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178
“겹겹이 쌓아놓은 철괴를··· 꼬는군요.”
헤파이스토스는 웃으며 말하지만, 나는 눈앞의 풍경에 큰 흥미를 가졌다.
“저, 기계의 설계를 알아갈 수 있겠습니까?”
***
강철이라 함은, 철에다 탄소를 ‘적정량’ 추가해서 만든 합금을 말한다.
철광석에서 탄소를 쭉 빼내어 괴철로에서 나온 철은 강철보다 탄소 함유량이 적은 연철.
그 연철을 헤파이스토스의 말처럼 숯아궁이에 넣었다 빼면서 길게 늘이고 접어 탄소 함유량을 적절히 맞춘다.
빨간색 점토에 파란색 가루를 뿌린 뒤 마구 주물러 보라색으로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것을 영어로는 패턴 웰딩(Pattern Welding), 한국어로는 단조 접쇠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파란색 가루의 양을 ‘정확히’ 조절하고, 빨간색 점토를 늘리고 주물러 파란색 가루의 분포를 ‘최대한’ 고르게 분포시키면 완벽한 강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다.
그래서, 만들 수 있느냐?
[내가 축복을 내려주지 않았더냐?]만들 수 있다.
예전에, 헤파이스토스가 스클레오스와 다른 대장장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줬으니까.
“맞습니다. 당신의 종복들이 이제는 가장 완벽하게 쇠를 두드리고, 가장 완벽하게 쇠를 열처리하는 대장장이들이 되었습니다.”
그때 안탄드로스에 있던 대장장이들은 가능하다.
그러니까···
“지금은 대장간이 ‘조금’ 커져서 말입니다.”
지금 안탄드로스의 대장장이 중에서, 약 2할 정도?
거의 안 된다는 뜻이다.
[흠, 그렇다면 어쩌고 싶으냐?]“저 키클롭스들은 탄소 함유량이··· 아니, 단단하고 무른 정도가 서로 다른 두 철을 붙인 다음 서로 꼬아줍니다. 여기까지는 안탄드로스와 별 다를 바 없지만, 저들은 기계를 씁니다!”
언제 숯아궁이에 넣고 빼고 어떻게 두들겨 펴서 접고 펼치고 하는 공정은 복잡하다. 그리고 복잡한 공정은 대개 ‘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시대의 노인들 수명이 60세에서 70세 정도 나온다 치자. 좀 서글픈 이야기지만 매일 매연 마시고 뜨거운 거 만지고 사는 대장장이들은 거기서 몇 년 깎아야 한다 치자.
이르면 50대에 사람이 간다. 헤파이스토스의 축복 덕택에 ‘감’이 좋은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그쯤에서 체력 때문에 경력이 끊긴다.
이거 지속불가능하다.
안탄드로스에서 대장장이 노릇한 지도 이제 10년 되었다. 나 어렸을 때 현역이던 사람들 중 태반이 은퇴했다. 슬슬 스클레오스 아저씨도 눈이 침침해져서 일 직접 안 뛰고.
결국 공정의 단순화, 표준화가 필요하다.
“헤파이스토스 님께 축복받은 대장장이들이 하나둘씩 늙고 지쳐갑니다. 안탄드로스의 대장간도 새로운 피를 수혈받을 때가 되었죠. 축복받지 못한 이들 말입니다.”
톨레도의 강철검이 유명한 이유도, 노래 박자 같은 걸로 망치 두드리는 타이밍을 표준화해서였다지.
“그들이 선대의 일을 물려받으면서도, 질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이거 잘만 하면 질 좋은 강철을, 계속 뽑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공정을 끊임없이 기계화하고, 사람의 손기술이 개입할 여지를 줄여나간다면? 지금처럼 제철제강법의 명맥이 끊어질까 걱정할 일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네 눈이 마음에 드는구나. 처음 가위를 들고 왔을 때에도 비슷했지.]헤파이스토스의 말에 내 상념이 끊긴다. 뒤늦게 대장장이의 신을 바라보자, 그는 나를 아련한 미소와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네 눈에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이리 빛나니, 내가 네 편이 되어주지 않을 수가 없구나.]“헤파이스토스 님.”
