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18
“다른 뜻은 없어. 우리 뱀파이어들은 더 이상 라프란을 공짜로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생각보다 인간 용병들의 솜씨가 제법이더군. 작정하고 빼앗으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러자면 우리 쪽도 피해가 발생하니까.”
“그 말은……?”
놀랍게도 적혈의 뱀파이어는 로드릭을 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훔쳐보는 또 한 명의 뱀파이어가 있었다.
박쥐로 변해 커튼 뒤에 숨어 있던 이자벨라였다.
사파에서 온 용사
적혈의 제안
“우리 뱀파이어들은 너희 상회와 더 이상의 소모전을 그만두기로 했다. 앞으로는 값을 치를 테니, 너도 우리에게 충분한 양의 라프란을 제공해라.”
“……!”
적혈의 뱀파이어는 로드릭에게 정상적인 거래를 제안했다.
물론, 양측의 인적, 물적 피해가 막심하니 이쯤에서 불필요한 싸움은 그만두고 협상을 제안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뱀파이어였다.
“얼떨떨하군. 뱀파이어는 인간을 들짐승 취급하지 않나?”
“흥, 너희 인간들도 우리를 악마 보듯 하는 건 마찬가지지. 하지만 네놈은 말이 좀 통할 것 같아서 말이야.”
뱀파이어들은 상대를 제대로 봤다.
로드릭은 신앙이나 양심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고, 이문만 남길 수 있다면 흡혈귀와 붙어먹는 것도 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들의 은밀한 제안에 로드릭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가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 보고 싶군.”
로드릭이 관심을 보이자 뱀파이어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조건은 썩 달콤하지 않은 것이었다.
“앞으로 12주 동안 매주 열 상자씩 라프란을 매입하겠다. 값은 은으로 치르지. 라프란 무게의 세 배만큼 쳐주겠다.”
“세 배? 장난하나? 최소한 여섯 배는 받아야 해.”
가공을 마친 라프란 가루는 같은 무게의 황금만큼 비싼 물건이다.
한데 금값의 1/8도 안 되는 은으로 값을 치른다니, 뱀파이어가 제시한 가격의 두 배를 받아도 손해가 막심할 것이다.
“후후, 싫으면 이 자리에서 죽든지. 어차피 네놈이 죽고 나면, 네가 가진 라프란 농장은 다른 욕심 많은 인간이 차지하겠지. 우린 그놈에게 다시 접근하면 돼.”
“이런 날강도 같은 놈, 그렇게 손해를 감수하며 파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과연 그럴까? 잘 생각해 봐. 겨우 12주다. 넉 달만 눈 딱 감고 손해를 감수하면, 더 이상 우리와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거야. 심지어 공짜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시세의 반값이라도 쳐주겠다니까?”
로드릭은 기가 찼다. 인제 보니 뱀파이어란 족속은 박쥐가 아니라 모기 종자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덜미에 닿은 검붉은 손톱이 그에게 불합리한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네 밑에서 일하는 건달과 용병 들이 앞으로도 우리 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나?”
“흐흐, 물론이지. 솔직히 너희 실력이 썩 대단치 않던데? 지금까지 몇 번이나 습격을 막아 냈는데, 계속 막지 못하리란 법 없잖아?”
로드릭의 비아냥을 들은 뱀파이어의 얼굴이 굳었다. 능글맞게 제안하던 지금까지와 달리, 살심을 간신히 억누르는 표정이었다.
“그동안은 우리 쪽에 사정이 있어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우리 일족을 죽이는 놈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나마 너희는 라프란을 가졌으니 이렇게 선택지를 주는 거야.”
“우리에게만 선택지를 준다고? 그럼 뱀파이어를 죽이는 다른 녀석들도 있다는 소린가?”
“그래, 너도 칠 인의 징벌자에 대해 들어 봤겠지?”
“칠 인의 징벌자라면…….”
못 들어 봤을 리가 없다. 아니, 들어 본 걸 넘어서 로드릭은 그들이 죽인 뱀파이어의 시체도 목격한 사람이었다.
“어제 그놈들을 모두 해치웠다. 수백의 뱀파이어 군세가 일시에 덮쳐 가루로 만들어 버렸지. 이제 너희 차례인데, 딱 12주 동안만 라프란을 싼값에 제공하면 우리도 극단적인 방법은 쓰지 않겠다. 어떠냐?”
당근인지 채찍인지 헷갈리는 제안이 번갈아 오갔다.
