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308)
308_악의 황혼 (3)
1941년 4월.
“인상 좀 펴렴, 앨리. 생일이잖니.”
“네에.”
런던의 한 고급 식당.
본래라면 특별한 관계자가 아닌 이상 이런 곳에 입장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옆에 연합군 유럽 총사령관을 끼고 있다면 그 어떤 점포도 프리패스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스 킴의 얼굴은 도무지 펴질 줄을 몰랐다.
미국을 떠난 뒤 도무지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게 없었기 때문.
앨리스는 원래 미국 적십자 클럽모빌 서비스(Clubmobile Service)에 참여해 유럽으로 왔다.
이 특별한 집단은 개조 버스를 몰고 포로수용소, 비행장, 향후에는 전쟁터까지 나아가 이동 매점 역할을 할 계획이었고, 실제로 앨리스는 시칠리아 전역에서 그 일을 했었다.
아무리 이 황금마차가 전장 투입을 고려했다지만, 연합군의 장성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자원봉사자를 최전방에 밀어넣을 리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앨리스와 자원봉사자들은 시칠리아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은 일은 없었다.
다만 몇 가지, 소소한 문제가 발생했다.
앨리스는 멤버 중에서 가장 어렸다.
클럽모빌 서비스 멤버의 공식적인 연령 제한은 최소 성인, 최대 35세 사이였다.
하지만 유진 킴이 막대한 자금을 기부하는 대가로 자신의 딸을 끼워달라 요청했기에 연령 제한이 내려갔을 뿐, 본래 적십자는 최소 25세를 커트라인으로 잡고 있었다.
결국 나머지는 거기에 파생되어 발생한 일들.
염불보단 잿밥이란 옛말 틀리지 않다는 듯 자꾸 앨리스에게 엉겨붙는 사람이 생기거나, 혹은 그 반대로 별로 엮이지도 않은 사람이 대놓고 적대시한다거나.
결국 이로 인해 몇몇 골치 아픈 일이 발생했고, 이런 불협화음을 캐치한 유진의 부하들이 ‘킴 장군의 사교 활동에 앨리스 양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그녀를 빼내면서 앨리스의 클럽모빌 활동은 막을 내렸다.
실제로 필요하긴 했으니 딱히 거짓말이 아니긴 했다만, 그녀의 기분이 그렇다고 풀릴 린 없었다.
한때는 런던에서의 사교 활동에 재미를 붙이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아시안 카산드라의 딸로 기자들에게 충분히 시달릴 만큼 시달렸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이곳에서 온갖 황색 언론의 불지옥맛을 보고 넌더리를 내고 말았다.
한번은 이러다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 아는 이들 얼굴이나 보러 잠깐 나갔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그녀가 앉은 테이블 바로 뒤편에서 웬 잡놈들이 ‘총사령관의 딸을 누가 가장 먼저 자빠뜨리느냐’ 같은 웃기지도 않는 주제로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내기를 하고 있더랬다.
그녀에겐 최악의 경험이었지만, 그 잡놈들에게도 이날은 최악의 날이 되고 말았다.
그 음담패설의 대상이 바로 뒤에 있었단 것이 두 번째요.
첫 번째로 불운한 사실이 있었다면, 그녀와 함께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사고 치고 자숙 중이던 흉포한 중세 기사였다는 점이렷다.
그리고 그날 벌어진 난투극에서 강냉이가 털린 놈팽이 중 하나가 처칠의 망나니 아들로 밝혀지면서, 흔해빠진 주정뱅이들의 죽빵 매치는 단숨에 연합국의 외교 문제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카이로에 있던 유진과 처칠이 긴급 회동하고, 언론을 필사적으로 틀어막고, 패튼이 건강 악화라는 구실로 대기발령당하는 혼돈의 카오스 끝에 모든 일이 마무리되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이 펴지지 않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여기 맛있네. 런던에서 이만한 요리 먹기 쉽지 않아. 얼른 많이 먹으렴. 얼굴이 반쪽이 다 됐―”
“아빠.”
“앨리. 혹시 귀국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절대로요.”
누가 김가의 혈통 아니랄까 봐, 이제 그녀는 악에 받치고 오기가 샘솟았다.
이대로 돌아가면 정말 끝이다.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자신의 실책이 컸다면 얌전히 돌아가겠지만, 이렇게 끝내기엔 억울해 미칠 것만 같았다.
“저, 육군 입대하고 싶어요.”
“안 돼.”
