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56)
56화 제2장 선택의 기로 (1)
신철우는 양손으로 환자의 오른쪽 옆구리에 위치한 자상(찔린 상처)을 힘껏 압박하고 있었다.
손과 상처 사이에 있는 거즈가 벌써 피로 젖어 있었다.
손바닥으로 축축한 피의 감촉이 느껴졌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신철우는 처음 목격했다.
이 서늘한 느낌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사람을 살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무력감?
가슴 저 밑바닥에 있던 감정들이 그를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듯했다.
신철우는 이믿음을 도와 처치를 시작한 뒤로는 한 번도 환자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신철우, 뭐 해? 거즈 다 젖었잖아. 새 거즈 덮고 다시 압박해야지!”
“어? 어. 미안.”
이믿음의 호통에 번쩍 정신이 든 신철우.
그는 이믿음이 약국에서 사 온 거즈를 한 움큼 집었다.
그 거즈를 이미 흠뻑 젖은 거즈 위에 얹은 뒤 양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제야 돌처럼 굳었던 이믿음의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대체 넌…….’
상처를 압박하면서 신철우는 붕대를 손에 쥐고 있는 이믿음을 쳐다보았다.
이믿음은 보면 볼수록 놀라운 친구였다.
흉기에 벌집이 된 사람을 보고도, 끔찍한 출혈을 확인하고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감정이 없는 냉혈한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환자를 발견한 뒤 보여 준 신속한 행동과 놀라운 처치.
이것은 도무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믿음은 의대생이지 의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천재로 자칭했던 것도.
양순재 교수에게 벌써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도 다 진실인 모양이다.
‘이 녀석 앞에서는 나도 명함을 못 내밀겠군.’
신철우는 반신반의하던 이믿음의 재능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이제 보니 오리엔테이션 당시 교통사고 환자를 치료했던 일도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었다.
한 번은 우연이지만, 두 번은 능력이고 세 번은 필연이자 숙명이다.
“이 사람, 살 수 있겠어?”
신철우는 이믿음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환자 치료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믿음의 의견이 궁금했다.
“사람은 피를 1.5리터 흘리면 죽어. 얼핏 듣기엔 엄청난 양인 것 같지?
“…….”
“하지만 1.5리터 우유 한 팩을 개봉해서 바닥에 붓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순식간이야.”
“…….”
“그래도 처치가 빨라서 다행이었지. 너희들도 나를 잘 도와줬고. 대학 병원으로 제때 이송하면 아마 최악은… 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믿음의 목소리는 건조하게 느껴질 만큼 차분했다.
의사가 아닌 같은 의대생인데도 이믿음의 말에 이상하게 신뢰가 가는 신철우였다.
“다들 차례대로 손 좀 치워 볼래?”
이믿음이 손에 든 붕대로 환자의 복부를 칭칭 감기 시작했다.
이믿음의 손놀림은 빠르고 야무졌다.
환자의 하복부부터 시작된 붕대는 금세 상처 부위를 전부 감쌌다.
이믿음이 뜯은 붕대의 포장지에 적혀 있던 글자, 압박 붕대.
그 말처럼 붕대는 환자의 상처를 단단하게 압박하고 조여 주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때마침 구원처럼 들려오는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
119 대원들이 주변에 있던 학생들을 밀어내고 화장실로 우르르 진입했다.
신철우는 그제야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부담감을 떨쳐 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과도에 수차례 복부 자상을 입은 환자입니다. 가슴에 꽂혀 있는 과도는 일부러 제거하지 않았고요. 응급처치는 저와 친구들이 먼저 발견하고 진행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처치를…….”
키가 큰 구급 대원은 환자를 내려다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일반인이 이런 처치를 할 수 있었나 싶었던 것이다.
현장에 도착하니, 구급 대원인 자신이 해야 할 처치가 벌써 끝나 있었으니까.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압박이나 지혈은 고사하고 당황해서 신고조차 제때 못 했을 텐데 말이다.
‘이 환자… 잘하면 살릴 수도 있겠어.’
구급 대원은 아직 의식이 꺼지지 않은 환자를 확인하고 용기를 얻었다.
신고 접수부터 출동까지 걸린 시간은 단 10분.
10분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정도로 흉기에 난자당했다면 목숨을 잃기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응급처치를 한 학생들 덕분일까.
