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17
사파에서 온 용사
적혈의 반격
징징징징-.
성물 메달의 떨림이 점점 심해지더니, 어느덧 눈으로 보지 않아도 소리가 들릴 정도가 되었다.
그 급박한 신호에 식사를 준비하던 성직자들이 급히 일어났다.
그들이 몸을 일으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메달은 진동을 넘어 회전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뱀파이어가 가까운 곳에 나타났습니다! 모두 공격에 대비해요!”
메달을 다루는 사제의 외침에 모든 성직자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방어 대형을 갖췄다.
사제들은 중앙에서 등을 맞대고 서고, 성기사 네 명이 각 방위에서 사제들을 지키는 형태였다.
“성물 메달이 왜 방향을 가리키지 않지?”
메달의 움직임이 평소와 다르다. 하지만 성직자들에게 불안이나 공포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뱀파이어의 습격을 여러 번 겪어 보았고, 매번 승리한 경험이 있었다.
“……?”
“왜 안 보이지? 피의 길잡이 메달이 오작동할 리는 없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메달이 이렇게 심하게 움직일 정도면 뱀파이어가 굉장히 가까이 있다는 뜻인데, 뱀파이어는커녕 평범한 박쥐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웅웅웅웅웅- 쩌적!
미친 듯이 회전하던 메달이 저절로 깨졌다. 성물이 깨지는 불길한 소리가 성직자들의 자신감에도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조금씩, 모래 밑에서 안개처럼 솟아오르는 적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뱀파이어가 가까이 온 게 아니었어……! 숫자가 많았던 거야!”
“이, 일단 후퇴를!”
“늦었어! 사방에서 나타난다!”
적은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매번 열 마리 정도씩 덤비던 뱀파이어들이지만, 이번에는 오십 마리도 넘어 보였다.
게다가 각각의 전투력도 이전과 달랐다. 풍기는 기세나 느껴지는 혈마력의 파동이 여태껏 경험한 뱀파이어들보다 훨씬 강했다.
“킬킬킬, 찾았다!”
“칠 인의 징벌자란 놈들이 너희로구나!”
뱀파이어들이 쾌재를 불렀다. 그들도 지금껏 손 놓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파라쿨라 성채에서는 동족을 살해한 흉수를 잡기 위해 일족의 정예를 뽑아 척살조를 편성했고, 계속 광야를 수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빛이여-!”
가장 먼저 평정을 되찾은 건 역시 노기사 테오도르였다.
빛을 외치는 그의 노호성과 함께, 은검에서 찬란한 광휘가 타올랐다. 그가 뽑아낸 광휘의 검은 길이가 무려 5m에 달했다.
“모두 정신 차려라! 사제들은 성경을 영창하고, 성기사들은 광휘의 검을 꺼내라!”
“예, 옛!”
“알겠습니다, 테오도르 경!”
노기사의 호통에 젊은 성직자들도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뱀파이어 정예와 칠 인의 징벌자들 간에 처절한 사투가 시작됐다.
“쳐라!”
“막아라!”
뱀파이어의 공세가 거셌지만, 성직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핏빛 마력과 백색 휘광이 허공에서 뒤엉키며 치열한 힘 싸움을 벌였다.
지상에서는 혈마력이 담긴 손톱과 광휘의 검이 부딪치며 서로의 파편을 뿌렸다.
“아악!”
첫 비명이 터진 건 뱀파이어 쪽이었다. 선두에서 용맹하게 달려들던 뱀파이어 혈마법사가 눈 깜빡할 사이에 토막이 났다.
그 앞에는 테오도르가 압도적인 광휘를 내뿜으며 버티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사제들을 지키는 데 집중해라! 수비가 우선이다! 활로는 내가 뚫겠다!”
테오도르의 외침에 웅혼한 신성력이 담겨 있었다. 놀랍게도 이 늙은 성기사는 광휘의 검과 신성력을 동시에 사용했다.
테오도르의 외침에 혈마법이 주춤하고,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뱀파이어가 한 마리씩 동강 났다.
그야말로 일격필살. 고르고 고른 정예 뱀파이어들조차 테오도르의 검격을 막아 내지 못했다.
“빛을 위하여!”
