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super-class hunter with 10 times the experience RAW novel - Chapter 269
269화 최후의 게이트(4)
아카식 레코드에 새겨진 기억이 흘러 들어 온다.
츠즈, 츠즈즈즛.
손에 닿은 부분을 통해 막대한 양의 정보가 내 정신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
엄청난 양이었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기억이었다.
『 스킬 ‘절대 정보 습득 Lv.12’를 발휘합니다. 』
『 스킬 ‘초고속 정보 처리 Lv.12’를 발휘합니다. 』
···
『 스킬 ‘초인지 : 해석 Lv.12’를 발휘합니다. 』
정보와 관련된 스킬 여러개를 사용하지 않으면, 그 방대한 양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
콰아아앙—!
화신체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시야 한 켠으로 동료들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시간이 많지 않다. 최대한 빨리 읽어내야 했다.
‘기억이 이어진다.’
화신체와의 첫 전투에서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지한은 ‘이계 규율 – 무한회귀’를 손에 넣고서 죽었다.
“회, 회귀했어······. 내가.”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의 능력을 깨닫는다.
일어난 곳은 단칸방 위였다.
이지한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움직였다.
허나.
“어째서, 어째서냐······. 겨우 고블린한테······.”
첫 회귀.
이지한은 고블린의 단검에 꿰뚫려 죽었다.
“허억, 허억. 괜찮아.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어지는 결과는 같았다. 그는 고블린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죽었다.
한 번, 두 번, 열 번······.
무한 회귀를 소유한 이지한은 이상할 정도로 고전했다.
그랬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재조정이······. 없는거다.’
그에게는 무재조정이 없었다.
경험치를 10만배로 만들어 줄 EX급 특성도.
한계를 돌파하게 해 줄 퀘스트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지한은 묵묵하게 도전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재능이 없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저주 받은 일이었다.
“겨우 여기서 죽을 순······.”
재능이 있다면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
“허억······!”
그런 일조차 재능이 없다면 온갖 노력을 들여도 될까 말까한 게 현실이었다.
하물며 멸망을 막아야 했다.
“할 수 있다. 계획을 세우면······. 이번에는 이렇게······.”
이지한은 포기하지 않고 움직였다. 과거에서 얻은 지식을 통해 모든 수를 동원해 미래에 대항했다.
하지만 회귀의 지식은 변질되기 마련.
“다, 달라졌어. 대체 왜?”
회귀자가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미래는 달라진다. 그런 완벽하게 변수까지 고려하는 것은 이지한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재능이 조금만이라도 더 있었다면.
이길 수 있었을텐데, 막을 수 있었을텐데.
“크아아악!”
수많은 회귀가 있었다.
천 번, 만 번······.
노력해도, 아무리 열심히 해봐도.
이지한은 F급 헌터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째서, 어째서냐······.”
그에게 달라붙은 무재(無材)는 저주처럼 달라 붙어 있었다.
무한 회귀는 희망이 아닌 저주였다.
허나, 포기하지 못하는 이지한은 무한한 삶을 반복해서 살아간다.
“으아아아아! 어째서! 어째서!”
증오감은 쌓여만 간다.
자신의 무재(無材)를 한탄하면서도 이지한은 움직였다. 천만 번의 회귀가 있었다. 그는 F급 헌터를 벗어났다.
그래봤자 고작 한단계였다.
고블린의 피를 뒤집어 쓴 이지한.
“하······. 하하하······.”
그는 지독한 혐오감 속에서 자조 섞인 웃음을 뱉어냈다.
자신의 재능도.
그리고 포기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도.
자신을 이리 만든 세상도.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멸망에서 세계를 구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무재(無材)의 저주를 풀어내지 못하는 한, 무한에 가까운 회귀를 해도 멸망을 막을 순 없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이미 자신의 정신은 너덜너덜해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겠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이지한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기계 인형처럼 반복하며 멸망을 막고자 했다.
콰득, 쿠웅—!