출혈량이 절망스러울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명치 아래에 꽂힌 과도를 제거하지 않은 것 또한 신의 한 수였고.
과도를 제거했다면 분명 걷잡을 수 없는 출혈이 발생했을 테니까.
“영환 씨, 환자부터 스트레처카에 싣죠.”
“네.”
구급 대원들이 환자를 스트레처카에 실은 뒤 앰뷸런스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1차적인 처치가 이미 끝났으니 이제 그들이 할 일은 1초라도 빨리 병원으로 달리는 것이었다.
피에 흠뻑 젖은, 처치를 한 것으로 보이는 학생들은 그 와중에도 구급 대원들을 도왔다.
환자를 스트레처카에 올리고 앰뷸런스까지 밀어 주었던 것이다.
끝까지 정의감이 투철하고 선의가 넘치는 학생들이었다.
“고맙습니다. 환자를 보고 당황하기도 바빴을 것 같은데 처치를 너무 잘했네요.”
“아니요. 이 정도야 뭘…….”
이믿음은 수줍어하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 환자분, 보통 종합병원으로 이송하시면 안 돼요.”
“여기서 5분 거리에 응급실이 딸린 종합병원이 있습니다만…….”
“응급실만 있는 걸로는 부족해요. 흉부외과가 있는 대학병원으로 이송해 주세요.”
이믿음의 똑 부러진 제안에 구급대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장 처치 가능한 병원이 코앞에 있는데, 왜 먼 거리에 있는 대학병원에 가라는 것인지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환자 명치 아래 과도가 박혔잖아요. 여기가 종격동 부근이에요. 종격동 외상을 치료하려면 흉부외과 수술이 필요합니다.”
“…….”
“그러니까 흉부외과가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야 하죠.”
이어지는 이믿음의 설명.
“교통이 막힌다거나 시간의 여유가 없다면 종합병원에서 수혈과 간단한 처치를 받고 대학병원으로 가셔도 좋겠네요.”
“…….”
“중요한 건 환자의 종착역이 대학병원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믿음의 설명을 들은 구급 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의대생일 뿐인데 눈앞의 학생이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의사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왜 학생의 말을 거역하면 안 된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최면에 걸린 듯한 몽롱한 기운에 깨어난 구급 대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영환 씨, 제일 가까운 대학병원까지 얼마나 걸려?”
* * *
“휴, 이제 다 끝난 건가?”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에 힘이 빠져나갔다.
신철우는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니 바지부터 상의까지 전부 다 빨갛게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피 비린내가 훅 하고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하필이면 바지가 녹색이고 상의가 흰색이네. 이거 완전히 파김치 아닌가?”
신철우의 농담에 이믿음, 남초롱, 권아름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고생했고 고맙다. 너희들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환자는 죽었을 거야.”
이믿음은 친구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가 처치를 주도한 것은 맞았지만, 그의 힘만으로 환자를 살려 낸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생명이란 귀하고 다루기 힘든 것이다.
결코 혼자만의 힘으로 지켜 낼 수는 없었다.
흉기에 난도질당한 사람을 보면 지레 겁을 먹고 얼어붙을 수도 있었을 텐데…….
친구들은 그런 두려움을 이겨 내고 그를 도와주었다.
그러니 친구들의 활약은 이믿음의 활약에 못지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믿음이야 회귀한 흉부외과의라서 냉정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
이믿음은 훗날 신철우, 남초롱, 권아름과 좋은 팀을 이룰 수 있겠다는 포부를 품어 보았다.
전생에서는 감히 가지지 못했던 수술 드림팀을.
“그나저나 술 마시는 건 이제 포기해야겠지?”
“술 마실 기분도 아니고, 술맛도 안 날 것 같아.”
신철우의 말에 권아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일단 씻고 옷부터 갈아입자. 저기 골목에 옷 가게 있던데.”
“잠깐, 경찰차 오는 것 같은데?”
이믿음은 희미하게 들리는 사이렌 소리를 확인하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그의 말대로 경찰차 한 대가 술집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믿음, 뭔데 소머즈라도 되냐?”
이믿음은 대답 대신 미소만 띠었다.
의사 생활을 하다 보면, 사이렌 소리만으로도 차의 종류를 알아맞힐 수 있다.
