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51
51화.
Epilogue I
화창한 봄날, 봄 햇살만큼이나 빛나는 신부가 입장한다. 단아하게 올린 머리 아래로 드러난 흰 피부가 은은한 광택이 있는 순백의 드레스보다 더 화사하게 반짝였다. 조금 긴장한 듯 서 있던 신랑이 몇 걸음 성큼성큼 다가와 신부를 맞을 준비를 했다. 악수를 하며 딸을 넘겨주는 윤 교수의 얼굴에 진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연분홍 한복을 차려입은 소양이 담담한 표정으로 서진을 바라보는 반면 신랑 측 부모석에 고운 하늘빛 한복을 입고 앉은 마음 약한 연화는 손수건을 꺼내 살짝 눈물을 찍어 냈다. 정 회장은 입술을 꼭 다물며 차오르는 감정을 가렸다. 정 회장 옆에는 이제는 고등학생 티를 벗고 제법 대학 신입생 모양새를 내는 예린이 앉아 있었다. 눈물을 찍어 내는 엄마를 지켜보더니 살짝 눈을 찡그렸다.
‘신부 엄마도 안 우는데 신랑 엄마가 울다니, 누가 보면 아들 주기 싫어 우는 줄 알 거 아냐.’
신랑 측 가족석에 앉아 있던 지희는 기훈의 손을 아래로 살며시 쥐었다. 기훈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작은 귀엣말을 했다. 이제 입덧을 시작한 지희가 불편한 것 같아 걱정하는 기훈을 보며 지희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지난겨울, 지희도 서진만큼이나 화려하고 우아한 신부가 되었었다. 기훈이 단지 자신을 한 번만 봐 달라는 그녀의 약속을 지킨 것이라 생각했었다. 반쪽짜리라 할지라도 그의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리라 위안했다. 하지만 그는 매일매일 조금씩 더 마음을 주고 있다. 가끔은 벅찰 정도로 온전히 그의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이다. 지희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차곡차곡 쌓아 가는 그와의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기훈 옆자리에 앉은 기훈의 어머니가 아름다운 신부와 역시 아름다운 신랑을 바라본다. 결혼식을 앞두고 두 사람이 따로 인사를 온다 하였다. 이미 친지들이 모인 자리를 만들어 인사한 이후였다. 번거로이 그럴 일 없다며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한혁은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시간 약속을 잡아 서진만 만났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호텔 룸으로 불렀다. 서진이 주저하며 룸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내가 한혁이 숙모할머니예요.’
‘죄송합니다. 어떻게 불러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앉아요.’
이 여사는 손을 끌어 소파에 자리를 권했다. 직접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커피를 내리고, 미리 준비한 쿠키를 세팅하였다.
‘감사합니다.’
서진이 또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서진 양. 아니, 이제 윤 부장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가라고 불러야 하나.’
서진이 커피 잔을 들고서 기훈의 어머니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내가 보스턴에서 나쁘게 굴었어요. 서진 양, 우리 아이랑 친구처럼, 공부 파트너처럼 교제한다는 거 알고 있었어. 나는 그때 회장님이 나서기 전에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생각에만 집중했어. 기훈이 못지않게 총명한 서진 양이 그렇게 학업을 그만두리라 상상하지도 못했어.’
서진은 표정에 변화 없이 한 번 고개를 들어 쳐다보기만 하였다. 예순다섯이 넘어 어린 사람에게 사과하는 일은 어렵고 부끄러웠다.
‘미안해요. 믿지 않겠지만 오랫동안 마음이 힘들고 가책을 느꼈어. 그 정도로 학업을 이루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나도 기훈이가 겪는 과정 지켜보면서 알았으니까.’
어렵게 꺼내는 긴 사과를 담담히 듣고만 있던 서진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학업을 중단한 건, 제 탓이 큽니다. 그 점에 대해서 더 이상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기적이게도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의 짐이 덜어졌다.
‘한혁이는…….’
서진이 눈에 띄게 바싹 긴장하였다.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걱정되는 일이 많을까, 이 여사는 말을 멈추고 찬찬히 바라보았다. 커피를 느리게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한혁이는 일곱 살 때 처음 봤어. 남동생 없는 기훈이가 끔찍하게도 아꼈죠.’
서진이 속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아이는 우리 부부를 몹시 불편해했지만 기훈이가 그렇게나 좋아하니, 나도 자연스레 마음이 갔어.’
