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219)
219화 제4장 전역(4)
“으음… 확실히 전례가 없는 일이긴 해.”
서인석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동시에 회의실의 정적이 길어지고 무거워졌다.
굳이 병동까지 찾아와 내가 부탁한 일은 단기 아르바이트였다.
제임스 홉킨스 병원에서 연수를 받기 전 붕 뜨는 30일에서 40일 사이.
그동안 나는 본원 흉부외과에서 단기 흉부외과의 업무를 맡고자 했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쉰다는 것이 내겐 지루한 일이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실력 유지 차원이었다. 잔뜩 녹슨 손으로 연수를 받고 싶지 않았다.
“P.A 대신 저를 쓴다고 생각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나는 전문 간호사를 언급했다.
보통 외과 계열에서 의사가 부족해서 의사 일을 대신해 주는 간호사를.
“그건 좀 달라. P.A는 장기 근무지만 믿음이 너는 단기 근무니까.”
“수술까지 하는 P.A는 거의 없잖아요? 월급은 P.A랑 비슷하게 맞춰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자못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동정심에 호소했다.
“과장님, 설마 저를 내팽개치실 생각은 아니겠죠?”
“…….”
서인석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물론 그가 고민하는 바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병원 소속이 아닌 페이 닥터.
그것도 단기 페이 닥터를 운용하는 대학 병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례 없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까짓거 한번 해 보마. 그동안 신세 진 게 있는데. 이 정도도 못 해 주면 안 되겠지.”
“감사합니다, 과장님.”
“이번 수술 끝나는 대로 진료 부원장님께 말씀드려 보마.”
추가로 서인석은 내가 병동에 조금 더 머물다 가기를 권했다.
기왕 온 김에 선배들 얼굴도 보고 페이 닥터 건의 결과도 듣고 가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 * *
“이야, 이믿음이, 이게 얼마 만이야? 안 죽고 살아 있었네?”
휴게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보이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마시던 캔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상대를 반갑게 맞았다.
“선배, 진짜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네 눈에는 어때 보여?”
“잘 지내신 것 같은데요? 살이 포동포동 찌신 걸 보면.”
나는 살갑게 농담을 던졌다.
털썩
소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이름은 바로 황은우였다.
나보다 1년 먼저 흉부외과에 들어온 선배.
전생에 황은우는 이 시점에서 본원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생의 내가 워낙 폐급이어서 내 똥을 닦다가 의국을 탈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생의 나는 에이스였으므로 황은우는 의국에 남아 있었다.
“네가 뭘 모르네. 살이 찌는 건 스트레스를 받아서야.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다 보니까 살이 찐 거지.”
“누가 선배를 스트레스 받게 해요? 데리고 오세요. 제가 혼내 줄 테니.”
“짜식, 말이라도 고맙다.”
황은우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딱히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니다.
펠로우 과정이 혹독해서 힘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펠로우들은 자칭·타칭으로 펠노예라고 불렸다.
지도 교수 논문 작성.
살인적인 수술 스케줄.
법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계약직 신세 등등.
하지만 처지가 박하다고 해서 펠로우를 때려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펠로우 과정을 수료해야만 교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교수가 되지 못한다면?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침울하고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봉직의로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도는 신세를 면치 못하기에.
모처럼 재회한 황은우와 나는 회포를 풀었다.
간간이 전화로 근황을 주고받아 왔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은 또 달랐다.
화제가 겉돌지 않아서 좋았다.
서로의 감정과 반응과 리액션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너도 참 대단한 놈이다. 고작 한 달을 가만히 못 있어서 과장님께 페이 닥터를 부탁했어?”
“놀면 뭐 해요. 그 시간에 실력을 갈고닦는 게 이득이지.”
“난 오히려 병원에 내 돈을 줘 가며 휴가 쓰고 싶은 심정인데. 별종 기질은 여전하네.”
“한결같은 게 제 매력이죠.”
벌컥!
내 페이 닥터 건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던 도중 불청객이 나타났다.
흉부외과 권태우.
가운 가슴에 달린 포켓 주머니를 확인하니 흉부외과 소속이었다.
“황 선생님 혹시 바쁘십니까?”
“바쁘진 않은데 왜? 혹시 응급 수술 잡혔어?”
“응급 수술은 아니고 입원 환자에게 기흉이 발생했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권태우의 노티를 듣고 황은우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유 없는 기흉이 어디 있어? 스태프들이나 보호자가 못 본 사이에 환자가 어디에 가슴을 부딪친 거 아니야?”
“환자는 절대 아니랍니다. 자기는 화장실 몇 번 다녀온 게 다랍니다.”
권태우의 거듭된 설명에도 황은우의 못마땅하다는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어디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냐는 반응이었다.
나도 황은우와 비슷한 심정이긴 했다. 기흉은 보통 외상으로 많이 생긴다.
“환자에 대해서 자세히 노티해 봐.”
“네, 선생님.”
환자는 35세 강아름.
OPCAB을 위해 입원 중이며 기흉의 과거력은 없다고 했다.
“35살 여자면 자발성 기흉으로 보기도 힘들지 않나?”
황은우가 내 의견을 구했다.
“거의 없다고 봐야지. 혹시 환자분이 키가 크고 말랐어요? 흡연은 하고요?”
“아니요, 전부 해당 사항 없습니다.”
그 정도는 이미 알아봤다는 듯 권태우의 목소리가 당당했다.
하지만 그 대답으로 인해 오히려 오리무중에 빠진 기분이 드는 나였다.
그럼 진짜 이유 없는 기흉이 발생했다고?
