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16
“입을 닫으면 밥을 못 먹지.”
“…….”
퉁명스러운 대화가 오갈 때, 옆에서 다른 용병들도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대화의 주된 주제는 역시 뱀파이어였다.
“그런 다음에, 내가 칼자루를 꽉 잡고 그 자식 머리통을 두 쪽으로……!”
“젠장, 피켈! 똑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하는 거야?”
“어쭈? 이 자식, ‘뱀파이어 살해자’ 피켈 님이 하시는 말씀에 끼어들면 되겠어?”
피켈이 농담처럼 하는 말에 다른 용병들이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의 이면에는 부러움이 짙게 묻어 있었다.
뱀파이어를 죽인 무용담은 평범한 용병이 평생을 야전에서 굴러도 얻기 힘든 것이었다.
‘이거 어째 불안한데.’
피켈의 무용담을 듣는 용병들의 표정에서 욕심이 엿보였다. 다들 뱀파이어 한 마리씩 죽여 보고 싶은 분위기다.
뱀파이어를 독식해야 하는 나로서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칠 인의 징벌자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법이라고 했던가?
적혈귀들의 두 번째 습격을 겪게 되자, 용병들은 서로 뱀파이어를 죽이기 위해 앞다투어 무기를 휘둘렀다.
“이 자식들아! 뱀파이어의 숨통을 끊는 건 테일로우의 몫이라니까!”
로드릭이 소리를 질러 대도 용병들은 못 들은 척 살초를 뿌려 댔다.
평범한 용병인 그들에게 뱀파이어 살해자라는 간판은 대단한 명예였고, 급박한 전투 상황에 적을 죽여 버렸다고 질책을 당할 것도 아니었다.
싸움이 혼란한 와중에 재수 좋게 뱀파이어를 한 마리라도 죽이면, 그걸 경력으로 삼아 이후 고용 시장에서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고용주이자 갱단 두목인 로드릭의 지시를 면전에서 못 들은 척하다니…….’
용병들이 막무가내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고용주를 개무시할 줄은 몰랐다.
나는 용병들의 이런 모습이 낯설었다. 내가 지금껏 고용한 그 어떤 용병도 내 말을 무시하진 못했었다.
에릭이나 토마스 같은 허접한 용병은 물론이고, 사자갈기 용병단을 이끄는 카라예프조차 내가 가진 고용주로서의 권위(그리고 무력)에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한심하군.’
나와 달리, 로드릭은 용병들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마라고사의 용병들은 용병 길드라는 강력한 뒷배까지 있으니, 고용주가 갱단 두목이라고 쩔쩔맬 이유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두 번째 전투는 엉망진창 난전이 되었고, 나는 결국 적혈귀의 혈마력을 흡수하지 못했다.
아무리 고수라도 흡성대법을 시전하는 동안은 무방비가 될 수밖에 없는데, 기껏 적혈귀를 제압해 놓고 대법을 펼치려고 하면, 용병들이 적혈귀를 향해 냅다 은화살을 쏘아 댔기 때문이다.
“이 새끼들이…….”
결국 나는 전투가 끝난 뒤 용병들을 마차 뒤편으로 소집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뱀파이어를 죽이는 건 내가 할 일이라고.”
“이, 이봐, 테일로우. 왜 이래? 혼전 중에 벌어진 일이잖아. 설마 그런 걸로 같은 용병끼리…….”
몽둥이를 들고 다가오는 나를 보며 용병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너희가 고용주의 말을 듣지 않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내 몫을 넘보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잠시 후, 마차 뒤에서 용병들의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행동은 명백한 사적제재고, 고용주의 권위를 침범하는 월권행위지만, 로드릭은 묵인했다.
그날, 용병들은 이 상단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똑똑히 깨달았다.
* * *
몇 주가 흘렀다.
그동안 상단은 몇 번의 습격을 더 겪었고, 적혈귀들은 내 손에 제압당해 고스란히 혈마력을 바쳤다.
용병들은 전투에서 보조 임무를 담당했고, 더 이상 뱀파이어의 숨통을 끊겠다며 막무가내로 덤비지 않았다.
마라고사의 용병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놈들답게, 힘의 차이를 보여 주자 즉각 새로운 서열을 받아들였다.
다른 용병들을 힘으로 휘어잡는 나를 보면서, 로드릭은 더욱 애가 달았다.
“테일로우, 앞으로도 계속 우리 상회에서 일하는 게 어때?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업계에 너만 한 놈이 없어.”
“글쎄, 난 갱단과 엮이고 싶진 않아서.”