로드릭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당장 그가 눈앞에 있는 뱀파이어를 물리칠 힘이 없는 이상, 제안을 수락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알겠다……. 매주 열 상자씩, 12주 동안 라프란을 시세의 반값에 제공하지. 딱 12주다.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라프란 재배지를 모두 불태우고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사생결단을 낼 테니, 얕은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뱀파이어를 인간 취급하지 마라. 그런 천박한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으니까. 어쨌든, 거래는 성사됐군.”
이런 걸 거래라고 할 수 있을까? 로드릭이 분을 삭이는 동안 뱀파이어가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제안이다. 아니, 이건 제안이라기보다는 통보지. 네가 고용한 용병 중에 테일로우라는 녀석이 있지? 눈동자 파란 놈. 그놈을 우리에게 넘겨라.”
“테일로우는 왜……?”
“다 알고 왔다. 너희 상단의 주력 용병이 그놈이잖아? 놈은 우리 일족을 너무 많이 죽였어. 아무리 협정을 맺었다지만, 그놈만큼은 그냥 둘 수 없지.”
비열하게 웃어 보인 뱀파이어가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받아.”
정교하게 만들어진 유리병에는 묽은 핏물이 들어 있었다.
“다음 상행에서 우리와 만나기 전에 미리 테일로우에게 먹여라. 놈을 제압하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하지만 고용한 용병을 뱀파이어에게 팔아먹은 게 알려지면, 용병 길드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런 것까지 우리가 신경 써야 하나? 거짓말로 둘러대든, 나머지 용병을 전부 재워 버리든, 네가 재주껏 해결해.”
톡 쏘아붙인 뱀파이어는 안개로 변해 흩어져 버렸다.
로드릭은 황망하게 서서 손에 든 유리병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걸 훔쳐본 까만 박쥐, 이자벨라도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갔다.
* * *
“로드릭이 적혈의 뱀파이어에게 포섭됐어요! 그 자식이 각하를 놈들에게 팔아치우려고 해요!”
“……?”
어딜 다녀온 것인지, 한참이나 보이지 않던 이자벨라가 돌아오자마자 헛소리를 지껄였다.
카심과 내가 별다른 대답 없이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속사포처럼 자기가 알아낸 정보를 쏟아 냈다.
“로드릭의 집무실에 잠입해서 알아낸 사실인데……. 그렇게 된 거예요. 어때요? 내가 제대로 한 건 했죠?”
“으음.”
“으음? 그게 끝이에요?”
이자벨라가 약 오른 듯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이자벨라가 가지고 온 소식은 분명 대단히 중요한 정보였지만, 어쩐지 인정해 주기 싫었다.
“적혈귀가 로드릭에게 준 붉은 물약은 무엇이지? 나한테 먹이라는 걸 보면, 역시 독약인가?”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이자벨라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카심이 한숨을 쉬며 끼어들었다.
“내 생각에, 그건 ‘매혹의 핏방울’인 것 같네.”
“매혹의 핏방울?”
카심의 설명에 따르면, 매혹의 핏방울은 정신지배를 도와주는 강력한 몽혼약(夢魂藥)이었다.
뱀파이어의 정신지배는 용의 그것처럼 강력하지 않아서, 웬만한 아인종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적혈의 혈마법사들은 주문의 위력을 보강할 다양한 수단을 강구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매혹의 핏방울이었다.
“인간처럼 지능이 높거나, 강인한 정신 저항력을 가진 몇몇 몬스터에게는 뱀파이어의 정신지배가 통하지 않지. 하지만 매혹의 핏방울을 이용하면 얘기가 달라져.”
매혹의 핏방울을 마시면 뱀파이어를 향한 의심과 경계가 줄어든다. 피의 매력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 혈마법을 시전하면, 고등 생물에게도 정신지배가 통한다.
“적혈은 매혹의 핏방울을 이용해서 강력한 하수인을 여럿 확보했지. 놈들은 인간과 드워프는 물론이고 소수의 엘프까지 하수인으로 거느리고 있어.”
적혈과 호각을 다투던 암혈이 최후의 전투에서 속절없이 무너진 것도 하수인 전력에서 밀린 탓이 컸다.
암혈이 꼭두각시술로 되살린 언데드 군세가 적혈이 데리고 온 하수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도륙당했던 것이다.
“박쥐 놈들이 감히 나를 세뇌하려는 건가? 북부의 백룡도 나의 정신을 지배하지 못했는데.”
“그야, 적혈은 각하의 진짜 정체를 모르니까. 그저 대단한 실력의 인간 검술가 정도로 알고 있을 테니, 하수인으로 만들면 쓸모가 있겠다고 판단했겠지.”
