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night Flower RAW novel - Chapter 867
867화. 여화(餘火), 타다 남은 불
소용돌이형 건물, 핵심 연구 구역 입구.
갑자기 이곳에 군화 한 쌍이 드리웠다.
장목화의 군화였다.
그녀가 다시 이곳에 돌아온 것이었다.
헬멧 안으로 보이는 그녀의 눈가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 입가엔 엷은 웃음이 어려 있었다.
성건우를 업고 실험 캡슐로 걸어온 장목화는 다시 그를 그곳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로 정신을 뻗어 성건우의 의식을 건드렸다.
이번엔 익숙한 어둠과 미약한 빛 다음으로, 전과 다른 장면이 보였다.
지금 장목화 앞에 보이는 건 성건우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로 각색의 빛을 번득이는, 거의 무너질 듯한 문이 자리해 있었다.
의식을 교류하는 자리에선 장목화도 군용 외골격 장치를 입지 않았다.
모처럼 얼굴을 드러낸 그녀가 성건우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럴 수가. 길을 잃는 바람에 다시 이 기기 옆으로 돌아왔지 뭐야.”
“거짓말!”
그렇게 농담을 좋아하던 성건우도 이번만큼은 전혀 웃지 않았다.
장목화도 쓸쓸히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물었다.
“핵심 구역 전자파 환경, 1분 만이라도 원상태로 되돌리는 건 가능해?”
성건우가 내뱉듯 말했다.
“가능해요, 근데 거절할게요. 절대 안 돼요.”
장목화는 가만히 그의 눈을 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명령이야.”
몇 초간 침묵하던 성건우는 결국 눈시울이 붉어졌다.
“예, 팀장님.”
장목화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 * *
신세계의 핵심 방 안.
이두형 역시 장목화의 복귀를 감지했다. 그가 놀란 눈으로 성건우를 바라보자, 성건우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분입니다.”
“좋아.”
이두형도 비로소 안심했다는 듯 웃었다.
원래부터 본인의 권한을 이용해 마지막 승부수를 걸어보려 했던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이윽고 신세계 전체가 맹렬하게 안쪽으로 수축하더니 한 겹, 한 겹 장벽이 됐다. 그 안에 사명을 비롯한 달지기들이 갇혔다.
꼭 호박에 갇힌 모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음으로 이두형은 여럿으로 나뉘어, 하나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되었다.
그림자는 투명한 장벽 속을 흘러 다니며 사명과 그 일행의 공격을 저지하고, 그들의 힘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막았다.
이건 이두형 혼자만의 힘으론 어려운 일이었다.
성건우 역시 성실한 성건우, 악을 증오하는 성건우, 냉정하고 이성적인 성건우를 분리한 뒤 검은 그림자로 만들었다.
분열된 성건우들은 장벽 곳곳으로 가서 만다라와 사명을 포함한 달지기들에 대항했다. 그에게는 정신력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이를 보고, 깨진 거울이 나섰다. 깨진 거울은 매우 약해진 상태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상태 같은 건 전혀 살피지 않았다.
보리도 놓치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때, 진리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큰소리로 외쳤다.
“핵심 연구 구역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
그가 말을 마친 순간이었다. 갑자기 본인 스스로를 감싼 그는 앞으로 하려던 일을 깔끔하게 잊어 버렸다.
이후 진리는 옆에 있는 장벽에서 나타난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 그림자는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말인이었다.
“너!”
진리가 질겁해 소리쳤다.
말인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생각해봤는데, 만약 너희들이 이긴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없겠더라고. 그렇게나 네가 너랑 같은 영역의 달지기를 남겨두려 할 리가 없잖아. 사명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분명 너를 도울 거고.”
진리가 애써 반박했다.
“그럴 일 없어!”
하지만 검은 그림자로 변한 말인은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그저 헤엄치듯 흘러갔다.
작열하는 문 역시 장벽 안에 갇혀 있었다. 그녀는 살고 싶다는 욕망을 격하게 표출하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사명은 이게 어떻게 상황인지 금세 알아차린 듯했다. 이에 바로 성건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정말로 죽음이 두렵지 않아? 회사의 안정적인 삶이 그립지 않은 거야? 넌 이미 달지기가 됐어. 우리를 도와 장생을 가두는 걸 돕기만 하면 기꺼이 네 지위를 인정해주지.”
두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 성건우들은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사명이 분명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 없을 말을 했다.
“전 인류를 위해!”
* * *
툭…….
