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es, Demons & Villains RAW - chapter (186)
184그녀의 우아한 하루
그녀의 아침은 빠르다.
해도 뜨지 않은 꼭두새벽부터 졸린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나 바닥에 던져둔 속옷을 주워 입고 흐트러진 잠자리를 정돈한다.
그리고 옷을 마저 갖춰 입은 뒤, 부엌에서 물통을 챙겨 샘으로 간다. 자신이 통째로 들어가고도 남을 물 항아리 세 개를 가득 채울 때까지 맑은 샘물을 담아 오는 걸 반복한다.
물론 저번에 개축 공사를 하면서 집 바로 앞에 우물까지 만들었기에 굳이 숲에서 물을 퍼 올 필요는 없지만, 그녀는 샘물을 고집했다.
이 샘물이 가장 좋다는 걸 숲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물을 떠 오는 것은 준비 작업일 뿐, 그녀의 진짜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식사에 쓰일 식재료를 골라 뽀드득뽀드득 씻어 두고, 항아리 하나 분의 물을 끓여서 대리석으로 된 욕조에 부어 두고 물통을 들고 뒤뜰을 돌아다니며 꽃밭과 텃밭에 물을 주는 등, 잠시도 멈추지 않고 집 안팎을 오가며 아침을 준비하다 보면 문뜩 들리는 목소리.
“…이런, 오늘도 제가 늦었군요.”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반짝거리는 금발의 여인.
방금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으로 집 안팎을 가볍게 둘러본 여인은 그녀를 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매일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할 일을 다 해 버리니, 이러다 제가 게으름뱅이가 돼 버릴 것 같네요.”
여인의 가벼운 농담에 그녀는 빙긋 미소 지었다.
항상 자신 다음으로 먼저 일어나는 이 성실한 금발 여인이 게을러진다는 게 얼마나 있을 수 없는 일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청소 정도는 제가 할 테니, 쉬고 계세요.”
그 간곡한 부탁에 살짝 고개를 젓는다. 여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일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제가 바깥 청소를 할 테니, 대신 집 안 청소를 맡아 주시겠어요?”
결국, 이어진 것은 타협.
언제나처럼 남은 일을 분담해 여인과 함께 청소를 마무리 짓는다.
이왕이면 식사 준비까지 마저 하고 싶지만 오늘은 안 된다.
“아침 식사 당번은 아리스니… 그때까지는 시간이 남겠군요.”
할 일을 다 한 것을 확인하고 검을 꺼내 온 여인을 보고도 그녀는 의아해하지 않았다.
여인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는 건 집안일을 돕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검술의 단련도 목적이라는 걸 매일 지켜본 만큼 알고 있었으니까.
“보고만 있기 심심하실 텐데. 괜찮으시다면 저랑 대련이라도 하시겠어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여인이 건넨 정중한 권유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검을 단련하는 것을 싫어하진 않지만, 이 이른 아침부터 여인과 검을 겨루면 여러모로 폐를 끼칠 테니까.
그런 대답을 예상한 듯 여인은 빙긋 웃으며 검을 들었다.
그렇게 여인의 훈련을 지켜보는 사이 어둑어둑하던 하늘에 희미한 여명의 빛이 떠오르며 하품 소리가 허공을 울린다.
“하아암…, 아침부터 열심이시네요.”
졸음기 가득한 목소리를 토해 내며 눈곱 낀 얼굴로 집에서 걸어 나온 까무잡잡한 인간 암컷의 말에 여인은 휘두르던 검을 멈추고 빙긋 웃으며 인사한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크리스 사제?”
“네에, 자긴 잘 잤는데요…. 아침부터 기분 나쁜 걸 봐서, 일진이 나쁠 거 같아요.”
[기분 나쁜 거, 너]그 말을 냉큼 받듯.
인간 암컷을 따라 나오며 손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하늘색 머리에 멍한 표정을 한 소심쟁이를 힐끔 돌아보며 인간 암컷은 생글생글 웃는 표정을 짓는다.
“아, 혹시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저, 벙어리 목소리를 듣는 법 같은 건 몰라서요.”
