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84
제 284화
90장. 나는 나를 넘어선다 – 2화
왜 의 개발진들이 마왕을 상대하기 위한 예행연습이라는 타이틀을 ‘파라디소’에게 붙였는지 알 것 같았다.
나를 그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는 존재. 바로 나 자신을 상대로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의 패턴 플레이나 공격 레퍼토리, 무의식적인 습관 등은 모두 데이터로 남는다.
이를 활용해서 플레이어 자체를 카운터 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은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야, 이건 반칙 아니냐.”
나는 볼멘소리를 냈다.
물론 저놈은 내가 아니다.
하지만 나에 가까운 움직임과 공격 방식을 흉내 낼 수 있다면, 위력적일 것은 틀림없었다.
‘유일무이한 내 특징인 초월 마법인 트랜센던스까지 구현을 한다면…… 이건 마냥 현실 세계의 일이라고 보기도 어렵군.’
나는 차분하게 생각했다.
이곳이 육체가 움직이는 물질세계가 아니라 감정과 정신이 움직이는 심상 세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파라디소에게 패배해도 된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보통 정신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면, 육체는 생각보다 쉽게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동기화되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죽으면 정말로 죽는다. 그 대전제가 변할 일은 없을 듯했다.
“덤벼 봐라. 내 흉내를 얼마나 잘 내는지 한번 보자.”
나는 파라디소를 향해 손가락 끝을 까딱였다.
매번 선공과 적극적인 공세를 즐겼던 나지만 이번만큼은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 듯했다.
나를 넘어서는 것.
그것이 생각보다 쉽게 느껴지지는 않았기에.
* * *
그로부터 15분 후.
“폐하를 상대하는 또 다른 폐하라니……. 이건 반칙이에요. 이래서는 안 되잖아요?”
“헤이즈, 집중. 적을 보려고 하지 말고 폐하의 본질을 봐. 우리가 얻어야 할 깨달음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야.”
작은 치유술 하나 시전해 줄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헤이즈를 이자벨이 진정시켰다.
과연 그녀다운 냉정하고도 침착한 판단이었다.
저곳이 아닌 이 자리에 동료들이 배치된 것은, 그에 맞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연동된 정신세계를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폭발적으로 쌓는 것.
이자벨은 나스 대미궁 100층이 자신들에게 주는 의미가 바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다시 말해 자레드가 살아 있는 교재가 된 것이고, 그가 무사하다는 가정 아래에 여기 있는 모두는.
전혀 고생하지 않고, 극한에 다다른 모든 전투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쌓을 수 있는 것이다.
“폐하를 믿어요. 매번 슬기롭게 위기를 헤쳐 나오신 분이시잖아요?”
마이라가 이자벨의 의견에 말을 보탰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
그래서인지 엘라나 나오미, 라키스와 레나는 일찌감치 침묵을 지키며 집중하고 있었다.
자레드와 파라디소의 전투는 그야말로 초 단위마저도 잘게 쪼개어 싸우는 극한의 연속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초월 마법을 맹폭하듯 퍼부었다.
애초에 6클래스 미만의 마법은 사용되지도 않았고, 전부 하이클래스의 고화력 마법이었다.
한번 마법과 마법이 부딪히면, 주변 반경 50m 이상이 전부 폭발에 휩쓸리는 충격파가 생겨났다.
그 안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면, 진즉에 찢어 발겨져 죽었을 것이 틀림없을 정도였다.
전투 기동을 위한 가속과 감속.
기만술의 용도로 뿌리는 가짜 마법과 그 뒤에 즉각 연계하는 진짜 마법까지.
동료들은 자레드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공격의 레퍼토리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이는 평범한 인간 마법사의 전투를 일찌감치 넘어선, 아득한 상위 세계의 전투였다.
모두는 동료의 자리에서가 아닌, 제3자의 시선을 획득함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했다.
그것은 자레드의 전투를 단순한 찬양, 놀람, 경외의 시선으로 보는 것에서 탈피하게 만들었다.
그간 미궁의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로 싸워 온 것보다 그 이상의 경험을 획득하고 있었다.
단순 관조(觀照)가 아니라, 고통과 감정이 연계된 정신적인 연결이 이뤄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이 미궁을 만든 신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드러내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가 전투에 몰입했고, 자레드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배움을 갈구하는 학생처럼, 전부 자레드의 전투에 그렇게 몰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느꼈다.
자레드와 파라디소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반쯤 신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놀라운 경지에 돌입했음을.
전투는 이제 눈만으로는 거의 흐름을 좇아갈 수 없을 만큼,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 * *
파아앗! 파앗!
“징글징글한 XX!”
나는 앞뒤 재지도 않고 바로 트랜센던스 디스인티그레이트 마법을 날리는 파라디소의 공세에 혀를 내둘렀다.
나는 전투를 하는 동안에도 마력의 총량을 체크하며, 극히 계산적인 전투를 하는 타입인데.
놈은 아니었다.
뒤가 없었다.
마치 대량의 마력을 끝도 없이 공급받을 밑천이라도 있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마법을 퍼부었다.
정신적인 대미지도 전혀 없는지, 하이클래스의 마법을 연사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보통 위력적인 하이클래스의 마법을 빠르게 연계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두통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과부하 현상인데, 놈에게는 마치 그에 대한 ‘면제권’이라도 있는 듯했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냉정하게 내린 판단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것이 내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서로 고화력의 마법을 쏟아붓다 보니 엄청난 양의 마력을 소모하게 됐다.
