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52
52화.
Epilogue II
여름의 늦은 오후다. 기울어지는 햇살이 쏟아지는 넓은 정원에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푸른 잔디 위를 뛰어다닌다. 앞서 달리는 리트리버와 경주라도 하는 듯 빠르게 달리는 아이의 유달리 까만 머릿결이 햇빛에 반짝이며 나풀거린다. 땀이 맺힌 하얀 얼굴은 발갛게 달아 있다.
“재준아, 그만하자. 나 힘들어.”
남자아이를 따라 뛰던 여자아이가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가쁜 숨을 쉬었다. 땀에 젖은 단발머리를 핑크색 리본이 달린 헤어밴드로 다시 정돈하면서 재준을 쳐다보았다.
“응, 유진아.”
재준은 급히 유진에게로 다가섰다.
“들어갈까 너무 더워 ”
숨이 찬 듯 조금씩 헐떡거리면서도 유진을 보는 까만 눈망울에 걱정이 가득하자 새치름한 표정으로 입을 꼭 다물었던 유진은 배시시 웃고 말았다. 재준과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이웃 아이 유진은 재준의 집에서 노는 일이 더없이 즐거웠지만 아무래도 재준과 콜리를 따라 계속 달리는 것은 힘들었다.
“아니, 우리 저기 가서 놀자.”
유진은 핑크색 원피스를 나풀거리면서 나무 그늘 아래로 먼저 걸어갔다. 재준은 유진을 따르며 리트리버를 향해 손짓했다.
“콜리야. 조금 이따가 다시 달리기하자.”
그늘이 드리워진 자그마한 인공 연못 근처에 앉아 유진은 나무 울타리 너머로 팔을 겨우 뻗어 빨간 장미 꽃잎을 하나씩 떨어뜨렸다. 정원 한편의 조경 용도라 연못이라 부르기에는 무척 작고 수심도 무릎 높이로 낮았지만 유진은 근처에 앉아 금붕어 밥을 주거나 꽃잎 몇 장을 띄워 보며 놀기를 좋아했다. 재준은 급히 마당에 있는 티 테이블로 가서 방석 하나를 가져왔다. 그동안에도 콜리는 재준을 쫓아 바쁘게 움직였다.
“자아, 여기 앉어.”
유진에게 방석을 깔아 주고 재준은 머리를 맞대듯 옆에 앉았다.
“예쁘지 장미 꽃잎 다섯 장을 띄웠는데 금세 저기 물레방아까지 갔다 근데 얘네들은 밥 주는 줄 알고 벌써 왔어.”
“음, 오늘은 오전에 밥을 줬어. 다음에는 꼭 유진이가 올 때까지 기다릴게.”
유진에게 입을 빠끔거리며 몰려드는 금붕어를 보자, 재준은 미안한 듯이 말하였다.
“응, 고마워.”
환하게 웃는 유진을 따라 재준도 밝게 미소 지었다.
“재준이, 이제 들어와요. 유진이도. 너무 오래 밖에서 논다고 할머니께서 걱정하세요. 곧 저녁 먹을 시간인데.”
단정하고 반듯한 모양새의 부인이 다가와 제법 엄한 투로 말했다.
“선생님, 조금만 더 놀면 안 돼요 우리 들어가면 콜리가 불쌍하잖아요.”
재준을 향해 꼬리를 연신 흔들고 있는 리트리버는 말이라도 알아들은 듯 낑낑 작은 소리까지 내어 보였다.
“안 돼요.”
“5분도 안 될까요 여기 그늘에 앉아 있을게요.”
재준은 눈을 반짝이더니 엄한 정 선생의 눈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폭 떨어뜨렸다.
“알았어요. 제가 콜리한테 바이할게요.”
‘콜리야…….’ 길게 빼어 부르며 재준이 콜리를 안타깝게 껴안았다. 정 선생은 서둘러 말했다.
“그러면 5분이에요.”
“정말 와아아. 고맙습니다.”
재준은 달려와 정 선생을 한 번 끌어안았다. 정 선생은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아, 정말 사랑스런 천사 같아. 번번이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잖아.’
유진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귀에 대고 뭔가 속닥속닥 작은 소리로 말하던 재준은 차고 문이 열리고 급히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리자 ‘아빠다!’ 소리치며 입구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재준아!”
“아빠아……”
마당으로 들어서는 한혁을 향해 재준은 팔짝 뛰어오르며 크게 벌린 품속으로 들어갔다.