장목화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미 헬멧 바이저를 올린 그녀는 곁눈으로 바이저 위의 계기판을 살피며 전자파 환경이 원상태로 회복되었는지 판단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닿았다.
빅보스의 목소리였다.
“네 부모와 오빠, 새언니, 조카들까지 전부 지하 빌딩을 떠났다. 가족들과 다시 만나지 않고 거기서 죽을 작정이냐?
애쉬랜드에는 네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아직 접해보지 않은 민속도 아주 많아. 넌 구세계의 그 많은 흥미로운 책도 아직 다 보지 못했잖아.”
장목화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런 소리도 못 들은 척 쪼그려 앉은 그녀는 성건우의 전술 배낭에서 소형 스피커를 꺼냈다.
그녀는 곧 잠들어 있는 성건우를 향해 웃어 보였다.
“건우야, 드디어 전 인류를 구원하는 순간이네. 지금 네가 깨어있었다면 분명 배경 음악을 깔아달라고 했겠지? 그렇게 해줄게. 근데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 거야.”
장목화는 소형 스피커 전원을 켜고 음악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직 전자파 환경은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 * *
사명은 재차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네가 우리를 해결하고 신세계를 파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 재난을 완벽하게 종결시키는 건 불가능해.
아직 수많은 각성자가 살아있고 제6 연구원, 제8 연구원 사람들도 아직 다 살아있어. 그들은 분명 강해질 방법을, 새로운 신세계를 창조할 방법을 천천히 모색할 거야. 그러면 재난은 또 찾아와! 차라리 우리가 살아서 이 세상을 통제하고 재난 위험을 최저치로 낮추는 게 낫다고!”
황금 저울을 비롯한 달지기들도 비슷한 이유를 들어가며 성건우와 깨진 거울 등을 설득했다.
그들은 핵심 연구 구역 전자파 환경이 곧 정상 회복되리라는 걸 알았다.
그에 반해 장생을 포함한 달지기들이 권한과 힘을 모조리 쏟아부어 형성한 이 속박을 벗어나기까지는 3분에서 5분이 걸렸다.
성건우들은 웃으며 달지기들을 향해 엄숙하고 장엄하게 말했다.
“누군가는 우리의 뜻을 이어가 줄 터!”
* * *
소용돌이형 건물, 핵심 연구 구역.
노래를 고른 뒤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던 장목화의 귓가에 또다시 흐릿한 사명의 목소리가 울렸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난 지금 네 가족들 의식을 추출할 거다! 다 같이 죽는 거야!”
장목화가 웃었다.
“잘됐네. 그럼 저세상에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잖아. 그럴 수 있었다면 진즉 그랬⋯⋯.”
순간, 장목화는 계기판들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곧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 뒤 핵탄두를 향해 폭발 신호를 보냈다.
핵탄두는 곧 폭발할 것이었다.
전자파 환경이 정상 상태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장목화는 성건우 곁에 앉아 소형 스피커를 누르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귓가로, 여러 달지기의 저주와 비명이 맴돌았다.
누구도 지금 이 상황을 예상한 적은 없었다.
장목화도, 성건우도 본래는 이 전투가 달지기들의 힘겨루기, 오로지 그들끼리의 결투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 전투라면 두 사람도 충분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신령들이 승부를 내기도 전, 일반인이 그들의 생명을 좌우하게 될 줄이야.
대부분의 성건우들은 웃고 있었다. 어찌나 웃었는지 눈가에 눈물이 다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두형, 이휘영, 인수영을 비롯한 이들도 웃고 있었다. 거의 해탈의 웃음에 가까웠다.
그 가운데, 성건우가 달지기들을 향해 외쳤다.
“진정한 신세계를 맞이하라!”
달지기들의 광기와 분노에 찬 저주가 울려 퍼지는 사이, 눈을 감은 장목화는 귓가에 닿는 익숙한 음악을 들었다.
– 어렸을 적 꿈을 아직 기억하니. 영원히 지지 않는 꽃 같은⋯⋯.
장목화가 속으로 그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던 그때, 백색의 빛이 폭발하면서 순간적으로 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콰르릉!
골짜기 안,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며 대지는 격렬하게 흔들렸다.
* * *
레드스톤 마켓, 호수 섬.
관 속 시체 같은 염호의 육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오하명은 신세계의 질서가 붕괴한 틈을 타, 그 보리 불상의 숙명통을 이용해 본인 의식을 염호의 체내에 이전시켰다. 지금 그는 상대의 남은 의식을 토벌하며 점차 이 육신을 장악해나가는 중이었다.