[내가 널 도우마. 나의 제자야.]나는 헤파이스토스의 말을 잠깐 곱씹었고, 그동안 헤파이스토스는 다시 손가락을 튕긴다.
그러자 우리는 원래 서 있던 작업공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곤봉과 사자 가죽, 그리고 검은 천으로 감싸여 있는 정체불명의 물체가 탁자 위에 올라와 있다.
[이제 우리의 머리를 모아볼 때로구나.]“일단 곤봉을 쪼개어야 하는데···”
[그거라면, 방법을 마련했지.]헤파이스토스는 조심스럽게 검은 천을 치운다.
그 밑에는, 순수한 섬광이 막대의 형태로 있었다.
“설마.”
나는 감히 손을 올리지 못하다가, 헤파이스토스의 채근에 겨우 ‘그것’을 오른손에 쥐었다.
-파짓.
온몸에 정전기가 타고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머리털도 쭈뼛쭈뼛 떠올랐을 테다.
제우스의 권능, 번개.
[이제 자세를 잡고.]헤파이스토스는 내 팔다리를 잡고 이리저리 자세를 교정해준다. 나는 긴장한 채 헤파이스토스의 명령에 잠자코 따른다.
[자, 이제 망치처럼 내리치거라.]“제, 제가 감히 이 귀한 것을···?”
[내리쳐보거라.]“···.”
그래, 침착하게만, 침착하게만.
“으, 끄아아아악!!!!”
침착은 개뿔이. 제우스의 무기를 다루면서 어떻게 침착할 수가 있겠나.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번개와 곤봉이 접촉하자.
-콰콰콰콰쾅!!!!
엄청난 섬광과 굉음이 터져나왔다. 이건, 대장장이의 눈과 귀로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한참동안이나 꼭 감은 눈앞에 새하얀 잔상이 보이다 겨우 눈을 떠보니, 곤봉은 깔끔하게 쪼개진 뒤였다.
안탄드로스에서 미리 내가 재어 놨던 치수 그대로, 딱 20개로.
뭐야, 이거. 말도 안 되는 물건이다.
[어떻느냐?]“···이제, 연결해도 되겠군요.”
내 말에 키클롭스들이 아까의 창날을 들고와 이리저리 창대에 고정하기 시작한다. 20개의 창대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내가 만들어보겠다고 했건만, 정작 내가 활약한 것은 쥐꼬리만 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에서 뒤돌아 헤파이스토스를 올려다 본다.
“혹시, 갑옷도 준비해두셨습니까?”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갑옷이 한 벌 있었다. 흉갑과 손목보호대, 복사뼈 덮개가 달린 훌륭한 정강이받이와 투구, 혁대, 방패까지.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자 가죽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단다.]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헤파이스토스의 미소를 보고 금세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나의 몫을 남겨둔 것이다.
“황동 갑옷은 태양과 같은 빛깔로 빛나지만, 강철은 검푸른 빛을 튕겨내지요.”
나는 그의 배려를 못 알아챈 척 헤파이스토스에게 말을 걸었다.
“또, 밤중의 전투를 생각한다면 너무 눈에 띄는 것도 좋지 않을 테고요.”
[흥미롭군. 그래서?]“사자 가죽을 검게 물들여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이게, 내 갑옷이란 말이지.”
“맞습니다. 누가 뭐래도 형님 거죠.”
“헤파이스토스 님께서 제, 제, 제 무기를 만드셨다는 말입니까?”
“그래, 맞아. 맞으니까 일단 시험부터 해보자고.”
나는 트로이아로 돌아와 헥토르와 아이네이아스 앞에 섰다.
***
“헥토르 형님, 이 철판을 발로 차보십시오.”
“흡!!!!”
-콰드드드득!
역시나.