“우리 아들! 뭐 하고 있었어 ”
한혁은 땀에 젖은 재준의 통통한 뺨을 비비며 말했다.
“유진이랑 콜리랑 놀고 있었어요.”
한혁은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유진에게 다정한 손짓을 하였다. 서진은 아들을 안은 채 활짝 웃고 있는 한혁을 올려다보았다. 한혁과 꼭 닮은 아들, 세상에서 서진이 가장 사랑하는 두 남자가 여름 태양을 고스란히 받으며 웃고 있다.
“최재준, 엄마도 왔거든. 알은척 좀 하지 그래 ”
재준은 그제야 서진을 보며 까르르 웃었지만 여전히 한혁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입술을 비죽거리는 서진을 향헤 한혁이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 엄마 삐쳤네.”
“삐치긴, 내가 애야 ”
한혁은 재준을 옆에 내리더니 서진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화나면 이렇게 턱을 올리고 본다니까.”
한혁은 ‘그럼 아빠가 엄마 웃게 해 줘야지.’ 말하며 서진의 뺨에 입술을 대었다. ‘왜 이래.’ 서진은 한 발 물러서면서 한혁의 가슴을 두드렸다. 뺨을 붉히는 서진을 보며 한혁은 소리 내어 웃었다.
현관문을 내려서는 연화를 향해 한혁이 인사를 건넸다.
“어머님, 다녀왔습니다.”
“그래, 윤 이사랑 최 사장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
연화가 다정한 웃음을 보이며 인사한다.
“네, 어머니. 백화점 매장 같이 둘러보고 들어오는 길이에요.”
한혁은 연화를 향해 편안한 미소를 보냈다. 그사이에도 콜리는 내내 한혁의 바짓자락을 맴돌며 꼬리를 흔드느라 정신이 없다. 한혁이 콜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콜리, 가자!’ 큰 소리를 냈다. ‘꺄아아.’ 재준의 탄성이 울리고 꼭 닮은 아버지와 아들이 리트리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아, 또 뛰네. 저는 다리 아파요.”
“으응, 유진이는 아줌마랑 저기서 기다리자.”
서진은 쀼루퉁 부푼 유진의 뺨을 쓰다듬고는 한혁이 되는대로 벗어 던진 양복 재킷을 집어 들었다. 내달리는 두 남자를 보며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연화와 눈이 마주치자 같이 웃어 버렸다. 누그러진 여름 햇살이 파란 잔디에 낮게 비춰 들고 더위에도 지치지 않는지 한참을 뛰어다니는 한혁과 재준의 웃음소리가 마당 전체에 울려 퍼졌다. 현관 근처에 서서 유진의 원피스 리본을 고쳐 매 주던 서진이 한혁을 크게 불렸다.
“재준 아빠, 이제 그만해요.”
서진의 말에 한혁은 무릎을 굽히고 뛰어오는 재준을 향해 양팔을 크게 벌렸다. 숨이 차올라 팔딱팔딱 심장이 뛰어오르는 재준을 가슴에 끌어안고 잔디 위에 털썩 앉아 버렸다.
“아 참, 아빠, 나…… 유치원에서…… 연극해요.”
달콤한 아이의 숨이 턱 끝에 닿아 간질인다. 한혁은 땀에 젖은 재준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어, 그래 뭐 하는데 ”
“백설공주.”
“정말 ”
유진과 같이 다가선 서진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네.”
재준이 자랑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자 한혁이 웃으며 물었다.
“예쁜 유진이가 그럼 백설공주야 ”
한혁의 말에 유진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백설공주 좋아 ”
“네.”
“이야, 재준이 엄마도 좋아하는데.”
“엄마가 좋아하는 거 ”
두 아이가 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한혁은 장난기 가득한 눈을 하고 말했다.
“어, 재준이 엄마는 신데렐라보다 독 든 사과 먹고 꽈당, 하는 백설공주를 더 좋아한대.”
짓궂은 표정으로 한혁이 쳐다보자 서진은 곁에 다가 선 연화의 눈치를 살피며 한혁의 팔을 툭 쳐 버렸다.
“그래, 우리 재준이는 뭐 하니 ”
연화가 눈을 맞추며 물어보자 재준은 큰 소리로 답했다.
“왕자요.”
“야아. 멋있구나.”
“어머니, 이제 들어갈까요. 아직 너무 덥죠 ”
한혁은 연화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재준을 안은 채 일어섰다.
“재준아, 아빠가 연극 꼭 보러 갈게.”
“아빠, 꼭, 약속이야.”