죽고.
퍼엉!
또 죽고.
콰지직!
계속해서 죽었다.
오천만 번에 해당하는 회귀가 있었다.
“······.”
그의 정신은 멀쩡했다. 어쩌면 재능이 하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광기 어린 집념.
그를 움직이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얼마나 많은 회귀를 했는지 그 감각조차 희미해질 무렵.
이지한은 처음으로 최하위 마족을 하나 죽일 수 있었다.
“······.”
전신이 엉망진창이었다. 마족의 검은 피를 뒤집어 쓴 채 이지한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조금 뒤면 자신의 목숨도 끊어질 것을 예감했다.
이지한은 들고 있던 검을 놓았다.
카앙.
돌에 부딪힌 검이 바닥을 굴렀다.
성취감은 없었다.
이제 하나.
셀 수 없이 많은 마족 중에서.
가장 약한 마족 하나를 잡았다.
그 사실이 그를 더욱 절망스럽고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 * *
콰아앙—!
아카식 레코드와의 연결이 끊기며 흘러들어 오던 기억이 중단되었다.
어디선가 발산된 충격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크윽.”
“지한씨, 괜찮아요?!”
“스승님, 죄송합니다. 녀석들을 막으려고 했는데.”
“괜찮아.”
‘생각보다 기억을 읽는 게 늦어져 버렸다.’
오천만 번? 장난하나.
정보량이 막대한 이유가 있었다.
하물며, 아직 전부 정보를 읽어낸 것도 아니었다. 한참 남았다.
【 ······. 】
어느덧 마계왕의 화신체들이 아카식 레코드 주변을 새까맣게 메우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쏘아낸 마기 탄환이 비석을 깨부순 것이었다.
터억.
비석을 떠나간 아카식 레코드의 파편이 화신체의 손에 쥐어졌다.
【 보아서 어쩌겠다는거냐. 】
수동적이었던 마계왕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기억에 한해서 그는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다.
【 무언가 알아낼 수 있기라도 할 것 같은가? 】
이렇게까지 하는데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그게 이상한 일이겠지.
“그거야, 내가 보고 판단한 일이지.”
【 무지한 자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이지, 너는 모른다. 】
고오오오······.
화신체 하나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마(魔)가 다른 화신체들을 집어 삼켰다.
셀 수 없이 많던 화신체가 하나가 되었다.
“하, 합쳐졌잖아.”
“다들 지한씨를 엄호해요.”
일행 모두가 무기를 겨누는 그 순간이었다.
돌연, 내 앞에서 나타난 화신체의 발차기가 나를 강타했다.
콰아아앙—!
주변에 보이던 공간이 순식간에 변화했다. 길에서 벗어났다. 나는 새하얀 빛줄기를 그리며 근처의 행성에 충돌했다.
콰과과과—!
나는 멸망한 지구의 황량한 대지에 떨어졌다.
나를 중심으로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곧바로 마계왕이 나타났다. 고도로 압축된 마기를 발에 휘감은 그는 다시 한 번 나를 내려 찍었다.
콰아앙! 쩌저저적—!
검을 들어 막아냈음에도 막대한 충격이 느껴졌다. 내가 등을 대고 있는 행성 전체가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 기억은 내가 가져가겠다. 】
싸움의 규모가 달라졌다.
나는 남아 있는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동시에 내가 서 있던 행성 자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크윽, 하지만 받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마계왕이 멈춰선 사이, 나는 허공을 뛰어넘어 마계왕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스킬 ‘일자베기 Lv.20’을 발휘합니다. 』
일자베기.
우주 공간에 새겨진 새하얀 빛줄기가 마계왕을 강타했다.
【 ······?! 】
콰아아앙—!
유성우처럼 떨어진 마계왕이 우주 공간을 가르고 또다른 행성에 떨어졌다.
행성 하나를 꿰뚫고서도 마계왕의 추락은 멈추지 않았다.
