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213)
213_거인의 맥동 (7)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밤이 되면 소수 유흥가를 빼면 조용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이 외곽에 있는 작은 집은 밤만 찾아오면 시끌시끌해지곤 했다.
“여러분은 이 미국 땅에서 공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시아인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아시아를 이끌어나갈 미래입니다! 비록 태어난 곳도, 살아온 곳도, 사회적 신분도 모두 다르지만 배움에는 귀천이 없는 법이니 여러분들이 더욱 열심히 배우고 익히길 바랍니다.”
비록 얼마 없는 전구는 깜박깜박거리고 지붕 위에선 쥐 돌아다니는 소리가 다 들리지만, 이들의 향학열을 끌 수는 없었다.
여전히 두꺼운 차별의 벽.
여전히 극복할 수 없는 인종의 낙인.
배울 만큼 배운 청년들이 부딪히는 현실은 너무나 아팠고, 그럴수록 이들의 가슴속 열망은 더더욱 달아올랐다.
“자본론에 적힌 대로, 대공황은 자본주의 체제 모순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하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전쟁을 일으켜 세계혁명을 저지하려 합니다. 루즈벨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더더욱 반전운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백인들의 싸움에 우리가 피 흘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명쾌한 답이 여기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조선계도, 일본계도, 중국계도, 류큐계도 아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만이 있을 뿐이었으니까.
한편 강의실과 분리된 작은 방에서는, 몇몇 중진급 인사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의 지령이오.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의 참전을 늦추라고 하는군.”
“선전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하지만… 김가 저택이 저렇게 불타버리면서 반전 여론을 조성하기 무척 어려워졌습니다.”
김가 이야기가 나오자 자리에서 가장 높은 인물로 보이는 사람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 극우 제국주의자, 민족의 배신자가 대체 뭐길래?”
“여기선 인망이 제법 있으니까요.”
“그놈의 자선은 모두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했기에 가능했던 거요, 동무들. 인심 쓰는 척하지만, 애초에 그의 것이 아니었소. 우리의 것이었지.”
“우매한 대중들은 그 사실을 모르니 갑갑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의 심기를 캐치한 이들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여기선 저놈이 두목이었으니까.
“하, 이거 참.”
김유진의 저열한 민낯을 까발릴 수만 있다면 단숨에 공산당의 세를 떨치고 서부를 해방구로 만들 수 있을 텐데.
박헌영의 고심은 깊어져만 갔다.
* * *
숙련된 의사가 고름을 짜내고 피와 살 밑에 파묻힌 고름 주머니까지 꼼꼼하게 도려내듯.
제갈량이 제단을 차리고 제를 올려 장강에 동남풍을 불러내듯.
루즈벨트의 작업은 신속하고도 과감했다.
“우리 공화당은 자성해야 합니다. 대공황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승리, 승리를 얻겠다는 마음가짐의 결여였습니다.”
“맥아더 의원의 말이 정확합니다! 링컨 대통령의 거룩한 뜻을 이어받은 우리 공화당이, 언제부터 자유의 적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해 쪼그라들어 있었습니까?!”
평화가 아니라 굴종.
반전(反戰)이 아니라 매국.
엊그제까지 미국의 평화를 위해서는 고립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외치던 자들은, 인민재판에 끌려 나오듯 썩은 눈을 한 채 연단에 올라선 자신이 얼마나 신실한 기독교인인지, 그리고 얼마나 나치의 비윤리적 악행에 경악했는지 기나긴 간증을 해야만 했다.
그러고도 청중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저는 평화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전쟁을 원하는 한, 우리 또한 맞서야만 합니다!”
“평화를 얻고 싶으면 무기를 준비해야 하는 법! 지금이야말로 자유의 이름으로 싸워야 합니다!”
전향.
180도 턴!
공화당 내에서 벌어진 이 칼부림에서 칼자루를 쥔 건 너무나 당연히 맥아더였다.
“얼마 전까지 전쟁을 선동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실례지만 혹시 독일로부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해입니다!”
캔자스 상원의원에 당당히 재선한 맥아더는 물 만난 물고기마냥 펄떡대며 회개한 탕아들의 신앙심을 판별하였고, 그동안 잘근잘근 씹어 왔던 굴욕을 말끔히 털어버릴 수 있었다.
당권을 장악하고, 기존 공화당 지지자뿐만 아니라 그동안 공화당에 마음이 떠나 있던 옛 지지자들도 다시 끌어들이고.
2년 남은 1940년 대선을 목표로 숨 가쁘게 달리던 맥아더는 어느 날, 청와대의 부름을 받았다.
“전시 거국내각?”
“더글라스. 자네밖에 없잖나.”
이제 대통령 노릇 한 지 6년이나 된 옛친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더러 2년간 전쟁을 미루란 이야긴 아니겠지? 이번 기회에 독일은 물론 일본까지 싹 끝내버려야 해. 이미 잽스 놈들의 수작질은 위험수위니 말이야.”
“그건 그렇네만.”