그 모습에 다른 성직자들도 용기를 되찾았다.
칠 인의 징벌자들이 옥쇄를 각오한 싸움을 시작했다.
“늙은이와 맞서지 마라!”
“반대쪽에서 젊은 놈들을 노려!”
뱀파이어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테오도르를 피해 비교적 전투력이 떨어지는 다른 성직자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핏빛 창이 허공을 날고, 피의 늪이 바닥을 뒤덮었다. 검붉은 안개는 사제의 빛을 가리고, 진득한 압력이 성기사의 갑옷을 짓눌렀다.
“뚜, 뚫린다! 보호막에 신성력을 더 쏟아!”
테오도르를 제외한 나머지 세 방향의 성기사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사제들이 필사적으로 보조했지만, 끝내 한쪽이 뚫리고 말았다.
‘큰일이다!’
테오도르가 급히 도와주려 해도, 뱀파이어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들은 온갖 마법을 동원해 테오도르의 운신을 방해했다.
테오도르의 손 속이 지체된 사이, 진형 내부로 뱀파이어들이 난입했다.
“으악!”
“아, 아도나이시여!”
방어 대형이 무너졌다. 난전이 벌어지고, 젊은 사제들이 공포에 휩싸였다.
연달아 거둔 승리로 한껏 차올랐던 자신감은 단 한 번의 위기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들은 성경을 영창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비명만 지르고 있었고, 그 틈에 뱀파이어의 손톱이 사제들의 울대를 관통했다.
그나마 전투에 능한 성기사들이 분투했지만,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사제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자, 성기사의 검술도 본래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컥!”
성기사의 심장에 적혈귀의 손톱이 틀어박혔다. 사제들도 대부분 죽어 버렸다.
아직 버티고 있는 건 테오도르와 아우레오가 유일했다.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빛은 내 곁을 지켜 주시니……!”
아우레오는 쉬지 않고 기도문을 영창하며 적혈귀를 상대했다.
그는 다른 젊은 사제들에 비해 보유한 신성력도 탁월했지만, 무엇보다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테온과 함께 싸우며 몇 번이나 사선을 헤쳐 나온 경험이 그가 공황에 빠지지 않게 붙잡아 주고 있었다.
“아우레오 사제! 조금만 더 버티게!”
난전 중에 멀어졌던 테오도르가 무서운 기세로 적혈귀들을 베어 넘기며 아우레오 쪽으로 다가갔다.
정예 뱀파이어들도 테오도르의 검술은 당해 내지 못했고, 점점 그를 향한 압박이 약해지고 있었다.
“늙은이를 막을 수가 없어! 어쩌지?”
“젠장, 애송이 사제 한 놈도 끈질기게 버티는군. 신성력이 특출 난 것 같으니, 차라리 산 채로 데려가자!”
뱀파이어들이 작전을 바꿨다.
그들이 정신을 집중하자, 피에 젖은 주변의 모래가 아우레오를 덮쳤다.
“읍!”
피에 젖은 모래는 아우레오를 단단히 가두어 버렸다. 그 형상이 마치 모래로 만든 번데기 같았다.
“죽이는 것보다 봉인하는 게 더 쉽군. 성채로 데려가서 실험에 쓰자.”
“저 늙은 성기사는 어쩌고?”
그 순간에도 테오도르의 칼날은 앞을 가로막는 뱀파이어들을 쪼개고 있었다.
아우레오가 모래에 잡아먹히는 모습을 본 노기사의 눈동자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저놈은 너무 강해! 죽이려면 원로들이 직접 와야 할 것 같아! 우리는 이만 후퇴하자!”
이미 칠 인의 징벌자 중 다섯을 죽이고 한 놈을 생포한 마당이다.
뱀파이어들은 더 이상 욕심내지 않고 퇴각을 선택했다.
파드드득!
뱀파이어들이 수십, 수백의 박쥐로 변해 전장을 벗어났다. 아우레오를 품은 모래 번데기도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박쥐들을 따라갔다.
“이런……!”
테오도르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성기사라도, 하늘을 나는 박쥐 떼를 쫓아갈 방법은 없었다.
* * *
황금 거미 상회.
