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18)
18화 제3장 나는 국민학생이다 (6)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속담은 이런 때 쓰는 것일까.
만약 내가 환생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브루가다 증후군을 몰랐으면 어땠을까.
나는 하하호호 웃으며, 세 사람과 즐겁게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비록 잡음이 있었지만, 심폐소생술로 아이를 살렸다고 의사로서의 뿌듯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회귀한 나는.
흉부외과의인 나는 극복한 불행보다 닥쳐올 불행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미리 안다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로 인해 뒤틀려 예상치 못하게 바뀐 미래.
내가 나서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르는 미래.
오직 나만이 아는 미래.
회귀한 삶이란 이 세 가지 미래를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일이었다.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나는 내 처지가 외롭고 딱하다는 생각을 해 봤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정작 내가 기댈 곳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국민학생의 몸으로 내가 가진 지식을 대체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답답함으로 가슴이 옥죄어 왔다.
“믿음아, 뭐 하니? 집에 가야지.”
담임선생님이 손짓하며 나를 재촉했다.
“네, 선생님.”
고개를 끄덕이고 선생님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마음속에 낀 먹구름을 있는 힘껏 걷어 내기 시작했다.
포기는 중요하다.
산에서 길을 잘못 들었는데 그 잘못된 길만을 고집한다면 결국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꼴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의술에 있어서만큼은 포기가 용납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했다.
의사가 환자를 포기하면 환자와 보호자는 기댈 곳이 없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한 번 더 지혜를 발휘한다면…….’
1992년 3월 초, 불규칙한 심장 리듬으로 환자를 돌연사시키는 브루가다 증후군은 아직 세상에 발표되지 않았다.
심장내과의와 흉부외과의는 당연히 브루가다 증후군을 몰랐다.
하지만 브루가다 증후군이 뭔지는 몰라도 이 질환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릴 만한 인물은 있었다.
한선대학교 심장내과 진료부원장 강동욱.
강동욱 부원장은 자타 공인 국내 최고의 심장내과 의사였다.
물론 지금은 진료부원장이 아니라 조 교수 정도를 맡고 있겠지만.
그의 날카로운 분석력이라면 브루가다 증후군을 꿰뚫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초라해 보이는 희망을 힘껏 움켜쥐었다.
“저기요.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결심을 마친 나는 세 사람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김요한이 강동욱 교수의 진료를 받도록 만든다. 그것이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목표였다.
“왜 그러니, 믿음아?”
“엄마가 그랬는데요. 사람이 많이 아플 때는 큰 병원에 가는 게 제일 좋다고 했어요. 요한이가 큰 병원에 가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녀석, 친구를 끔찍하게도 생각하는구나. 그런데 여기 있는 의사 선생님도 실력 좋은 분이야. 이분이 괜찮다고 했으면 괜찮을 거란다.”
담임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 반론을 펼쳤다.
역시 이 상황에서도 내 편은 없었다.
“믿음아, 나 지금은 괜찮아. 가슴만 조금 아파.”
“정말 괜찮니, 요한아?”
“네.”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거 아니지? 요한이만 괜찮으면 엄마도 괜찮은데.”
“정말 괜찮아요.”
김요한과 김요한의 어머니가 대화를 나누며 은근히 담임선생님의 의견에 힘을 보탰다.
3:1의 싸움에서 나는 사무치는 고독을 느꼈다.
남이 다 모르는 것을 혼자 안다는 것은 참으로 고독한 것이었다.
“요한아, 정말 괜찮아?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하지는 않아? 나는 그럴 것 같은데.”
“…….”
“가슴이 뛰는 거에 집중해 봐.”
나는 김요한이 없는 증상을 느끼도록 고의로 유도했다.
누구나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세상 멀쩡하다가도 주변에서 아픈 거 아니냐고 자꾸 물으면 괜히 아픈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경험 말이다.
이런 경험은 어른보다 아이에게 더 자주 일어나므로
이 경험을 통해 김요한에게 불안감을 심어 주기로 했다.
가히 좋은 방법은 아니었으나, 브루가다 증후군을 치료하지 않은 채 사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나으리라.
작전이 효과가 있을까.
가슴에 손을 얹은 김요한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갑자기 가슴이 빨리 뛰는 것 같아. 왜 이러지?”
과연 내 작전대로였다.
뛰고 있는 심장을 한번 의식하게 되면 심장 리듬이 비정상으로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왜냐고?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심장은 보통 1분에 60~100회를 뛴다.
그러니까 심장에 집중하면 60~100회의 리듬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심장의 힘찬 생명력은 오히려 사람에게 불안감을 심어 줄 수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 심장이 빨리 뛰는 것처럼 말이다.
