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09
“파, 파리스 님? 이것들 죄다 죽이면 됩니까? 아니면 일부는 살려야 합니까?”
“다.”
선장을 안전한 갑판 한가운데로 밀쳐내는 동안 선실에서 무장하고 나온 오디세우스가 내 대신 아킬레우스를 향해 말했다.
“다 죽여.”
오디세우스는 뭔가 손에 바리바리 싸들고 나온 채였다. 그는 그것들을 내게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파리스. 여기 그대의 갑옷과 활이오. 입고 있으면 그동안은 버텨주겠소.”
가슴받이, 정강이받이, 팔 보호대.
나는 벌벌 떠는 선원들을 불러 갑옷의 끈을 조이는 동안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파트로클로스!!”
“알아!!”
아킬레우스가 투창을 던져 인어 세 마리를 꿰어 죽인다. 그러고도 추진력을 잃지 않은 투창을 파트로클로스가 방패로 튕겨내어 또 다른 세 마리를 죽인다.
파트로클로스가 칼로 대장 정도 되어 보이는 인어의 가슴팍을 찌르자 인어는 한동안 허우적댄다. 그러자 아킬레우스가 그의 목을 잘라 정리한다.
“···.”
옛날 일이기는 하지만, 저만한 인어에게 죽을 뻔한 걸 아이네이아스가 겨우 구해준 일이 있었지.
그런데 그걸 바로 몇 초만에, 마치 둘이서 한 몸처럼 움직여 죽여버린다.
신화 속에서 아킬레우스나 파트로클로스는 이전 세대의 영웅들처럼 괴물들과 맞서거나 위업을 세우지 못한다. 방방곡곡을 떠돌며 전설을 남긴 오디세우스와는 대조적이다.
그들은 트로이아에서 죽었으니까. 한 명은 헥토르에게, 한 명은 나에게.
네스토르는 저런 그들을 보고 교만하지 말라며, 자신은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가 살아있던 시절을 보았다고 말했지만.
저 둘이 그에 모자라는 영웅일까?
모르겠다. 그들은 이미 죽어 신이 되거나 하데스의 왕국으로 떠났으니.
“파리스! 무장은 다 갖췄소? 놀고만 있지 말고 가담하시오!!”
물론 강력한 전사 두 사람이 모든 걸 다할 순 없다. 지금 인어떼는 무슨 할리우드의 좀비떼처럼 이 작은 배 하나를 향해 몰려들고 있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선원들도 있다. 둘이서 마구잡이로 인어를 대학살할 수는 있어도 배를 지키고 선원을 지키려면 다른 이들의 도움도 필요했다.
물론, 난생 처음 보는 괴물들의 모습에 패닉이 온 선원들의 도움은 아니다. 어쩌다 거친 바다로 나왔지만 파라오가 직접 관리하는 평화로운 나일 강이 더 익숙할 이들이다.
영웅들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적어도 싸움에 익숙한 이들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지금 이곳에 딱 4명 있다. 아, 파라오도 생각이 있으니 호위 무사들을 몇 붙여줬으니 그들 역시 애쓰고는 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결국··· 이 작은 머릿수를 극복하려면 어떤 수단이 필요하다.
“파, 파리스 님? 무얼 하시는지요? 왜 무기를 내려놓으십니까?”
선원 하나가 내게 묻는다. 그래도 내가 제일 말이 잘 통하니 선장이고 선원들이고 내가 가장 친숙한 모양이다. 나머지가 워낙 사람 같지 않은 것도 있고.
그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이깁토스에서 내 이미지가 그렇게 괴상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납치해간 이들 중 태반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돌아온 태반은 갑자기 ‘이상한 신앙’에 미쳐서 동료들을 데려가려 애쓰니···.
파라오 암살범에 사이비 교주라. 이것보다 더 이미지가 나쁠 수는 없겠다.
그리고, 나는 내가 왜 그런 이미지가 됐는지 잘 알고 있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시오.”