천진난만한 말투와는 딴판으로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이 담긴 그 말에도 소심쟁이는 주눅 들지 않았다.
단지 멍하니 손짓했을 뿐.
[괜찮음. 귀머거리, 말 못 듣는 거 당연]“아하하, 그거 참 옳으신 말씀이네요.”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인간 암컷.
[나, 똑똑. 틀린 거 너, 당연]여전히 멍한 얼굴로 가운데 손가락을 세운 소심쟁이.
“에이, 그건 좀 아니죠. 제가 이래 봬도 스승님한테 똑똑하다는 칭찬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요. 푼수라는 말만 들은 댁이랑 다르게요.”
[똑똑하다 아님, 교활. 칭찬이 아닌, 욕]“…지금 스승님이 절 욕했다고 하신 건가요?”
[긍정]빙산처럼 얼어붙은 회색 눈동자, 살기로 번들거리는 녹색 눈동자.
두 시선이 교차하고 둘의 주먹이 살짝 쥐어지며 아침 공기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인 순간, 그녀는 손을 놓았다.
탕!
물통이 땅에 떨어지며 산산이 깨어진 정적 속에, 인간 암컷과 소심쟁이는 그녀를 살짝 돌아봤다가 동시에 주먹을 폈다.
“칫, 운 좋은 줄 아세요. 아침 기도할 시간만 아니었어도, 본때를 보여 줬을 테니까요.”
그렇게 마지막까지 한마디도 지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던 둘이 획 등을 돌려 각자 집 안과 숲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금발의 여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곤란한 분들이네요. 각자 사제나 신관으로는 훌륭하신데 말이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인간 암컷이나, 소심쟁이나 신의 종으로서는 모범적인 이들이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를 하고 성실하게 집안일을 도와주니까.
볼 때마다 서로 으르렁거리기는 것만 빼면 꽤 좋은 식구라고 할 수 있었다.
“라네스 님, 아침 기도 받으셔야죠!”
“우웅…. 크리스 사제…, 그 신심은 참 고맙지만요…. 저,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요…?”
“안 돼요! 훌륭한 사제가 되려면 기도는 꼬박꼬박 챙겨야 한다고 스승님이 그러셨다고요!”
“이미 사제 전사이자 사제장이면서…, 얼마나 더 훌륭해지고 싶으신 건가요, 크리스 사제는…?”
…물론 자기가 기도하기 위해서 졸려 하는 신을 억지로 깨워 놓고 오늘도 스승을 죽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서 신에게 한숨을 내쉬게 하는 저 인간 암컷에는 주의가 필요하지만.
푹, 푹!
…마찬가지로 언제 인간 암컷이 달려들거나, 악마와 싸워도 이길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해서 만든 성수를 몰래 땅을 파서 묻어 두는 저 소심쟁이에게도 비밀 구덩이를 백 개나 파 뒀으면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타이르고 싶지만, 그녀는 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 두 사람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단지 금발 여인을 돌아봤을 뿐.
“네, 오늘 훈련은 이만 끝내야겠군요.”
검을 내려놓은 여인과 함께 그녀는 마당에 있는 우물로 갔다.
그리고 옷과 속옷을 벗고 우물물로 깨끗하게 몸을 씻었다.
“…정말 거리낌 없으시군요.”
일부러 욕실까지 들어가 몸을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나온 금발 여인이 건네준 또 하나의 수건을 받아 물기로 촉촉하게 젖은 알몸을 닦으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인의 미묘한 표정이 숨겨진, 주인이 이 모습을 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공감할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수는 없었으니까.
쿵쿵쿵!
[뀌익! 배달 왔다!]그렇게 그녀와 금발 여인이 몸을 정돈하고 집 안에 들어온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허공을 열고 나타난 것은 목에는 커다란 진주목걸이를 감고 황금 왕관과 비단 망토를 두른 아기 돼지.
아니, 돼지 모습의 요마는 대뜸 망토를 젖혔다. 그리고 두루마리 통을 우르르 쏟아 내고 통통한 앞발을 내밀었다.
그 난데없는 요구에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단지 돼지의 뒤로 시선을 향했을 뿐.
