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21)
1121화. 서전(緖戰), 그리고 서전(西戰) (1)
산이 통째로 가라앉는 진풍경은 황궁 북성에서도 훤히 보였다.
“저, 저게?!”
그 광경을 보는 모두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특히 기천웅은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포 정도로 무너질 만한 산이 아니었는데?!”
그곳에 발을 디뎌 본 당사자로서, 포병만으로 산맥을 날리는 지금의 행위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밟고 서 본 것만으로 산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알긴 힘들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상식이라는 게 있다. 기천웅은 지반이 무른 곳과 단단한 곳을 구분할 만큼의 눈이 있었다.
당연히 저 산맥은 무른 곳이 아니었다. 설령 무른 곳이라 한들, 화포 몇백 발로 무너트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산맥이라고는 하지만, 높이도 낮도 두께도 얇아서 언덕보다 좀 큰 곳이라 해야 옳을 겁니다.”
연호정의 얼굴에도 감탄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요.”
“사람이라니?”
“모르시겠습니까? 지금 연위 무림장은 화포로만 산을 무너트린 게 아닙니다. 심검으로 산맥의 결을 살펴 약한 곳을 파악한 수, 그 부위에 화포를 발사해 야산 하나를 통째로 없애 버린 것입니다.”
그 순간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그렇다. 연위에게는 심검이 있었다.
심검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의지조차 베어 버릴 수 있는 능력이라면, 광물의 약점과 결을 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심검은 곧 심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므로.
“하지만 그 또한 힘들 걸세.”
잠시 황제 곁에서 나온 탁무자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었다.
“사람의 의지를 베는 것은 곧 상단전과 중단전을 흔들어 버리는 것을 뜻하네. 심검 한 방에 사지를 놀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역시, 심검으로 상단전의 일부분을 베어 사지와 두뇌의 명령 체계 사이의 연결을 끊어 버리는 것에 가까워.”
“……!”
“말하자면, 사람을 상대로 발휘하는 능력을 광물에 썼다는 게야.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결이 다른 곳에 쓴 심검은 시전자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걸세.”
“그 말씀은?”
“정신력만 충분하다면 내상을 입지는 않겠지만, 다시 심검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야. 이를테면 마음에 입은 내상, 즉 심상은 있었을 테니까.”
모두의 얼굴에 걱정이 깃들었다.
“괜찮습니다.”
연위를 향한 연호정의 믿음은 굳건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절대 벌이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연위 무림장의 냉정한 안목을 믿습니다. 그 안목은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도 적용되지요.”
“음, 그렇겠지.”
그래도 양천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여전했다.
“하지만 괜찮겠는가? 분명 화포만으로 산 하나를 날려 버리는 것은 놀라운 위업이네만, 그로 인해 당장 이만이 넘는 적과 싸우게 되지 않았나.”
“예. 또한, 연위 무림장의 용병술은 충분히 일류이나 누구 못지않게 대단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큰일 아닌가?”
“이 또한 자신이 없었다면 산 하나를 지울 생각은 안 했겠지요. 이미 작전은 시작되었고, 모든 건 일선 지휘관의 역량에 맡겨야 합니다. 애초에 화포로 산을 날려 버리겠다는 작전은 없지 않았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양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내가 십이지신과 함께 도우러 갔다면 좋았을 것을. 지금이라도 갈까 싶네만.”
“안 됩니다. 태상께서는 황제 폐하의 사위입니다. 제가 아버지와 함께하지 않은 것처럼, 태상 역시 지금은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섣불리 나서지 말라는 뜻이다. 양천은 끙,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연호정은 한곳에 모인 정보들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백 마리의 전서구와 전서응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역시.’
무허대사의 신법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다. 벌써 그가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다는 것은, 동쪽에 진을 친 병력을 데리고 황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아버지에게 충분한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문제는 저곳에서 곧장 적과 부딪치느냐, 후방으로 전력을 빼느냐를 결정해야 한단 것인데.’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아버지에게 맡긴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한 불안함. 자식이기에 남들보다 천 배는 더 걱정스럽지만, 대군사이기에 함부로 티를 낼 수 없었다.
‘지금은 다른 걸 생각해야 할 때다.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만에 하나를 위해 황궁의 정예 기마병 일천을 서쪽에 배치해 두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지금, 연호정은 오히려 자신의 추측이 틀리기를 바랐다.
‘사부님을 출격시킬 순 없다.’
흑제성의 태상이자 황궁 부마도위인 양천은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런 전투에서 목숨을 잃어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기천웅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강호 무림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었다. 패륜을 저지른 배신자를 끌어내기 전까지, 기천웅을 전면전에 내세우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탁무자야 말할 것도 없었다.
‘곡경 선배가 이곳에 왔다면 좋았을 것을.’
무림맹에서 처리할 일 때문에 곡경은 황궁에 돌아오지 못했다.
‘결국 나로군.’
말이 대군사지, 이번 한 번의 전투가 끝나면 그 직위도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까지가 자신이 할 일의 끝이었다. 남은 것은 적과 싸우는 일이다.
연호정은 서둘러 다른 정보 문서들을 뒤적거렸다. 이 잠깐 사이에 쌓인 전서들이 무려 수십 장에 달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
산서성에서 지급으로 날아온 개방의 전서를 확인한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역시!’
혹시 몰라 몇 장의 전서를 더 확인했다. 개방만이 아니라 산서성에 나가 있는 무림맹, 흑제성의 정보 부대가 보내온 정보였다.
그 모든 정보가 하나의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뜻이었다.
‘전서가 도착한 시간을 생각한다면…….’