김요한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치자, 다시 김요한의 어머니와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기까지 나왔는데, 큰 병원 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나는 다시 한번 세 사람의 반응을 유도하며 세 사람의 눈치까지 살폈다.
분명 좀 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내 말이 적당한 무게로 세 사람의 어깨에 내려앉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머님이 괜찮으시다면 큰 병원에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큰 병원에서 건강하다고 하면 정말 문제가 없는 거니까요.”
“…그렇게 하죠. 어차피 지금 돌아가도 장사는 못 하는데.”
“요한이 너도 큰 병원에 가도 괜찮겠지?”
“네.”
세 사람의 의견이 모아지는 것을 나는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이제 남은 건 강동욱 진료부원장, 아니 강동욱 조교수가 브루가다 증후군을 꿰뚫어 보기를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선생님, 저도 갈래요.”
“믿음이, 너는 집에 가도 돼. 오늘 하루 종일 너무 고생했어.”
“저보다는 요한이가 더 고생했어요. 요한이를 끝까지 챙겨 주고 싶어요.”
“기특하구나. 뭐, 이제 와서 너 혼자만 학교 쪽으로 보내는 것도 위험할 테니 좋다. 다 같이 가자꾸나.”
“감사합니다. 저희 엄마가 간호사니까 어느 큰 병원이 좋은지 물어보고 올게요.”
나는 공중전화 부스에 동전을 넣은 뒤 전화하는 시늉만 했다.
그리고 세 사람에게 돌아와 해맑게 말했다.
“한선대학교 병원에 강동욱 교수님이 되게 좋은 의사 선생님이래요.”
* * *
한선대학교 병원에 도착하고 진료를 보기 전까지 고작 한 시간이 걸렸다.
예약 없이 대학 병원을 찾았고, 진료 전에 검사까지 다 받았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아마 이때는 강 교수님이 외래 진료를 맡은 지 얼마 안 돼서 환자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기 때문인 듯했다.
세 사람은 대학 병원에 와 본 적이 없었는지 그 모든 과정을 답답하고 지루하게 여기는 듯했지만.
‘강동욱 교수님이라면 기대를 걸어 볼 만하지.’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두 손을 모아 의술의 신께 기도를 올렸다.
김요한이 붙잡을 수 있는 동아줄은 강동욱 교수가 유일했으므로.
강동욱 교수가 부디 브루가다 증후군을 눈치채도록 도와 달라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나는 강동욱 교수에게 넌지시 던질 말들도 미리 준비해 두었다.
브루가다 증후군을 알아챌 수 있는 힌트 같은 것들 말이다.
“김요한 환자분, 들어오세요.”
기분 탓인지 외래 간호사의 부름이 신의 계시처럼 들렸다.
대기석에 앉아 있던 우리 네 사람은 동시에 일어나 진료실로 향했다.
“네 분이나 들어가시게요?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저는 환자 담임선생이고, 이 아이는 환자 친구입니다.”
“그럼 두 분은 앉아 계시겠어요? 진료실이 너무 복잡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양 선생님, 다 들어오시라고 해요.”
진료실 안쪽에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생에 참석했던 한선대학교 심장내과 컨퍼런스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강동욱 교수의 도움으로 우리 네 명은 동시에 진료실로 들어갔다.
‘와, 이때는 진짜 꽃미남이셨구나.’
진료실에 앉은 강동욱 교수를 보고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강동욱 교수는 살집이 잡힌, 투실투실한 얼굴의 노인이었는데.
눈앞의 강동욱 교수는 턱선이 날카롭고 이지적인 매력을 뽐내는 중년 의사였다.
교수님은 절 모르시겠지만, 그래도 구면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요한이를 살려 주세요.
“환자분하고 보호자분은 앉으시고, 다른 두 분은 서 계셔야겠네요. 의자가 부족해서.”
“저희는 괜찮습니다.”
강 교수의 말에 담임선생님이 황송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강 교수의 대범한 기운에 살짝 눌린 듯 보였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강 교수가 본격적인 문진에 나섰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질문은 꼼꼼했으며, 차트를 작성하는 손은 분주했다.
“피검사, 흉부 촬영, 소변검사는 이상 없고 심장 초음파까지 멀쩡하네요?”
“네, 여기 오기 전에 인근 병원에 들렀는데, 거기서도 큰 이상은 없다고 했어요.”
“그래도 잘 오셨습니다. 국민학생이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경우는 잘 없거든요.”
드디어 강 교수가 심전도 결과지를 손에 쥐었다.
강 교수가 심전도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지금까지의 여정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고, 성공적인 끝맺음에 다다를 수도 있었다.
나는 숨죽여 가며 강 교수의 낯을 살폈다.
