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20
‘이렇게 된 이상……!’
결단을 내리고 귀식대법을 거두려는 순간, 명치 부근에서 미약한 파동이 느껴졌다.
내 몸 안에 자리 잡은 용마력의 응집체, 통제 불능의 용마주가 또 한 번 제멋대로 능력을 발휘했다.
우웅-.
용마주는 은은하게 진동하며 마력을 풀어냈다. 키르케네스가 품고 있던 차가운 마력이 머리로 올라와 뇌를 보호했다.
혈마력은 용마력을 돌파하지 못하고 두개골 부근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쳇, 쉽지가 않네. 약효가 늦게 돌아서 그런가?”
정신지배를 펼치는 적혈귀가 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옆에 있던 다른 적혈귀가 손가락으로 내 눈꺼풀을 벌렸다.
적혈귀들은 내 동공을 들여다보며 정신지배를 계속 시도했다.
‘눈꺼풀은 왜 열어 보지? 아하, 정신지배를 당하면 눈동자 색이 변하는구나!’
퍼뜩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카심이 리자드맨에게 정신지배를 사용했을 때, 호박색이었던 리자드맨의 눈동자가 옅은 빨간색으로 변했었다.
나는 역용술을 펼쳐 천천히 눈동자 색깔을 바꾸기 시작했다.
귀식대법과 역용술, 축골공을 동시에 유지하며 눈동자 색깔을 바꾸는 건 묘기에 가까운 재주였다.
용마주가 정신지배를 확실하게 막아 주지 않았다면, 감히 시도할 수도 없었으리라.
“눈동자 색이 변했군. 성공이다.”
“휴우, 힘들었다. 고생한 만큼 쓸모가 있는 놈이어야 할 텐데.”
적혈귀들이 긴 숨을 내쉬며 말했다.
태연한 척했지만, 일족 수십 명을 죽인 전사에게 정신지배를 시도하는 건 그들에게도 긴장되는 일이었다.
“자, 이제 돌아가자. 이놈이 깨어나려면 족히 하루는 걸릴 테니, 일단 들것에 실어서 이동하지.”
적혈귀 중 절반은 본거지로 돌아가고, 나머지 절반만 남아서 라프란 거래를 마칠 생각인 듯했다.
나는 들것에 실린 채 이리저리 흔들리며 파라쿨라 성채로 향했다.
* * *
들것에 실려 도착한 곳은 황무지 너머에 우뚝 솟은 바위산이었다.
사방에 적토와 먼지바람뿐인 곳인데, 어느 순간 칼을 거꾸로 꽂아 놓은 듯 날카롭게 솟은 바위산이 불쑥 나타났다.
‘평소에는 마법으로 숨겨 두고, 정해진 방위로 진입해야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이군.’
서장의 대막(大漠)에서 간혹 볼 수 있다는 신기루가 저러할까?
거대한 바위산을 통째로 숨기다니, 실로 놀라운 마법이었다.
적혈의 뱀파이어가 사는 바위산은 끝이 날카롭고 주변에 박쥐들이 날아다녀 꼭 동화에 나오는 귀곡성 같은 분위기였다.
파라쿨라 성채는 그 바위산 아래에 있는 동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말이 동굴이지, 천장까지 족히 삼십 장은 될 것 같은 거대한 지하 광장이었다.
천장에는 붉은 박쥐가 빽빽하게 매달려 있고, 내부에서는 서늘하고 습기 가득한 바람이 불어 나왔다.
‘지하에 수원(水源)이 있나? 과연 적혈이 근거지로 삼을 만한 곳이로군.’
이렇게 큰 동굴의 입구를 흥건하게 적시는 습기라니, 물이 귀한 서부에서 보기 드문 수원지였다.
적혈귀들은 나를 들것에 실은 채 지하로, 지하로 계속 내려갔다.
