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247)
247화 제5장 도전 (2)
수술방이 있는 7층 휴게실.
나는 천중혁 조 교수와 잡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천중혁은 의외로 내게 호의적이었다.
내 면전이라서 그런 건지, 내게 호감이 있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건지는 아직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 교수님은 수완도 좋으시네요. 외래 환자가 없으니까 바로 의학 정보 프로그램에 출연도 하시고.”
“먹고 살려면 뭐라도 해야죠. 가만히 있었다간 과장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하긴 과장님은 다 좋은데 실적 욕심이 워낙 크시단 말이죠.”
천중혁은 은근하게 강태섭에 대한 불만을 비쳤다.
강태섭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스태프들을 조종한다고 해서 그 손에 모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건 아니었다.
개중에는 천중혁처럼 깨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조금 더 지켜보다가 천중혁을 내 편으로 삼자.
나는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다.
혼자의 힘만으로 강태섭과 이시형을 상대하는 일은 벅차니까.
“그나저나 긴장되지 않으세요?”
“뭐가요?”
“무수혈 수술이요. 안 그래도 한창 외래 환자가 불어나는 타이밍이잖아요. 만약 수술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천중혁이 끝말을 삼켰다.
그가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어렴풋이 느꼈다.
“의사가 수술을 두려워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수영 선수가 물을 두려워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죠.”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네요. 저도 패기가 넘쳤던 시절이 있었는데.”
천중혁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어쨌거나 무수혈 수술은 꼭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이시형 교수 코가 납작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이시형 교수와 사이가 안 좋으세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천중혁이 노골적으로 나를 응원하고 반대로 이시형을 배척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긴 나는 부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교수들 간의 원한 관계 같은 것은 다 파악하지 못했다.
“사실 시형이랑 저랑 동기예요. 시형이가 저를 제치고 부교수가 됐죠.”
“아… 제가 괜한 걸 물어봐서…….”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인데요, 뭐.”
천중혁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시형이를 잘 알아서 하는 소리인데 이 교수도 시형이 조심해요. 걔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요.”
“…….”
“지금도 이 교수를 어떻게 해 보려고 갖은 궁리를 다하고 있을 테니까.”
천중혁의 경고는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구체적인 사례는 말하지 않았다만 천중혁도 과거에 이시형에게 크게 데였던 적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나를 응원하고 이시형이 혼쭐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천중혁이 이시형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당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참았다.
내 알량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타인의 상처를 들쑤실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시형 교수님도 아직 퇴근 안 했죠?”
“마지막 수술이 지금쯤 끝났을 겁니다. 왜요?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하게요?”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이시형 교수님과 술 마시면 백 퍼센트 체할 텐데.”
내 농담에 천중혁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천중혁과 함께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뒷담화의 순기능을 오늘에서야 처음 경험한 기분이었다.
위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콜 폰.
천중혁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는 통화를 연결했다.
– 교수님, 저 경훈입니다.
“어, 그래. 경훈아, 왜?”
– 다음 주에 무수혈 수술 예약되어 있는 손대범 환자 말입니다. 방금 응급실에 실려 왔습니다. 검사 결과를 봤는데 응급수술이…….
최경훈이 말문을 잃었음에도 나는 그 후에 이어질 말을 능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젠장!
일이 꼬이려면 이렇게도 꼬이는 건가.
정상 스케줄대로만 수술을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뜻밖의 비보에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갔다.
“지금 수술방으로 갈게. 그동안 모아 둔 자가혈액하고 셀 세이버도 챙겨 놔.”
– 네, 교수님.
“무슨 일이라도 터졌어요?”
내가 통화를 끊자 천중혁이 놀란 부엉이 눈으로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터졌네요, 대형 폭탄이.”
* * *
지이이잉.
수술방을 나온 이시형의 몸은 녹초였다.
하루 만에 정규 수술을 무려 네 개나 처리했더니 목과 허리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다 날 지경이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수술실 바닥에 대자로 눕고 싶었다.
‘이게 다 그 자식 때문이잖아.’
이시형은 수술 가운과 모자, 마스크, 장갑들을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졌다.
여기서 그 자식이란 이믿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어리고 영악한 놈은 의학 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제 입지를 탄탄하게 다져 나갔다.
그 모습이 기특했는지 최근 강태섭 과장은 이믿음만 예뻐라 했고.
질투에 눈이 먼 이시형은 과장의 관심을 되찾기 위해 수술 스케줄을 무리하게 소화 중이었다.
이시형은 강태섭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자신이 이믿음보다 더 쓸모가 있으면 더 출중한 외과의라는 사실을.
가만히 서서 한숨을 돌리는 와중에, 이시형은 동분서주하는 레지던트를 발견했다.
1년 차 최경훈이었다.
최경훈은 인턴과 함께 환자가 누운 베드를 수술방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이 시간에 응급 수술인가.
호기심이 들어 베드를 자세히 살펴보니 베드에 누운 환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맞아, 그 노인네.
이시형에게 무수혈 수술을 해 달라고 부탁했던 괴팍하고 깐깐한 노인네.
지금은 이믿음이 맡고 있는 그 노인네.
상황 파악을 마친 이시형은 입꼬리가 찢어져라 웃었다.
라이벌인 이믿음이 사면초가에 빠졌기 때문이다.
모아 둔 혈액이 모자란 상황에서 응급 수술을 해야 하니 지금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으리라.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즐겨 볼까?’
사악하게 웃으며 이시형은 수술실을 나왔다.