그 틈에 나는 백색의 길 위로 복귀했다.
터억.
“오빠, 괜찮아요?!”
진세아가 로브를 벗으며 물었다.
“괜찮아.”
“지, 지구가 박살났는데요?”
“그보다 파편은?”
마계왕이 손에 쥐었던 기억의 파편은 어느새 진세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녀석은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서현 언니랑 협력하면, 직접 닿지 않아도 훔칠 수 있거든요.”
“잘했어.”
나는 진세아의 머리를 두드려 주고선, 바로 아카식 레코드의 비석에 파편을 끼워 넣었다.
“잠깐이면 됩니다. 엄호를 부탁하겠습니다.”
일행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눈을 감고서 검은 비석 위에 손을 댔다.
『 아카식 레코드의 기억을 가져옵니다. 』
빛이 흘러나온다.
이곳에 마계왕을 쓰러뜨릴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것이다.
* * *
이후로도 마계왕의 무한한 회귀는 계속 되었다.
그러나, 이지한이 발버둥칠수록 무재의 저주는 그를 강하게 옭아맸다.
“멸망을 막을 수만 있다면······.”
무한 회귀는 사용자의 인격을 변화시킨다.
시간이 흐르며 그가 겪는 사건에 따라 성격이 차츰 변해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사, 살려주세요!”
“커허억, 어째서?”
“날 왜······.”
이지한은 서슴없이 타인을 죽였다. 무수한 회귀를 거치며 이지한이 소유했던 도덕적 관념은 어느새 희미해져 있었다.
푸욱—!
멸망을 막기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이든, 선량한 시민이든 상관 없었다.
아이템을 얻기 위해 죽이고, 정보를 얻기 위해 고문하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내던지고······.
빌런이 되어 영웅들에게 토벌 당하기도 했으나.
이지한은 멈추지 않았다.
악(惡)이어도 괜찮았다.
멸망을 막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인류 전체가 멸망하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재능이 없기에.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를 바꿀 수 없기에.
목표를 향한 이지한의 집념은 점차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뤄낸 경지가 고작 C급.
1억 번 가까운 회귀를 했을 무렵.
중위 마족 하나가 이지한을 찾아왔다.
“인간, 마계왕께서 널 보고 싶어 하신다.”
선택권은 없었다.
이지한은 마족에게 납치 당해 마계로 끌려갔다. 목줄이 채워진 뒤, 마계왕의 앞에 무릎 꿇려졌다.
【 무한회귀라. 】
그저 마계왕의 말을 들었을 뿐인데.
전신을 뒤흔드는 듯한 격이 이지한을 덮쳤다.
피를 토하고 오장육부가 쏟아지는 고통이었다.
【 이제 초월신의 경지가 머지 않았다. 】
이지한은 기지를 발휘해 근처의 검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러나 도망칠 수 없었다.
“인간, 마계왕께서 널 보고 싶어 하신다.”
중위 마족이 또다시 이지한을 찾아왔다. 회귀 지점을 아무리 바꾸어도 소용 없었다.
마족에게서 벗어나려고 미친듯이 발악해도 소용 없었다.
무수하게 뻗은 시간선은 마계왕의 관리 하에 놓여 있었다.
“억에 달하는 회귀는 대체 무엇을 위해 있었던 거냐. 나는 도대체 뭘 위해······.”
이지한은 무력함을 느꼈다.
끝없는 절망감과 함께 자신에 대한 혐오, 증오가 솟아 올랐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지한을 먹음직스럽게 바라보는 마계왕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 머지않아 본좌는 초월신에 오를 것이다. 마족은 영원토록 부흥하겠지. 】
기억을 살피던 나는 새로운 사실에 놀랐다.
아예 처음보는 마족이 마계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잠깐, 이 놈은 불사의 마족이 아니다. 마계왕은 아예 다른 존재였어. 그럼 본래의 마계왕은 대체······?’
