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55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저도 그렇고, 제 부모님도 그렇고 말입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니?”
“전··· 아직 제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아.”
내 말에 프리아모스는 이제야 눈치챘다는 듯 살짝 걸음을 뒤로 옮기면서 목소리를 죽인다.
“그래서 그리 작게 속삭이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느냐? 당연한 일이다. 나라도 너처럼 했을 것인데.”
그리 말하면서 프리아모스는 내 어깨를 쓰다듬는다. 나를 달래는 그의 눈에 살짝의 회한과 복잡한 감정이 스치다가, 흩어진다.
“그렇다면, 네 부모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더냐?”
나는 프리아모스가 내게 두 사람을 ‘네 부모’라 말해준 것에 감사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제 부모님이, 아버지를 뵙게 되면 말입니다.”
이것도, 사실 내 욕심 때문이기는 했다.
“그러면 고개를 숙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그분들의 왕이시니 말입니다.”
“···.”
“저는, 죄송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가···”
“네 부모님 두 사람은··· 왕의 혈육이지. 안탄드로스를 다스리는 군주의 근친이니.”
프리아모스의 입이 작게 호선을 그린다.
“그런 이들이 굽실거리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예.”
한 번쯤은, 그랬으면 했다.
여러 왕들의 앞에서 프리아모스의 아들이자, 아겔라오스의 아들인 파리스라고 불려보고 싶었다.
아마존, 미시아, 이타카, 프리기아의 고귀한 왕과 왕자들에게 내 부모는 양치기라고 소개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두 분을 불러왔다. 곧 전승 연회가 이어질 테니까.
사소한 욕심이다.
그냥, 그랬다.
내 말에 프리아모스는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시선을 교환하며 침묵을 지켰고.
“아버지.”
이번에는 내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프리아모스는 싱겁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정말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느냐?”
“···.”
“하여간, 너는 나를 정말 많이 닮은 자식이다.
그게 정말 신기하구나.”
그 말과 함께 프리아모스는 조용히 뒤돌았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약속이 급했지만 상관 없었다. 지금 당장은 ‘아버지’와 보폭을 맞추어 걷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우리는 행선지가 갈려 서로 흩어졌다. 그리고 이번에 복도 너머에서 다시 마주한 이들은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파리스! 아저씨랑 아주머니 오셨다고 말을 왜 진작 안하고!”
“네가 다른 요정들이랑 약속 있다며.”
“지금 애들이 난리잖아!”
“아빠! 우리는! 할아버지랑 할머니! 보러 가요!!”
“나도 약속 끝나면 갈게.”
이노가 복도를 달리며 내 볼을 꼬집고 내 곁을 지나간다. 헛웃음이 터져나온다.
아저씨, 아주머니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는데, 무슨 아직도 나 없냐고 빙글빙글 돌면서 우리 집 앞을 서성이던 열살배기 때처럼 우리 부모님을 불러대니.
이노가 앞서 달려나가고 코리토스와 멍멍이가 그 뒤를 따른다. 셋이서 무슨 술래잡기라도 하는 모양이지.
트로이아 왕궁의 시종들도 이제는 말리기를 포기했는지 슬슬 자연스레 그들을 시선에서 지운다.
곧 그들이 달려간 방에서 엄마아빠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손주들을 끌어안고 뭔가 또 장난을 치나 보다.
나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따라 웃었다.
끔찍한 전쟁이 있었다. 호메로스가 그 행적은 노래한 수많은 영웅들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호메로스가 관심 가지지 않은 이들도, 흙과 분뇨 냄새 나는 양치기들도 살아남았다.
두 번째 사실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정리
개미는 동족이 죽으면 그를 오염원이나 장애물로 생각하고 치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지각이 있는 생물이라면 자신과 교류를 나누던 개체가 죽었을 때, 그를 내버려두지 못한다.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개체의 몸뚱이라도 그를 내버려두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그냥 감정적인 본능 때문일지 모른다. 인간은 그렇게 모질지 못하다. 강아지가 떨고 있으면 뭐라도 덮어주려 하고, 하다못해 인형이 부서지는 모습에도 얼굴을 찌푸린다.