위용~ 위용~ 위용~.
짧은 간격으로 들리는 위용 소리는 경찰차.
강력 범죄와 관련된 환자가 응급실을 찾을 때는 경찰차가 대동하기도 한다.
삐~ 뽀~ 삐~ 뽀~.
경찰차보다는 좀 더 간격이 넓은 삐뽀 소리는 앰뷸런스.
응급실에서 근무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앰뷸런스의 삐뽀 소리였다.
“학생들이 최초 목격자입니까?”
경찰차에서 내린 순경이 곧장 일행에게 다가왔다.
피범벅인 꼴을 하고 있었으니 일행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접수를 통해 끔찍한 칼부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경찰의 표정은 비장하고 무거웠다.
“엄밀히 말하면 저만 최초 목격자입니다.”
이믿음이 순경과 마주 보고 서서 입을 열었다.
“방금 전 겪었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화장실에 들어가려는데, 학과 동기가 마침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동기 다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과도에 복부를 난자당한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과도는 명치 아래에 꽂혀 있었고요.”
이믿음은 본인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은 최대한 상세하게 진술했다.
환자를 살리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이 끔찍한 범행의 범인을 밝히는 일이었다.
대체 범인은 누구이고, 어떤 이유로 이런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을까.
‘혹시 이민호는 아니겠지?’
이믿음은 이민호를 떠올리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민호에게 아무런 혐의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쓰러진 환자를 마지막으로 마주친 것도.
환자를 발견하고도 신고를 하지 않은 것도 영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민호가 끔찍한 칼부림을 할 동기가 없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화장실에서 마주친 동기, 그분 이름이 뭡니까?”
“신원대학교 의예과 1학년 이민호라고 합니다.”
“이민호라… 알겠습니다. 지금 상황 설명을 해 주고 계신 분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죠?”
“저도 같은 대학 의예과 1학년이고, 이름은 이믿음입니다.”
“환자를 보고 바로 처치를 한 것도 이믿음 씨죠?”
“네, 맞습니다.”
이어지는 순경과의 문답.
순경의 질문은 꼼꼼하고 날카로웠다. 마치 이믿음이 살인 용의자라도 되는 것처럼.
목격자는 사건 해결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열쇠이자 동시에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다.
그런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에 이믿음은 순경의 질문에 조금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피해자와 자신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없다는 점.
식당 CCTV와 동기 및 주변 사람들의 진술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거라는 점.
마지막으로 그가 범인이라면 피해자를 찌르고 열심히 치료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 등등.
이믿음이 무죄라는 증거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경찰도 곧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나중에 참고인으로 소환되실 수도 있다는 건 알아 두세요.”
“그러시죠.”
문답을 마친 순경은 주변 사람들과 친구들, 식당 이모들에게도 수사를 펼쳤다.
잠시 후 화장실에 폴리스 라인이 쳐지고, 감식반이 도착해서 화장실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번 사건의 분위기가 의료물에서 형사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우리도 돌아가자.”
“그래.”
신철우의 제안에 일행은 술집이 아닌 다른 건물로 향했다. 상인에게 양해를 구한 뒤 화장실에서 피 묻은 옷과 피부를 닦았다.
가까운 옷 가게에서 저렴한 외투를 구입하기도 했다.
그래도 비릿한 피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친구들과 헤어져 집 근처 아파트 단지에 도착한 이믿음.
그는 달빛을 따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겪은 술집 칼부림 사건은 그의 전생에는 기억에 없던 사건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친구가 없었고, 따라서 친구와 여흥을 즐기러 돌아다닌 적도 없었으니까.
학비를 구하기 위해 과외만 죽어라 했을 뿐.
‘앞으로도 녹록지 않겠구나.’
이믿음은 과거에 이미 벌어졌지만 자신이 알고 있지 못하는 사건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것들을 해결하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도.
하지만 회귀한 그는 그 모든 시련을 감당하고 이겨 낼 자신이 있었다.
전생의 그와 현생의 그는 엄밀히 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니까.
‘그런데 정말 이민호가 범인일까?’
이믿음은 문득 몇십 분 전으로 기억을 되돌렸다.
화장실에서 막 나오던 이민호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어렴풋이 무언가가 기억날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