내 의문과 별개로 기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 부덕의 영역으로 데려와라. 무한 회귀를 내것으로 만들겠다. 】
무한 회귀를 빼앗기 위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마계의 지하 깊숙히 존재하는 은밀한 장소.
마족의 제약을 활용한 힘.
‘금제(禁制)’가 마계왕과 이지한을 옭아맸다.
이지한의 공허한 눈동자가 마계왕을 향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마계왕을 중심으로 의식이 거행되기 시작했다.
【 무한 회귀는 이 자의 영혼에 새겨져 있다. 본좌는 그의 영혼을 섭취함으로써 무한 회귀를 손에 넣을 것이다. 】
강대한 힘이 이지한을 감쌌다.
이윽고 마계왕의 영혼이 이지한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한없이 악에 가까운 영혼이 이지한의 지성을 잠식해나갔다.
혐오스럽고 증오스런 악(惡).
그건 이지한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지한은 계속해서 사고 했다. 여기까지 왔음에도 포기하지 못했다.
【 잠깐······. 】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포기하지 못해서?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무한회귀의 이지한 자신이 만들어낸 역사는 비루하다.
억을 넘는 회귀를 하면서도 달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크으윽······. 】
허나, 그 시간들이 헌터 등급이 낮을 지언정,
그 상대가 고블린이나 오크 같은 저열한 마수일 지언정,
항상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웠다.
“마, 마계왕이시여!”
“의식이, 의식이 잘못됐다. 당장 의식을 멈춰라!”
“부, 불가능합니다. 크아악, 마기가!”
이지한은 단 한번도 대충 살아 오지 않았다.
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오며 끝없이 죽었고, 끝없이 절망했다.
그러한 삶 앞에서 세계의 크기나 헌터의 등급은 무의미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에.
악을 택할지언정 끝없는 수도(修道)의 길을 걸었기에.
그의 영혼만큼은 운명에 의해 더없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따라서, 이지한의 영혼은.
마계왕의 영혼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쿠우웅—.
마계왕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마계왕의 주변에서 마기가 미친듯이 들끓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지금 당장, 의식을 준비한 자들을······.”
최상위 마족들이 마계왕을 걱정하며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거꾸러졌던 마계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그럴 필요 없다. 】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마계왕이 피워 올린 압도적인 격에 모든 마족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마계왕은 과거와는 달라져 있었다.
탐욕에 휩싸여 있던 그의 눈빛은 한없이 공허해졌다.
그렇게 이지한은 마계왕이 되었다.
* * *
기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째서냐.”
이지한은 마계왕이 되었다.
무재(無材)의 저주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계왕의 지식과 능력도 이지한의 것이 되었으나, 빌어먹을 저주는 사라지지 않고 들러 붙어 있었다.
그래도 새롭게 얻은 지식은 의미가 있었다.
‘본래의 마계왕은 외차원에서 온 괴물이었다.’
‘마계의 역사를 개변하고, 자리를 차지한 가짜 왕.’
‘초월신의 경지에 올라, 이 세계에서 빠져나가려 했던 거다.’
그러한 존재를 이지한이 우연찮게 집어 삼킨 것이다.
웃긴 일이었다.
마계왕이 되다니.
무한한 회귀로도 손에 넣지 못했던 염원이 이뤄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어찌되었건 지금의 자신이라면······.
멸망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 지금부로 타차원에 대한 침공을 중지한다. 】
마계왕인 자신이 초월신이 되려 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에 더 이상 문제는 없을 터.
그러나 마족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마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역사는 정복의 역사였기에, 그들은 마계왕의 행보를 부정했다.
마계왕 이지한은 왕좌에서 끌어내려졌다.
막을 수 없었다.
마계왕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
이지한의 재능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당신은 더 이상 우리들의 왕이 아니야.”
콰드득—!
또 한 번 목숨을 잃었을 때.