연호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준비해야겠군.’
연호정이 양천에게 말했다.
“사부님.”
“으응?”
내내 태상이니 부마니 하는 소리를 해 대더니만 갑자기 사부다.
양천은 한 줄기 불안함을 느꼈다.
“무슨 일이냐?”
“제가 없어도 황궁을 잘 지켜 주십시오.”
“이놈의 자식이!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갑자기 왜 이러는 게야?!”
“누가 죽으러 간답니까? 슬슬 대군사직을 내려놓겠다는 뜻이지요.”
양천의 얼굴이 험해졌다.
“이놈! 아직 제대로 된 전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한데 대군사직을 내려놓겠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전투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싸움뿐이지요. 그리고 이곳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음이 분명하다면, 이제 다른 곳에서 벌어질 전투에 집중해야 합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놈들이 다시 황궁을 공략하려 한들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병력 차출, 전략 전술 등을 다 따지면 족히 석 달은 걸리겠지요.”
“나는 대체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연호정이 품에서 잘 접힌 문서 몇 장을 꺼내 양천에게 건넸다.
서둘러 문서의 내용을 확인한 양천이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예. 제가 대군사직을 내려놓고 난 이후의 일들을 정리한 문서입니다.”
양천의 입이 떡 벌어졌다.
“대군사 일을 하면서 여기까지 생각해 두었단 말이냐?”
“별거 아닙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가능했지요.”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황제 폐하께서도 다 알고 계십니다.”
“……!!”
“그리고 이 일은 모용가주가 직접 맡고 있지요. 지금쯤 절반 정도 완성이 되었을 겁니다.”
그럴 상황은 아니었지만, 양천은 연호정의 철두철미함과 엄청난 일 처리 속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놈아, 이런 일이 있었다면 미리 이 사부에게 말을 해 줬어야지.”
“신혼의 즐거움으로 불타오르는 스승님께 이런 일을 공유해야 쓰겠습니까.”
“이놈이?!”
“여하간 남은 일은 기 교주, 탁무자 노선배와 상의하여 마무리해 주십시오.”
양천의 얼굴에 아쉬움이 깃들었다.
“나는 항상 너를 보내 주기만 하는구나.”
“묵룡부에서는 제가 사부님을 보냈습니다만.”
“이놈아, 그런 뜻이 아니지 않느냐.”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다시 뵙게 될 겁니다.”
연호정이 기천웅을 바라보았다.
“이 문서에는 교주께서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서도 전부 적어 놓았소. 미리 가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오시면 되겠소.”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구먼. 하지만 알겠네. 자네의 귀신 같은 책략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기천웅은 오히려 담담한 기색이었다.
연호정이 탁무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허대사님을 출전시킨 점, 다시 한번 사죄드리겠습니다.”
무허대사가 잘못되면 탁무자의 목숨도 날아갈 수 있다. 그걸 알면서도 한마디 상의 없이 그를 출격시켰으니, 그 부분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다.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탁무자가 주먹을 휘둘렀다.
연호정의 머리통에서 딱! 소리가 났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꿀밤을 맞아 보았다.
“떽! 내 나이가 몇이고, 내가 몸담은 곳이 어딘데 목숨 운운하겠느냐. 내 제자였다면 머리통에 불이 나도록 알밤을 날렸을 것이다.”
“아픕니다.”
“아파야지. 이 늙은이는 죽을 수도 있잖느냐?”
그간 서로를 경건하게 대우해 준 것과 달리, 지금 두 사람은 마치 조손처럼 대화하고 있었다.
연호정이 머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무허대사님은 안전하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연히 걱정 안 한다. 그 땡중의 주먹은 지금 네게 알밤을 날린 이 늙은이의 주먹보다 열 배는 더 매섭다. 부처님이 부르시기 전까지 멋대로 이승을 뜰 그릇이 아니야.”
“그렇군요.”
연호정이 모두를 한 번씩 바라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부족한 저를 따라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뵐 동안 부디 건강하시길.”
그렇게 모두에게 인사를 건넨 연호정은 빠르게 북성을 떠났다.
얼마나 급한지 신법까지 펼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극한의 속도였다.
양천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못된 녀석 같으니라고. 이번 전투가 끝나면 정식으로 안사람을 소개해 주려 했거늘.”
기천웅이 피식 웃었다.
“나중에 나한테나 소개해 주게.”
“일없소.”
“그거 서운하구먼.”
그때였다.
훅!
저 멀리서 한 줄기 차가운 기세가 솟구쳤다.
모두가 그 기세를 느낀 순간, 두 여자가 빠르게 북성으로 다가왔다.
양천과 기천웅, 탁무자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어렸다.
“오셨는가.”
다소 지친 듯한 묵비와 달리, 모자선의 얼굴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흑제성주는 어디 있습니까.”
“그 전에, 전투는 어떻게 되었소?”
묵비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압승입니다. 적의 오천 병력과 수뇌부를 전원 해치웠습니다.”
양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잘했네! 그리고 고생했어! 한데 남은 병력은……?”
“천천히 오고 있습니다. 황궁 북부 기습에 대비하여 저희 먼저 왔습니다만.”
“올바른 판단일세.”
양천은 현재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그렇군요.”
곰곰이 생각을 거듭한 묵비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최대한 축기하겠습니다. 전투 상황을 보고 말해 주십시오.”
“연 성주를 따라가지 않나?”
“연 성주는 자신의 싸움을 마치면 연가주님께로 향할 겁니다. 아주 잠시라도요.”
묵비가 눈을 감았다.
“저는 가주님을 도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