갑옷의 설계자 겸 제작 보조였던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메아의 사자 가죽을 유일하게 뚫을 수 있는 저 발톱. 역시 활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헥토르의 정강이받이 쪽에 달아놓았으니 분명 청동이든 철이든 뭐든 발차기 한번으로 뚫고 찢어버릴 수 있으리라.
“시야는 어떻습니까? 가리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지난번에 내가 말했던가?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쓸 때면 시야가 좁아져서 불편했다고.”
헤라클레스는 사자의 머리 부분을 후드처럼 뒤집어 쓴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지만, 실제로 그리하면 양옆의 시야가 차단된다.
전장에서는, 특히 사방을 살피며 질주해야 하는 전차 위에서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지금은 아주 잘 보이는군.”
고로 사자의 머리 부분은 왼쪽 어깨로 배치해 장식처럼 남겨두었다.
“투구는요?”
“무게중심이 잘 잡혀 있어서 목이나 머리가 불편하지 않고, 피부처럼 딱 맞아. 이게 바로 신의 솜씨인 건가 싶다.”
“정강이받이랑 흉갑도 마찬가지입니까?”
“그래, 전번에는 살짝살짝 사자 가죽이 바닥에 쓸려 불편했는데, 그게 해결되니 아주 편안해.”
“그렇다면야···.”
-휘이이이익! 퍽!!
내가 시험 삼아 헥토르에게 창을 던지자, 헥토르는 재빠르게 검게 물들인 털가죽 망토를 휘감아 창을 막아낸다.
내가 왼쪽에서부터 칼을 휘두르자, 헥토르는 가볍게 피하며 내게 반격을 가하는 자세를 취한다.
좋아.
공격과 방어 양면에서 완벽하고, 시야도 제한되지 않는다.
흑회색 철갑 위로 검게 물들인 사자 가죽이 망토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가죽은 양어깨와 가슴, 등판을 모조리 가려버리며 뒤쪽 망토로 이어진다.
왼쪽 어깨에서는 검은 사자갈기가 휘날리고, 한때 헤라클레스를 노려보았을 두 눈이 흉흉한 눈빛으로 적을 노려본다.
훼손한 부위는 거의 없이 통짜로 활용했다. 위험하기도 하고, 거추장스럽기도 하던 발톱만 잘라내어 정강이받이에 덧붙여 무기로 만들었을 뿐.
거기에 얇은 철판 9겹을 겹치고 흑사자의 문양을 새겨 만든 방패까지.
톤앤매너가 딱딱 맞는다. 헤파이스토스도 감탄한 디자인다웠다.
이제, 그 다음은 아이네이아스의 차례였다.
“아이네이아스? 던져!!”
“네, 넵!!!!”
아이네이아스가 미사일을 쏘는 듯한 기세로 투창을 던지니 과녁들이 하나둘씩 산산조각난다. 나는 그 위력에 감탄하면서도, 살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은··· 소모품인데.’
끽하면 던져버리기도 하니 말이다. 괜히 여러 개의 창을 들고 다니는 거겠나.
그렇다고 목재를 쓸 만한 곳은 손잡이밖에 없는 칼을 만들자니 애매했다. 결국 답이 저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내할 수밖에.
하지만 그런 씁쓸한 기분은 아이네이아스가 10번째 창을 던졌을 때쯤 사라졌다.
“좋아, 이제 저 창들을 주워서 훼손된 곳 없이 멀쩡한지만 보자고. 어차피 헤파이스토스 님께서 직접 만드신 거니···”
“파리스?”
“예, 형님. 왜 그러십니까?”
“주우러 갈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예?”
나는 황급히 아이네이아스 옆에 쌓아놓았던 창의 뭉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수를 세려보니···
딱 스물.
시종들을 시켜 찾아보니, 아이네이아스가 던진 쪽에 있던 창들은 온데간데 없었다고 한다.
“···아이네이아스?”
“예, 파리스 님.”
“저쪽에, 그러니까 비교적 가까운 데 던져봐. 과녁을 박살내지는 않게 힘조절해서.”