“오늘은 얼마입니까?”
[꾸익, 뀌익! 황실 서류 27통. 카산드라 서류 36통 배달했다. 배달료 금화 66닢 줘라!]“불합리합니다.”
[꾸익?! 뭐가 불합리하냐?!]“서류 한 통당 금화 한 닢 아닙니까? 그런데 왜 금화 63닢이 아니고 66닢입니까?”
방금 잠에서 깼음에도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부터 주름 한 점 없는 동방식 드레스나 잠기운 따위는 일절 없는 차분한 말투까지 더없이 깔끔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보는 새침데기의 지적에 아기 돼지는 움찔하며 변명했다.
[세, 세 닢은 부가세다!]“저는 당신에게 부가세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뀌익, 안 주면 파업할 거다!]“하려면 하십시오. 대신 이걸로 저희 거래는 끝입니다.”
[꾸익?!]“그리고 오늘 수당도 없습니다.”
[꾸이이익!? 그게 무슨 악마 같은 소리냐?!?!]상상도 못 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이 반쯤 튀어나온 아기 돼지.
그 앞에 돈주머니를 던지며 새침데기는 딱 잘라 말했다.
“해고당하고 싶지 않으면 그거나 받고 가십시오.”
[악덕 고용주! 두고 봐라, 요마 노조에 고소할 거다! 뀌익, 뀌익!]그렇게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돈주머니를 주워 든 아기 돼지가 공중제비를 넘어 펑 하니 사라진 뒤, 수북한 두루마리를 보며 침묵하는 새침데기에게 금발 여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나르는 걸 좀 도와드릴까요?”
“…운반비는 합리적으로 드리겠습니다.”
“후훗, 이 정도 일에 대가는 필요 없어요.”
“일하면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 합리적인 일입니다.”
너무나 새침데기다운 말에 그녀는 빙긋 웃었다. 굳이 대가를 제시하려는 것은 새침데기 나름대로 감사를 표하는 방식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옥신각신한 끝에 서재까지 두루마리 통을 날라주고 다시 밑으로 내려왔을 때, 그녀와 금발의 여인을 맞이한 것은 차가운 얼굴을 한 은발의 소녀였다.
“안녕.”
“좋은 아침이에요. 아리스.”
잠기운이 남아 있음에도 애써 안 졸린 척하며 은발의 소녀는 힐끔 그녀를 보았다.
“식사 준비, 아직 안 했지?”
“오늘 당번은 아리스니까요.”
“물은? 이미 떠 놨어?”
“네, 데우기만 하면 돼요.”
“…알았어.”
해야 할 일을 확인하고 수프를 끓이는 한편, 욕조에 가볍게 손을 담그고 짧은 주문을 외우는 것만으로 차갑던 물을 팔팔 끓이는 소녀를 그녀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었지만, 어차피 거절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소녀가 아침 준비를 마쳤을 무렵 멀리서 어떤 기척을 느끼고 그녀는 날개를 조금 움찔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소리 없는 조용한 걸음으로 집의 중심부에 있는 하나의 방으로 향했다.
끼이익.
“노크는 하고 들어오라고 했을 텐데.”
살며시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넣자 툭 튀어나온 냉엄한 질책에도 그녀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단지 빙그레 웃으며 막 일어난 주인에게 다가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시중들었을 뿐.
“…흥.”
그런 그녀가 불편한 듯 차가운 코웃음을 치면서도 주인은 그녀의 시중을 받아들였다.
침실 옆의 문을 열고 욕실로 들어가 호리호리한 몸에 두른 잠옷을 거두고, 따스하게 데워진 욕조에서 몸을 씻고 뽀송뽀송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뒤, 준비한 옷을 차례차례 입힌 후 띠를 조여 고정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하얀 머리카락을 정리해 끈으로 단정하게 묶기까지 모든 시중을 마친 뒤에야 그녀는 만족하며 손을 뗐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주인을 따라 식당에 가자 그들을 맞이한 것은 풍성한 식탁. 그리고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아침 인사를 건네는 여인들과 어느새 주인의 뒤에 나타나 먹잇감을 휘감는 거미처럼 주인을 끌어안는 악마.