카심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적혈은 이미 로드릭을 포섭한 상태이니, 가능하다면 나를 죽이는 것보다 노예로 만드는 게 이득이었다.
“그나저나 이자벨라, 너는 로드릭의 집무실에 왜 숨어 들어갔던 거야?”
“그 자식이 가진 연락망을 빼돌려 볼까 해서요. 곳곳에 라프란을 팔아치우는 놈이니, 고객 중에 혹시 다른 암혈의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사실, 일리가 없어도 상관없다.
그녀가 왜 로드릭의 집무실을 염탐하고 있었는지보다는, 그녀가 가지고 온 정보가 더 중요했다.
“적혈이 대대적인 역습에 나서다니, 발목을 잡고 있던 내부 문제가 해결된 건가?”
“라프란을 원하는 걸 보면 아직 이냐시오가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닐 테지. 하지만 최소한 의식은 회복한 게 분명해. 그러니 한시름 놓고 외부 활동을 하는 것일 테고.”
카심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릭의 집무실에 침입한 적혈귀의 말에 따르면, 이미 광야를 누비던 칠 인의 징벌자들도 그들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중부에서 온 징벌 기사단을 분쇄할 정도라면, 파라쿨라 성채에서도 작정하고 정예를 보냈다는 뜻일 터.
‘……서부를 떠날 때가 온 것인가?’
파라쿨라 성채에서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는 걸 알았으니, 이쯤에서 적혈귀 사냥을 끝내고 오덴세섬으로 돌아갈지, 위험을 감수하고 좀 더 욕심을 내어 볼지 고민해 볼 문제였다.
‘내 내공은 이미 이 갑자 반을 넘어섰다. 목표였던 삼 갑자에 거의 근접한 것이지. 더구나 해가 바뀌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오크들이 제대로 된 토템을 만들어 내기 시작할 거야.’
지금 당장 영지로 돌아가도 이번 서부 원정은 성공이다.
서부에 머무른 지도 꽤 오래되었다. 생각할수록 점점 몸을 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자벨라가 아쉬워하겠지만, 적혈 측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는데, 위험을 알고도 몸을 피하지 않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럼 슬슬 오덴세섬으로…….”
말을 하려다가 슬쩍 이자벨라의 표정을 살폈다. 눈치 빠른 흡혈귀 계집의 표정이 벌써 굳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면, 복수에 미친 이자벨라가 얼마나 징징거릴지 훤히 보였다.
그때 카심이 끼어들었다.
“각하, 이제 그만 오덴세섬으로 돌아가는 게 어떤가?”
“음?”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파라쿨라 성채에서 작정하고 복수에 나서면 아무리 자네라도 위험해. 영민한 기사는 싸울 때와 물러설 때를 구분하는 법이지. 서부에서 많은 적혈의 뱀파이어를 처단했으니, 이쯤에서 만족하고 돌아가세.”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처음부터 서부 원정이 내키지 않았던 카심이 냉큼 영지 복귀를 권했다.
술술 흘러나오는 언변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영지 복귀를 원했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카심은 내 가려운 곳을 긁어 주듯 다양한 이유를 제시하며 강력하게 철수를 주장했다.
“오덴세섬을 너무 오래 비웠어. 수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영지인데, 영주가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안 되지. 복수도 좋지만, 영지의 내정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네.”
“크흠, 철수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듣고 보니 카심의 말에도 일리가 있군.”
내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카심에게 눈을 찡긋했다.
카심도 내 마음을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생지랄들을 하시네요, 정말로.”
“…….”
이자벨라의 냉소에 카심이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나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고독한 이자벨라
“돌아가긴 어딜 돌아가요? 각하, 맹세를 잊었어요? 내가 적혈의 뱀파이어를 만나게 해 주면 전부 제압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신앙까지 걸고 맹세했으면서, 광휘를 잃고 싶어요?”
“반드시 이번 원정에서 모든 적혈귀를 죽이겠다고 맹세한 건 아니잖아.”
이자벨라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카심을 향해 쏘아붙였다.
“카심, 왜 그런 식으로 말해요?”
이자벨라의 말투가 달라졌다. 분노와 실망만 담겨 있던 목소리에 울음이 약간 섞였다.
“이쯤에서 만족하고 물러가자고요? 복수도 중요하지만, 영지 내정이 더 중요하다고요? 왜 그런 식으로 말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 그게…….”
“일족의 원한을 잊었나요, 카심? 당신은 적혈이 밉지 않아요?”
이자벨라는 이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카심의 원한이 자신과 같지 않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