“그러엄. 아빠랑 엄마랑 할머니랑, 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랑 다 같이 보러 갈 거야.”
재준은 매달리 듯 한혁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자, 유진이도 같이 들어가서 간식 먹자.”
한혁은 자유로운 한 손으로 유진을 잡았다. 연화는 마당 저편 이제 막 벌어지기 시작하는 분꽃 더미를 눈에 담아 보다가 ‘어머님.’ 부르는 서진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할머니, 근데 할머니도 엄마처럼 백설공주가 좋아요 ”
재준의 물음에 곤란해하는 서진을 한번 보더니 연화는 웃으며 답했다.
“응, 할머니도 신데렐라보다 백설공주가 더 좋아.”
한혁과 연화가 소리 내어 웃었다. 볼을 붉히는 서진도 영문을 모르는 재준과 유진도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하여 백설공주와 왕자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한혁이 책 마지막 줄을 다 읽기 전 재준은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한혁은 동화책을 덮고 재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뒤 방문을 조용히 닫고 나갔다.
“재준이 벌써 자 ”
한혁이 침실로 들어서자 서진은 하얀 실크 잠옷을 막 입는 중이었는지 한쪽 어깨 끈을 서둘러 올리면서 가운을 집어 들었다. 머리는 물기에 젖어 있다.
“응. 피곤했나 보네.”
한혁은 서진의 손에 들린 가운을 가볍게 채어 툭, 아래로 떨어뜨렸다.
“아, 왜 그래.”
다시 흘러내리는 어깨끈을 고쳐 잡으며 서진이 슬쩍 흘겨보았지만 한혁은 허리를 끌어당긴 채 빙그레 웃었다. 한혁이 어깨끈을 아무렇지도 않게 밀어 내리자 서진이 몸을 움츠렸다.
“오늘따라 너 되게 예뻐 보인다.”
“치, 뭐야. 원래 예뻤어.”
“그렇기는 해. 멍청한 백설공주처럼.”
“또 놀린다.”
서진은 그의 가슴을 양손으로 슬며시 밀어냈지만 한혁은 드러난 하얀 어깨에 입을 맞추고 목덜미에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흰 피부는 금세 붉게 물든다. 한혁이 얼굴을 들고 뒤로 물러섰다. 입고 있던 티셔츠를 머리 위로 벗고는 서진을 쳐다보았다. 물기 젖은 머리, 자신만 바라보는 눈동자, 발갛게 물든 뺨과 벌어진 입술을, 끈이 흘러내린 어깨를 차례로 보았다.
“백설처럼 피부는 하얗고, 입술은 장미 꽃잎처럼 붉은, 똑똑한 공주님.”
서진이 입을 벌린 채 숨만 내어 쉰다. 흰 뺨이 더 붉어진다.
“이리 와 봐.”
서진이 다가서자 가늘고 흰 팔을 들어 제 어깨에 올렸다.
“왜.”
“키스해 줘, 공주님.”
서진이 목에 팔을 감고 고개를 약간 젖힌다. 한혁은 고개를 들고서 서진을 느긋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키 차이 때문에 입술이 닿지 않는다.
“어떻게 하라고.”
서진은 약이 바싹 오른다.
“윤서진 똑똑한 머리를 사용해서 ”
한혁이 빙글거렸다.
“올라가든가, 내려와야겠네.”
“응.”
여유로운 대답이다.
“발꿈치를 들어서 네 입술에 닿길 기대하나 봐.”
“성공하면, 상 줄게.”
귓속에 대고 은밀하게 속삭인다.
“기대해도 좋은, 상.”
뻔뻔한 제안에 서진은 입술을 잘근 깨문다. 발꿈치를 들어도 한혁의 협조 없이는 닿지 않는다. 알고서 하는 제안이다. 닿을 듯 가까워진 입술에 장난스레 입김만 분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김이 간지를 때마다 심장까지 저려 서진은 숨만 색색 내어쉬었다.
“말해 봐.”
“응 ”
“Say the magic words.”
“Please ”
“아니. 그건 재준이가 부탁할 때 쓰는 마법의 단어이고. 너는 뭐야, 윤서진 ”
“……사랑해.”
한혁이 가만히 펼치고 있던 팔을 둘러 서진의 허리를 감싼다.
“그리고…… ”
뜨거워진 입술이 건조하다. 서진은 혀로 입술을 적셨다.
“사랑……해 줘.”
순식간에 몸이 번쩍 들린다. 서진은 어지러워 목을 꽉 끌어안고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