‘죄송합니다.’
손을 저어 서진의 사과를 막았다.
‘무슨 말이야. 한혁이 누군지 몰랐잖아, 안 그래 ’
‘……네.’
‘걔야, 너무 멋있잖아. 요즘 회사 다니는 모습 보니 세림 모델로 세워야겠다 회장님도 그러셨어. 그런 남자가 좋다는데 당연했겠지.’
서진이 조금 무안한 듯 웃었다. 차갑고 단정한 인상이라 생각했는데 웃으니 참 예쁘고 고운 얼굴이다.
‘우리 가족 누구도 조금이라도 아가를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아. 회장님도 그러시고, 다른 사람들은 처음부터 잘 몰랐어. 무엇보다 지금 기훈이 가정이 따뜻하고…….’
이 여사는 준비해 둔 자그마한 상자를 내밀었다. 서진이 눈을 크게 떴다.
‘선물이야. 작은할머니가 주는 결혼 선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 마음 편하자고 주는 거야. 받아 주면 좋겠어.’
서진이 고개를 숙이며 상자를 받았다.
‘굉장히, 내 기억엔 대학생 같았거든 공부 잘하는 모범생. 이제 보니 다른 품목을 골랐어야 했나 후회되네.’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선물은 만년필이었다. 서진의 이름이 새겨지고 에메랄드가 박힌 만년필을 서진이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맘에 꼭 들어요. 고맙습니다, 숙모할머님.’
기훈의 어머니는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청산하여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서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한혁의 체제로 굳어진 회사에서 그의 눈치를 보게 된 신세를 한탄하면서도 강 전무도 석연도 좋은 마음으로 그의 결혼을 지켜보았다. 한혁이 처음 평범한 집안의 회사 직원이랑 결혼한다고 했을 때 기막힌 마음뿐이었다.
‘세림을 떠나도…….’
석연은 주례석 앞에 선 한혁을 보며 갑자기 찾아와 담담하게 말하던 얼굴을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그 아이는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언제나 누구의 비위도 눈치도 완벽하게 맞추지 않았다. 조금 더 쉬운 길을 버려두고 제 갈 길로 동요 없이 움직이는 아이. 힘든 결혼을 끝내 추진하는 그 아이를 보며 젊은 날 한없이 순수하고 마음이 여렸던 오빠를 떠올렸다. 그 오빠를 이용해 자신의 집안을 먹칠하고 오빠의 인생을 망가뜨린 여자의 아이로만 보여 오랜 세월 증오하고 멸시했다. 이제 당당하게 성인이 된 그 아이에게서 조금씩 세상을 떠난 오빠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비록 집안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 질투하기는 했지만 자신에게는 항상 좋은 오빠였던 석원을 떠올리며 석연도 눈시울을 붉혔다.
먼저 결혼하는 동생을 바라보는 서연의 얼굴에는 미소만 걸려 있다.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 아직도 요정 같은 얼굴로 작은 입을 달싹거리며 옆에 앉은 서훈에게 연신 종알거렸다.
“신랑도 인물이 좋기는 하지만, 너무 예쁘지 않니, 내 동생 ”
“어, 큰누나는 더 예쁠 테니 제발 엄마 속 그만 썩이고 결혼해라. 올해 넘기기 전에 안 가면 내가 먼저 간다.”
“뭐 내가 너한테도 추월당해 그건 절대 안 돼, 너어 알아서 해!”
서연이 샐쭉하게 흘겨보자 서훈은 대답 없이 하객 측을 한번 바라다 보았다. 목련을 닮은 유달리 희고 깨끗한 얼굴은 수많은 하객 속에서도 단번에 눈에 잡혔다. 눈이 마주치자 무안한 듯 살며시 미소를 짓는 사람을 잠시 눈에 담았다. 이내 신랑 신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서훈은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창 너머로 옅은 봄 하늘에 하얀 새털구름이 그려 놓은 듯 걸려 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천천히 퇴장하는 신랑과 신부의 얼굴에 기쁨과 설렘이 번진다. 굳게 맞잡은 두 손 영원히 놓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이 걸음걸음 묻어났다.
‘사랑해. 영원히.’
그의 눈이 말하는 다짐에 여자의 눈에 환한 등불이 켜졌다.
‘사랑만 할래.’
수줍게 웃는 눈이 조용히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