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087)
1087화. 먹고 먹히다 (1)
전쟁이 터지자마자 황궁과 무림맹, 흑제성과 개방은 잘 훈련시켜 놓은 전서구와 전서응들을 세상에 뿌렸다.
훈련 자체는 평범했지만, 훈련시킨 금수들이 반 영물에 준하는 날짐승이다. 혈통부터 잘 관리된 특유의 전서구들은 평범한 전서구에 비해 세 배 이상의 거리를 날아갔다.
감숙, 섬서의 정보를 황궁에서도 빠르게 받아 볼 수 있는 이유였다. 물론 며칠의 차이는 있지만, 이 넓은 대륙에서 사나흘 만에 세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건 대단히 큰 무기였다.
수년 전부터 전쟁 준비를 해 온 중원의 저력이었다.
하지만 놀랄 만한 정보 운용 능력을 손에 넣었다 해도, 다시 정보를 전달하는 데엔 또 시간이 흐르게 마련이었다.
즉, 아무리 정보 전달이 빨라도 각 지역에서 터진 일은 지역을 책임지는 이들이 관리해야 한단 말이다.
“괜찮겠느냐?”
연위의 물음에도 연호정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감숙의 정보를 받은 그는 곧장 중원 전도를 폈고, 이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중부에 단단한 준비를…….”
“아닐 겁니다.”
“무슨 말이냐?”
연호정이 심각한 얼굴로 감숙을 가리켰다.
“이놈들, 사천으로 넘어가지는 않아요. 길이 너무 험합니다. 오히려 넘어가다가 사천의 정보망에 그대로 걸려 기습의 묘를 살릴 수 없지요.”
“기습이라?”
“오천 중 이천을 남기고 삼천이 이동했습니다. 병력을 떼어 운용했다는 것은 적이 모르게 기습을 하겠다는 의도일 수밖에 없지요.”
연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옳다. 그렇다면?”
“만약 놈들이 중부를 노린다면 섬서로 타고 내려올 것이고, 그게 아니면 섬서를 뚫고 일만 기병과 함께 종남과 화산을 위아래로 압박할 겁니다.”
양천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그건 좀 이상한데.”
“그렇습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연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상하구나.”
태공이 물었다.
“이 늙은이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소이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소?”
감숙을 가리키고 있던 연호정의 손가락이 그대로 섬서 남서부로 향했다.
“삼천 병력이 우회하여 감숙 남쪽으로 내려왔다…… 감숙 입장에선 한 방 먹은 겁니다. 설마 이천이나 떼어 놓고 이동하다니, 어지간한 배포 없이는 쉽게 선택할 만한 전술이 아닙니다.”
“오천 병력이라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병력이라고 알고 있소.”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역 전체로 보면 결코 많다고 볼 수 없지요. 한데 그만한 병력을 둘로 쪼갰답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만한 병력으로 섬서를 위아래로 공략한다? 말도 안 됩니다. 이건 무력 이전에 절대적인 숫자의 문제입니다. 협곡에서 몰아붙이는 것도 아니고, 피해는 입힐 수 있겠지만 섬서 전국(戰局)을 뒤바꿔 버릴 정도는 아니지요.”
“흠, 그렇소?”
“그렇다고 중부까지 밀고 들어온다고 하기에도 숫자가 적습니다. 그쪽에 무극수가 붙었다면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겠지만, 당장 무림맹에는 두 명의 무극수가 존재합니다. 병력의 차이 역시 비교를 불허하지요.”
태공의 눈이 번뜩였다.
“쓰고 버릴 만한 병력이 아니라면 굳이 다른 지역으로 뚫고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로군.”
“정확합니다. 삼교 전체의 병력을 생각하면 이만 병력은 그리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협 한번 한답시고 보낼 만한 숫자도 아니지요. 결정적으로 이번 싸움은 초전(初戰)입니다.”
연호정의 검지가 청해를 끼고 우회하다가 감숙의 남쪽으로 이동했고, 이후 곧장 북쪽 방향으로 이동했다.