“네가 용병 노릇을 관두고 우리 상회에 들어오면,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지. 너도 알다시피, 마라고사에 황금 거미 상회만 한 직장은 없다고. 사창가의 샘 패거리나 사채꾼 웰슨의 밑으로 들어가 봤자, 평생 그 자식들 뒤나 닦아 주다가 인생 종 치는 거야. 거지 대장 멀대는 말할 것도 없지. 그놈 밑에서는 아무리 출세해도 결국 거지 신세니까!”
로드릭이 우쭐대며 말했다.
그의 말은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맛이 가 버린 놈이지만, 한때 기사였던 사람답게 자기 심복은 챙길 줄 아는 녀석이니까.
실제로 로드릭이 이끄는 황금 거미 상회는 다른 갱단에 비해 조직력이 탄탄했고, 그걸 바탕으로 마라고사의 여러 갱단을 차근차근 병탄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이 또라이가 진짜 마라고사의 주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유서 깊은 귀족이니 영주니 하는 놈들도, 처음엔 다들 저런 식으로 시작했을 테니까.’
정복자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끼리 다투다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지역을 차지하면 그게 초대 영주고 귀족이다.
귀족이란 결국 살인을 밥 먹듯이 하며 자기 고향을 독차지한 사람을 고상하게 불러 주는 말이었다.
나처럼 다른 대영주에게서 영지를 하사받는 건 최근에나 등장한 경우였고, 초창기의 귀족들은 예외 없이 자기 이웃을 죽여 가며 땅을 차지했다.
‘로드릭이 영주라……. 안 된다는 법도 없지.’
인생이 좀 꼬여서 그렇지, 로드릭은 생각보다 수완이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새로운 사업 분야를 개척하고 확장하는 데는 독보적인 소질이 있었는데, 무법 도시 마라고사에서 라프란 재배와 유통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가 가진 재능의 증거였다.
이놈 머리가 돌아 버린 것도 출셋길이 막혔다는 좌절감 때문이니, 마라고사를 차지하면 정신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킥킥, 갑자기 멀쩡해지면 그것도 볼만하겠군.’
각설하고, 로드릭이 라프란 유통을 독점한 덕분에 나도 손쉽게 적혈귀 사냥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어느새 흡수한 적혈귀의 숫자가 수십을 넘어가고, 내공은 이 갑자 반에 다다랐다.
백오십 년 치 내공이라니,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중원에서 한평생 쌓았던 내공을 넘어선 것이다.
‘서부 원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삼 갑자의 내공은 까마득하게 느껴졌는데……. 목표를 생각보다 빨리 달성할 수도 있겠군.’
이렇게 되면 목표 내공을 오 갑자로 상향 조정하는 것도 고려할 만했다. 그만큼 서부 원정은 순조로웠다.
외팔이 로드릭이 징그러울 정도로 살갑게 구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내가 로드릭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잔반을 버리러 갔던 갱단 조직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보, 보스, 저쪽에 이상한 게 있어요. 뱀파이어들 같아요!”
“그래? 야, 다들 칼 뽑아.”
로드릭의 명령에 상단 호위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았다. 이미 적혈귀와 전투를 여러 번 치른 터라 별로 떠는 모습도 아니었다.
“카심.”
내 부름에 카심이 조용히 탐혈의 은반을 확인하고, 고개를 저었다. 은반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적혈귀가 아닌가?’
잠시 후, 갱단 조직원을 따라간 상단이 발견한 건 열두 마리의 적혈귀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열두 마리 적혈귀의 ‘사체’였다.
“이, 이게 다 뭐야?”
“이미 뒈진 것 같은데? 근데 꼬라지가 어째 좀…….”
열두 마리의 적혈귀 중에는 허리나 목이 잘린 놈도 있고, 별다른 외상 없이 죽은 놈도 있었다.
다만, 하나같이 피부가 쪼글쪼글하게 말라붙어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햇볕에 내놓은 곶감 꼴이군. 목내이(木乃伊, 미라)가 된 건가? 왜 이런 광야에 적혈귀가 떼로 죽어 있는 거지?’
내가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카심이 나서서 한마디 했다.
“얘들은 신성력에 당한 것 같은데?”
“신성력이라면, 이놈들을 처치한 게 사제들이란 말이야?”
신성력이라는 말에, 특급 용병 피켈도 얼마 전 도시에서 주워들은 소문을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 말고도 광야에서 뱀파이어를 죽이고 다니는 놈들이 있다던데? 뭐라더라, ‘칠 인의 징벌자’라던가?”
“칠 인의 징벌자?”
“중부에서 온 아도나이교 성직자들인데, 도시에는 보급하러 잠깐씩 돌아오고, 대부분의 시간을 황무지에서 뱀파이어를 사냥하며 보내는 놈들이래.”