후우우웅, 하는 소리를 내며 아까보다는 덜한 기세로 창이 날아간다. 그리고 그 창이 과녁에 직격으로 꽂히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눈을 깜빡여 본다. 과녁에는 방금 창 때문에 뚫린 구멍만 남고 비어 있었다.
다시 돌아보니 비어 있던 아이네이아스의 손에 다시 원래의 투창이 들려 있었다.
순간 나와 헥토르, 그리고 창의 주인이 된 아이네이아스 모두가 얼어붙었다.
새로운 신물(神物)의 탄생이었다.
멤논 (1)
트로이아의 해안은 막 어둠에서 깨어난다. 어제 저물녘, 피흘리며 죽어가던 태양은 동쪽에서 다시 예고된 부활을 맞이한다.
하늘과 땅, 바다가 모두 황금빛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어느 위대한 거인이 기나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는 것 같이 해는 자신의 광선을 길게 지상에 뻗쳐나간다.
그 장엄한 광경 속에서 바다는 조용했다.
야음을 틈타기를 즐기는 해적들도, 그런 해적들을 잡기 위해 움직이는 트리에레스도, 아직 잠에 빠져 허우적대는 상인들의 범선도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달과 별이 일시에 스러진 뒤 하늘에는 위대하고 유일한 절대군주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런 장관을 모두들 놓치고 있으니, 인간이 밤에 잠들고 낮이 되어야 깨어나는 족속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말로 트로이아의 ‘모두’가 이 장관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운좋게, 이 드넓은 바닷물이 수천 톤의 황금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본 이들이 있었다.
잠시 후 들려온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새벽 바닷빛에 녹아 있던 배 1척이 조금씩 은빛으로 빛나는 외관을 드러낸다.
마치 허공에서 배가 생겨나는 듯, 투명한 안개 속에 숨어 있다가 빠져나오는 듯했다.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 기묘한 배의 선원들은 제각기 돛을 접고 삭구와 짐을 정리한 뒤 작은 신상 앞에 질서정연하게 모여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새벽이시여, 장밋빛 손가락을 지니신 분이시여···.”
“불멸하는 신들과 필멸하는 인간들과 이 땅의 모든 피고 지는 것들에게 밤의 장막을 걷고 빛을 주시는 분이시여···.”
그들 중에는 구릿빛 살갗을 지닌 사람과, 창백한 살갗을 지닌 사람과, 흑회색 살갗을 지닌 사람들이 고루 섞여 있었으니.
개중에서 한 아름다운 남자가 일어나 읊조리자 다른 모두의 목소리가 멎었다.
“어머니시여.”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아직 잠들어 있던 트로이아의 철새들을 깨운다.
“어머니시여, 밤의 장막 속에 저희를 숨겨 이 땅에 데려와주시오니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어머니시여, 저희가 저희 주군의 명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우시니 그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 말한 뒤 남자는 작은 병을 꺼내어 마개를 연 뒤 그 내용물을 신상에 뿌린다. 거룩한 올리브유였다.
그런 다음, 선원들과 남자는 천천히 하선하기 시작한다.
“저희는 어디로 가야겠습니까?”
“자네들은 근처를 돌아다니며 상인인 체하고 있게. 그를 위해서 가져온 흑단과 상아가 아닌가. 나오는 금화는 모두 자네들이 챙기게.”
“감사합니다, 주군.”
“병사들 두어 명만 나를 호위하면 족하네. 이제 가지.”
이렇듯, 바다 건너 선조들의 땅에 도착한 남자는 천천히 목적지를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가 평생 만나보지 못한 친족들이 있을 곳을 향해서.
그는 도시의 중심부로 걸어갔다.
***
혹시 누가 내게 아이깁토스 원정에 대해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괜히 집 나갔다가 해적 네스토르의 약탈이나 구경하고, 괜히 아이깁토스에서 일어난 내란 시도에 얽혀서 죽을 뻔하고, 계속 숨기고 살던 망치도 드러내고, 돌아와 보니 파라오를 죽였느니 피람세스를 태웠느니 하는 이상한 소문들이 나돌아다녔는데···
후회하냐고?
아니. 그럴 리가.
