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19
그렇기에 이자벨라는 고독했다. 자신의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자꾸 딴생각을 품고 있었다.
“여기서 더 머무는 것은 하책이다. 어차피 우리 셋이서 서부에 사는 적혈의 뱀파이어를 남김없이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차라리 이쯤에서 철수한 다음, 준비를 더 해서 다음 기회에…….”
“듣기 싫어요!”
뾰족한 고함이 실내를 울렸다.
원독에 찬 이자벨라가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상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고 어두웠다.
“카심, 다 잊었어요? 전부 죽었단 말이에요! 내 가족도, 친구도! 적혈의 손에 다 죽었어!”
이자벨라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비쩍 마른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광기로 형형하게 빛나고, 악에 받친 목소리는 공기를 찢는 듯했다.
“곤살로도! 알베니토도! 당신이 도망쳤던 그날 모두 죽어 버렸단 말이야! 심지어, 심지어 베로니카 언니는…… 내가, 내가 보는 앞에서…… 그 악마들에게……!”
감정에 북받쳐 소리치던 이자벨라는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일족의 멸망 이후 많은 시련과 고초를 겪은 이자벨라였지만, 그날처럼 끔찍한 경험은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이자벨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요?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상책이라고요? 그딴 게 다 뭔데? 지금까지 적혈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적혈의 뱀파이어가 한 놈이라도 살아 있다면, 난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죽일 거예요.”
나는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이자벨라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거나, 뺨을 올려붙이고 억지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복수의 끝에 웃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겪었던 아픔을 이자벨라가 똑같이 겪게 될 거란 걸 알면서도, 섣불리 그녀의 복수를 막을 수 없었다.
그 가슴 찢어지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테온에게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이 가소롭게 들리겠죠. 내가 가진 알량한 마법으로는 단 한 명의 적혈도 상대하기 힘드니까. 하지만 두고 봐요. 반드시, 누구보다 무서운 혈마법사가 되어서 세상 모든 적혈의 뱀파이어를 내 손으로 찢어 죽이고 말 테니!”
발작적으로 소리친 이자벨라가 휙 하고 몸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멀어져 가는 이자벨라를 보며 카심이 급히 따라 나갔다.
* * *
두 암혈귀는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숙소에서 한참 동안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독한 술 한 잔이 간절해서 밖으로 나왔다.
마라고사의 밤거리를 거니는데, 행인들이 쑥덕이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봐, 그 소식 들었나? 아도나이 교회에서 전사들을 모집하고 있다던데?”
“들었지. 개척 사제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용병을 고용하고 있다더군.”
아도나이 교회라는 말에 내 귀가 쫑긋했다. 가만히 들어 보니, 쑥덕이는 두 행인은 중급 용병인 듯했다.
“이번 임무에 참여하면 아도나이 교회에 인맥을 쌓을 수 있을 거야. 일이 잘 풀리면 척박한 서부를 떠나 중부로 진출할 수도 있겠지. 듣자 하니, 그 아우레오인가 뭔가 하는 사제를 구출하는 데 성공하면 중부 대교구에서 큰 상을 내린다던데?”
“에이, 그래도 난 사양하겠네. 상대는 무려 흡혈귀라고. 칠 인의 징벌자도 속절없이 당했는데, 우리 같은 잔챙이가 나서 봤자 귀한 목숨만 잃지.”
“……?!”
아우레오라는 이름이 내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봐, 방금 그 이야기 자세히 좀 해 봐.”
“어라, 당신 테일로우 아냐? 특급 용병 테일로우!”
“오, 자네라면 나설 만하겠군. 한데, 소식을 아직 못 들은 모양이지?”
용병들은 나를 알아보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내용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칠 인의 징벌자에 아우레오가 포함되어 있고, 뱀파이어들이 그를 납치했다고?”
“그렇다니까? 칠 인의 징벌자 중 다섯 명이 죽었고, 아우레오 사제는 산 채로 끌려갔다더군. 유일한 생환자가 직접 증언한 내용이야.”
“심지어 그 생환자가 누구인 줄 아나? 그 유명한 테오도르래! 당신도 이름을 들어 봤겠지? 중부 최고의 성기사, 테오도르 몬테파를로 경이 서부에 와 있다니까!”
테오도르인지 뭔지는 내 알 바가 아니었고, 나는 오직 아우레오가 납치됐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흡혈귀들이 아우레오를 납치해? 하긴, 예전부터 그 자식을 탐내는 놈들이 많았지.’
아우레오는 젊은 나이에 아주 강한 신성력을 보유했다.
