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 God Dragon RAW novel - Chapter 198
8화. 조손(祖孫) (1)
“아저씨는 누구예요?”
언제였더라? 소진은 그날이 몇 살 때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다섯 살이었는지, 여섯 살이었는지.
이제는 정현이나 영화가 없어도 밤에 혼자서 잘 잘 수도 있고, 편식도 하지 않는 어엿한 여덟 살이었으니 아기였던 ‘옛날’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 정현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만큼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들만 가득 있는 하늘산에서 보기 드문 하얗고 잘생긴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에다 종이를 가져다 놓으면 베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콧날도 유독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소진이 정현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동경(銅鏡, 거울)에서 늘 보던 얼굴이었다. 자신이 어른이 되면 저렇게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현과 자신은 닮아 있었던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언제나 냉소가 가득한 날카로운 눈매 정도…… 하지만 저 눈빛이 자신에게 향해 있을 때는 항상 씁쓸함과 아픔이 담겨 있어 뭔가 싶기도 했다.
나는 이 사람을 처음 보는데, 왜 이 사람은 나를 저런 눈빛으로 보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진을 대하는 사람들은 친조부인 천마를 제외하면 항상 두 가지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상하게 웃거나, 바짝 엎드리거나. 태어났을 때부터 성녀(聖女)로서의 운명을 타고난 그녀에게 정현과 같은 태도는 신기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래서 저 아저씨는 왜 저러는 걸까, 그런 아리송한 눈빛으로 마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도 정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정현을 데려왔던 천마가 옆에서 소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자네의 손녀라네.”
“……?”
소진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녀? 자신에게는 할아버지가 천마, 한 명뿐일 텐데?
아니다.
다른 신도들에게 듣기로 사람은 누구나 할아버지가 두 명이라고 했다. 친조부와 외조부.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버지. 다만, 소진은 아버지의 아버지인 천마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 이 하얀 백발의 아저씨가 어머니의 아버지란 뜻일까?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었다. 정현은 할아버지라고 하기에 너무 젊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물론, 친조부님도 아흔에 가까운 나이라고 하기엔 훨씬 젊어 보였지만, 그래도 최소 환갑은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다른 마존(魔尊)들도 마찬가지. 일백이 넘으면서는 아무리 젊게 보아도 다들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그런데 정현은 아니었다. 젊다 못해 아예 어려 보이기까지 했고, 실제로 청년에 해당하는 신도들과 비교해도 절대 그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인다거나 하는 모습은 없었다.
그러니 친조부님이 거짓말을 하신다고 여길 수도 있었지만. 소진은 딱히 정현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런 건 딱 한 가지 때문이었다.
눈.
자신을 보는 눈이 전혀 달랐으니까.
그리고 그 눈의 깊이가 아주 달랐다. 마존들보다도 훨씬 깊었다. 친조부님과 비슷했다. 저만한 눈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그만한 연륜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소진은 정현이 외조부일지도 모른다는 천마의 말을 믿었다.
반면에 정작 정현은 소진이 손녀라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였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천마는 뭘 그리 놀라냐는 얼굴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왜, 놀랐나? 내가 다 알고 있어서?”
천마가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굳이 그렇게 놀랄 건 없는데. 뭐, 본좌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었다네. 자네에게 그런 약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하지만 본좌의 며느리를 보던 자네의 눈빛이 당시에 좀 예사롭지 않아서 따로 조사를 해 보았었지. 덕분에 알게 되었다네. 이 넓은 세상에 인연은 또 왜 그렇게나 짧고 삭막하던지. 물론, 알고 있는 건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
“…….”
“여하튼 처음으로 본 손녀가 아닌가? 딸에게는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손녀에게는 똑같은 아픔을 주지 말게.”
정현은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일렁이는 눈으로 천마를 보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곧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소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한쪽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고는…… 천천히 소진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아무 말도 없이, 한참 동안.
* * *
그날부터 소진은 ‘새로운’ 할아버지의 곁을 계속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제 딴에는 조심스럽게 따라다닌다고, 들키지 않게 한다고 여기저기에 숨어서 다닌다지만.
