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54)
1154화. 백음귀(百淫鬼) (4)
연호정의 이동 속도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정확히는 흑혈신마가 대단했다.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다른 문제겠지만, 보통의 말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지구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물론 종마다 차이가 크고, 개중에는 정말 천리마라 할 정도로 체력이 좋은 말도 있다. 그런 말은 물 몇 모금 섭취한 것만으로도 쉬지 않고 반나절을 달리기도 한다.
흑혈신마는 그 천리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놈에 온갖 술법과 마기를 퍼부어 만든 마물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전설상의 강시와 유사하지만, 멀쩡히 살아 있다는 측면에서 강시와 비교할 수 없었다. 실제로 흑혈신마는 무언가를 섭취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생물이었다.
하지만 그 덩치에 비해 극히 소량의 음식물만 섭취하고도 천리를 달렸다. 그 속도는 전투에서 보여 준 것처럼 절정고수 이상이며, 어지간한 고수의 발경도 통하지 않는 튼튼한 몸뚱이를 지녔다.
거기에 안 그래도 좋았던 시력을 신왕기로 더 틔우기까지 했으니, 마물이 아니라 영물이라는 표현을 써야 옳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하북을 벗어나 산서 태원, 나아가 분양(汾陽)까지 이른 연호정은 흑제성의 비밀 지부로 들어갔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산서 분양 지부는 실질적인 산서성 최고 전력을 보유한 곳이었다.
물론 본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무력보다는 정보력과 각종 사업에 특화된 면이 있었다. 그런데도 성도인 태원의 지부보다도 더 큰 지부가 분양이었다.
“고생이 많네.”
연호정의 치하에 분양 지부장의 얼굴은 감격으로 물들었다.
호남에 있는 흑도 무림 연맹 본부와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있는 그였다. 아무리 뛰어난 정보력을 지녔다지만, 성주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다 들었으리라 믿네.”
“물론입니다. 현재 섬서의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해 두었습니다. 식사부터 하시지요. 보고서를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그러세.”
분양 지부장에 대한 연호정의 첫인상은 상당히 좋았다.
양천에서 연호정으로 수장이 바뀌었는데도 분양 지부장의 태도는 깍듯했다. 그것은 비단 연호정의 무력이나 명성 때문이 아니었다.
연호정이 볼 때 분양 지부장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머리가 그렇게 좋은데도 충성심이 뛰어나기란 쉽지 않다. 양천이, 암무단주가 왜 그를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넌 괜찮냐?”
“좀 뻐근하긴 하지만, 괜찮소.”
놀랍게도 진양은 흑혈신마의 괴물 같은 체력과 속도에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같은 초절정이라도 신법에 한해서만큼은 최고 수준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기천웅의 가르침이 진양에게는 하늘이 내려 준 선물과 같았던 것이다.
‘신법에만 적용되는 무리(武理)는 아니겠지. 필시 다른 무공도 발전했을 것이다.’
진양도 진양이지만, 오대신장들은 하나같이 재능이 뛰어났다. 당장 진양 정도만 되어도 한 계단 오르는 데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십수 년이 걸리는데도 큰 무리 없이 발전하고 있었다.
재능은 물론 주변 환경, 그리고 강렬하고 능동적인 발전 의식 덕분일 것이다.
“씻고 밥 먹자.”
“그럽시다.”
뜨끈한 물로 몸을 씻고 피로를 푼 두 사람은 밥까지 든든하게 먹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에게 분양 지부장이 다가왔다.
“현재 섬서 무림의 상태입니다. 당장 어제 아침에 올라온 최신 정보까지 적혀 있습니다. 중요한 부분만 골라서 작성했으니, 보시는 데에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사무적이면서도 깍듯하다.
연호정은 빠르게 보고서를 훑었다.
‘흐음.’
과연 남다르다. 쓸모없는 정보는 철저히 배제했으며, 문장 하나하나가 간결하면서도 전달력이 좋았다.
이런 사람을 데려다가 밑에 붙여 주면 소정광이 크게 기뻐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당장에 그럴 수는 없었다.
어느새 보고서의 마지막 장을 읽은 연호정이 눈을 번뜩였다.
“피리?”
“그렇습니다.”
분양 지부장의 눈이 깊어졌다.
“독특한 모양의 피리라고 합니다. 그녀가 데리고 온 일백 명의 병력과 결정적인 차이점이 가면과 피리입니다.”
피리라.
‘설마?’
연호정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자식을 버리고 떠났다는 죄책감에 제 인생조차 제대로 살지 못했던 여자.
강호 무림 최강자 중 하나이자 연호정과 그 일행에게 큰 도움을 주기도 했던, 그러나 그 자신의 의지가 확고하여 미래가 불투명한 길임이 빤히 보이는데도 보내 줄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
‘하 선배.’
음제 하은교.
그녀는 사음교주를 직접 찾아간다고 하였다.
무극에 이른 고수의 정신이 비정상일 수도 있다는 말을 증명하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근본적으로 선하고 현묘한 사람이었지만, 자식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오랫동안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물론 자식을 그렇게 떠났으니, 양심 있는 부모라면 괴로워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녀는 엄청난 정신력과 빼어난 지혜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일의 선후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것엔 관심도 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 자신의 마음이다.
하은교는 몇 년을 더 인내할 수 있었고, 더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사지(死地)로 갔다.
어미로서의 책임감과 죄책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기 때문이겠지만, 동시에 무극에 이르렀음에도 그녀가 신(神)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알려 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만약 하 선배가 사음교주를 만났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호정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사음교주에 대한 분노 외적으로, 그는 천하제일을 논하는 강자였다. 당장 회귀 전만 해도 그 하나를 잡기 위해 자신과 모용군, 당관까지 셋이 필요했다.