“꽤 맛있는 냄새가 나는구나.”
“식사를 하고 싶다면 자리에 앉도록.”
“알지 않더냐. 내가 탐내는 것은 식탁 위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내 알 바 아니다.”
“후후, 여전히 거짓말을 잘하는구나.”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주인의 턱을 간지럽히던 악마가 음울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며 작은 신이 눈을 치켜뜰 때, 정작 자신은 식당을 둘러보고 금발 여인에게 시선을 향하는 주인.
“폐하께서는?”
“그것이….”
이 자리에 빠진 한 명을 묻는 질문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금발 여인.
그런 그녀를 대신하듯, 갑자기 옆에서 뻗어 나와 주인을 빼앗듯이 끌어안으며 도도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은 유독 풍만한 몸을 가진, 붉은 머리의 여제.
“이런, 짐의 품이 그리웠다면 진작 말하지 그랬는가. 그럼 어젯밤을 즐겁게 보냈을 텐데 말일세.”
“…이제야 기침하신 겁니까?”
“그렇네만?”
“늦잠을 주무시는 건 자유입니다만, 그런 차림으로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은 자제해 주십시오.”
“짐의 차림이 뭐 어쨌다는 말인가?”
속이 비칠 듯 얇은 잠옷 차림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실로 당당하게 주인을 끌어안고 있는 여제와 졸지에 주인을 뺏겨 눈을 가늘게 뜨는 악마, 그 모습을 보며 싱글거리는 작은 신과 곤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금발의 여인, 여제를 째려보는 은발의 소녀, 몰래 달려들 준비를 하는 인간 암컷, 인간 암컷의 발밑을 얼리는 소심쟁이, 안 보는 척 주인을 훔쳐보는 새침데기, 거기에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는 주인까지.
온갖 감정이 뒤엉킨 아수라장 속에서 이번에는 또 뭘 떨어트려야 할지 고민하며 그녀의 하루는 시작을 고했다.
** *
식사를 마친 뒤에도 그녀가 할 일은 많았다. 소녀와 함께 빈 식기를 정리해서 소심쟁이와 인간 암컷에게 설거지를 맡긴다.
주의할 점은 절대 같이 주면 안 된다는 것, 그럼 싸우다가 그릇을 다 깨 먹는다.
대신 설거지를 반씩 나눠 주면 경쟁하느라 열심히 하므로 그럭저럭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
“흥, 제가 신전에서 설거지만 몇 번을 해 봤는데요. 이런 벙어리보다 배는 빠르게 할 수 있다고요.”
[속도, 기본. 깨끗하게 잘 닦는 거, 중요]“제가 씻은 그릇도 깨끗하거든요?”
[근묵자흑. 더러운 마음, 그릇에 묻음]설거지하는 내내 툭탁거린다는 아주 사소한 단점이 있긴 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부엌은 방음이 잘돼 있으니까.
그렇게 둘이 설거지를 하는 사이 새침데기의 값비싼 다과를 꺼내고, 여제가 황궁에서 챙겨 온 차를 끓인다.
집안일에는 도움이 안 되는 두 사람이지만 그만큼 이런저런 것을 많이 가져오기에 두 사람이 그녀는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챙겨 주는 게 많은 만큼 주인을 잘 모실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일거리를 나눠 줘야 할 필요도 없고.
“언제 봐도 놀랍군. 라베라 티를 이렇게 완벽하게 내 입맛에 맞춰 끓일 수 있는 시녀는 황궁에도 드문데 말일세.”
자신이 끓인 차를 맛보고 여제가 토해 낸 짧은 탄성에,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기껏해야 한 달 전, 주인을 모시기 전까지만 해도 차를 끓이는 법도 모르던 그녀였지만 배우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어떡하면 차를 맛있게 끓일 수 있고 우유나 설탕을 얼마나 넣어야 각자의 입맛에 딱 맞을지 세계가 그녀에게 알려 주었으니까.
“그대, 혹 나의 것이 될 생각은 없는가?”