화려하지만 다소 천박하고 산만하게 꾸며진 집무실에서 로드릭이 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흐흐, 상회가 나날이 번창하는구나. 돈이 넘쳐흐르고 있어.”
술술 풀리는 사업에 로드릭의 기분은 날아갈 듯했다.
세상에 다양한 무역 상품이 있지만, 큰돈 벌기에는 라프란만 한 게 없었다.
사업 초기에는 뱀파이어들의 습격으로 물건을 강탈당하는 일이 잦았지만, 실력 있는 용병 테일로우를 고용한 이후로는 그런 일도 없어졌다.
달그락.
“뭐야?!”
싱글벙글하던 로드릭은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뒤를 돌아봤다. 창밖에서 부는 바람에 창틀이 움직이며 작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 씨팔, 깜짝 놀랐네…….”
로드릭은 요즘 라프란 판매가 호조인 덕에 기쁘면서도, 동시에 경호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가 고용한 용병들에게 죽은 뱀파이어가 벌써 수십 마리다.
로드릭은 뇌가 고장 난 인간이지만, 슬슬 뱀파이어 측에서 보복에 나설 때가 되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뒷골목을 전전하며 터득한 직감이 성직자의 지식보다 정확한 법이다.
“경호를 보강해야 해, 한데, 누구를 어디서 고용하지……?”
경호 인력을 늘려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뱀파이어의 습격으로부터 그를 지켜 줄 만한 실력자를 어디서 구하느냐가 문제였다.
황금 거미 상회가 큰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태생이 갱단인 탓에 아직 진짜배기 실력자는 부족했다.
최근 고용한 테일로우는 특급 용병이라는 말도 부족할 만큼 강한 사내였지만, 고집이 세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이라 심복으로 만들기 어려웠다.
달그락, 달그락.
로드릭이 잠깐 고민하는 동안에도 창문은 계속 흔들렸다.
로드릭의 가슴속에 분노가 치솟았다. 고작 바람 소리에 겁먹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팔이 불구가 된 탓에 명색이 기사임에도 다른 사람에게 경호를 맡겨야 하는 신세가 처량하기도 했다.
“아오, 씨팔!”
그는 촛대를 들어 창문을 향해 던졌다. 성질나게 자꾸만 달그락거리는 창문이 박살 나길 기대하며 힘껏 던졌다.
하지만 창문은 깨지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내가 어느새 방 안에 들어와 촛대를 잡아챈 것이다.
“……외팔이 로드릭.”
“뱀, 뱀파이어! 뱀파이어가 내 방에, 읍!”
침입자는 순식간에 다가와 로드릭을 벽으로 밀치고, 입을 손으로 막아 제압했다.
로드릭이 오른팔을 다쳤을지언정 힘이라면 아직도 팔팔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비쩍 마른 뱀파이어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마, 마법이다. 이 새끼, 마법으로 육체를 강화하고 있어.’
로드릭은 지금 눈앞에 있는 뱀파이어의 선택에 따라 자기 생사가 결정된다는 걸 깨달았다.
가만히 노려보는 뱀파이어의 검은 눈과 가느다란 입술, 뾰족한 귀가 더없이 징그럽고 두려웠다.
“나는 너를 해칠 마음이 없다. 하지만 계속 소리를 질러 대면 목에 바람구멍을 뚫어 줄 수밖에 없어. 자, 난 이제 네 입을 가린 손을 치울 건데, 설마 목구멍을 하나 더 갖고 싶진 않겠지?”
“…….”
로드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과 달리 뱀파이어는 로드릭을 당장 죽이지 않았다.
“후후, 좋아. 외팔이 로드릭, 내가 왜 널 찾아왔는지 알고 있나?”
“……동족의 복수를 위해 찾아온 게 아닌가?”
“복수라, 그것도 중요하지만, 이번에는 더 큰 일 때문에 왔다.”
이어지는 뱀파이어의 제안은 마라고사 뒷골목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로드릭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너에게 두 가지를 제안하겠다. 첫째, 앞으로 12주 동안 우리에게 라프란을 판매해라.”
“판매? 지금 판매라고 했나?”
로드릭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지금껏 상단을 습격해 라프란을 강탈하던 놈들이, ‘판매’라는 단어를 입에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