『 ‘이계 규율 – 무한 회귀’의 효과를 사용합니다. 』
『 지정한 포인트로 회귀합니다. 』
마계왕 이지한은 좀 더 깊은 과거로 회귀할 수 있었다. 본래의 마계왕의 영혼을 삼켰기 때문이었다.
의식이 심연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도중.
이지한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에는 다를 지도 모른다.’
마계왕의 신체를 손에 넣었다.
무언가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수억, 수십억, 수백억······.
끝없이 회귀를 해도.
“왜냐, 어째서냐.”
이지한은 바꿀 수 없었다.
인류가 멸망으로 향하는 미래를 바꿀 수가 없었다.
그것이 이지한이 짊어진 무재(無材)라는 업(業).
시스템에 의해 규정되는 결코 변화되지 않는 진리였다.
천 억, 조, 경, 해, 자, 양, 구······.
그것을 깨닫기까지 천문학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
억겁의 시간이 지나갔다.
아득한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희미해져 간다.
목적의 의미도 그 의미의 중요성마저도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추구하던 이상은 추악하게 변질 되어 있었다.
‘······.’
기억을 읽어내는 이지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어찌되었든 마계왕은 마침내 깨달았다.
무수한 시간을 거치고서 드디어 알았다.
무재(無材)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초월신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 기형적인 해답을 찾아냈다.
* * *
파직, 파지직—!
“허어억······.”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비석에서 손을 떼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정신이 멍하다.
지고의 정신 스킬이 있음에도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이다.
‘스킬로 정보를 처리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위험했겠어.’
현실로 감각이 되돌아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콰아아앙—!
일행의 마력과 화신체의 마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쳐왔다.
나는 숨을 고르고서 일행을 향해 몸을 돌렸다.
“끝났어요?!”
마기의 폭발을 막아낸 윤서현이 소리쳤다. 일행 모두가 전력으로 마계왕의 화신체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장비는 이미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파츠즈즈······.
시야 한켠으로는 완전히 망가진 초월 병기가 보였다. 가져왔던 비장의 수도 전부 꺼내서 쓴 모양이었다.
“······다들 고생했습니다.”
나는 모두를 향해 말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일행이 버틸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기록을 전부 확인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
나는 초월력을 남김없이 끌어 왔다.
“마계왕, 네 기억은 전부 확인했다.”
그가 어째서 그리도 거만할 수 있었는지도 이제는 이해가 간다.
마계왕이 보인 자신감은 그가 겪어 온 세월과 무수히 존재했던 시간선에 기인하고 있다.
‘그가 보낸 시간에 비하면 나는 자그마한 점에 불과할테니.’
화신체도 그의 본신(本身)에 새겨진 자아의 표출일 뿐.
마계왕 이지한의 진의(眞意)라고 볼 순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하게 알았다.’
시간선의 끝자락.
마계왕의 화신체는 세계의 기운을 거둬들였다. 그 기운은 세계의 규칙이자 세계를 만들어내는 힘.
즉 초월력이었다.
화신체들은 초월력을 마기의 형태로 가공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화신체를 향해 한걸음 나아갔다.
스르르······.
내 왼손에서 뻗어나간 이계 규율의 문자열이 금빛 띠가 되어 나를 두르기 시작했다.
“마계왕, 넌 부정할지도 모르겠지만.”
기억을 훑어보며 나는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본질적으로 나는 마계왕과 다르지 않다.
다른 시간선, 다른 가능성 속에서 피어난 또다른 나일 뿐.
그 무재(無材)만큼은 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너는 나다.”
그러니 화신체가 다루는 힘을 내가 다루지 못할 이유는 뭐란 말인가.
으어어어—!
은하를 등지고 서 있었던 거대 생명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새까맣던 거체가 점차 하얀색으로 물들어간다.
게이트 내부의 세계를 메우고 있던 마기가 내 의지에 따라 요동치기 시작했다.
『 대상 이지한이 초월력을 발휘합니다. 』
가공할 양의 흑색의 기운이 순백의 초월력이 되어 내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