어지간히 그녀의 차가 마음에 들었는지 여제는 노골적으로 영입을 권해 왔지만, 그녀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녀의 주인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흐음. 뭐, 좋네. 어차피 키렐의 것은 짐의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코드가 언제부터 당신 게 됐는데?”
“그야 짐이 황제가 되었을 때부터 아니겠는가? 땅부터 사람까지, 제국의 모든 것은 짐의 소유이니.”
“그 잘난 제국, 한번 망하게 해 줄까?”
“호오, 과연 가능하겠는가?”
은발의 소녀가 째려보고 여제가 여유롭게 웃는 가운데 간단하게 티타임을 끝낸 뒤, 그녀는 금발의 여인과 함께 각 방을 돌아다니며 빨랫감을 수거해 깨끗이 세탁한 뒤, 빨랫줄에 널었다.
사람의 숫자가 숫자다 보니 빨랫감도 적은 양은 아니었지만, 체력만은 넘쳐나는 금발 여인이 도와준 만큼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문제가 되는 건 몇몇 드레스들, 그냥 물로 빨면 옷감이 망가지는 만큼 그런 옷들의 처리 방법은 조금 특별했다.
“아르넬타, 태워.”
화르륵!
은발의 소녀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이글거리는 불꽃이 드레스를 휩쓸며 모든 오탁을 불사른다.
잠시 후 불꽃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막 지은 것처럼 깨끗한 드레스뿐.
악마들도 혀를 내두르며 감탄할 놀랍도록 섬세한 마도.
“다음부터는 다른 빨래도 그냥 나한테 맡겨.”
이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듯 차가운 얼굴로 말하는 은발의 소녀를 보며 그녀는 빙그레 웃는다.
아무리 마도를 얻은 소녀라도 이토록 섬세한 작업이 쉽지는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처음에 이 수법을 연습하려고 몇 벌이나 되는 옷을 태워 먹었고, 그 잔해를 어디에 몰래 버렸는지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는 그녀에게 은발의 소녀 허세는 귀엽게 느껴졌다.
만약 지금 그것을 지적하면 귓불까지 새빨개진 모습을 볼 수 있겠지만 굳이 소녀를 부끄럽게 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녀는 부드럽게 제안을 사양하고 막 빨래를 널고 있던 금발의 여인에게 몰래 다가가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었다.
“또 제크가 오고 있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간 소년의 위치는 저 멀리, 이제 막 집을 벗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인간 소년이 어떤 계획을 짜고 어떤 루트를 통해 몰래 숨어들어 어떻게 은발의 소녀를 만나려고 하는지 그녀는 이미 샅샅이 간파하고 있었고. 예전에 부탁받은 이후, 지금까지 계속 전해 주었던 것처럼 금발의 여인에게 그것을 고스란히 알려 주었다.
“…어지간하네요, 그 아이도. 이만하면 포기할 때도 된 거 같은데요.”
그 열정에 대한 감탄과 그 민폐에 대한 한탄이 섞인 실로 깊고도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금발의 여인은 빨래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죄송하지만 남은 빨래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녀는 미소와 함께 빨래 바구니를 맡았다.
그리고 열심히 땅굴을 파는 인간 소년을 찾아 숲으로 들어간 금발의 여인을 대신해 빨래를 마저 빨랫줄에 널고 간단하게 집 안 청소를 한 뒤 집 한편에 따로 준비돼 있는 서재를 찾아간다.
“그렇게 하시면 예산 초과입니다.”
“무엇을 고민하는가? 돈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을.”
“새로운 화폐라도 찍어 내실 셈이십니까?”
“아니, 탐관오리들의 재산을 압수해 볼까 하네. 그럼 부족한 예산 정도는 해결될 터이니.”
“그 방안은 작년에도 쓰신 거로 기억합니다만.”
“일 년은 긴 시간이니 말일세. 처형을 각오하고 짐의 주머니를 채워 주려는 충신들이 매년 새로 생기니, 이야말로 짐의 인덕이 아니겠는가?”
