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70)
970화. 늪에서 (3)
황궁에서의 이튿날이 밝아 왔다.
연위 일행은 황제가 직접 정해 준 거처에서 휴식을 취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연위는 잠을 자지 않았다. 적절한 운공으로 피로를 날리면서도 기감은 항시 신화교주 기천웅을 향해 있었다.
팽무강은 편하게 쉬면서 피로를 모두 풀었고, 양천은 두 사람보다 더 깊은 곳, 어전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잠이 없는 황제와 또 다른 깊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시 해가 서산으로 질 즈음이었다.
양천과의 대화, 그리고 어느 정도의 정무를 마친 황제가 기천웅을 부를 무렵.
황궁에 드리워진 붉은 화염 속에서 한 줄기 서늘한 불꽃이 치솟았다.
* * *
청록색 화려한 색조로 물든 거인이 물었다.
“상황은 어떠하냐?”
“강동 벽산연가의 가주와 하북팽가의 가주, 그리고 묵룡부의 부주가 병력을 이끌고 궁에 주둔 중입니다.”
“연가주라…… 황제의 총애를 받는 제국검의 검주(劍主)라 들었지.”
“소문으로는 그의 무공이 천화경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직접 볼 수 없는 상황이라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궁내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본 결과, 실제로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기가 막히는군. 그 조그마한 가문에서 천화지경에 달한 고수가 둘이나 나오다니. 하기야 연호정 그놈의 재능이 나 이상이라 하였으니, 뿌리인 아비의 재능도 보통은 아니겠지.”
“…….”
“양천은?”
“황제의 예비 부마로서 어전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양천의 무력은 확인 가능한가?”
“내궁 쪽과 제법 떨어져 있는 터라 그 또한 직접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양천이 입성했을 적 그의 강렬한 기도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떻더냐?”
“기도만으로 추측기에는, 저보다 강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사음교주와의 싸움에서 못난 모습을 보여 줬다고 들었거늘, 그사이에 모진 노력을 했나 보군.”
“…….”
“그래도 이 정도면 일이 잘 풀린 셈이야. 아버지가 용케 황제를 설득했어.”
“예.”
“시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걸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다만, 그만한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다면 임무를 달성해도 살아남기는 힘들 것이야.”
“이곳으로 오며 이미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아직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가?”
“…….”
“뭐, 됐어. 고작 황제의 목숨과 자네만 한 걸물의 목숨을 교환하는 것이 아깝기는 하지만, 자네가 진정 내게 돌아오지 않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저는 그저 대의에 따라 행동할 뿐입니다.”
“대의라는 것도 결국 말장난에 불과하지. 같은 대의를 내세웠다 해도 일 년 앞을 보는 자와 십 년 앞을 보는 자의 행동은 달라지는 법이야.”
“…….”
“시간도 촉박한데 자네와 이런 걸로 말싸움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해서, 아버지는?”
“황제와 독대 중이실 것입니다.”
“자네를 의심하진 않던가?”
“전혀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재미있군. 이래서 세상은 공평한 거야. 하늘에 이른 무력으로 만족했으면 될 것을, 과한 욕심에 상단전을 상실하고 영안(靈眼)의 뿌리마저 잃었으니 자네의 속내를 알 수가 있겠나.”
“설령 영안이 온전하셨더라도 저를 의심하진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긴, 그도 그렇겠지. 자네는 우리를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자네 스스로를 위해서 행동하고 있으니까.”
“…….”
“어떻게 할 건가? 살아남기 힘들어 보이는데, 황제가 죽었다는 건 어떻게 알릴 셈이지?”
“황제가 죽으면 황궁은 물론 무림의 움직임에도 큰 변화가 생길 겁니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예측하라고? 그건 너무 불확실한 일이지.”
“하면……?”
“이왕 죽을 마음이니 어전으로 침입해 폭사라도 하면 괜찮겠지만, 그 또한 이쪽에서 황제가 죽었다는 걸 확신하기엔 부족해.”
“…….”
“탈출해서 본교로 돌아와 보고할 수 있다면 그리하게.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할 겁니다.”
“음.”
“그리고 제게는, 당신에게 연락할 만한 시간도 능력도 없습니다.”
“…….”
“그저 최선을 다해 황제를 죽일 뿐입니다. 이쪽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그쪽에서 어떻게든 알아내 주시길 바랍니다.”
“당신…… 그쪽이라…….”
“…….”
“죽음을 각오했다고 너무 막 나가는군. 내가 당대 신화교주임을 잊었는가.”
“소교주이시지요.”
“…….”
“아직 정식으로 교주위에 오르지 않으셨습니다.”
“호칭만 제외하면 다를 게 없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지 말래도 할 것 같군.”
“부디 사음교주에게 놀아나지 마십시오.”
“……이놈.”
“그는 소교주가 감당할 만한 악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손을 잡은 거야 그렇다 쳐도, 이번 일이 끝나면 죽이든 연을 끊든 하십시오.”
“네놈이 정녕 나를 우롱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남들이 문제라고 말하는 부분을 스스로만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남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한 당사자의 안목 탓입니다.”
“…….”
“소교주에게는 그것이 자존심입니다. 그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본래 갖고 있던 향상심을 올바르게 재현한다면, 신화교는 삼교의 으뜸이 되어 만세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닥쳐라.”
“가마꾼 중 다섯이 제 수하입니다.”
“…….”
“이곳 상황을 지켜보다가 황제가 죽으면 교로 돌아가라 이르겠습니다. 다섯 중 둘은 교단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
“그럼 이만.”
촤아아악!
물 한 바가지에 꺼진 화로가 허연 연기를 뭉게뭉게 피워 올렸다.