피켈의 말에 다른 용병들도 들어 본 적이 있다며 맞장구를 쳤다. 얼마 전부터 나타난 놈들인데, 마라고사에 종종 방문한다고 했다.
“참나, 할 일도 더럽게 없는 놈들이군.”
“아도나이 교회 놈들, 유별난 건 알아줘야 해.”
대부분의 용병이나 갱 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아무리 성직자라도 고작 뱀파이어를 사냥하기 위해 그 먼 중부에서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신앙이 약한 서부인들에게는 그들의 지독한 신앙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아도나이 교회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내가 볼 때, 이건 교회의 행사치고도 특별한 경우였다.
‘아도나이교 사제들이 유별난 건 맞지만, 그렇다고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뱀파이어를 사냥할 정도는 아닌데……?’
아도나이 교회가 서부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생각이라면, 일단 도시에 개척 사제를 다수 파견해 복음을 전하고 신자를 늘리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징벌 기사단을 보내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건 지역 내에 교회가 단단히 뿌리내린 이후에 추진해도 될 일이다.
‘열정 넘치는 몇몇 사제와 성기사가 모여서 독단적으로 벌이는 일인가?’
가능성은 작지만,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당장 나만 해도 그런 짓을 벌이고도 남을 만한 열정 넘치는 사제를 한 명 알고 있었으니까.
‘중부 대교구에는 아우레오 같은 놈들이 여럿 있나 보군.’
오랜만에 떠오른 앳된 얼굴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아우레오가 잘 지내는지 문득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 * *
일곱 명의 성직자가 황량한 들판을 걷고 있었다.
인원 구성은 사제가 세 명, 성기사가 네 명이었는데, 대체로 성기사 쪽이 나이가 많았다.
“점점 뱀파이어를 찾기 어려워지는군요. 마치 우리를 피해 다니는 것처럼요.”
“그러게나 말일세. 뱀파이어들이 서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몸을 사리는 것일까?”
아우레오의 말에 노기사 테오도르가 웃으며 답했다. 다른 성직자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부로 넘어와서 벌써 여러 번의 전투를 치렀고, 우리가 빛으로 정화한 뱀파이어의 숫자가 물경 오십이 넘어갑니다. 그놈들도 이 황무지에 자기들을 노리는 심판자가 있다는 걸 눈치챘겠지요.”
한 사제가 가느다란 은실 끝에 달린 작은 메달을 보며 말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구리 메달의 이름은 ‘피의 길잡이 메달’로, 뱀파이어를 찾아내는 성물이었다.
서부 원정 초기에는 바쁘게 움직이던 메달이 지금은 축 늘어져 사제의 손길에 따라 흔들렸다.
“메달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요. 가까운 곳에 뱀파이어가 없나 봐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야영지를 꾸리고 식사부터 하세. 하지만 메달에서 눈을 떼지는 말게. 뱀파이어가 언제든 나타날 수 있으니 말이야.”
“예, 테오도르 경.”
일행의 실질적 리더인 테오도르가 젊은 성직자들에게 당부했다.
이들은 아우레오를 따라 중부에서 서부까지 온 성직자들로, 하나같이 혈기가 왕성하고 의욕이 넘쳤다.
성서를 연구하고 홀로 면벽하며 기도하기보다는, 세상을 주유하며 복음을 전하고 직접 칼을 들어 마귀를 처단하는 등 이른바 ‘행동하는 신앙’을 추구하는 청년들이었다.
“아 참, 이번에 마라고사에 갔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간에서 우리를 ‘칠 인의 징벌자’라고 부르나 봐요.”
“호오, 그것참 영예로운 칭호인데요? 그간의 노고를 한꺼번에 인정받는 기분이네요.”
젊은 성직자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자화자찬을 나눴다. 그들은 스스로의 행동과 그 행동이 불러온 결과가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단 한 사람, 노기사 테오도르만이 찜찜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장차 교회를 이끌어 갈 젊은이들이 구마의 보람을 경험하는 건 좋지만, 저들의 면면에서 벌써부터 교만의 씨앗이 보이는 것 같아 불안하구나.’
테오도르의 걱정처럼, 젊은 성직자들은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자만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예 뱀파이어의 근거지를 찾아내서 쳐들어가자는 말을 진지하게 내뱉는 자도 있었다.
“최고의 성기사이신 테오도르 경이 함께하시니, 이번 원정에서 뱀파이어의 씨를 말리는 것도 허황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악독한 마귀는 두더지처럼 빛을 두려워하는 법이지요.”
젊은 성직자들이 테오도르의 속도 모르고 태평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듯, 길잡이 메달이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