아이깁토스인 이민자가 지금 안탄드로스와 동맹도시에 1,000명 정도 새로 정착했다.
지금 전세계의 인구가 21세기 대한민국 수준과 일본 수준 사이를 와리가리한다는 점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자원은 인구였다.
그것도 동원 가능하려면 되도록 도시에 있는 게 좋고.
기술도 갖추고 있으면 최고다.
그 최고의 인구가 내 영역으로 ‘1,000명’씩이나 들어왔다.
그렇게 아이깁토스인들이 가져온 온갖 신기술이 안탄드로스 곳곳을 채우고 있다. 지금 이 에게 해 전체에서 안탄드로스만큼 발전한 도시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아주 하찮은 손실 따위 죄다 덮어버릴 만한 이득이 들어왔다 이 말이다.
하지만···
“와!! 파리스 님께서 홀로 파라오를 죽이고 피람세스를 약탈하셨는데!!!! 저 아카이아인들을 떼로 몰려가서도 실패하다니!!!!”
“여기, 아이깁토스인들이 경악하고 아카이아인들이 전전긍긍하며 트라키아인들이 부러워하는 파리스 님의 아이깁토스 여행기에 대해 듣고 싶은 이들은 줄을 서시오!!”
“파리스 님께서 아이깁토스에서 무얼 하셨느냐고? 대체 맨손으로 배를 쪼갰다는 게 말이 되냐고 하셨소?
···난 그곳에서 본 것에 대해 침묵하겠소. 그렇소. 파리스 님께서 부탁하신 일이오.”
아주 살짝, 후회하는 기분이 들려고 한다.
소문으로 듣자 하니 파라오가 갑자기 현인신으로 변해 아카이아 군대를 학살했다고 들었는데.
그거 아이깁토스 내수용 프로파간다 아니었나? 진짜였어?
아무튼 해봐야 ‘인도적인 목적으로 자발적 난민들을 수용한 것’ 말고는 한 적 없는 선량한 나와, 아카이아 해적떼들이 비교 대상이 되다니 너무했다.
다른 것보다도 그 아킬레우스와 무력 비교니, 누가 더 쎄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이 오가는 것도 심란했고.
궁정 내부에만 있으면 그런 쓸데없는 질문들에 시달리게 되니, 나는 조용히 트로이아 왕궁을 빠져나와 쉬려고 했다. 형님이랑 아이네이아스 무기 좀 주러 와서 이게 뭔 일이냐.
이러니까 왕궁 문을 나서면서 누군가에게 손목을 잡혔을 때.
“···무슨 일이오? 만약 아이깁토스 관련한 질문이라면 정중히 사양하겠소.”
이렇게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왔다. 아니, 길을 걷다가 갑자기 손목을 잡혔으면 이러는 게 당연한가? 철쇄대원들도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일제히 칼을 뽑을 준비를 한다.
그러나 망토 쓴 남자는 내게 의외의 대답을 되돌려주었다.
“모든 인상착의가 증언과 일치하니, 당신이 안탄드로스의 군주 파리스가 맞는 모양이군요.”
“이 도시 사람이 아닌가 보군.”
나를 모르는 사람이 트로이아에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아카이아에서 온 영웅 지망생?
“모험을 떠나려는 뜨내기라면 내가 아니라 저 텔라몬 님에게나 찾아가는 게···”
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무시할 수 없는 괴력이 내 손목을 감쌌다. 뿌리치려 해도 뿌리칠 수가 없다.
생각해보니, 내 양옆으로 철쇄대원들이 따라붙어 있는데 어떻게 근접해온 거지?
“이, 무슨···!”
“걱정 마십시오. 악의는 없습니다. 단지 그대가 언성을 높이지만 말아주었으면 해서. 그나저나 소문만큼 강해보이지는 않는군요.”
남자는 나를 궁전 바로 옆의 골목으로 끌고 간 뒤 망토를 걷으며 말했다. 그의 주위로 호위무사들이 몇몇 보이고, 내 등 뒤에서는 급히 따라들어온 철쇄대원들이 전투 태세를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