신화교의 호교신장, 야하륵의 눈에 불이 붙었다.
“당신의 성품이 지금보다 개미 눈곱만큼만 더 괜찮았다면, 나 역시 이런 일에 목숨을 걸지는 않았을 것이오.”
수하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린 야하륵이 거처에서 나왔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많군.’
신화교의 본단에서 보는 하늘과 같으면서도 묘하게 달랐다.
본단에서 보았던 별들은 하나같이 새하얀 불꽃을 담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밝고 뜨거웠다. 구름이 가득 껴도 어둡지 않을 정도로 별빛이 맑고 생생했다.
하지만 이곳 대륙의 하늘을 수놓은 별빛들은 무척이나 서늘해 보였다.
밝기는 같은데, 불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저 헤아릴 수 없는 신(神)의 작은 눈들이 대지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차가움, 그리고 위화감.
야하륵은 이 대륙의 하늘을 메운 별들에도 새하얀 불꽃들이 가득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
그때였다.
“계시오?”
야하륵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그는 내심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언제 온 것일까?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거기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야하륵이 입을 열었다.
“누구신가.”
“강호의 필부요. 강동 연씨가문의 위라 하오.”
순간 야하륵의 눈이 흔들렸다.
강동 연씨가문이라면 당대 무림 최고의 풍운아인 연호정이 소속된 벽산연가를 뜻함이었다.
그리고 그 연가의 위라면 가주인 연위일 것이다.
뜻밖의 순간,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이 찾아왔다. 야하륵은 괜스레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왜 지금? 설마?’
황제 암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일까?
긴장해서 저도 모르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이내 야하륵은 조소를 머금었다.
‘그럴 리가 없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임무였다. 신화교주 기천웅도 모르는 것을 무림의 필부가 알 리 없다.
애초에 성화분으로 펼쳐지는 화화술은 영안의 후계자 정도가 아니면 그 기색을 알아채기가 불가능하다. 깨달음이 극에 이르러 반쯤 신선의 경지에 발을 걸친 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생각해도 연위가 거기에 해당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연가의 가주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로?”
“볼일이 있으니 왔겠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차분하고도 깊다. 듣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풀어지는 걸 느낀다.
교주인 기천웅과 전혀 다르면서도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는 목소리.
야하륵이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한 그루 대나무 같은, 혹은 평생 올바른 학문을 위해 애를 쓴 노학자와 같은 사내가 서 있었다.
야하륵이 순식간에 연위의 몸을 훑었다.
‘없다?’
검이 보이지 않는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외양으로 알려 주고 있다. 야하륵의 얼굴에 보이지 않는 안심이 일었다.
연위가 웃으며 말했다.
“처음 뵙소이다.”
“그렇구려.”
“그대의 풍부한 진기는 황궁 입성 때부터 느꼈소.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는데, 과연 보통 자태가 아니오. 출중하게 연마된 무인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소이다.”
진심이 담긴 칭찬이었다.
야하륵이 물었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으시오?”
“무뚝뚝하시구려. 들은 것과 다르오.”
야하륵의 눈이 가늘어졌다.
연위가 엄지로 어전 방향을 가리켰다.
“교주께 폐하를 알현하기 전에 그대와 술 한잔해도 괜찮겠냐고 물었소. 다행히 교주도, 폐하께서도 허락을 해 주셨소.”
“……!”
“듣기로 술을 상당히 잘하신다던데.”
“조금 하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앞으로 함께 싸울 동지인데 얼굴 한번 못 보고 서먹하게 지내서야 쓰겠소? 해서, 내 용기를 내서 찾아왔소이다.”
야하륵의 눈이 흔들렸다.
함께 싸울 동지. 어디서든 쉽게 듣기 힘든 말이었다.
신화교에 동지는 없었다. 애초에 그런 말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신을 위해, 교주를 위해 한목숨 바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까.
가만히 연위를 바라보던 야하륵이 툭 던지듯 말했다.
“하면 조금만 마시겠소.”
교주가 허락했다는데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다. 거부했다간 오히려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술이 없소.”
“걱정하지 마시오. 내 거처에 있으니까. 천천히 걸어갑시다.”
흔들렸던 야하륵의 눈동자가 찬란한 빛을 발했다.
‘생각보다 쉬워질 수 있는가.’
연위의 거처는 어전에서 무척이나 가깝다. 그에 비하면 이쪽은 거리가 상당하다.
어차피 어전으로 향하는 길이라면, 연위와 술을 마시다가 슬그머니 빠져서 일을 벌여도 될 것 같았다.
야하륵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허허, 받아 주셔서 감사하오. 솔직히 거절할 줄 알았소이다.”
“……왜 그렇게 생각했소?”
“당연하지 않소? 그간 우리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소이까. 기실, 이렇게 웃으면서 볼 만한 사이는 아니지 않소.”
야하륵은 아차 싶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렇게 시원하게 허락해 주다니, 과연 신화교주께서 사람 보는 안목이 있소이다.”
시원하게 허락한 이 행동이 교주님의 안목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야하륵은 알 수가 없었다.
“과찬이시오.”
“하면 슬슬 걸어갑시다.”
“좋소.”
그렇게 두 사람이 내궁 방향으로 걸었다.
어둑한 밤에 강력한 힘을 지닌 고수들인지라 황궁 수비대 병사들이 그들을 안내했다. 말이 안내지, 만에 하나 일이 벌어지면 최대한 돌발 행동을 막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야하륵은 병사들로 둘러싸인 것이 답답했다.
그리고 그런 야하륵을 보는 연위의 눈빛은, 처음 그를 보았을 때와 달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