“총력전이 되어야 해. 유럽 대륙을 석권한 독일과 아시아 대륙을 석권한 일본에 맞서려면 우리 역시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힘을 끌어 써야 하네. 사실 전쟁은 자네의 전문 분야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자네가 전쟁부 장관이 되어주면 그야말로 최고의 인선 아니겠나.
루즈벨트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이미 정치판에서 제법 오래 구른 맥아더는 그 속내를 빤히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전쟁부 장관에 어울리긴 하지.”
“오! 그렇다면―”
“하지만. 대전쟁을 앞둔 지금, 백악관이야말로 전쟁부보다 더 어울리는 거처라고 생각하네.”
“젠장.”
끼익거리는 휠체어 소리가 요란히 울려 퍼지고, 루즈벨트는 어느새 맥아더의 곁에 바짝 붙었다.
“1940년 11월 5일에 선거하고, 다음 해 1월 20일에 취임하고. 가장 전쟁이 격화되어 있을 시기에 대통령을 교체하자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네가?”
“이상한 소릴 하는군, 프랭크. 어차피 자네는 백악관에서 나갈 예정 아닌가? 민주당의 새 후보가 당선되나 내가 당선되나 어차피 정부수반 교체는 당연한 일인데.”
맥아더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스스로 가능성이 희박하다 생각해 머릿속 구석에 밀어놓았던 판단이 다시 용틀임 쳤으니까.
“자네, 워싱턴 이래로의 전통을 짓밟으려고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암묵적인―”
“암묵적이지! 당연하지! 아무도 그딴 발칙한 생각은 안 했으니까!”
“그야 전 세계를 두고 수천만 대군을 동원한 전쟁 따위 여태까지 없으니까 그렇지!”
루즈벨트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저으며 외쳤다.
“우리 당에 지금 사람이 있는 것 같나? 안정적으로 거국내각을 유지시키고, 뉴딜에서 손을 놓지도 않으면서, 전쟁 지휘에 내분 중인 당까지 관리할 수 있는 인간이 있으면 나도 핫 스프링스 온천으로 돌아갔어! 뜨뜻하게 몸이나 지지면서 살면 되니까!”
“야당으로 돌아가면 아무 문제 없네, 프랭크.”
“의사당에서 사람 웃기는 법은 잘 배웠군 이 친구가. 입만 열면 나더러 공산주의자라고 까대던 공화당 친구들이 참 잘도 뉴딜을 유지하겠어. 솔직히 말해보게. 그거 다 폐지하고 싶어서 막 드르렁드르렁하지 않나?”
맥아더는 답하지 않았지만, 표정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일이었기에 루즈벨트는 그러려니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볼수록 그의 의지는 더더욱 확고해지고 있었다.
“나는 3선에 도전할 걸세. 4년 더 해먹고 싶어서가 아니야. 지금 이 나라의 키를 잡아야 하는 건 그 누구보다 정치적인 인간이고, 내 생각에 자네보단… 내가 좀 더 잘할 것 같거든.”
“그래서, 나더러 장관이나 해라?”
“다른 걸 원하면 뭐든 말하게. 몇 자리 정도는 더 내줄 수 있어.”
“전통을 깨는데 두렵진 않나? 후세가 자넬 어떻게 평가할지?”
“내 평가 기준은 오직 미국 시민의 표뿐이네. 후세는 알 바 아니고. 그보다 자네, 낙선할까 봐 벌써 쫄리나 보군.”
맥아더는 정곡을 찔렸는지 할 말을 잃었고, 그 모습을 본 루즈벨트는 더욱 어깨를 폈다.
“자네의 의사를 기다리고 있겠네. 하지만 빨리 결정해주게. 선전포고문을 의회에서 읽을 때 새 각료진도 공개하고 싶거든.”
“이렇게 멋대로 움직여 놓고 협조를 구하다니, 뻔뻔스럽군.”
회담은 결렬로 끝났고, 잔뜩 성이 난 맥아더는 곧장 D.C에 따로 마련한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새벽.
여전히 수십 년 군인 생활의 습관이 몸에 밴 맥아더는 해가 뜰 즈음 일어나 마당으로 향했다.
간단하게 몸을 좀 움직이고, 구독 중인 신문을 읽고, 우체통을 확인하는 정해진 루틴.
하지만 우표도, 소인도 일절 없는 황색 봉투를 우체통에서 꺼내는 일은 전혀 정해진 루틴이 아니었고.
“이, 빌어먹을….”
봉투 안에 들어 있는 한 젊은 여성의 사진을 보자 맥아더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 친애하는 맥아더 의원께.
이자벨 로자리오 쿠퍼(Isabel Rosario Cooper) 양 기억하시지요? 당신이 총애했던 16살짜리 정부 말입니다. 귀하께서 필리핀에서 데려왔던 그 아가씨가 참 예쁘게 크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분이 생계에 곤란을 겪고 있는데―
“이 개자식! 이따위로 협박질을 한다고?! 빌어먹을 앉은뱅이가!”