그렇다면, 막 숨이 끊어졌을 뿐인 동족에게는 어떻겠는가. 최소한의 예우라도 해주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네안데르탈인이 거닐던 시절부터 인류는 그랬다.
하지만 원시적인 본능을 넘어서서, 그 생각이 좀 더 추상적인 것에까지 닿는다면 어떨까.
육신의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믿고, 그 무언가의 안식을 위해서라도 동족의 사체를 돌봐주려 한다면.
이 시대 사람들도 귀신을 믿었다.
억울하게 죽은 혼령들이 이승을 떠돈다는 흔한 전설처럼, 제대로 매장되지 못한 시신들은 하데스의 왕국으로 향하기 어려워진다고 믿는다.
일리아스에서 역시, 아킬레우스의 앞에 나타난 파트로클로스의 유령이 자신의 장례를 부탁한다.
조금 더 후세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아이네이스에 나오는 데이포보스는 오디세우스와 메넬라오스에게 온몸이 갈가리 찢긴 모습 그대로 아이네이아스의 앞에 나타난다.
그들의 시신이,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그것이 단지 전설이라고 일축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하데스가 날 위해 산자락에 터널을 뚫어주었는데 어떻게 그의 왕국을 부정하겠나.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로 전쟁이 끝나고, 당분간 모두가 시신의 수습에 역량을 쏟았다.
트로이아인과 그 동맹 족속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카이아인들 역시 여러 왕과 족장들, 그리고 일반 병사들의 시신을 어떻게든 모아서 불사르고 추모했다. 에게 해에서 가장 보편적인 장례 풍습은 화장이었으니까.
그 외에도 하티인들 역시 눈물 흘리며 혈족의 몸을 그러모았고, 유대인과 페니키아인, 아무루인 등등 모두가 끊임없이 평원을 떠돌며 아군의 몸을 장사 치러주기 위해 움직였다.
그 오랜 작업도 슬슬 마무리되어간다.
잔인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모든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들의 불꽃에 먼지 한 줌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이들만 세어봐도 수십에서 수백쯤은 될 것이다. 그 난전 속에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시신은 얼마나 남았겠는가.
그렇기에 수많은 신원 미상의 몸뚱이들, 또는 잘려나간 팔다리들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모아 태웠다.
어느 족속의 것인지 짐작이라도 가는 시신들은 그 방식대로 매장을 하든 어떻게든 했지만, 나머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그날의 전장에서 머지 않은 곳에서 불살라졌다.
신원이 확인된 시신들은 그럴 수 없었다.
메네스테우스처럼 트로이아의 편에서 싸우다 죽은 이들은 정식으로 화려한 장례를 치러주고 그 뼛가루를 화려한 금항아리에 담아 보관했다. 고향에 가서 그 항아리를 묻을 수 있도록.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하투샤 편에 섰던 이들이라든가.
아니면 아카이아 쪽에서도, 너무 명확하게 죄과가 컸던 이들이라든가.
사실 후자에 해당하는 이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메넬라오스의 장례는 트로이아 바깥의 어느 들판에서, 몇 안 되는 참배객들의 애도와 함께 조용히 치러졌다.
그래도 왕이자 지휘관이었으니, 그 휘하의 왕들은 모두가 애도를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트로이아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 말고는.
장작과 함께 불 탄 메넬라오스의 유해를 그와 가장 가까웠던 이들이 거두었다. 조촐한 행사와 함께 장례는 끝났고, 어느덧 해가 저무는 들판에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곳에 네스토르는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끌어안고서.
“···필로스의 왕이시여.”
“아, 나의 어린 벗이여. 오게나.”
나는 그가 끌어안고 있던 항아리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아무 장식 없이 초라한 질항아리다.
그 안에 메넬라오스가 있다.
화장한 그의 잿가루가.
내가 네스토르가 앉은 언덕배기에 함께 주저앉자 노인은 힘없이 주문이나 기도문 같은 것을 외더니···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내가··· 이 항아리를 묻어줄 걸세.”