그 후 호수 섬을 떠나 인류 거점으로 간 뒤 그들의 의식을 추출하면 기본적으로 이 육신을 회복시킬 수 있을 터였다.
염호의 일그러진 얼굴에 느릿한 웃음이 번졌다.
오하명의 웃음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어디에선가 유도탄이 날아들었다. 정확히 이곳을 노린 것이었다.
목표를 아직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오하명은 지금 가장 약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의 눈빛이 굳어진 그때, 유도탄은 염호의 신전에 그대로 떨어졌다.
콰광!
보이지 않는 장벽은 한 1초 정도 버티는가 싶더니,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이 구역은 그대로 폐허가 되어 버렸다.
애쉬랜드의 다른 장소들 몇 곳도 유도탄에 폭격당했다.
이것이 바로 이두형이 퓨쳐를 사전에 애쉬랜드로 돌려보낸 이유였다.
제8 연구원의 군사 기지에 침입해 그 독창들의 최후의 희망까지도 모조리 멸하고 숨겨진 위험을 철저히 근절하는 것.
이두형이 퓨쳐에게 내린 마지막 명령이었다.
* * *
저녁 무렵.
어둠 속, 수많은 차량 대열이 느릿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야영지를 마련하기 적합한 곳을 찾았다.
반고 바이오의 한 생존자 무리였다.
이들은 가진 식량도, 연료도, 배터리도 많지 않았다. 심지어는 무기 역시 모두에게 지급하지 못했다.
하지만 리더 역할을 맡은 안전부 중고위층 직원 몇몇이 멀지 않은 곳에 회사에서 다른 세력과 거래를 위해 지어둔 비밀 창고가 여럿 있다고 알렸다.
그곳으로 가면 물자는 충분히 보충할 수 있고, 능력 있는 이들은 적당한 장소를 찾아 다시 작은 반고 바이오를 세울 수 있을 것이며, 나름 우호적인 세력에 찾아가 의탁을 협의해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언제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었다.
그중 한 차량에 탑승한 고홍자와 용대용은 저도 모르게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뒤를 돌아보았다.
지하 빌딩의 입구가 숨겨져 있던 그 산맥은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꼭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뒤쪽으로 길게 뻗은 차량 행렬은 노르스름하거나 하얀 전조등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꼭 밤하늘의 은하수, 혹은 이글거리는 화룡 같은 모습이었다.
차량 행렬은 계속해서 느릿하게 전진했다.
* * *
몇 년 후.
저녁 무렵, 어느 중형 거점 광장에 수많은 이들이 은흑색의 거대한 로봇 한 대를 에워싸고 있었다.
검은색 제복을 입고 구세계 선현의 조각상 아래에 앉은 게네바는 아이들과 청년들, 또 그 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들의 희생 아래 인류는 달지기의 사육에서 벗어났고 무심병은 사라졌지. 언젠가 무심병은 다시 찾아올지 몰라. 하지만 난 또 그들의 뒤를 잇는 새로운 영웅이 나타나 앞으로 전진하리라 믿어⋯⋯.”
그의 이야기에 푹 빠진 사람들은 매우 흥미로워하면서도 감동한 듯 연신 눈을 반짝였다.
마침내 이야기를 마친 게네바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파를 비집고 나아가 광장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그때, 구세군의 검은색 제복을 입은 한 사람이 게네바에게 다가왔다.
“대장, 이만 떠나야 합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게네바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눈두덩이 속의 붉은빛만 두 번 번득였을 뿐이었다.
게네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을 왼 가슴에 얹으며 예를 갖췄다.
“전 인류를 위해!”
“전 인류를 위해!”
그의 앞에 선 구세군도 같은 예를 취했다.
* * *
중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봄 마을.
책을 쥐고 강단에 선 한명호는 지식을 갈구하는 눈동자들을 마주했다.
“다음, 이 단락 다 같이 읽어볼까.”
남루하지만 나름 깔끔한 옷을 입은 아이들은 앳된 목소리로 입을 모았다.
“대도가 행해지던 시대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라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 믿음을 가르치고 화목하게 만들었다.
하여, 그때는 자신의 부모만 부모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은 여생을 편안히 마치고, 장정은 다 직업이 있었으며, 아이는 바르게 자라고, 홀어미, 홀아비, 고아, 병자 모두 가엾이 여겨 보호를 받았다⋯⋯.”
완결
– 번외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