“예?”
나는 굳이 더 답하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내 손안에 오랜만에 묵직한 무게감이 쥐여진다. 다시 망치를 흔들자 이번에는 불꽃이 일어난다.
“마, 마, 맙소사···.”
“아문, 아문이시여!”
선원들의 비명에 가까운 탄성 따위 무시하고 나는 선수 쪽으로 나아간다. 인어 서너 마리가 덤벼드니 나는 망설임 없이 망치를 던졌고.
망치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궤적을 그리며 인어들을 도살하기 시작했다.
“아니, 저런 걸 왜 여태까지 안 쓰고!”
오디세우스가 외치고.
“썼으면 어떻게든 무력화하려고 했을 거 아니오?”
나는 답했다. 내 대답에 오디세우스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리고는 다시 칼을 휘둘러 가까이 다가서던 인어 한 마리의 이마를 쪼갠다.
그래, 이렇게만 하면 버틸 수 있다. 어떻게든···.
[이방의 왕자여.]‘저것’이 올 때까지는.
갑자기 선수 앞으로 50걸음 정도 될 거리에서 물기둥이 치솟아 오른다.
물기둥은 수십 미터 높이까지 솟아오른 뒤, 서서히 어떤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다.
검푸른 물은 무언가의 몸이 되고, 흰 거품은 수염과 머리칼이 되니 강건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팔을 들어올려 해수면을 때리니 거대한 파도가 우리를 덮쳐 온다. 선수의 장식이 부서지며 배가 뒤쪽으로 크게 기운다.
선원들이 급히 기도문을 외며 움직이고, 인어들과 다른 모두 역시 충격에 살짝 몸이 위로 떠오른다.
[‘내’가 너를 죽여야 하리라.‘바다’가.]
나는 저것의 이름을 안다.
“···아루나.”
[너를 죽이고, 네 도시를 부수고, 네 도시의 신전들을 차지하며, 광영을 차지하리라.]마치 거대한 고래의 울음소리처럼, 뱃속에서부터 울리는 목소리가 내 귀를 먹먹하게 한다. 온몸이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나갈 것만 같다.
[광영을.]그리고 거대한 노인의 손이 나를 덮치려 할 때.
-콰드드득.
무언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찢어지는 비명이 울린다.
[역겨운 종자가···.]마치 심해 생물이 뿜어낼 듯한 푸른빛의 어른거리는 섬광이 배를 향해 몰려오는 물줄기들을 쪼개어버린다.
이번에는···
익숙한 목소리다.
그 빛이 현현하자 갑자기 또 다른 무리의 인어들이 다가온다. 마치 아카이아의 전사들이 그러하듯 청동으로 된 흉갑을 걸친 인어들이 헐벗고 눈이 충혈된 인어들과 다툰다.
[누구도 네놈을 향해 제례를 치러주지 않을 훗날이 그리도 두렵던가.]빛은, 역시 사람의 형상으로 화한다.
그러나 저 흔들리는 물기둥처럼 단지 물보라로 빚은 어설픈 인형(人形)이 아니라, 뼈와 살과 머리칼을 갖춘 인간의 모습이 빛 속에서 드러난다.
아카이아인들이, 에게 해의 뭇 백성들이 그 모습을 돌과 나무에 새기고 흠숭하니.
“포세이돈이시여!! 적들을 쓸어내어 주소서!!”
오디세우스가 화색이 되어 외치니, 바다의 왕은 답하지 않고 곧장 저 이신(異神)의 물기둥을 향하여 달려든다.
그 순간 폭풍과 폭풍이 부딪히고, 저 수면 깊숙한 아래의 지반이 흔들리며, 대기가 미친 짐승처럼 날뛰기 시작한다.
구름과 구름이 뒤엉킨다. 파도가 이빨처럼 서로를 향해 달려들어 깨물고 할퀴고 부순다.
-콰르르르륵!!!!
그리고 인간의 형상을 한 신과 자연의 신이 서로 다툰다.
