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24
제 124화
47장. 불평등조약 – 1화
“후퇴! 후퇴하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후퇴해!”
“크리비아 영지군이 도망친다! 끝까지 추격해서 놈들의 목을 쳐라!”
“놓치지 마라!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고, 왕국의 명예를 드높이자!”
“와아아아!”
자레드의 군대는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패주하고 있었다.
개활지에서 시작된 보누스 왕국과 크리비아 영지군의 전투는 분명 영지군에게 불리했다.
2배에 가까운 보누스 왕국군의 수적 우위에다가 그래도 제법 실력 있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파견됐기 때문이다.
반면 다소 허술하게 편성된 영지군은 기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했고, 그 결과 리라키 시 근처에 있는 ‘비단뱀 계곡’까지 밀려난 상태였다.
처음에는 왕국군도 신중했다.
혹시나 지뢰를 잔뜩 깔아 놓은 지역으로 자신들을 유인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영지군이 안전하게 지면을 밟고 지나가는 판국에 더 이상 걱정할 것은 없었다.
자레드 지뢰는 그들도 알고 있었고, 발현 기전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거세게 밀어붙였다.
비단뱀 계곡을 돌파하고 나면, 바로 리라키 시로 이어지는 대로였다.
사실상 마지막 방어선이었고, 여길 넘어서면 무주공산이 된 도시를 탈환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딱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매복의 가능성이었다.
이제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주변에 점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단뱀 계곡의 중앙점을 돌파할 때까지 아무 대응도 없다면, 그건 매복이 없는 것이다.’
보누스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전군의 총책임자인 카슨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상황에 맞게 냉정한 판단을 내렸고, 합리적인 추론에 의거해 판단할 근거를 갖췄다.
추격, 추격, 추격.
변화는 없었다.
영지군은 계속 패주했고, 복병의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모두 죽여 버리자!”
“크리비아 영지 놈들, 별것 아니었구먼!”
게다가 병사의 사기도 높았다.
잘 먹고, 잘 훈련받은 병사이다 보니 두려움도 없었다.
한데 바로 그때.
“어?”
열심히 말을 채찍질하며 달려가던 카슨의 몸이 하늘로 붕 떠올랐다.
카슨이 순간적으로 떠올린 것은 5클래스 마법, 텔레키네시스였다.
염동력이라면 충분히 자신의 몸을 들어 올릴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뿐이다.
텔레키네시스로 몸을 계속 움직이려면, 꾸준히 마력이 연결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카슨은 예전부터 항마력을 높이고, 마법에 대응하는 수련을 해 왔다.
“흐음……!”
카슨이 체내의 마나를 빠르게 순환시키며, 기운을 밖으로 방출했다.
누군가에 의해 시도되고 있을 텔레키네시스를 가볍게 끊어 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끊기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은 계속 끌려 올라가고 있었고, 속도는 오히려 더 빨라졌다.
‘마법이 아니야?’
텔레키네시스 마법이라면 마나의 방출과 함께 연결이 끊겨야 했다.
마법사들이 괜히 텔레키네시스 마법을 전투에 안 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유지는 어려운데, 적의 입장에서 해제는 가위로 실을 자르듯 간단하기 때문이다.
“우와아앗!”
통제되지 않는 몸에 당황하여 카슨이 버둥거리는 사이.
쉬이이익.
그의 얼굴 앞에 갑자기 차원문 하나가 생겨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아!
카슨은 자신의 얼굴을 밝게, 그리고 뜨겁게 비추는 거대한 화염구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3클래스의 파이어볼이었다.
“흥, 이따위 마법은!”
카슨이 콧방귀를 뀌며, 쉽게 파이어볼을 쳐내려고 했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건틀릿은 아티팩트였다.
예전에 던전 공략을 갔다가 얻은 것으로 비싸게 팔아 준다고 해도 절대 팔지 않았던 보물이었다.
이 아티팩트의 강점은 3클래스 이하의 마법은 고무공을 튕겨 내듯 소량의 마나로 쳐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4클래스 이상의 마법도 마력만 있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 여유롭게 콧방귀까지 뀌어 가며 파이어볼을 쳐냈다.
그런데.
“……?”
화아악!
파이어볼이 튕기지 않았다.
이어서 최악의 참사가 카슨에게 벌어졌다.
과아아아!
폭주하듯 달려든 화염구가 그대로 카슨의 얼굴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만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카슨의 건틀릿이 공중에서 덧없이 꿈틀거리고 있을 때, 이미 그의 머리 전체가 녹아 버렸다.