“인덕이라는 말의 뜻은 아십니까?”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책상에 싸인 서류를 척척 처리해 가는 여제와 새침데기 사이를 지나가, 서재에서 책 한 권을 살짝 꺼내 와 방에서 기다리던 주인에게, 무릎을 꿇고 바친다.
“…이만 가 봐도 좋다.”
책만을 건네받고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차갑게 축객령을 내리는 주인. 그 무뚝뚝한 태도에도 그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다시 방을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어라어라, 여기는 웬일이신가요?”
오늘 점심 식사 당번을 맡아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작은 신은 그녀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부엌 한쪽을 살짝 가리키자,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서 즐겁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스를 만들던 인간 암컷을 바라보았다.
“크리스 사제, 또 오라버니의 요리에 독을 넣었나요…?”
“에이, 그럴 리가요. 독은 안 넣었어요.”
“그럼 뭘 넣으신 건가요?”
“미약이요!”
빈약한 가슴을 활짝 펴고 자랑스럽게 대답한 짐승 암컷….
아니, 인간 암컷을 보고 살포시 한숨을 내쉬며 작은 신은 부엌 밖을 가리켰다.
“…크리스 사제. 나가서 손들고 계세요.”
“네에?! 왜요!?”
왜 자신이 혼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억울해하던 인간 암컷이 쫓겨난 뒤 대신 작은 신을 도와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한편 인간 암컷이 만들다 남긴 소스를 자연스럽게 주인의 요리에 뿌리려던 작은 신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 신에 그 사제라고.
** *
간신히 멀쩡한 요리를 준비해 점심시간을 무탈하게 넘긴 후, 집을 나선 주인을 따라 그녀는 숲으로 향했다.
늘 가던 고목 밑에서 주인이 한 권의 책을 펼쳐 들고 조용히 독서를 즐기는 것을 확인하고 숲을 돌아다니며 가장 달콤한 과일과 제일 좋은 향을 풍기는 버섯과 신선한 나물을 채집한다.
오늘 저녁 당번은 그녀인 만큼 가능한 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주인에게 대접할 생각이었다.
푸욱!
메인 메뉴로 쓸 것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암사슴. 한 번 가볍게 검을 휘두른 것만으로 냇가에서 물을 마시던 암사슴을 꿰뚫는다.
그리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피를 빼내고 상하기 쉬운 내장을 빼내 물에 담가 두는 등, 간단한 손질을 마치고 사슴 고기를 집에 옮겨 둔 뒤 그녀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대로 굽기만 해도 맛있을 사슴 고기지만, 몇 가지 재료를 곁들이면 더 맛있어진다.
하지만 그 재료는 가을철에만 나기에 지금 이 숲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얻는 것뿐.
그리고 실로 다행스럽게도 이 주변에는 그 재료를 가진 사람이 있음을 세계가 알려 주었다.
펄럭!
사슴 다리 하나를 챙겨 들고 그녀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리고 숲 위를 가로지르며 날아가 숲과 마을 사이의 외딴곳에 덩그러니 놓인 한 채의 집 앞에 내려섰다.
“제크 네 녀석, 오늘도 두들겨 맞았느냐?”
“그렇죠, 뭐….”
“적당히 하거라. 그러다 골병드는 수가 있다.”
“두고 보세요! 그 녀석의 비겁한 수단은 다 간파했으니, 이제 곧 제가 이길 거라고요!”
“글쎄다. 그럼 좋기야 하겠다만….”
똑똑.
두런두런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가볍게 문을 두드린다.
“응? 손님이라도 왔는가?”
“그램 할아버지한테 오는 손님도 있어요?”
“시끄럽다, 이 녀석아. 내 나가 보고 올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기척이 문가로 다가온 후, 닫혀 있던 문이 슬그머니 열리며 늙은 사냥꾼이 고개를 스윽 내민다.
“누구…?”
그녀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사슴 고기와 식재료의 교환을 부탁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녀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늙은 사냥꾼은 눈을 부릅떴다.
“허, 허억?!”
경악, 충격, 공포, 불신, 절망.
수많은 감정이 뒤엉켜 붙은 얼굴로 입을 뻐금거리는 늙은 사냥꾼.
“요, 용, 요용! 용검, 검…. 끄르르르륵!”