인어들은 어느새 자기들끼리 다투더니 어딘가로 흩어진다. 인간들은 모두가 외경심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우위는 명확했다.
[야만인들!! 야만인의 우상들!!]그리 지껄이던 아루나의 형상이 조금씩 무너지고 일그러진다.
[벌레들이 바다를 차지하니 나의 제국이 뭍에 머무는도다!! 나의 신전에 벌레가 들끓고 가시덤불이 덮인다!! 먼지가 쌓이고 발걸음이 끊긴다!!]‘그것’은 발악한다.
악을 쓰며 포세이돈에게 저항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의 말을 들으며 깨닫는다.
하투샤에는 통일된 신화가 없다.
하투샤를 세운 네샤인들의 신, 거기에 후르리인들과 루위인들의 신,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온갖 신들이 공존하면서 수천의 신들이 하투샤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동일시되지도 않고 단일한 체계를 이루지도 않는다.
마치 로마에서 그리스의 신들과 이집트의 신들에 대한 신앙이 함께 유행했듯이. 네샤인들의 숭배를 받던 아루나 외에도, 바다를 다스리는 수많은 신들이 하투샤로 밀려들어왔으리라.
그리고 내가 알기로 하투샤에 아루나를 위한 대단한 제의 따위 없다. 강대하고 대단한 신도 아니고, 그저 텔라피누 등 다른 유명한 신들의 이야기를 장식하는 들러리일 뿐.
하투샤는 해양제국이 아니니까.
나일 강을 척추 삼아 자라난 아이깁토스에 나일 강과 그 강물, 생명을 상징하는 신들은 많아도 바다를 다스리는 신은 그닥 중요하지 않은 잡신인 것과 같다.
[대왕의 발 아래 바다가 놓인다면! 그리하여 야만인들을 몰아낸 위에 거대하고 잔잔한 호수가 일어난다면···!]이것은 고독한 발악이다.
이제야 많은 것이 설명된다. 아루나가 이미 안탄드로스의 위험성을 알고 그를 죽이고 부수려 하는데, 어째서 하투샤의 대왕과 다른 이들은 움직임이 그토록 적었는가?
그는 중요하지 않은 신이니까.
그는 홀로 움직였고.
[나는 대지를 뒤흔들며 광대한 영역을 내 발 아래 놓았도다.]그리하여 패했다.
삼지창이 거대한 물기둥의 심장을 꿰어낸다.
[크아아아아악!!!!] [나는 세상을 셋으로 갈라 그 조각 중 하나를 다스리는 크로노스의 아들이며, 올림포스의 권좌를 차지하였으니.]푸르른 옷을 걸친 채 안광을 빛내는 위대한 신이, 네샤인들의 ‘바다’를 짓부순다.
[내가 곧 ‘바다’다.]물기둥이 무너진다. 하늘의 먹구름이 찢어지며 서광이 배를 향해 비추자, 소금물 범벅이 된 인간들이 겨우 그에 의지해 몸을 말린다.
높이 솟구친 파도들을 밟고 선 노인이··· 조용히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어느덧 하늘은 맑아오고, 파도는 잔잔해진다. 배는 이곳저곳에 상처가 남고 인어들의 시체가 널부러져 엉망이지만 그래도 모두들 살아남았다
그 위에서 황금처럼 빛나는 청동 갑주가 노인의··· 아니, 바다의 가슴팍에서 어른거린다.
그는 우리를 잠시 둘러보더니, 곧장 수면 아래로 사라진다. 감사의 뜻을 표할 틈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그리고 바다는 고요했다.
참수작전
“저··· 파리스 님?”
더럽게 헤맸다.
망할 물귀신 잡귀 하나 때문에 웬 생고생을 다하고, 배 위에서 칼부림 난동이나 부렸다.
그나마 그냥 물에 던져버릴 것 같던 인어 시체를 아이깁토스인 선원들이 귀중품이라며 비늘이니 이빨이니 뼈니 챙겨서 이득(?)을 봤지.