“감숙 병력은 북서부에서 내려온 적의 병력을 상대하기 위해 철저히 방진을 짰을 겁니다. 한데 여기서 뒤를 물린다? 굉장한 피해가 발생할 겁니다.”
“으음.”
태공의 늙은 얼굴에도 심각한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감숙 무림인의 병력도 만만치가 않잖소? 기습적인 움직임이라고는 하나 후방에서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으리라고 보오만.”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래서 전쟁 지휘는 실전을 겪어 본 무사가 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전쟁은 책과 이론만으로 달통할 수 없는 영역이다.
“숫자만 생각하면 그렇습니다만, 이건 전쟁입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극한의 환경에서는 아무리 잘 훈련된 무사라도 긴장하기 마련이고, 그 긴장은 주인을 생사의 갈림길 위로 몰아붙이게 마련이지요.”
“허어!”
“전방을 주시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던 부대가 후방에서 기습을 받았다? 잘 수습되어도 삼 할의 피해는 볼 것이고, 당황하다가 휩쓸려 버리면 순식간에 절반 이상이 대파될 수 있습니다.”
태공의 얼굴에 심각함이 드리워졌다.
“그렇다면 큰일이 아니오?”
양천이 말했다.
“큰일입니다만, 방진에 따라 피해의 격차가 달라질 수 있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양천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색이 다른 지휘봉 세 개를 차례대로 지도 위에 놓았다.
“집단 간의 전투는 지형과 병사의 특성에 따라 여러 가지 진(陣)으로 편성됩니다. 그중 가장 보편적인 것이 바로 이선, 삼선의 횡진입니다.”
“횡진…….”
“적을 맞이했을 때, 선두의 일선이 싸우다가 밀리는 것 같으면 이선이 투입되어 전력을 보강합니다. 이후 이선으로도 해결이 안 되면 삼선까지 투입되지요.”
“허!”
“굳이 병력을 투입하지 않더라도, 후방에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군의 사기는 올라갑니다. 반대로 지원군 없이 일선 싸움만 된다면, 이것은 말 그대로 배수진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배수진.
물러날 곳이 없으니 목숨을 다해 싸워야 하는 상황이란 말이다.
병사들의 사기가 목숨도 불사할 정도라면 강한 정신력으로 말미암아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배수진을 치게 되면, 뒤가 없는 군대의 사기는 바닥을 치게 된다. 후방에서 도와줄 이선, 삼선의 아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 상태에서 적들과 부딪친다는 것 자체가 죽음으로 돌격하겠다는 의미다. 사기가 안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이다.
“한데 감숙의 경우, 이선과 삼선의 거리를 꽤 길게 늘어트렸습니다. 지형도 지형이지만, 무림인의 기감은 원체 뛰어나기 때문에 혹시 모를 측방에서의 공격을 예비하고자 함입니다.”
“집을 두텁게 만들었군.”
“그렇습니다. 선두 일선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거리가 멀어도 소리와 기세로 인해 빠른 지원이 가능하지요.”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 두터운 집의 외벽까지 돌아, 감숙 끝에서부터 다시 올라오게 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태공이 탄성을 질렀다.
“길게 벌린 횡진의 거리가 약점으로……!”
“그렇습니다. 게다가 감숙 병력은 마지막 사선까지 만들어 병력을 분산했습니다. 당연히 사선의 무위와 숫자는 가장 낮습니다.”
연호정이 지휘봉을 하나씩 치웠다.
“삼천 병력이 후방에서 기습하면 사선, 삼선, 이선 순으로 차례대로 무너질 겁니다. 설마 전투가 벌어졌으리라 상상도 못 할 테니, 이선과 삼선의 경우 후방으로 정찰병을 보내 원인을 확인하려 들 겁니다.”
“시간!”
“그렇습니다. 전투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당장 도와주러 가도 모자랄 판에 신중하게 정찰병을 보낸다면, 오히려 적의 삼천 병력이 파죽지세로 쓸고 올라올 수 있습니다.”
“하, 하지만 당가가……!”