투구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고열로 인해 투구가 찌그러지는 변형이 일어났고, 그 바람에 얼굴의 외형이 일그러졌다.
숨이 끊어진 카슨이 덧없이 지상으로 추락하려는 순간.
터업!
차원문을 넘어온 남자가 카슨의 손을 잡았다. 남자의 정체는 자레드였다.
“전리품은 당연히 챙겨야지. 그냥 보낼 수야 있나.”
쑤욱!
자레드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카슨의 손에서 건틀릿을 벗겨 냈다.
그리고 다시 그를 밀쳐 내자, 카슨의 몸은 속절없이 추락했다.
자레드의 시선이 여기서 멀지 않은, 숲속의 어둠으로 향했다.
이자벨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어둠을 벗 삼아 모습을 숨기고 있던 드레자 주술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레드는 그들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설계가 통했다.
예상대로 카슨은 주술에 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 때문에 열 명 이상의 주술사들이 군무(群舞)처럼 호흡을 칼같이 만들어야 구현할 수 있는 ‘강제 소환의 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렇게 보누스 왕국은 부단장급의 기사 하나를 잃었다.
건틀릿은 분명 3클래스 이하의 마법에는 치트키처럼 대응할 수 있는 아티팩트가 맞았지만…… 애석하게도 초월 마법은 예외였다.
카슨이 죽었다.
적의 예봉은 확실히 꺾였다.
자레드가 거침없이 음성 증폭 마법을 이용해, 영지군 전체에게 명령했다.
비단뱀 계곡이 진동할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이었다.
“전군 공격!”
악어의 아가리 앞까지 적들을 유인하는 데 성공한, 크리비아 영지군의 대반격이 드디어 시작됐다.
* * *
그로부터 사흘 후.
나는 리라키도, 프라시노도 아닌 다른 도시의 영주 성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보누스 왕국으로부터 추가로 빼앗은 해안 도시 아르노와 밀라니아. 그중에 예술인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밀라니아의 영주 성이었다.
원래는 방어전만 치를 생각이었지만, 내친김에 욕심을 냈다.
비단뱀 계곡에서 생각 이상으로 보누스 왕국군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카슨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대반격에 왕국군은 크게 당황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바위와 통나무를 떨어뜨려 그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물론 모든 길을 막지는 않았다.
샛길 하나를 남겨 뒀는데, 그 샛길 위에는 자레드 지뢰가 거의 한 걸음마다 있는 수준으로 박혀 있었다.
도망치던 왕국군은 여지없이 그곳을 지나가게 됐다.
문제는 앞다투어 저마다 살겠다고 도망치는 병사와 이를 막기 위해 기사와 마법사들이 이탈자를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하필이면 그 다툼의 지점이 지뢰밭 위였던 것이다.
그 바람에 병사들은 죽고, 핵심 전력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상황이 몰살(沒殺)로 바뀌어 버렸다.
내가 계산한 것 이상으로 벌어진 적군의 실책이었다.
이어진 우리 영지군의 반격에 왕국군 전체가 전멸했다.
그리고 방어전은 곧바로 공세로 전환됐다.
그렇게 한달음에 내달려 단숨에 밀어붙여 얻은 땅이 바로 여기, 두 도시였다.
[이그노어 건틀릿] [분류 등급 : 6성] [옵션 1 : 마법 멸시 – 3클래스 이하의 마법을 건틀릿을 이용해 튕겨 낼 수 있습니다. 마력을 1 소모합니다.] [옵션 2 : 마력 200 증가] [옵션 3 : 지혜 100 증가] [옵션 4 : 물방 50 증가] [옵션 5 : 마방 50 증가] [옵션 6 : 마력 저장 – 최대 5천의 마력을 건틀릿 내부에 저장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마력을 이용할 수는 없으므로, 반드시 자신의 마력을 저장해야 합니다.] [옵션 7 : 선택적 회피 – 4클래스 이상의 마법은 ‘해당 마법의 클래스×1000’의 마력으로 튕겨 낼 수 있습니다.]“마력 저장고의 역할에 마법 대응까지 하는 아티팩트라……. 수지맞았네.”
나는 만족한 표정으로 건틀릿을 낀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옵션 2번부터 5번까지의 추가 스탯도 괜찮았고, 6번의 저장 능력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마력이 많다는 가정하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7번 옵션도 마음에 들었다.
카슨이 7번 옵션을 쓰지 못한 이유는 하나. 마력이 부족해서다.
물론 그에게 안타까운 일이고,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현재 내 마력의 수치는 약 1만.