그 눈이 기어코 뒤집어지며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늙은 사냥꾼을 보며 그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 *
겨우 다시 정신을 차린 뒤 엎드려 비는 늙은 사냥꾼에게 사슴 고기 대신, 몇 개의 식재료를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기분 좋게 식사를 준비했다.
이제 맛있는 요리를 해서 주인에게 대접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사이에도 할 일은 있었다.
기어코 숲에서 싸움을 벌여서 주인의 청정을 방해한 인간 암컷과 소심쟁이를 말리다, 결국 검으로 둘 다 때려눕혀서 질질 끌고 돌아오거나 흉흉하게 웃으며 체스를 나누다, 전쟁을 벌이려는 작은 신과 악마를 설득해 다시 신과 악마의 전쟁이 벌어지는 걸 막는 등, 언제나처럼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그녀는 기어코 근사한 사슴 요리를 완성해 저녁 식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우와, 이 요리 진짜 맛있네요. 요리 잘한다고 뻐기던 어떤 벙어리보다 백배는 나아요!”
[귀머거리 요리보다는, 만 배 맛있음]“…세레나. 사슴 수프, 끓이는 법 알아?”
“유감이지만 아리스, 사슴 고기만 쓴다고 이 맛이 나오진 않을 거예요.”
“어라어라, 이건 또 그리운 조리법이네요.”
“확실히, 천 년은 못 먹어 본 요리로구나.”
정성을 들인 보람이 있는지 그녀가 차린 저녁을 맛보고 인간들은 누구나 감탄을 토했고, 신과 악마도 그리움과 함께 만족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녀의 걸작 요리를 먹으면서도 주인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에만 집중했고, 그녀 또한 실망하지 않고, 조용히 주인의 시중을 들었다.
그렇게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식사의 뒷정리를 하고 모두가 거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어쩌다가 갑자기 카드 대회를 벌여서 금발의 여인과 은발의 소녀가 초반에 파산하고, 인간 암컷과 소심쟁이가 멱살잡이를 벌여 결국 둘 다 강제로 퇴장당하고, 무제한의 돈을 쏟아붓는 새침데기를 작은 신이 운을 무기로 삼아 무너트리고 주인이 슬쩍 패를 바꿔치기해서 최종 승자가 될 뻔했다가 악마에게 속임수를 들켜 협박당하는 것을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만들어 내 게임판 자체를 박살 내서 구해 낸다.
그렇게 날이 어둑해지자 결국 하나둘씩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잠자리를 준비하는 가운데, 그녀는 주인의 침실에 따라 들어가 잠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침상으로 향하는 주인에게 살짝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한 뒤 조용히 등을 돌려 침실을 나서려 할 때 들려온 것은, 조용한 한마디.
“…수고했다.”
짧고, 무뚝뚝하고, 나지막해 다른 이라면 듣지 못했을지도 모를, 그러나 더없이 분명한 그 말을 듣고도 그녀는 특별히 놀라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주인의 침실을 나섰을 뿐이다.
세계의 속삭임을 통해 단순한 말과 표정을 넘어 마음 자체를 읽을 수 있는 그녀에게 그 한마디는, 전혀 뜻밖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더 가벼워진 걸음으로 마지막까지 집 안의 정리를 하고, 남아 있던 램프의 불을 끈 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옷을 잘 걸어 두고 속옷을 대충 바닥에 던져둔 뒤 침대에 다이빙해서 푹신푹신한 베개를 끌어안고 데굴데굴 침대 위를 굴러다니며 주인의 한마디를 머릿속에서 되새긴다.
아무리 알고 있고, 당연한 것이라도 직접 듣는 기쁨은 또 남달랐으니까.
그렇게 하루의 노고가 다 날아가고 새로운 활력이 샘솟는 가운데 스르륵 눈을 감는 것으로 그녀의 하루는, 언제나처럼 우아하게 끝을 맺는다.
영웅&마왕&악당 [8권]
지은이 무영자
발행일 2020년 5월 29일
펴낸곳 (주)코핀 커뮤니케이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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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90769-57-0 [05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