과거 숲의 마녀도 그렇고, 키르케네스도 그렇고, 강한 신성력을 가진 어린 사제는 여러모로 써먹을 곳이 많았다.
‘죽이려면 전투가 한창일 때 죽여 버렸겠지. 굳이 생포해서 성채까지 데리고 갔다면,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잠깐 고민했다. 아우레오를 구해야 하는가?
이미 아우레오에게서 얻을 것은 다 얻었다.
나는 이제 중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고, 그와의 인연은 진작에 끝났다.
서부를 떠나려던 시점에, 아우레오를 구하기 위해 파라쿨라 성채로 향하는 건 희생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복수는 해 봤어도 희생은 해 본 적 없는 인간이다.
‘그래도…… 아우레오니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예전과 달리, 나에게는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인사할 사람이 여럿 생겼다.
아우레오도 그중 한 명이다.
근황을 몰랐다면 잊고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흡혈귀들에게 끌려간 걸 알고도 외면할 수는 없는 인연이었다.
* * *
아우레오를 구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 이제 방법을 생각할 차례다.
이미 아도나이 교회에서 구조대를 조직하고 있으니, 거기에 합류하는 게 첫 번째 방법이다.
‘게다가 지금 서부 교회에 와 있는 성기사가 대단한 실력자라지? 테오도르 경이라고 했던가?’
파라쿨라 성채에 비해 서부의 아도나이 교회는 세력이 빈약하다.
그러니 이왕이면 전력을 한곳으로 모으는 게 좋고, 실력 있는 성기사까지 있다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나는 금방 생각을 바꿨다.
‘테오도르는 역용과 축골을 간파할지도 모른다.’
듣자 하니 테오도르는 광휘의 검을 다루는 성기사이면서, 동시에 신성력을 다루는 고위 사제이기도 하다.
그 정도 실력자라면, 희박하지만 내 정체를 알아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역용과 축골을 풀고 본래 모습으로 구출 작전에 나설 수도 없는 게, 용살기사가 파라쿨라 성채를 공격한다는 소문이 오비데우스의 귀에 들어갈 우려가 있었다.
‘그놈은 내가 서부에 있다는 걸 최대한 늦게 알아야 해. 영영 모르면 더 좋고.’
거기에 더해서, 내가 교회에 합류할 수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카심과 이자벨라의 존재였다.
‘혹여 테오도르가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카심과 이자벨라의 정체는 단번에 알아채겠지.’
지금은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보이지 않지만, 두 암혈귀는 결국 내 곁으로 돌아올 터다. 고위 성직자인 테오도르가 그 둘의 정체를 간파하지 못할 리 없다.
‘역시 교회에 합류하는 건 무리다. 나는 그들과 다른 방면으로 파라쿨라 성채에 잠입해야겠군.’
어떻게 하면 쉽고 안전하게 파라쿨라 성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적혈귀들은 나를 죽이기 위해 이를 갈고 있고, 로드릭에게 일족의 비약인 매혹의 핏방울까지 전해 준 상태다.
‘다음 상행에서 적혈귀들은 나를 생포하려 하겠지. 정신지배를 시도할 테니, 역으로 그 기회를 노려야겠다.’
머릿속에 대략의 계획이 떠올랐다.
어쩌면 화경에 이른 나조차도 목숨을 걸어야 할, 대단히 위험한 계획이었다.
* * *
며칠 뒤, 또 한 번의 라프란 상행이 시작됐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황금 거미 상회에서 일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터다.
카심과 이자벨라는 어디에 처박힌 건지 아직도 행방이 묘연했다. 감정이 격해진 이자벨라를 카심이 달래고 있을 텐데,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뭐, 차라리 잘됐지. 아우레오를 구출하는 동안은 두 뱀파이어와 떨어져 있는 게 편해.’
나는 모처럼 혼자가 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상단 호송은 용병들과 갱들, 짐꾼 노예들, 말 많은 로드릭까지 많은 사람이 함께했지만, 믿을 만한 동료는 없었다.
“여기서 쉬어 간다!”
로드릭의 지시에 노예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야영지를 꾸렸다.
임시 천막이 세워지고 작은 모닥불에 솥이 걸렸다. 죽을 끓이고 가져온 빵을 데우자 제법 근사한 향기가 났다.
“테일로우, 이거 한 잔 마셔 볼래? 귀한 술인데.”
여느 때처럼 내 옆으로 슬쩍 다가온 로드릭이 술을 권했다.
주종은 적포도주였는데, 주향이 은은하고 깊었다.
“억, 억지로 마시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보스인 내가 주는 술을 거절하진 않겠지? 뭐, 정 싫다면 안 마셔도 괜찮아. 근데 웬만하면 맛이라도 보는 게…….”