실눈을 뜨고 슬쩍슬쩍 주변 경관을 관찰해 보니, 놀랍게도 파라쿨라 성채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동굴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땅을 파서 만들어 낸 시설이었다.
벽면을 따라 기숙사처럼 여러 격실이 갖춰져 있고, 종종 식당이나 연회장 등 공용으로 사용하는 시설도 보였다.
간혹 야명주와 비슷한 보석이 박혀 있어 붉은 빛을 발했는데, 동굴의 넓이에 비해 조명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실내는 대체로 어두컴컴했다.
“자네들, 그 황금 거미 상회인가 뭔가 하는 놈들 상대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아, 몽티조 님!”
한참을 내려가는 와중에 한 늙은 뱀파이어가 우리를 불러세웠다.
들것을 옮기던 적혈귀들이 자리에 멈춰서 반갑게 인사했다.
“무사히 돌아온 걸 보니, 라프란 거래가 잘 끝난 모양이군.”
“저희는 라프란 거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하수인만 데리고 먼저 복귀했지요.”
“새로운 하수인? 아, 그 테일로우라는 인간 용병을 사로잡은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바로 이놈이지요. 한번 보시겠습니까?”
젊은 적혈귀들이 몽티조라 불린 늙은 적혈귀에게 나를 보여 줬다.
몽티조는 내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몸 이곳저곳을 주무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자가 우리 일족을 수십 명이나 죽였다고? 인간 전사의 강함은 대부분 체격에 비례하는데, 이놈은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걸.”
“아마 특이 체질인 모양입니다. 매혹의 핏방울도 약효가 한참 늦게 나타나더군요.”
“그것참 재미있는 놈이군. 이놈은 무슨 용도로 사용할 셈인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일단 정신지배는 성공했으니, 원로원에 보고부터 하고, 이후 지침을 받을 생각이었어요.”
그 말에 몽티조의 기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저 늙은 적혈귀는 특이한 신체를 지닌 나를 탐내는 듯했다.
“잘됐군. 나도 원로원의 일원이니, 이자는 내 직권으로 처분하지. 일단 실험체 수용소에 수감하게. 임무를 부여하기 전에 생체 실험부터 몇 가지 해야겠어. 내가 요즘 돌연변이에 관심이 많거든.”
“몽티조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적혈귀들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 몸을 돌려 지하로 계속 내려갔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나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파라쿨라 성채의 바닥층, 한 점의 빛도 들지 않는 땅 밑 최하층이었다.
* * *
적혈귀들은 나를 성채 지하에 있는 실험체 수용소에 가두었다.
실험체 수용소는 인간 도시의 감옥과 비슷한 형태로, 쇠창살이 달린 여러 격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이 수용소에 갇힌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인간과 아인종은 물론이고 특이한 짐승이나 몬스터도 여럿 갇혀 있었다.
‘실험실이라기보다는 감옥에 가깝네.’
여기서 실험을 하는 건 아니고, 필요할 때마다 수용소에서 실험체를 꺼내 실험실로 가져가는 것 같았다.
또한, 생체 실험에 쓰일 동물이나 몬스터만 가둬 둔 게 아니라, 죄수나 포로도 수용하는 것 같았다.
동족인 뱀파이어들도 몇몇 갇혀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서부는 인간보다 뱀파이어가 더 엄격한 법치를 펼치는군. 이 정도 규모의 감옥도 갖추고 있고 말이야.’
수용하는 대상이 다양한 만큼 방의 크기도 제각각이었는데, 개 한 마리 겨우 가둘 만큼 작은 방부터, 키클롭스 서넛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방도 있었다.
그오오오오……!
땅 밑에서는 종종 긴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렸다. 여기가 최하층인 줄 알았는데, 수용소 아래에 한 층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소리의 울림이나 깊이로 가늠할 때, 거의 조르가드에 버금가는 대형 몬스터가 내는 소리 같았다.
‘실내에서 들을 만한 울음이 아닌데, 이 교활한 흡혈귀들이 최하층에 뭘 가둬 둔 거지?’