“보호자분.”
“네, 선생님.”
“저는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강 교수가 뜸을 들이는 순간이 내게는 몇십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먼 미래에 자타 공인 최고의 심장내과의가 되는 강동욱의 심전도 해석은 과연?
“아드님은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강 교수의 입에서 내가 그토록 듣고 싶은 말이 나왔다.
나만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두 손을 천장까지 치켜들고 만세를 부를 뻔했다.
환생을 했음에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역시 강 교수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김요한의 어머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담임선생님도 크게 동요하는 눈치였다.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앞서 간 병원에서는 분명 요한이가 멀쩡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왜 수술을 해야 하죠?”
“아드님 같은 케이스가 매우 드물어서 해석의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심전도에 이상이 있는데 이걸 대수롭지 않게 넘길 거냐, 심각하게 볼 거냐의 차이가 있는 거죠.”
강 교수의 눈높이 설명이 이어졌다.
심장에는 전기신호를 보내는 곳이 있다.
이 신호를 받고 심장은 뛴다.
그런데 김요한은 전기신호를 보내는 곳에 문제가 생겨서 전기신호가 불규칙적으로 전달된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전기신호는 계속 불규칙할 테고 자연스럽게 오늘처럼 심장마비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저는 아직 혼란스럽네요.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어느 의사 선생님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김요한의 어머니가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 교수는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심전도 결과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요한이가 앓고 있는 질병은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
“이런 심전도 그래프를 가진 환자들이 심장마비로 돌연사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만 조금씩 나오고 있죠.”
“…….”
“앞서 간 병원 의사의 말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닙니다. 앞으로 아드님께 문제가 안 생길 수도 있어요.”
“…….”
“하지만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문제가 없는 것과 문제가 있는데 발생하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겠죠?”
“…네.”
“아이의 장래를 위한다면 수술이 필요합니다. 평생 심장마비로 쓰러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소아 병동에 여유가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오늘 바로 입원하시죠.”
호쾌한 남자라는 별명을 가진 강 교수다운 결정이었다.
진료를 끝내기 무섭게 바로 입원을 결정하는 저 결단력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강 교수를 보고 외과에 가야 할 사람이 왜 내과로 갔냐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저런 점은 배워야지.’
나는 강 교수의 호쾌한 태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전생의 내게 부족했던 것은 저런 호쾌함과 결단력이었다.
전생에서 확신이 없어서 놓쳤던 환자들을 떠올리면 그저 죄송하고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선생님, 근데 수술이라면 흉부외과에서 하는 것 아닙니까?”
잠자코 있던 담임선생님이 처음으로 나섰다.
“PCI, 그러니까 좁아진 혈관을 늘려 주는 풍선술과 인공심박동기를 삽입하는 일은 내과에서 합니다.”
강 교수는 김요한이 받아야 할 인공심박동기 삽입술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인공심박동기 수술이란 쉽게 말해서 김요한의 심장에 기계를 설치해 불규칙한 심장의 리듬을 잡아 주는 수술이다.
수술이란 단어에 김요한과 김요한의 어머니, 담임선생님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인공심박동기 삽입술은 어렵지 않고 위험하지도 않은 수술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
“…….”
강 교수의 설명을 듣고, 김요한 어머니는 한참 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이제 김요한 어머니의 손에 모든 게 달린 상황이었다.
김요한 어머니가 수술을 거절한다면 지금까지의 여정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나는 두려움에 갈 곳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 육체는 비록 국민학생일지언정 내 눈빛은 성숙한 흉부외과의의 것이었으리라.
“아이가 불안에 떨며 사는 건 저도 원치 않아요. 그럼 수술을 받기는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수술비는 얼마 정도 나올까요?”
김요한의 어머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수술 쪽으로 생각이 기울긴 했는데, 경제적인 부담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대략 200~300만 원 수준입니다. 충분히 부담이 될 만한 금액이죠. 하지만 사회 사업팀을 찾아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원무과를 통해 수술비를 조금씩 갚아 나가는 방법도 있을 수 있고요.”
“…….”
“그럼 입원하시는 겁니다?”
“네,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셨는데… 아이를 위해서라도 입원해야죠.”
“훌륭하신 판단입니다. 양 선생님, 환자분 입원 안내 도와주세요. 사회 사업팀 위치도 알려 드리고요.”
“네, 교수님.”
진료가 끝난 뒤 나는 세 사람과 홀가분하게 진료실을 나왔다.
내 길고 험난했던 여정에 완벽한 마침표를 찍어 준 강 교수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인공심박동기 수술을 받는다면, 김요한은 다소 불편하긴 하겠지만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진료실을 나온 뒤 나는 진료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강 교수님.
저는 혼자가 아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