네스토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돌무더기를 쌓고서, 제례를 진행해줄 생각이라네. 메넬라오스의 친족들과 함께.”
“스파르타에 말입니까?”
내 말에 네스토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나는 알고 있네···. 다시 스파르타의 여왕으로 되돌아갈 틴다레오스의 딸이, 이 아이를 용서치 못할 걸세.
이 아이는, 냉혹하면서 연약했고, 잔혹하면서 동정심 많은 아이였으니까. 거기서 말로 다 못할 악행들을 저질렀을 게야.
속이 썩어들어가는 와중에도 아가멤논의 명령을 아주 잘 따랐겠지. 스파르타인들이 반기지 않을 게 뻔하네.”
그리 말하면서도, 네스토르는 항아리의 뚜껑을 쓰다듬었다. 한 나라의 왕이 마지막으로 잠들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곳이었다.
뚜껑 위로 노인의 눈물이 떨어진다.
“스파르타에 묻어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할 거라면 미케네에 묻어줄 걸세. 그것도 안 된다면 내 도시 필로스에 매장해주겠네.”
“···.”
“···미안하네. 모든 것이 나의 탓일세. 이 모든 일이, 결국 나의 비겁함과 우유부단함으로 말미암은 것일세.
이 아이는 자네에게는 학살자이겠지만 내게는··· 작은 소년 같았네. 어딘가 다쳐 한 치도 자라지 못한.”
그는 내게 고개를 숙인다. 내가 그를 일으켜세우려 해도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내, 내가··· 이 아이를 말렸어야 했네. 이 아이의 상처를 보듬어줬어야 했어. 내가, 이 전쟁을 막았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네. 알량한··· 정말 알량한 죄책감 때문에···.”
노인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운명이 바뀌어 그의 아들이 멤논에게 살해당할 일도 없어졌건만, 그는 외려 더 불행해진 듯 보였다. 그의 어깨 위로 무거운 짐덩이가 놓여 있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입을 열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저는 메넬라오스의 유언을 들었습니다.”
“···.”
“저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그도 자신의 죄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스파르타의 왕은 당신을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형님을 탓하지도 않았죠.”
그는 내게 헬레네에게 속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의 죄를 짊어지고 갔습니다. 그의 의지를 부정하지 마십시오.”
내 말에 네스토르가 눈물 어린 얼굴을 들어올린다.
“그 말을··· 전해 주러 온 건가?”
네스토르의 목소리가 떨린다.
“트로이아의 왕자가 이곳에 오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걸세.”
“그래서 망토를 깊이 눌러 쓰지 않았습니까.”
“소문이 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메넬라오스가 시작한 전쟁이다. 지금 한 줌 재가 되어 항아리에 고이 담긴 이 남자로 인하여 수만이 죽었다.
원래대로라면 그의 목을 잘라 성벽에 걸어놓았을 것인데, 이렇게 장례까지 허용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자비였다.
거기에 트로이아의 왕자가 참여했다는 것은···
“맹세코, 머리카락을 던져주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그가 오해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시신에 머리카락을 던진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이다. 나는 나의 머리칼을 그를 위해 바치지는 않았다.
그의 죽음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다. 그 삶의 궤적이 내게 동정심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정치적 위험을 감수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저는, 그저 지켜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원수의 초라한 장례식을 보며 잔인한 복수심을 충족시킨다든가 하는 것도 아니었다.
-“제피···로스···셔서···감···사···.”
그저··· 그의 유언을 들은 이로서의 의무감일 뿐.
그뿐이었다. 그에게 목숨을 빚진 자로서, 그 죽음을 지켜본 자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이었다.
나는 슬슬 몸을 일으켰다. 잔디의 이슬이 묻은 허벅지가 차가웠다. 그 물방울을 털어내고 떠나려니 네스토르가 슬며시 내 옷깃을 붙잡고 말한다.
“···고맙네.
그것만으로도, 나는···”
나는 울먹이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작은 배려였다.