무공도 익히지 않은 대여섯 살의 아이가 강호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 정현의 기감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왜?”
“헤헤헤.”
소진도 정현이 자신이 있는 쪽을 보고 있으니 이미 들켰다는 것을 알았는지, 밝게 웃으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요.”
“그냥?”
“예. 그냥요. 헤헤.”
정현은 그런 소진의 태도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지 눈살을 가만히 좁혔다. 정현은 한평생 제자도 들이지 않고, 하나 있는 딸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어린아이의 사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 역시 어린 시절을 겪었다지만, 천음절맥을 앓으면서 일찍 철이 들었기 때문에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소진의 성격은 그에게 영 낯설게만 다가왔다.
만약 소진의 엉덩이에 꼬리가 달려 있었더라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지 않을까. 정현에게로 향하는 소진의 시선에는 온통 설렘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마인들에게는 공포를, 정파인들에게는 경기를, 민초들에게는 숭배만을 받아왔던 정현에게는 역시나 낯선 눈빛이었다.
불가사의(不可思議). 정현에게 있어 소진은 그런 존재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도저히 이해하려 해도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 존재.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한없이 어렵기만 한 존재.
반면에 소진은 정현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가깝게 생각했고, 단순히 ‘외조부’라는 이유만으로 무한한 애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것이, 정현에게는 또다시 낯설기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소진이 그를 따라다니는 게 싫냐면…… 또 그런 건 아니었다.
밥 먹을 때 옆에 불쑥 끼어들어서는 같이 먹자고 졸라 댈 때도, 명상에 잠겨 있을 때 불쑥 나타나서는 놀자고 칭얼댈 때도, 홀로 잠에 들었을 때 이불 옆에서 불쑥 나타나서는 같이 자자고 할 때에도…… 조금 귀찮기는 해도 싫지는 않았다.
역시나 낯설고 어렵기 때문에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것일 뿐. 하지만 소진은 어린아이 특유의 순진함으로 그런 거리감을 확 좁히고 있었으므로, 정현은 언제나 그녀를 대하는 데 있어서 쩔쩔매기 바빴다.
천마는 그런 모습이 아주 재미있어 죽는 눈치였지만.
“하하하하! 자네에게 이런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군. 본 교의 성도(聖徒)들은 싫다면서 모가지를 줄줄이 자르고 다니더니, 그 아이는 그럴 수가 없어서 힘든 겐가?”
“모가지 자르고 다닌다는 말이 뭐예요?”
“……애 듣는다. 이상한 말 쏟아 내지 마.”
“뭐, 어떤가. 언젠간 이 아이도 알게 될 텐데.”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동시에 한편으로 정현은 자신의 신도들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 다녔는데도, 마치 친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보며 웃어 대는 천마가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줄곧 얼굴만 마주치면 죽어라 싸워 댔던 것 같은데…… 왜 지금 와서는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그로서는 어색할 따름이었다.
물론, 그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지난날, ‘문’을 열고서 보여 주었던 수많은 마물(魔物)들. 그것들을 보고 난다면 아무리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같이 손을 잡으려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정현도 함부로 할 수 없던 존재들이었고, 그건 천마도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심지어 천마의 친위대(親衛隊) 중에는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천마를 위기로부터 보호해 줄 수 없을 거란 사실에 좌절을 겪고 스스로 단전을 폐하거나, 사임(辭任)을 하고 산을 내려가 떠돌이 생활을 하는 이들까지 있다고 할 정도였다.
하물며 그런 존재들이 하늘산 내에서 존재를 감추고서 웅크리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천마가 그런다고 해서 모두가 정현을 환대해 주는 건 아니었다.
정현과 명천교 사이에는 절대 넘을 수 없을 거리가 존재했고, 대놓고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마존들은 정현을 여전히 경계하거나 호시탐탐 목을 칠 기회를 노리고 있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도마(刀魔)가 그러했다.
명천교 내 최고 호법에 해당하기도 하는 그는 행여 정현이 소진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싶어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현을 감시하고 다녔으니.