자신이 그때와 많이 달라졌고 당시의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후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음교주가 하은교보다 떨어질 거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결정적으로 사음교주 주변에는 무극에 이른 고수들이 많을 것이다. 하은교가 사음교주를 죽일 수 있는 확률은 사실상 무(無)에 가까웠다.
‘그걸 알고도 가셨지요.’
하은교는 자신이 죽을 걸 알고도 갔다.
누군가는 그 행보를 답답하다고 여기겠지만, 자식에게 죄책감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아주 희박한 확률이나마 자식이 살아 있음을 안다면, 설령 죽는다고 해도 가서 얼굴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게 진짜 부모다.
하은교에게 중원의 전쟁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녀는 이미 전쟁보다도 더 끔찍한 시간을 홀로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무극에 이른 무공과 여인.
그리고 결정적으로 피리를 들고 있다고 한다.
‘사음교주가 모종의 능력으로 하 선배를 세뇌라도 시켰다면?’
연호정이 알기로 하은교 수준의 고수를 세뇌할 방법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교라면 다를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술과 마공에 능한 광혈교와 사음교라면 불가능하지도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하 선배님…….’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인생일 것이다. 연호정은 그렇게 생각했고, 하은교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하 선배라면, 놈들은 왜 이 시점에 하 선배를 파견했을까.’
하은교 개인에 대해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적의 의도였다.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그 의도가 쉽게 유추되지 않았다.
‘역시…….’
그때, 진양이 말했다.
“우리끼리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겠소? 일단은 만나 보는 게 우선이겠지.”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봤을 때, 지금 대형을 이길 만한 사람은 전 무림을 통틀어도 셋이 안 될 거요. 고민 같은 거 그만하고 냅다 가서 모가지 날려 버리시오.”
분양 지부장은 내심 깜짝 놀랐다.
진양의 격의 없는 말투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흑도 무림의 수장인데!
“역시 고민해 봤자 답은 안 나오겠지.”
더 놀라운 건 연호정의 대답이었다.
분양 지부장은 흑도 무림이 얼마나 힘의 논리에 철저한지 알고 있었다. 특히나 흑도 연맹 정도가 되면 상명하복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무척 자유로운 분위기구나.’
그렇다고 엄격함이 없어 보이진 않았다. 진양은 툴툴대듯 말했지만, 분명 연호정에 대한 약간의 어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실력이든 뭐든, 지킬 건 지키는 관계라는 뜻이리라.
연호정이 보고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 부분이 유독 의아하긴 하군.”
“무슨 부분인데 그러시오?”
“남하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느리다는 것. 아직도 섬서 감천이다.”
“흐음.”
진양이 턱을 쓰다듬었다.
“저놈들이 아무리 대가리가 멍청해도 이쪽 정보력이 대단하다는 걸 모를 리는 없을 텐데.”
“그렇지.”
“뭐지? 성동격서, 뭐 그런 건가?”
그때, 분양 지부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신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생각보다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고 혹시나 해서 끼어든 것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게.”
“감사합니다. 저희도 그 부분이 의아하여 줄곧 생각해 봤는데…… 상식적인 행동은 아니니, 저 느릿한 움직임 자체에 의도가 있는 듯합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렇다면 관건은 무슨 의도가 있겠느냐입니다.”
“해서, 자네들 생각은?”
분양 지부장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대놓고 본인들의 거취를 보여 주고 있다는 건, 누가 찾아와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유인?”
“소신들의 생각은 일단 그렇습니다.”
물론 그 생각을 연호정이라고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닐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올 줄 알고 유인을 한단 말인가?
“……대형이겠지.”
마치 속마음을 읽은 듯한 진양의 말에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뭐?”
“만약 유인책이라면, 대형을 노린 것일 확률이 높소.”
“왜?”
“왜라니? 놈들이 바보요? 그동안 뭔 일이 터지면 항상 누구보다 빨리 날아와서 사건을 착착 해결한 사람이 누구요?”
“……?!”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에는 허점이 있었다.
“그건 말 그대로 가능성에 불과하다. 나 하나를 불러내자고 그만한 고수를 투입해? 다른 사람이 올 수도 있는데?”
“대형이 아니면 또 어떻소?”
“엉?”
“대형이 아니면 또 다른 무극수겠지. 뭐가 됐든 보고 이길 수 있으면 싸우고, 아니면 줄행랑쳐 버리면 되는 거 아니오?”
“……?!”
“왜? 당연한 거 아냐?”
진양은 고개까지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연호정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걸려들면 좋고, 안 걸려도 상관없다…….”
“이번에 뭐, 나 빼고 재미 좀 보셨다면서? 그때도 보슈. 신화교 놈들 요녕성에 미끼를 던지고 진짜는 북부에서 기습 준비를 했다며?”
“성동격서다?”
“내 말은, 끼리끼리 노는 만큼 이것도 제법 그럴듯한 함정일 수 있다는 거요. 그게 성동격서든 차도살인이든, 저렇게 미적거리고 있는 게 말이 되오? 지부장 말마따나 유인책이라면 누가 걸리든 상관없는 패를 쥐고 있거나, 반응만 보고 말아도 되는 상황인 거겠지.”
“……!”
“막말로 뒈질 것 같으면 튀면 그만이고. 무극수라며? 누가 쫓아가서 잡을 거야? 튀면 튀는 대로 유인책일까 무서워서 어떻게 쫓아가?”
그야말로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진양이 입맛을 쩍 다셨다.
“막상 나오는 대로 지껄이다 보니까 이거 영 찝찝하네.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
“그래도 갈 거지?”
“가야지.”
“시벌, 그럴 것 같았소.”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하지만 네 말대로 아쉬울 게 없는 놈들이라면…… 그냥 갈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