내가 그 언덕을 벗어나자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내게 외투를 건넸다.
메넬라오스의 유언이라.
나는 문득 생각나서 시종에게 물었다.
“스파르타의 여왕께서 어디에 계신지 아는가?”
***
여자는 천천히 잿더미 사이를 오갔다. 타버린 나무 기둥과 그을음이 묻은 돌벽을 지나보니 그곳에는 비밀 문이 있었다.
열려 있었다.
···결국 끈질기게 오가더니, 결국 메넬라오스는 그녀가 숨어 있던 곳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헬레네는 열려버린 비밀 문을 내다보면서 복잡한 상념에 잠긴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끌어안고 숨죽이던 며칠.
탈출하던 그때 메넬라오스와 마주하고 느꼈던 공포감과 당혹감.
그 기분을 되새기며, 다시 비밀 공간 안으로 들어가 볼까 싶어 발을 들였다가···
-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휙 돌린다. 그러자 그곳에는 개들이 있다.
어쩐지 익숙한 모습의, 더럽고 때투성이가 된 들개들.
아니다. 들개라고 하기에는 사람 손이 탄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왜지? 어째서 익숙한···
“보레아스.”
···아.
“노토스, 에우로스.”
익숙한 목소리가 그 이름을 부르자 개들을 고개를 훽 돌린다. 그제야 헬레네는 왜 그 개들의 모습이 익숙한지 알아챈다.
그자가 기르던 개들이다.
그리고 그 개들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녀가 지난 체류 동안 사력을 다해 피해 다니던 남자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파리스는 개들에게 다가간다. 그것들은 경계하면서 몸을 움츠릴 뿐 다가가지는 않는다.
“저··· 개들의 이름을 알고 계신 건가요?”
“예. 부탁을 받아서.”
‘부탁’을 받았다.
그 말에 헬레네의 얼굴이 굳자 파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넬라오스의 부탁이 맞습니다. 그의 유언이었습니다.”
“유언···이요.”
헬레네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파리스를 보고 쿵쾅거리는 가슴을 달래야 했고, 메넬라오스라는 이름이 불러온 감정적인 요동을 잠재워야 했다. 순간 머리가 아파 눈살을 찌푸리니 파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이··· 녀석들이 불편하시다면 치워두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개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것들은,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부른 파리스를 경계한다. 주인을 기다리는 듯하다.
그 주인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데.
“개들 때문에 오신 건가요?”
“아니오. 헬레네 님을 찾아서 왔습니다.
메넬라오스의 최후를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
헬레네는, 잠시 머뭇거린다.
그 끔찍한 남자, 창백한 남자, 언제나 겁에 질린 듯 사방을 경계하던 남자.
그녀를 학대한 남자.
-“제가 저지른 모든 일을 후회합니다. 헬레네 님께서 이를 듣고 흡족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께서 느끼실 승리의 기쁨과 복수의 쾌감이 경감되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기이한 남자.
“듣고 싶지 않으시다면 듣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지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알려주십시오.”
그 말에 파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메넬라오스는···.”
그의 붉은 입술이 달싹거린다. 머뭇거리며 파르르, 꽃잎처럼 떨린다.
“···끝까지 자기 변명을 일삼았습니다. 헬레네 님과 트로이아를 저주하면서 죽었습니다.”
“···.”
파리스는 그 말을 끝마치고서도, 한참을 머뭇거리면서 헬레네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불신을 감지한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전해 달라더군요.”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까?”
“···끔찍하고, 이상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사람이, 다 이상하죠.”
파리스는 그리 말하며 피식 웃는다. 왕자의 저 떨리는 얼굴이 아름답다. 치켜 올라간 저 뺨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만’ 한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마주 웃었다.
“그렇죠. 사람이 다 이상하죠.”
혈혈단신으로 죽을 위험을 무릅쓰 아카이아의 장군들을 유인하기도 하며.
죽은 혈육이 원한다면서 이웃나라를 침공하기도 하고.
정작 기회가 왔을 때는 그 혈육의 열망을 배신하고서 자살이나 다름 없는 길을 택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