결국 항로도 놓쳐서 하마터면 하투샤 입 안에 제 발로 들어갈 뻔했었다.
그렇지만 별 수가 있나? 배는 전복 직전까지 갔었고 식량이든 식수든 뭐든 죄다 쓸려나가거나 오염돼서 쓸 수 없게 됐는데. 상륙해야지, 뭐.
그래도 나 정도 이쁨 받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포세이돈이 제깍제깍 와서 구해주기도 하고 그러지.
오디세우스랑 아킬레우스랑 파트로클로스만 있었다?
내가 신이라고 치고 생각해봐도 그닥 살리고 싶지가 않은 것들인데?
딱 뒈지기 좋은 조합이다. 저것들은 사실상 내가 살린 목숨이다.
그럼. 그렇고 말고.
벌써 목숨을 두 번이나 빚졌으니 네놈들은 아카이아로 돌아가기 전까지 히타이트와의 항쟁이랑 이런저런 사업에서 쎄빠지게 굴러줘야 할 것이야.
두 팔, 두 다리 멀쩡히 달고서 고향 땅 밟고 싶다면 말이지.
“파, 파리스 님!”
“음··· 음? 아, 왜 그러나?”
문득 생각에 잠겨 있다가 뒤돌아보니 선장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헌데 막상 내가 부름에 응해 돌아보자마자 선장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내리깐다.
그게 의아해서 옆에 있던 다른 선원들을 휙 둘러보니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나를 어려워한다.
역시··· ‘그거’ 때문인 것 같다.
“파리스 님께서는 혹시 어떤 신께서···”
“인간일세.”
“물론 그렇겠지요. 헌데···”
“선물 받은 걸세.”
내가 불 붙은 뿅망치 쓰는 거 싫어하는 데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소소한 부분에서 계속 귀찮은 일이 생기니까 피하는 거지.
이런 일이 자주 생기면 괜히 기분 좋고 우쭐해지지 않냐고? 그게 제일 위험하다.
타르타로스행 특급 열차를 타고 싶은 게 아니라면야 이런 거에 우쭐해하면 안 된다.
아무튼 기묘하리만치 공손해진 선원들이 머뭇거리는 동안 선장이 용기를 내어 말한다.
“그, 머지 않았습니다.”
“그래. 고향의 해안을 모를 수는 없으니 짐작은 했네.”
우리는 지금 트로아스의 해안을 지나고 있다.
머지않아, 아이깁토스에서 온 배는 어찌저찌 칼리폴리스에 가닿을 수 있었다.
해안에 닿고 보니 헥토르와 다른 이들이 모여 있는데···
“···아버지랑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이노는요?”
이거 좀 섭섭한데.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었던 것)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멀리 갔다 왔는데 이렇게 야박하게 나오시다니.
게다가 이노는 왜 안 나왔지? 이 동네 언니들이랑 노느라 배가 오는 걸 못 봤나?
그렇게 생각할 때쯤 헥토르가 난감한 듯 고개를 젓더니 말한다.
“두 분 다 쓰러지셨다. 네 반려는··· 울면서 근처 숲으로 뛰쳐들어갔고.”
“예?”
뭐라고?
설마 암살 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아루나가 내게 집적거리는 동시에 칼리폴리스에 있는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에게도 무슨 짓을 벌였을 수도 있고··· 하지만 이노는 왜? 충격이 심했나?
“그건, 크흠, 네 배 상태를 보면 알 수 있을 거다.”
“배 상태가 어떻길래···”
아.
테세우스의 배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아테네에서 대대로 배를 보존하면서 부품 다 갈아끼웠는데 그게 어떻게 테세우스의 배냐는 얘기 말고.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르스를 잡으러 떠나면서, 아버지 아이게우스에게 자신이 살아오면 흰색 돛을 달고 죽으면 검은색 돛을 달겠다고 말해놓는다.