그래서 아티팩트를 비롯한 모든 요소에 저장되어 있는 마력을 끌어다 쓰는 상황이었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열은 가려지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나와 달리 파라디소는 마력 걱정을 전혀 하지 않고 공격을 퍼붓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름 기만이나 기습의 용도로 전개한 내 공격들은 모조리 막혔다.
즐겨 쓰는 디멘션 도어도 녀석에게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똑같이 디멘션 도어로 대응해서다.
오히려 반대로 디멘션 도어를 연계해서 빈틈을 노리니, 대응하기가 까다로웠다.
‘쫓아가는 형태로는 절대 이길 수 없어. 아직은 이기지도, 지지도 않은 상황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불리해.’
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
정말 까다로웠다.
왜 지금까지 이런 적의 형태를 예상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개발진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선한 기질을 가진 신의 대표자라면, 마왕은 악 성향의 모든 신의 대표자다.
레크나트 정도면 나와 같은 까다로운 상대는 수도 없이 겪어 본 존재일 터.
그런 존재라면 지금 내가 상대하고 있는 ‘파라디소’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은 상대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진정한 시험의 무대인 셈이다.
내가 나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마왕 레크나트를 제압하겠다는 생각은…… 그저 실현 불가능한 공상이나 다름없겠지.
“후우.”
잠깐의 소강상태.
나는 심호흡을 했다.
한편 파라디소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를 지켜보며,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을 식히고 있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나와 달랐다.
내게 마법의 과부하가 두통으로 전해진다면, 녀석은 고열로 나타나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를…… 나를 이기려면, 나도 알지 못하는 나를 만들어 내야만 해.’
뜬구름 잡는, 마치 불경을 외는 느낌이 물씬 드는 모호한 첫 번째 판단이 떠올랐다.
지금까지의 전투는 정석이었다.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레퍼토리로 공격을 퍼부었고, 당연한 얘기지만 전부 막혔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지금껏 이 명언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이야말로 이 말을 어떻게든 실천해야 할 판이었다.
내가 무엇을 할지 스스로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파라디소에게도 간파당한다는 뜻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역설적으로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아리송하지만, 어떻게든 그것을 깨닫고, 반드시 전투의 과정에 녹여 내야 하는 문제였다.
‘어쩌면…….’
고민 끝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지독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무념무상의 단계에 접어들 수 있는 방법.
그것은.
스르륵.
나는 마침 품속에 있던 와인색의 띠 하나를 꺼냈다.
헤이즈가 얼마 전에 공들여 수놓은 것이라며 내게 건넸던 수공예 띠였다. 딱, 안대의 느낌처럼 눈을 감쌀 수 있는 면적이었다.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군. 어차피 죽을 테니, 이렇게 해서 정신 승리라도 하겠다는 게냐?”
코웃음을 치는 파라디소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마저 눈에 띠를 둘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약간의 빛이 느껴지긴 했지만, 뭔가를 살피고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가슴으로, 뜨거운 심장으로 싸워야 해. 이성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감각과 본능에 의지하는 거야.’
이것이 내 깨달음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숱한 전투를 끊임없이 치러왔다.
그리고 그 전투는 치밀한 계산 속에서 확실한 노림수로 펼쳐 온 ‘차가운’ 전투였다.
하지만 이제는 ‘뜨거운’ 전투의 필요성을 느꼈다.
본능과 감정, 동물적 감각이 이끄는 대로. 오직 그것에만 충실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즉!
지금까지 내가 싸워 온 모든 패턴에서 벗어난 또 다른 나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뭘 하는 거지?”
파라디소가 내게 물었다.
그 순간.
나는 지금의 나를 가장 확실하게 표현해 줄 수 있는 말을 힘주어 내뱉었다.
“눈에 뵈는 게 없이 싸우려고 한다. 됐냐? 덤벼라, 복제 인간 XX야.”
그리고 녀석을 도발했다.
* * *
결코 쉽지 않았다.
두 눈으로 보고 마법에 대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보이지 않으니 모든 것을 감각에만 의지해야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다시 시작된 전투와 함께 근 1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레드는 파라디소에게 마법 찜질을 미친 듯이 당했다.
반격의 마법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고, 완벽한 집중이 되지 않는 방어는 어딘가 조금씩 허술했다.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레드의 신체였고, 여기저기에 상처가 생겨났다.
“쿨럭! 쿨럭!”
대회복을 아껴 두고 있었기에 체력 소모와 부상이 꽤 있음에도 자레드는 참고 또 참았다.
단번에 몸 상태를 100%로 끌어올리는 대회복은 자레드가 아끼고 있는 비장의 수단이었다.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절대로 꺼내서는 안 될 선택지이기도 했다.
‘확실한 건…… 파라디소의 공격 패턴도 변했다는 거야. 내가 틀에 박힌 대응을 하지 않으니까, 녀석의 레퍼토리도 달라졌어.’
한 가지 변화는 확실히 느꼈다.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듯했던 파라디소의 공격에 변주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예측 불가능한 행동과 대응을 하니, 자연스럽게 파라디소의 반응에도 변화가 생긴 듯했다.
‘변곡점.’
자레드는 그것을 지금의 전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터닝 포인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석대로 흘러가면 무난하게 밀려 버릴지도 모르는 전황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체크 메이트.’
역전의 가능성으로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