽을 뚫지 못하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수호 영역」은 그 범위 바깥에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그 내부의 아군에게는 A등급 수준의 치유를 상시 부여한다.
일반적인 게이트 공략 상황에서보다 이런 집단전에 더없이 어울리는 능력이었다.
강력한 몬스터의 공격이라면 모르겠으나, 아무런 특성도 실리지 않은 일반적인 화살이 S등급 특성에 위해를 가할 수는 없었다.
“허억······.”
한편, 정현의 주위에 있던 징집병들은 그 경이롭기까지 한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그럴 수밖에.
‘「수호 영역」이 아니었으면 전부 아군의 화살에 맞아 죽을 운명이었을 테니.’
어찌 되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겠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암기에 급소를 찔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후이리라.
아니, 차라리 깨끗하게 숨을 거둘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
급소가 아닌 곳이 화살에 꿰뚫리고 고통에 신음하다 인파의 발에 밟혀 죽어 가는 것보다야.
당장 그 지옥도는 세아의 영역 밖에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퍼버버버벅-
「수호 영역」의 범위가 넓다고 한들 엄청난 수의 군대가 쏘아내는 사격의 범위를 전부 감당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고작 얄팍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천당과 지옥이 갈렸다.
“끄아아악!”
팔과 다리, 몸통, 목, 머리.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부위를 가리지 않고 화살이 내리꽂혔다.
앞서 말했듯 식칼이나 제대로 막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방어구는 착용자들을 제대로 지켜 내지 못했다.
잔인하게도 일격에 죽지 않은 이들이 절대다수.
그들은 꼼짝없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며 쇼크든 과다출혈이든 다른 방식의 죽음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좋든 싫든 정현의 감각은 그 모든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에게 전해 주고 있었다.
이건 정현이 이 자리에 불꽃놀이를 들고 나오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이 정도 수인지는 생각지 않았으나 어쨌든 이전까지 자신이 상대해 본 적 없는 수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도대체 누가.’
정현이 부리는 단검들이 일순간 공중에서 멈춰 섰다.
‘이런 짓을.’
성큼-
처음 자리를 잡은 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그의 다리가 크게 한 걸음을 걸었다.
‘벌인 거지?’
누구 하나 약속한 적 없건만 거의 완벽한 원 형태를 그리고 있던 사람의 벽이 크게 요동쳤다.
공터의 형태는 정현의 진행 방향으로 기울어진 타원형이 되었다.
성큼- 성큼- 성큼-
점차 정현의 걸음걸이가 빨라짐에 따라 타원형도 점점 길쭉하게 늘어지나 싶더니.
타다다다닥-
이윽고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형편없이 허물어졌다.
정현은 한 방향으로 곧게 달리기 시작했다.
화살이 날아온 쪽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