그렇다면 무디두스의 기도에 마력 저장 옵션까지 모두 끌어다 쓴다고 가정했을 때,
최대 2만 5천의 마력을 한꺼번에 끌어다 쓸 수 있다.
이쯤 되면, 빈틈을 확실히 노렸다는 가정하에 베르하드쯤 되는 대마법사의 목숨도 노릴 법하다.
물론 상대가 ‘빈틈을 보여야 한다.’는 대전제가 들어가지만!
어쨌든 0%로 전혀 없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겼다는 얘기다.
그때.
헤이즈가 달려와서는 내게 소식을 전했다.
“영주님, 상영이 시작됐어요!”
발데스가 새벽에 도착했다더니, 바로 준비한 영상을 영지의 노천극장에서 상영하는 모양이었다.
“헤이즈, 같이 갈래?”
“네! 가야죠! 발데스 님이 영주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만드신 영상인데요!”
“뭐…… 업적이랄 것까지야.”
정말 헤이즈는 띄워 주기에는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상대의 장점을 캐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까.
그래서 헤이즈는 두루 친했고,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 전쟁에서도 그녀 덕분에 상처가 깊어지기 전에 빠르게 회복한 병사들이 무척 많았다.
병사들은 그녀를 하나같이 ‘백의의 천사’라고 부르며, 감사해하고 따랐다.
그런 그녀가 영주인 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질 않으니, 병사들은 나를 더욱 믿고 따랐다.
처음 나를 보는 병사들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며, 헤이즈를 통해 항상 곁에서 함께하고 있었던 느낌이 든다고 했다.
그녀가 내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있는지, 나는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 * *
“모두 죽었는 줄 알았는데…… 저렇게 잘 살고 있었단 말인가?”
“라디우스 님의 축복이 내린 땅에서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었구나.”
“망할 귀족들! 빌어먹을 임금! 왕이라는 작자가 백성들을 버리고 쫓아내는 게 말이나 되냐고!”
노천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보며, 영지민들은 울분을 토해 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 보누스 왕국의 국민이었다. 이제는 자레드의 영지민이 되었지만.
하지만 아직 과거를 완전히 떨쳐 내지 못했기에 보누스 왕국에 대한 불만을 쏟아 내고 있었다.
발데스의 영상은 자레드의 영지민이 된 그들의 감성을 자극, 공감을 하도록 잘 만들어져 있었다.
“자네, 들었나? 새 영주님께서 1년 동안 기본 세금은 절반으로, 나머지 특별세는 전부 감면해 주시기로 한 것 말이야.”
“암, 들었지! 당장에 우리 가족이 다음 달에 먹고살 것도 걱정이었는데…… 이대로라면 한시름 놓았지! 아주 크게 놓았어!”
“우리도 자격이 생기면 꼭 사나레 성지에 터를 잡자고! 여기엔 아직 왕국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싫어. 아주 진절머리가 나!”
“그러지 말고, 새 영주님과 함께 행복해질 미래를 기대해 보자고. 당장에 어제부터 마정석 조명등인가? 그걸 설치하기 시작했더라고!”
“아, 그래? 이제 우리도 밤길을 마음 놓고 다닐 수 있게 되는 건가?”
“그러게 말이야! 세상이 달라질 것 같아! 기대가 많이 돼! 그나저나 자레드 님은 어떤 분이실까?”
영화를 보며, 사람들은 미주알고주알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절반은 보누스 왕국에 대한 욕이었고, 절반은 자레드와 영지 행정에 대한 찬사와 기대였다.
먹고사는 ‘생존’ 문제에서 숨통이 트인 것만으로도 그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말로만 듣던 크리비아 영지의 문물과 혜택을 자신들도 누릴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바로 그때.
다그닥! 다그닥!
급히 말을 채찍질하며, 영주 성으로 향하는 두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크리비아 영지가 아닌 말루스, 보누스 왕국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사신이 왔나 봐!”
“설마 왕국에서 대군이라도 다시 파견하려는 건가?”
지켜보는 영지민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제야 비로소 암담하던 미래에 볕이 드나 싶었더니, 다시 어둠이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이 무색하게, 뒤에서 기척 없이 조용히 얘기를 듣던 남자가 말문을 열었다.
“다들 걱정할 필요 없어. 전쟁이 아니라 우리 영지에 정전(停戰)을 요청하기 위해 두 왕국에서 보낸 사신일 테니까.”
“예에?”
놀란 영지민이 뒤를 돌아본 자리에는 수수한 평복 차림으로 흐뭇하게 대화를 듣던 남자가 있었다.
“여, 영주님?”
바로 자레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