마존들 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천마의 추종자…… 아니, 미친개나 다름없는 녀석이니만큼 뒤를 밟히는 게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소진이야 따지자면 피를 나눠 준 외손녀이고, 또한 마음이 예쁜 어린아이라 괜찮다 치지만…… 저렇게 덩치 크고 시커먼 남정네가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꼴은 정현으로서도 짜증이 단단히 날 수밖에 없는 일.
“아, 뭐! 또 왜! 여기 있는 동안에는 사고 안 치겠다고 말했잖아! 근데 뭐가 문젠데! 진짜 한판 붙을까? 앙? 오늘 하늘산이 뒤집힐지 내가 뒈질지 내기해?”
가뜩이나 하늘산을 뒤져서 ‘회’의 놈들을 찾느라 골머리를 쥐어 싸던 중에 마존들이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시비를 거니, 정현으로서는 용살검 쪽으로 손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고.
“……싸우려는 게 아니다.”
도마도 이 이상 정현을 자극했다간 정말 큰일이 나리라고 생각했던지 슬쩍 나타나서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래도 그의 두 눈은 여전히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그럼 뭔데? 너 설마…… 남자 주제에 이 미모를 흠모했다거나 하는 거면 진짜 산어귀에다가 모가지 걸어 버린다?”
“미쳤는가! 나도 어엿한 한 가정이 있는 몸이다.”
“그럼 됐고. 뭐? 싸우려는 게 아니면 왜 자꾸 시빈데?”
“그대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
“생각?”
“그래. 생각. 성녀님에 대한 그대의 생각.”
도마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대는 교주님과 마찬가지로 성녀님의 피붙이라 들었다. 그렇다면 성녀님께서 위기에 처했을 때, 교주님처럼 성녀님을 보호해 줄 수 있는가? 그대의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각오로 성녀님을 보호해 줄 수 있는가, 이 말이다.”
정현은 그제야 도마가 왜 자신을 따라다녔는지 알겠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비소에 가까웠다.
“내가? 내가 마두 놈처럼 어떻게 해? 한평생 친딸한테도 딸이라는 한마디도 못 했던 게 나였는데?”
순간, 도마의 눈에서 불똥이 튀겼다.
“그럼 그대를 성녀님의 옆에 더 이상 붙어 있게 할 수는 없……!”
“그래도.”
하지만 정현은 담담하게 도마의 말허리를 자르면서 말했다.
“안 죽게 만들 거다. 또 잃는 건 싫거든.”
“…….”
도마는 한동안 말없이 정현을 바라보다, 곧 몸을 돌려서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도마가 정현의 뒤를 밟는 일은 없었다.
* * *
하늘산이 불에 타오르던 그 날.
“그 약속…… 기억하나?”
도마는 전신이 갈가리 ‘찢긴’ 상태에서도, 숨을 크게 헐떡이면서도, 겨우겨우 말을 이어 나갔다. 반드시 정현에게 이 말만큼은 해야 한다는 듯이.
“성녀님을…… 이제는 안 잃을 거라던 말.”
정현은 자신의 멱살을 붙잡으며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 말하는 도마를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부디, 지켜다오. 성녀…… 님을.”
“…….”
정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도마는 안심할 수 있었던지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정현은 그의 시신을 조용히 눕히고, 눈을 감겨 주면서 소진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 정상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이보게, 정현. 우리는 친구겠지?”
“이런 미친놈이. 어디서 마두 놈 따위가 겸상하려 들어? 내가 이래 봬도 무당파 원로거든? 그보다 정신 좀 차려, 인마. 뭘 이렇게 비실비실해? 너 진짜 천마(天魔) 맞냐?”
“그러니 부탁함세……. 부디 내 손녀딸을…….”
“야! 이상한 복선 같은 거 깔지 말라고!”
“자네밖에 믿을 사람이 없…….”
천마의 유훈도 깊게 그의 가슴 속에 남으면서.
검재(劍災)와 손녀의 강호 나들이가 시작되었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