“당가주님은 녹풍과 녹수를 끌고 갔습니다. 이는 감숙 본대와 달리 기동력을 살린 기습을 담당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정보 자체가 당가주님에게서 나왔으니, 녹풍과 녹수는 남은 이천 병력을 상대하게 될 겁니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만약 이천 병력을 다 막지 못한다면, 그들은 옆구리로 치고 들어와 이선과 삼선에 더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쾅!
연호정이 지도를 내리쳤다. 그러자 한옆에 빼 둔 지휘봉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감숙의 초전은 끝입니다. 적을 한 놈도 살리지 않고 몰살한다 한들, 이 정도면 패배라고 봐야 합니다.”
한 지역이 초토화되면, 적이 다시 출병해도 막을 병력이 없다.
즉, 중원으로 오는 길 하나가 훤히 생겨 버린단 말이다. 그걸 막기 위해 증원 병력을 보내면 다른 지역에서 전력의 공백이 발생하니 초전보다 더 쉽게 뚫고 내려올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다.
거기에 초전에서 한 지역을 삼켜 버렸다는 사실은 적군에게 엄청난 사기 진작을 일으킬 것이다.
당연히 중원 입장에선 어디도 뚫려서는 안 된다.
“그, 그럼 어찌해야 하오? 지금 당장 병력을 보낼 수도 없지 않소?”
“걱정이긴 합니다만.”
연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믿어 봐야지요. 섬서로 향한 무림맹의 소맹주와 감숙에서 전투를 벌이는 당가주 등, 뛰어난 전략 전술을 지닌 이들은 많습니다.”
믿고 기다려야 한다. 전쟁은 이제 시작되었다.
첫 전투에서 각자가 지닌 능력을 제대로 보여 줘야 뒤이어 터지는 전투의 역할도 달라지게 될 것이다.
“감숙의 정보는 전투가 끝난 뒤에 분석도록 합니다. 이제부터 섬서와 이곳, 하북의 전쟁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 * *
“으음?”
무사들에게 막 식사 명령을 내린 동군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뒤를 돌아보았다.
“장로님. 여기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
“장로님?”
“응? 아, 그래. 고맙구나.”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동군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도 긴장을 했나 보다. 바람 소리나 온도 등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검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희는 장로님이 그러신 줄도 몰랐습니다.”
“부대를 이끄는 장이 그런 모습을 보여선 안 되겠지. 그나마 너니까 이런 말도 하는 게다.”
“솔직히, 저희는 더합니다. 다들 티는 내지 않으려 하지만 굉장히 날이 서 있어요.”
“이런 식의 대규모 전투는 처음이 아니더냐. 인근의 흑도나 산적 무리를 토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저들의 무력은…….”
그때였다.
‘……?!’
등허리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던 불안감이 단숨에 목덜미까지 치고 올라왔다.
식사를 던지고 재빨리 후방 백 장 너머로 달려간 동군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적이다.
야트막한 언덕을 타고 올라오는데도 발소리가 나지 않고 먼지가 일지 않았다. 한데도 그 속도가 벼락을 방불케 했다.
동군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적……!”
퍼어억!
한 줄기 빛살이 번뜩임과 동시에 동군의 가슴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다.
삼천 마귀들을 이끌며 선두에서 달려오는 자.
어떠한 기세도 드리우지 않았지만, 존재감이 무시무시했다. 눈으로 보는 순간 사람의 육신을 옭아매는 엄청난 위압감을 뿌리는 이였다.
사내 못지않게 당당한 체구. 등에는 큼직한 참마도(斬馬刀)를 찼고, 양손에는 시커먼 활 하나를 들었다.
거기서 쏘아 낸 화살 한 방에 동군의 목숨이 날아간 것이다.
여인의 입이 열렸다.
“축제의 시작이다.”
장군처럼 낮은 음성.
퍼져 나가는 굵은 목소리에 삼천 마인들의 몸에서 살벌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화아아악!
그들은 야백도가 이끄는 짐승들과 달랐다. 멀쩡한 이성을 지닌 채 여인처럼 참마도를 들고 있는 당당한 체구의 마인들이었다.
제삼사제장, 지마후(地魔后)가 삼천의 마인을 이끌고 사선을 휩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