나는 호기심을 뒤로하고 일단 적혈귀들에게 몸을 맡겼다.
적혈귀들은 나를 들것에서 내리더니, 중간 크기의 독방에 집어넣었다.
“세상모르고 잠들었군.”
“흐흐, 내일 이 시간은 되어야 정신을 차릴 거야. 매혹의 핏방울은 조금만 먹어도 정신을 잃는데, 그걸 독한 포도주에 타서 몇 잔이나 연거푸 마셨다더군.”
적혈귀들은 창살을 잠그고 수용소를 떠났다.
나는 그들이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귀식대법을 유지하며 주변의 동태를 살폈다.
실눈을 뜨고 주변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워낙 깜깜한 곳이라 내공을 사용하지 않으면 자세히 살피기 어려웠다.
이곳에 격실이 수없이 많고, 다양한 놈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 정도만 알아냈을 뿐, 각 방에 누가 갇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서두르지 말자. 여기서 경거망동하다가는 살아서 돌아가기 어렵다.’
잠입은 어렵지 않았지만, 탈출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해정밀기로 잠금장치를 풀고, 운잠홍을 펼쳐 지상까지 올라가는 건 쉽겠지만, 내가 사라진 걸 적혈 측에서 알아채는 순간 감시가 강화될 테고, 결국 성채 안에서 싸움이 벌어질 터다.
‘놈들의 본거지에서 싸움이 붙으면, 필패(必敗)다.’
아우레오를 찾으면 녀석을 지키면서 싸워야 하는데, 심지어 지금 나는 용병으로 위장하느라 운철묵검과 백룡갑, 축복의 망토 같은 강력한 무구를 모두 벗어 두고 온 상태다.
‘일단 아우레오부터 찾자.’
나는 잠이 든 것처럼 가만히 누워서, 귀식대법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그리고 내공을 서서히 끌어올려 새로운 기술을 펼쳤다.
‘지망초감각(蜘網超感覺).’
천리지청술이 청각을 극대화하는 강체술이라면, 지망초감각은 오감을 전부 끌어올리는 탐지 무공의 최고봉.
화경에 이르러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기술이지만, 내공의 소모가 극심해 나조차도 자주 펼칠 수 없는 절학이다.
‘수감자는 역시 뱀파이어가 가장 많군. 바로 옆방도 뱀파이어고……. 뒷방은 호흡이 짐승 같네, 생체 실험용 몬스터인가?’
지망초감각의 거미줄이 점점 넓게 뻗어 갔다.
격실 하나하나를 샅샅이 수색한 끝에, 이윽고 감옥의 한쪽 끝에서 익숙한 기운을 발견했다.
‘찾았다.’
아우레오였다.
사파에서 온 용사
수용소
아우레오는 지하 수용소에서도 가장 구석진 방에 있었다.
‘호흡이 가늘고 맥이 약하다. 예상대로 목숨은 붙어 있지만, 기력이 쇠했군.’
나는 지망초감각을 계속 유지하며 아우레오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정신을 잃은 듯 모로 쓰러진 상태였고, 병든 닭처럼 생명력이 다한 모습이었다.
‘탈출 과정에서 아우레오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겠군. 몸을 가누기는커녕 의식을 언제 되찾을지도 기약이 없으니…….’
파라쿨라 성채 탈출의 난이도가 또 한 단계 올라갔다.
나는 아우레오에게 집중했던 지망초감각을 거두고, 내공을 아끼기 위해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천리지청술은 계속 유지해야겠다. 간수의 숫자나 교대 주기, 감시 영역을 파악해야 하고, 각 방마다 어떤 생물이 갇혀 있는지도 알아내야 해.’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무사히 탈출할 확률이 높아진다. 다만, 지망초감각을 계속 유지하는 건 내공의 소모와 신체 부담이 극심하다.