뒷목이 뜨뜻미지근한 것이, 어찌나 세게 뒤통수를 처맞았는지 얼얼할 정도였다.
사진 뒤에 적힌 누군가의 글귀를 정신없이 읽던 맥아더는 빡 돌아버린 나머지 사진을 북북 찢어버렸다.
공화당 중진인 자신을 상대로 금품 협박? 웃기는 소리.
루즈벨트다. 무조건 루즈벨트야. 대선 때 뿌려버리겠단 거지.
이걸 막아낼 만한 수단? 맞서면 되나? 내가 가진 패, 망할 앉은뱅이의 약점. 그 모든 것들을―
“이 개자식이 진짜. 좋아. 한 판 붙자. 어디 네놈 뜻대로 되는지 한번 보자고.”
맥아더가 투쟁을 결심한 그다음 날, 봉투는 하나 더 꽂혔다.
― 의원님. 너무 정정하신 것 아닙니까? 여자가 너무 많으신데….
한두 건이 아니네?
전시에 여자 문제로 이렇게 많이 언론을 탔다간 강인한 지도자상은 개뿔, 그냥 나잇값 못 하는 추잡한 노인네로 낙인찍히겠지. 이래서야 도저히 선거에서 이길 각이 안 보인다.
그날 오후, 맥아더가 이끄는 공화당이 대통령의 ‘대국적 결단’에 물밑으로 동의하면서 정계도 정리가 완료되었다.
* * *
베를린.
“이 빌어먹을 작자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콰당탕탕!!
책상 뒤엎어지는 소리가 작렬하고, 자리에 있던 고관들이 모두 대가리를 박았다.
[독일 간첩단, 사형 선고!] [주범 등 9명 사형, 기밀 누출 등 모두 합쳐 총 300년 형 이상!]“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유대인들이 선량한 아리아인을 사법 살인하려 하고 있어!”
히틀러는 손을 덜덜 떨며 엉망으로 구겨진 종이쪼가리를 바닥에 툭 던졌다.
독일의 입장은 단순명료했다.
― 홀로코스트나 대규모 학살은 모두 날조이며, 유대인들이 또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선동을 하고 있다.
― 유진 킴은 예전부터 일관적인 극우 반독 활동을 해온 인물이며, 이번에도 선동과 날조를 저지르다 애국심 넘치는 사람들에게 ‘의거’를 당한 것.
― 독일 당국은 결코 테러를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절 지령을 내린 바 없음.
이래놓고 분위기가 영 좋지 않자 ‘폭력은 나빠요’ 수준의 성명을 발표하긴 했다.
“대체 왜! 어째서! 오이겐 킴, 또 그놈이 추잡한 짓거리를 하는 게 틀림없어!”
나치 독일의 체제란 건달패 조직이나 일반인 계모임 꼬락서니에 비견될 만해서, 총통의 명령은 문서화되는 것도 물론 있었지만 암시나 구두 멘트 정도로도 얼마든지 하달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히틀러가 “저 원숭이 새끼 죽었으면.”이라고 한마디 했다고 첩보조직이 풀가동되어 알아서 명을 이행하려 드는 일도 당연히 밥 먹듯이 벌어지곤 했다.
일이 잘되면 총통의 결단, 망하면 아랫것들의 과잉충성.
나치의 구조라는 것이 대개 이런 모양새였다.
“미국인들이 선전포고를 하기 전에 빨리 일본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교섭은 잘 되고 있나?”
“더욱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총통 각하. 프랑코가 참전을 거부했는데 어쩌면 좋을까요…?”
“이 배신자! 배신자들! 은혜도 모르는 배신자!!”
지브롤터 공략을 위해 끝없이 구애를 펼쳤던 프랑코는 끝끝내 독일의 손을 뿌리쳤다.
아무리 프랑코가 내전으로 나라를 피범벅으로 만든 인간백정이라곤 해도, 히틀러의 트루 광기 앞에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외교관들이 찾아가 ‘석유와 식량 수출 금지’라는 카드를 내민 것도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야.”
독일 민족의 메시아가 또다시 천재적인 발상을 번뜩이자,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우리 국가사회주의의 이념이 무엇인가. 바로 반공이야. 그런데 애먼 프랑스를 때려잡았으니 반응이 별로 안 좋은 거야. 이제 우리가 하나 된 유럽의 힘을 모아 소련 볼셰비키들을 쳐부수면 미국도 감히 끼어들진 못하겠지.”
“예…?”
“총통 각하의 혜안에 감탄했습니다!”
“러시아를 정복해 레벤스라움을 이룩하면 미국을 조종하는 유대―볼셰비키들도 필시 실각할 겁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끼어들려면 2년 정도는 준비해야 할 터.
2년이 뭔가. 하등종족 슬라브인쯤이야 1년이면 너끈히 정복할 텐데.
신조차 모독하는 사상 최대의 천재는 자신의 놀라운 발상에 두려움마저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