‘더럽게 횡설수설하네. 어설픈 놈.’
꼴을 보아하니 그 매혹의 핏방울인가 뭔가 하는 정신지배 비약을 포도주에 섞어 놓은 모양이었다.
로드릭이 지금 이걸 나에게 권한다는 건, 적혈귀의 습격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상행에 포도주를 챙겨 오다니, 보스의 취향이 꽤 근사한데?”
나는 모르는 척 로드릭이 주는 술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내공으로 위장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거북하군.’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시다 보니 명치 부근이 뻐근하고 답답했다.
나는 소변을 본다는 핑계를 대고 야영지를 벗어난 뒤, 마신 술을 전부 게워 냈다.
잠깐 뜸을 들이다 야영지로 돌아가니, 로드릭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이런 무식한 놈. 흡혈귀랑 붙어먹는 모습을 숨기기 위해 상단을 전부 재워 버린 건가?’
스튜에 미리 수면제를 섞어 놓았던 모양이다.
혼자만 잠들지 않은 로드릭이 무언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뚱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테일로우, 혹시 머리가 어지럽지 않나? 시야가 약간 붉어지는 느낌은 없어? 뺨이 따뜻해지고 다리가 붕 뜨는 기분 아니야?”
“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나는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며 약에 취한 연기를 했다.
바보 같은 로드릭이 자기가 기대하는 증상을 일일이 설명해 주는 덕에 쉽게 속여 넘길 수 있었다.
내가 완전히 잠들었다고 확신한 로드릭이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이윽고, 어둠을 가르고 일단의 적혈귀 무리가 야영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잠입
‘숫자가 많군.’
모습을 드러낸 적혈귀는 그 숫자가 물경 스물에 달했다.
저들이 각각 다른 혈마법을 사용한다면, 내가 전력을 다해도 섣불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터다.
“우리가 준 약을 다 먹였나?”
“그래, 포도주에 타서 줬더니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꿀꺽꿀꺽 잘도 마시더군. 흐흐, 워낙 옅게 희석한 탓에 술을 잔뜩 먹여야 했지만 말이야.”
로드릭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적혈귀들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나에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이상하네……. 제대로 먹인 거 맞아? 지금쯤이면 가사 상태에 빠져야 하는데, 이놈은 심박도 멀쩡하고 체온도 그대로야.”
‘로드릭이 몰랐던 증상이 있었네.’
나는 잠이 든 척하며 은밀하게 귀식대법(龜息大法)을 시전했다.
귀식대법은 거북이처럼 호흡이 느려지기만 하는 대법이 아니다. 단순히 숨을 늘리는 것 외에도 다양한 공능이 있었다.
심박을 늦추거나 체온을 낮추고, 피부에 푸른 기운을 돌게 하는 등 기척을 숨기고 시체로 위장하는 데 탁월한 대법이었다.
“심박이 점점 느려지는군. 체온도 살짝 내려간 것 같고.”
“약효가 늦게 도는 건가? 하긴, 인간치고 특출 나게 강한 놈이니까, 특이 체질일 수도 있지.”
적혈귀들은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들이 매혹의 핏방울에 갖는 믿음이 대단하기도 했고, 귀식대법 자체가 강호에서도 눈치채기 힘들 만큼 완성도 높은 대법인 덕도 있었다.
내가 가사 상태에 빠졌다고 확신한 적혈귀들은 드디어 정신지배를 시도했다.
개중에 가장 뛰어나 보이는 녀석이 다가오더니, 카심이 쓰는 정신지배와 똑같은 마법을 시전했다. ‘매혹의 밤안개’였다.
‘태청은 고요에 옥청은 자운이니 도기는 상청으로 돌아…….’
나는 눈을 감은 채 마음속으로 옥심귀일공의 구결을 암송했다.
만에 하나라도 이 정신지배를 막아 내지 못하면, 귀식대법이고 뭐고 전부 풀고 정면 대결을 펼쳐야 했다.
끈적한 혈마력이 내 머리를 감싸더니, 이내 두피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체내의 옥심귀일진기도 그에 맞서 심지를 보호하기 위해 천천히 움직였다.
‘이런 제기랄, 역시 무리인가?’
내공의 흐름이 평소보다 훨씬 느리고 답답했다. 귀식대법을 펼치고 있는 탓이다.
적혈귀의 정신지배는 키르케네스의 그것에 비하면 수준이 떨어졌지만, 문제는 나도 그때보다 방어가 약해진 상태라는 것이다.
옥심귀일공과 귀식대법을 동시에 운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