나는 천리지청술을 기본으로 가끔 지망초감각을 펼치며 하루를 보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날 데리고 생체 실험을 하겠다던 몽티조가 아직까지 별다른 기별이 없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수용소 내부를 샅샅이 파악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감시가 허술하군.’
그럴 만도 한 것이, 이곳에 있는 수감자 대부분은 이미 정신지배에 당했거나, 불구가 되었거나, 이성이 없는 짐승 또는 몬스터였다.
그러니 문단속만 잘해 두면 굳이 많은 감시자를 배치할 필요는 없었다.
수용소를 지키는 간수는 고작 네 명이었다. 두 명이 출구를 지키면, 나머지 두 명은 수용소 내부를 천천히 거닐며 순찰을 돌았다.
그리고 두 시진마다 위층에서 내려온 뱀파이어들과 교대하는 방식이었다.
‘간수 노릇을 하는 적혈귀는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다. 저들은 내 정신이 온전한 걸 모르고 있으니, 지강으로 기습하면 넷을 일수에 제압할 수 있어. 그럼 최대 두 시진 동안 수용소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겠지.’
두 시진이면 여유 있게 탈출로를 찾아볼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천장을 가득 메운 붉은 박쥐 떼의 시선이 거슬렸다.
뱀파이어는 박쥐를 수족처럼 부리니, 어쩌면 저 박쥐들이 모두 감시자일 수 있다.
간수들을 소리 없이 제압해도, 저 박쥐들이 밖으로 나가서 상층에 소식을 전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는데, 내가 갇힌 격실의 창살 틈으로 붉은 피 몇 방울이 굴러 들어왔다.
“……?”
어디서 흘러온 건지 모를 핏방울은 자의를 가진 생물처럼 내 쪽으로 굴러오더니, 이윽고 익숙한 형태를 갖추었다.
[이보게.]“……!”
[자네 지금 탈출을 계획하고 있나?]놀랍게도 핏방울은 글자로 변해 의사를 전하고 있었다.
피를 움직여 필담을 나누다니, 마법이 분명한데, 주변 어디에서도 마력의 파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오오오오……!
그 와중에 아래층의 거수가 또 한 번 긴 울음을 토해 냈다. 저 녀석도 땅 밑에 처박혀 있는 게 어지간히 답답한 모양이다.
[자네는 인간인데, 다른 존재의 향기도 이것저것 뒤섞여 있군. 마녀, 데스나이트, 적혈의 뱀파이어, 심지어…… 내가 모르는 향기도 두 가지나 가지고 있네? 자네, 정체가 뭔가?]핏방울은 놀랍게도 내가 지금까지 흡성대법으로 흡수한 상대를 쭉 나열했다.
향기 어쩌고 이야기하지만, 정말 냄새로 알아냈을 리는 없고, 무언가 특별한 감지 능력을 갖춘 모양이었다.
‘저놈이 모르는 두 가지 향기란 아마도 오크 주술사들, 그리고 키르케네스겠지.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예리한 놈이군. 경계해야겠어.’
나는 무어라 대답하지 않고 그저 핏방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글 쓰는 핏방울도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건 아니었는지, 자기 할 말을 이어 갔다.
[자네는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나? 난 옆방 늙은이일세. 나도 탈출을 계획하고 있는데, 몸이 성치가 않아서 시도를 못 하고 있었지. 자네, 나하고 협력하지 않겠나?]글 쓰는 핏방울, 아니 옆방의 수감자가 동맹의 손길을 내밀었다.
옆방이면 이미 내 감각 범위 안에 들어와 있는 상대다.
한데 그에게서는 마법의 기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핏방울을 굴려 글씨를 쓰는데, 마력은 사용하지 않는다니? 독특한 재주를 가진 영감이었다.
‘자세히 좀 볼까?’
지망초감각을 옆방 늙은이에게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아도 눈앞에 그리듯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육체 손상이 심각하군. 사지 근맥이 모두 잘렸고, 가슴에는 말뚝이 박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