“으음… N.P(신경 정신과) 협진이라도 보내야 하나? 뭔가 정신에 문제 있는 느낌인데?”
“그 전에 환자부터 직접 봐요. 환자와 대화 하다 보면 뭔가 짚이는 게 있을지도 몰라요.”
“쩝, 그럼 잘 부탁한다.”
“뭘 부탁해요?”
“나 다음 수술 스케줄 있거든.”
“선배, 이런 식으로 내빼기 있어요?”
“선후배 좋다는 게 뭐니. 그리고 너도 곧 페이 닥터 생활할 건데 겸사겸사 몸도 풀고 좋잖아?”
이어서 황은우가 권태우에게 정식으로 내 소개를 했다.
내가 기흉의 원인을 밝혀 줄 등대라고도 했다.
“수고.”
손을 흔들며 얌체같이 휴게실을 떠나는 황은우를 나는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저 인간, 못 본 사이에 살만 늘어난 게 아니라 넉살도 늘어났네.
졸지에 남의 일을 떠맡게 됐지만 사실 기분이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나도 궁금했다.
환자에게 뜬금없이 발생한 기흉의 원인이 무엇인지.
“같이 갈까요?”
“네, 선생님.”
권태우가 앞장서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 * *
‘이분이 그 유명한 이믿음 선생님이었구나.’
병동으로 복귀하는 도중 레지던트 3년 차 권태우는 이믿음의 얼굴을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이믿음은 키가 훤칠했으며 잘 생겼고 인상이 부드러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꼭 선한 주인공 역할만 맡아야 할 것 같은 외모를 가졌다.
흉부외과 레지던트들 사이에서 이믿음의 이름은 전설처럼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많은 스태프가 레지던트들은 본 적 없는 이믿음을 입에 달고 살았다.
– 제발 믿음이의 반의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따라해 봐라. 응?
– 믿음이가 어시스트였으면 수술 이 두 시간은 줄었을 텐데…….
수술 어시스트를 들어가면 교수들은 종종 이런 발언을 하곤 했다.
솔직히 자존심 상하는 발언이었다.
자신들이 이믿음의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못 미친다는 굴욕적인 이야기였으니까.
간호사들의 반응이라고 교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간호사들 역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믿음을 칭찬했다.
이믿음은 환자를 자기 가족처럼 대할 줄 안다.
그렇다고 마냥 물렁한 건 아니다.
진상 환자나 보호자가 나타나면 꼼짝도 못 하게 기를 죽여 놓는다 등등.
이믿음을 경험한 사람들이 풀어 놓는 이믿음에 관한 썰은 이믿음을 전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잘생긴 건 인정인데. 뭐가 그렇게 잘났다는 건지…….’
권태우는 다시 한번 이믿음을 힐끔거렸다.
다행히 이믿음은 깊은 생각에 잠겨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믿음은 스태프들이 레지던트들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 낸 상상의 존재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일까.
결과는 곧 밝혀지리라.
“권 선생님은 김 아름 환자의 기흉 어떻게 생각해요?”
이믿음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의심이 가는 점도 없어요?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이믿음의 목소리는 이믿음의 외모만큼이나 부드러웠다. 그래서 권태우는 속에 있던 말을 꺼내 보일 수 있었다.
이믿음은 황은우보다 젠틀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황 선생님하고 비슷한 의견입니다.”
“환자가 외상성 기흉이란 말이죠?”
“네, 자발성 기흉의 근거가 없으니까요.”
“환자는 어디에 부딪친 적이 없다고 말했다면서요?”
“부딪쳤는데 아프지 않아서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게 아닐까요.”
“아프지도 않고 대수롭지도 않은 부딪침으로 외상성 기흉이 발생할 수 있어요?”
이믿음이 쏟아붓는 질문 세례에 권태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형사가 범죄자를 취조하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거야?
설마 페이 닥터로 근무하기 전에 군기를 잡겠다는 속셈인가?
“반응을 보니 내가 트집 잡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저… 절대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정곡을 찔린 권태우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른 건 몰라도 이믿음의 눈치만큼은 전설인 게 확실해 보였다.
“진단을 했으면 그 진단에 근거를 댈 줄 알아야죠. 혹시 기흉이 발생한 부위의 피부는 확인해 봤어요?”
“못 했습니다. 그런데 피부는 굳이 왜…….”
“환자가 외상으로 인한 기흉이라면 가슴에 멍 정도는 생겼을 테니까요. 멍도 생기지 않을 정도의 외상으로 기흉이 생겼다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
권태우의 후두부를 강타하는 이믿음의 지적.
권태우는 졸지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자신이 근거에 기초하지 못한 채 막연한 의심만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사답지 못한 진단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럼 가슴에 멍이 있다면 외상성 기흉이 맞겠네요?”
이번에는 권태우가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있다면 맞겠죠. 하지만 멍은 없을 거예요.”
“왜죠?”
자신이 모르는 뭔가를 이믿음이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권태우는 계속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가 본인 입으로 말했잖아요. 어디에 부딪친 적이 없다고. 그러니까 외상성 기흉이 아닌 자발성 기흉으로 봐야죠.”
“그렇다면 환자를 자발성 기흉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뭔가요?”
권태우는 이믿음이 사용했던 수법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나야 당연히 짚이는 곳이 있죠. 그런데 권 선생은 미리 알면 재미없을걸요?”
이믿음의 입가에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알려주세요, 선생님. 저는 만화나 드라마도 꼭 완결 난 것만 보는 타입입니다.”
“그럼 성의를 봐서 힌트만 줄게요. 환자가 여성이라는 점에 주목해 봐요.”
애매모호한 힌트에 권태우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