“여군단(Women’s Army Corps)도 창설됐잖아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처럼 최전방에 나가지도 않잖아요.”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아. 네가 어떤 마음을 품고 대서양을 건넜는지 잘 알고 있단다. 여군단에 가면 네 커리어에 보탬이 되기보단 짐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빠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네요.”
유진은 그 미묘한 비아냥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나이프를 놀렸다.
“아빠야말로 인간승리잖아요. 다른 사람들을 다 입 닥치게 만들고 모든 걸 거머쥐었잖아요?”
“그래. 그리고 내가 거친 커리어는 장애 요소가 아니라 다 도움이 되는 일들이었지. 여군단은 전혀 다른 문제야.”
“아빠도 그 얼토당토않은 소릴 믿어요?”
“내가 믿는 건 문제가 아냐. 대중이 그렇게 믿는 게 문제지.”
영국이 대대적으로 여군을 모집하고 제법 성과를 내자, 인력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던 마셜은 당연히 이를 벤치마킹해 여군단을 창설했다.
마셜은 반대를 돌파할 뚝심과 추진력을 보유했으며, 모두를 찍어누를 힘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국 시민은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여군단은 기독교 윤리에 위배된다.] [여군단은 전쟁터의 굶주린 남자들과 뒹굴고픈 여자들이나 가는 곳이다.] [여성들만이 모인 군대가 있으면 동성애가 창궐할 수 있다.]온갖 더럽고 추잡한 루머가 횡행했고, 제아무리 제복군인의 꼭대기에 있는 마셜이라 할지라도 미국 시민들의 여론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여군단은 망했어. 돌이킬 수 없을 수준으로 그 도덕과 위신에 상처를 입었지. 그런 데 몸을 담으면 회복하기 어려울 거야.”
“유언비어잖아요 전부!”
“그런 문제가 아니래도. 음, 그러니까….”
“저도 다 컸는데, 그냥 대놓고 말하셔도 돼요. 왜 오빠한테는 다 말해주면서 저한텐 자꾸―”
딸내미의 연이은 채근에 못 이긴 유진은 결국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그동안 쓰던 영어 대신 한국말로 말했다.
“대중은 진실을 원하지 않아.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지. 여군단에 대한 그 악의적인 비난이 이토록 힘을 얻는 이유는 그게 진실이라서가 아니라 다들 듣고 싶어 하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란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만큼 웃기는 이야기도 없다.
유진 킴 그 자신이야말로 없는 굴뚝을 만들어서라도 기어이 연기를 피워 올리던 인간 아닌가.
“여군단이 대대적으로 주목받으면서 다른 많은 시민단체들이 지지자, 후원자,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모조리 빼앗겼지.”
유진의 무덤덤한 말에 그녀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집안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대폭 후원했다고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우리에게 감사와 호의를 표하던? 내가 아시아계의 자립을 지원했다고 모든 아시아계가 나를 사랑하던?”
“…아니요.”
“명분에 현혹되지 말고 본질을 봐. 헤게모니 다툼. 주도권 싸움. 결국 본질은 한정된 자원을 누가 먹느냐야. 밥줄이 달린 싸움은 그래서 타협이 어렵지.”
FDR의 뉴딜 정책을 자본가들보다 더 증오한 건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이다.
쪽발이들보다 더 김가의 독립운동 지원에 경기를 일으킨 건 일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다. 당장 이승만만 보아도 완벽히 제압당하기 전까진 서로 사생결단을 벌이지 않았던가.
마셜에겐 참으로 유감스러운 이야기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유진 킴이 아니라 FDR이 나서도 수습할 수 없다. 청교도 탈레반의 나라 미합중국이 또다시 1승을 거둔 셈이다.
그는 착잡하게 입맛을 다시며 냅킨으로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냈다. 그의 딸은 애비의 독설에 잠시 얼이 빠진 듯했다.
“나는 너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 모두, 각자 행복하고 멋진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잘 모르겠지만 이 아빠는 한평생 칼을 휘두르며 살아왔어. 어지간하면 굳이… 너희는 이렇게 살 것까진 없지 않겠나 싶거든.”
“저는 그 반대예요. 한 번뿐인 인생을 이렇게 놀라운 위치에서 시작했는데, 어떻게 제가 평범하게 살 수 있겠어요.”
“그걸 나도 아니까 결국 놔준 거 아니겠니. 네 말대로 한 번뿐인 인생인데, 네 뜻대로 하면서 사는 게 최고지.”