보호자 대기석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보호자를 확인했다.
환자만큼이나 보호자의 얼굴도 익숙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아,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예전에는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고집 센 환자와 달리 보호자들은 양처럼 유순했다. 이시형이 아는 체를 하자 인사를 받아 주었다.
“선생님이 수술해 주시는 건가요? 그때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수술할 교수님은 따로 있습니다. 외래에서 봤던 젊은 교수님이죠.”
“아, 네.”
“환자분을 감당하지 못한 제가 감히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시형은 달콤한 말로 보호자들을 꼬드기기 시작했다.
아버지 몰래 수혈 수술을 진행해라.
아버지의 종교적 신념보다 아버지의 생명이 우선 아니냐는 논리였다.
보호자의 마음을 충분히 뒤흔들어 놓고서 이시형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현장을 떠났다.
그가 보호자에게 수혈 수술을 유도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이믿음이 보호자들의 요청 받아들여 수혈 수술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수술이 성공한 후 이시형이 직접 환자에게 수혈 사실을 폭로할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환자는 약속을 어겼다며 난리를 칠 테고 급기야 이믿음을 고소하게 될 것이다.
둘째 이유는 수술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믿음이 보호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이믿음과 보호자는 실랑이를 할 게 분명했다.
수혈 수술과 무수혈 여부를 놓고 말이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이시형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였다.
사람을 잘못 건드렸어, 이믿음.
내가 이래 봬도 부산의 싸움닭이라고.
병원을 벗어날 때까지 이시형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질 줄 몰랐다.
* * *
타다다다닥.
나는 가운을 휘날리며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전화로 들은 노티로는 환자의 상태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법.
그래서 내 눈으로 직접 환자를 살피고 싶었다.
‘뭐지?’
수술실이 가까워지는 가운데 달갑지 않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보호자 대기실 쪽에서 최경훈과 손대범의 두 딸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제는 최경훈의 손에 들린 인쇄물이었다. 수술 동의서임이 분명한 인쇄물을 보는 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당장 수술을 해도 모자란 판국에 아직 동의서도 못 받았다고?
“하아… 하아… 무슨 일인데?”
나는 최경훈의 곁에 서서 숨을 골랐다.
“그게… 보호자분들이 수혈 수술을 강력하게 요청하셔서요.”
최경훈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덕분에 내 시선이 최경훈에게서 보호자들 쪽으로 옮겨졌다.
이 사람들은 또 왜 이러는 걸까.
환자의 뜻을 존중해서 무수혈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지 않았던가.
“아버님은 무수혈 수술을 원하십니다. 수술은 무수혈로 진행할 겁니다.”
“정상적인 시기에, 정상적으로 수술을 받았다면 당연히 저희도 선생님 뜻을 따랐겠죠.”
안경을 쓴 큰 딸이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큰 딸은 퍽 불안해 보였지만 곁에 있는 동생보다는 그나마 상태가 나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응급 상황이잖아요? 혈액도 모자랄 텐데 무수혈 수술을 진행하다가 혹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큰딸이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마음을 나라고 이해를 못 하는 바가 아니었다.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소중한 목숨까지 걸어야 한단 말인가.
나 역시 큰 딸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환자와 무수혈 수술을 하기로 약속하고 각서까지 받은 나였다.
지금 와서 환자와의 약속을 깨 버릴 수는 없었다.
“안타깝지만 보호자분의 말씀은 들어드릴 수가 없어요.”
“왜죠? 선생님과 저희만 입 꾹 다물고 있으면 아무 문제 없잖아요.”
“그건 명백한 기만입니다. 설령 저희끼리 구두로 동의한다고 쳐도 차트까지 조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나는 대답을 마치고 최경훈이 들고 있는 동의서를 빼앗았다. 그리고 얼른 들어가서 수술 준비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최경훈이 고개를 숙이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럼 하다못해 저랑 동생의 혈액이라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마침 혈액형도 맞고 가족이니까요.”
“환자분은 본인의 피만 수혈하는 데 동의하셨습니다. 설령 가족분이라도 수혈은 안 됩니다.”
나는 말을 하면서도 내가 답답했다.
졸지에 의식을 잃은 환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외과의인 내가 수혈을 왜 싫어하겠는가.
수혈만 할 수 있으면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는 관상 동맥 우회술인데 말이다.
“뭐 되는 게 없네요.”
“죄송합니다. 그게 환자분의 뜻이니까요. 저도 답답해 죽겠지만 환자분의 의식이 없는 이상, 그전에 했던 약속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제가 사인을 안 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큰딸이 나조차 감당하기 힘든 초강수를 던졌다.
큰딸은 어떻게 해서든 수혈을 통해 아버지를 살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극단적인 선택을 나는 한편으로는 이해했고 한편으로는 답답하게 여겼다.
환자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그녀나 나나 똑같은데.
이렇게 갈등을 해야 한다니…….
나는 남은 시간이 촉박함을 인지하고 똑같이 초강수로 맞받아쳤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보호자분이 사인을 안 한다면 제가 해야겠죠. 무연고자인 환자분들의 경우 의료진이 사인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내 말에 큰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가 손에 쥔 동의서를 빼앗아 서명을 했다.
“저희 아버지, 고집이 센 분이지만 나쁜 분은 아니에요. 제발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선생님.”
큰딸의 애절한 간청에 나는 외과의로서 하면 안 되는 금기어를 내뱉고 말았다.
“이번 수술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보호자분들께도 약속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