그리고 돛 달아끼는 걸 깜빡해서 검은 돛을 달고 아테네로 돌아온다. 아이게우스는 돛의 색깔을 보고 슬픔에 빠져 자살했다. 뭐 이런 머저리가 다 있나.
···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타고 온 배를 돌아보니, 돛대 둘 중 하나는 부러져 있고, 돛은 다 찢어진 데다 노도 반 이상 부러진 걸 그대로 달고 왔다. 선수 역시 짜부라졌다.
배 주위가 온통 피칠갑된 건 물론이다.
척 봐도 나를 태우고 아이깁토스에서 온 것 같이 생긴 배 꼬라지가 이러면··· 오.
“···.”
“···아무튼, 환영한다. 살아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그래, 정말 다행이긴 하지.
“일이야 많았죠.
···그런데 일단 이노부터 찾고 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정말 할 얘기가 많았다.
***
[나? 어? 너? 어어어!! 죽은 줄!!!! 어어어어어!!!! 알고!!!!!!]“···미안해.”
머저리 같은 테세우스.
···머저리 같은 파리스.
밤낮으로 숲속을 돌아다니고 나서야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있는 이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듣자 하니 언니들한테 고래고래 소릴 지르면서 하루종일 벌벌 떨었다는데···
“이모저모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 정도 얼굴이면 그 난리를 칠 만하군.] [돌아가거라. 네 반려가 지금 목이 다 쉬었겠구나.]“여기 약소하지만 사죄의 선물을 남기니, 앞으로도 저희 동생 데이포보스와 제부 이피게네이아를 잘 부탁드리며···”
[예의도 아주 바르군.] [성의 표현이란 걸 할 줄 아는 인간이야! 이노? 너 조금만 더 울다 갈래?] [언니들 다 못돼 처먹었어!!]머리가 산발이 다 된 이노를 네 발로 기고 물구나무 서서 걸으며 장장 네 시간을 들여 달랬다. 그 다음에 우느라 지쳐 녹초가 된 이노를 업고 겨우 집으로 돌아오니.
“파리스 님? 프리아모스 님과 헤카베 님께서 깨어나실 듯합니다!”
“당장 가보지.”
흙투성이에 눈물콧물 범벅이 된 이노를 대강 씻기고 재운 뒤 침실로 달려들어가니 이미 다른 왕들이 모두 거리를 두고서 둘러서 있다.
곧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제들이 물러서자 나는 곧장 두 사람이 누워있는 침상으로 걸어간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더니 곧 열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헤카베였다. 나를 보고 두 눈을 크게 뜨고는 곧장 옆에 누운 프리아모스를 돌아본다.
“파, 파리스? 네가 왜? 맙소사, 여보, 우리 설마···”
아.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다.
“걱정 마시오. 당신은 선행을 많이 쌓았잖소? 분명 좋은 내생을 살 테니···”
거기에 나보다 프리아모스가 먼저 응답하여 말을 꺼낸다. 두 사람이 서로 애틋하게 손을 쥐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나는 감히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경건한 침묵이 지속되었고.
머잖아 두 사람이 나 말고 헥토르와 다른 이들 모두가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이 무슨 착각을 했는지 깨달으면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아무튼 난리였다.
진짜 난리였다.
하필 칼리폴리스를 급하게 확장하느라 안탄드로스에서 데려온 아이깁토스인들이 꽤나 되는데, 이 광경을 보고 걔네가 안탄드로스로 돌아가서는 할 말이 벌써부터 그려진다.
-‘오오,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위대한 자 파리스.’
-‘역시 영험하시다. 헤파이스토스 님은 가장 위대하시며, 파리스 님은 그분의 사도···!’
젠장.
아루나 개새끼. 다방면으로 사람 속을 꼬아놓는 개새끼.
다음에 만나면 물 먹는 x마로 미세한 습기까지 조져버릴 테다. 포세이돈 님, 제발 저 새끼 좀 어떻게 족쳐 주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