그는 다시 싱글벙글 웃으며 나이프를 집어 들고 촉촉한 고기의 육즙을 만끽했고, 그 모습을 보며 앨리스는 방금 전의 그 사람이 어디 갔나 싶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빠는 정말… 왜 기껏 무게 잡아놓고 도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다른 집 아빠들은 막 근엄하고 막 그런데, 좀 그럴 순 없어요?”
“글쎄. 평생을 이렇게 살았는데 인제 와서 무게 잡을 순 없잖니.”
“사람들이 얕보지 않아요?”
“옛날에 너랑 헨리는 서커스를 참 좋아했단다. 가족끼리 몇 번 같이 가서 구경하곤 했는데. 사자가 재주 부리는 거 보면서 막 박수 치고. 기억나니?”
참으로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 사자가 무서웠니?”
“아뇨. 신기했죠.”
“바로 그거란다. 이 아빠는 가진 게 없어서 경계를 사면 안 됐거든. 그럼 어떡하니. 재롱이라도 떨어야지.”
그는 나이프를 살며시 고쳐 쥐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은 무게감이 있으면 좋지. 싸우지 않고 사람을 무릎 꿇릴 수 있거든.”
“그럼―”
“나머지는 스스로 생각해 보렴. 앨리 너는 애비처럼 맨손으로 시작한 게 아니니 내가 답안지가 될 수 없어.”
유진은 문득 그동안의 인생을 쭉 반추했다.
정말 징글징글하게도 싸워온 인생이었다. 당장 웨스트포인트 입학, 해안포대 말뚝을 피하려는 발버둥에서부터, 이승만의 따까리 신세를 피하려는 몸부림에….
그는 이제 곧 원수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싸움이 끝날 것 같진 않았다.
남들에게 종전은 곧 모든 것의 끝이겠지만.
그에겐 종전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니까.
손에 쥔 나이프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지구 반대편.
“다른 사람들 반응은 좀 어떤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두루 접촉해 보았지만, 이 나약한 놈들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최용건(崔庸健)과 김책(金策)의 말에, 약산 김원봉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애초에 임시정부네 뭐네 자기들끼리 실컷 공치사해 봐야, 김유진이가 하사하는 돈다발 처먹기 바쁜 등신 새끼들이지. 기개 있는 놈들이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그 코쟁이가 원수에 임명되면서 장개석의 총애가 더 커진 것 같습니다.”
“제길.”
예전엔 잠시 장개석의 후원을 받아 한번 해볼 만한 뒷배를 잡아 보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저 미국인 참모단인지 고문단인지 하는 것들이 중국에 오면서 그에 대한 지원도 끊겨버렸다.
“지금은 은인자중해야 할 때입니다. 독립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허무하게 죽을 순 없습니다.”
“그래야지. 김유진이 그놈이 코쟁이들에게 나라를 팔아먹으려 하는데, 우리 같은 이들이 나라를 지켜야 할 것 아닌가?”
임정을 중심으로 다시금 재편되고 있는 독립운동 세력도에서, 김원봉은 치솟는 화를 참을 길이 없었다.
저 나치의 비밀경찰에 비견될, 경무국을 제 사조직으로 만들어버린 독종 김구도.
총 한 번 쥐어본 적 없으면서 피 흘리며 투쟁하는 이들을 폄하하기에 바쁜 독재자 이승만도.
겉으로는 독립운동을 후원한답시고 지껄여대며 제 하수인인 임정 외엔 단 한 푼도 내주지 않는 김유진도.
누가 봐도 저놈들은 임정에서 일절 사회주의를 배제하고, 저들끼리 다 해먹으려는 밑작업을 깔고 있지 않은가.
“너무 염려치 마시죠. 일단 독립만 된다면 조선 인민들은 금방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당연하지. 모리배들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인민들이 떨쳐 일어나 저 추악한 놈들을 몰아낼 거야.”
“김유진의 정체가 미국인 제국주의자라는 사실은 이 카이로 선언만 봐도 뻔히 알 수 있습니다. 독립이 끝이 아닙니다. 외세의 손에서 나라를 지키려면 또 한 번 투쟁해야 합니다!”
“그렇지, 그렇지.”
무언가 수상한 모택동의 움직임도.
다시금 모택동과 장개석 사이에서 간을 보는 소련도.
애써 국공 협력을 강조하며 중경에 주은래(周恩來, 저우언라이)를 불러다 앉힌 미국도.
돌아가는 판세가 절대 심상치 않다. 일제가 패망한다 한들 이토록 복잡한 중원과 동아시아의 정세가 단숨에 안정될 리는 없었다.
해방 조선의 미래를 위해선, 싫어도 당분간은 임정의 그늘에서 은인자중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