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50
오비데우스의 분신을 보고 딱히 쓸모가 떠오르진 않았다.
흑마법에 능한 키르케네스나 꼭두각시술을 익힌 이자벨라가 보았다면 군침을 흘릴 재료겠지만, 강시술에 소양이 없는 나는 이걸 활용할 방법이 없었다.
“각하, 취익, 혹시 이놈이 누군지 알고 있나? 취익, 각하한테 원한이 있는 것 같았다.”
“잘 알지. 이건 용의 분신이다. 이걸 조종하던 배후의 본체는 내 손에 목이 잘렸지.”
나는 오크들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용이 뭔지 모르는 오크들은 그저 내가 대단한 마법사를 처단하고 왔다고만 이해했다.
“오비데우스의 분신은 당분간 너희가 관리해라. 지금처럼 잘 봉인해 두면 되겠군. 혹여 부패하거나 야위는지 수시로 관찰해라.”
나는 오비데우스의 분신을 보며 이자벨라가 돌아오면 선물로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로드릭에게 언질을 남겨 두었으니, 이자벨라는 머지않아 나를 다시 찾아올 터다.
‘이자벨라는 흑마법을 익혔으니, 이걸 주면 좋아하겠지?’
“취익, 알겠다. 그런데 각하, 취익, 이자벨라와 카심은 왜 함께 오지 않았나? 취익, 두 뱀파이어도 보고 싶다.”
“이자벨라는 사정이 있어 잠시 헤어졌다. 곧 돌아올 거야. 그리고 카심은…… 죽었다.”
“……!”
카심이 죽었다는 말에 오크 주술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심은 오크들에게 좋은 이웃이자 학식을 나눌 수 있는 연구 동료였다. 동시에 바깥소식을 들려주는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나는 손뼉을 한번 쳐서 주의를 환기한 뒤, 보따리에 싸 온 오비데우스의 연구 자료를 꺼냈다. 알아볼 수 없는 문자로 기록된 자료였다.
“이걸 한번 보거라. 읽을 수 있겠느냐?”
오크들은 연구 자료를 꼼꼼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문자란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 오크들이 살던 세계의 문자는 아니군.’
나는 실망스러운 마음을 거두고 오크들에게서 연구 자료를 다시 받았다. 이건 내가 보관하는 게 나을 듯했다.
* * *
오비데우스의 분신을 확인하고, 두 번째로 향한 곳은 카심과 이자벨라가 머물던 오두막이었다.
차원 관문 근처에 임시로 지어 둔 가옥인데, 두 뱀파이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오크들이 종종 와서 먼지를 털어 냈다고 한다.
“……밖에서 기다려라.”
오크들은 마당에 세워 두고, 나 혼자 오두막에 들어섰다.
눈에 익은 물건들이 보였다. 카심이 애지중지하던 각종 실험 도구, 이자벨라의 여벌 옷과 구두도 있었다.
그리고 오두막 한쪽 구석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갑옷 거한이 눈에 들어왔다.
“이놈, 뚱보야, 별일 없었느냐.”
뚱보는 대답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듀라한인 뚱보는 이자벨라와 어느 정도 멀어지면 작동을 멈춘다.
이자벨라가 방부 처리에 공을 들인 덕분에 부패하거나 냄새가 나진 않았지만, 지금의 뚱보는 그냥 목 잘린 시체와 다름이 없었다.
“네놈은 생전에 이자벨라와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 들고양이 같은 계집애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게냐?”
헛헛한 심정에 뚱보의 머리통을 툭툭 치며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잠시 감상에 빠져 있는데, 먼 곳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강력한 마력의 파동이 있었다.
웅웅웅-!
내가 그 마력 파동을 느끼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오크 구역의 경계 수정도 마구 진동하기 시작했다.
강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가 차원 관문 주변에 나타난 것이다.
“웬 놈이냐!”
“각, 각하, 취익!”
나는 즉시 밖으로 튀어 나갔다. 밖에서 기다리던 오크 주술사들도 누군가의 침공을 알아챈 듯 서둘러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달렸다.
“봉인 석관을 노린다, 취익!”
“취익, 막아라!”
도착한 곳은 오비데우스의 분신을 보관해 둔 장소였다.
검은 로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마법사가 공중에 둥둥 떠 있었는데,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봉인 석관을 향해 양손을 뻗고 있었다.
위잉- 철컥. 위잉- 철컥.
석관을 감싼 봉인 결계가 순서대로 빠르게 해제됐다. 생소한 이계의 술법을 물 흐르듯 파훼하다니, 마법사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오크 주술사들은 사력을 다해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검은 로브의 마법사는 파리 쫓듯 허공에 손을 한번 휘젓는 것으로 오크들의 술법을 모조리 튕겨 내 버렸다.
‘이 새낀 또 뭐야? 설마 또 다른 용인가?”
나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놈에게 쇄도했다.
놈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어설프게 거리를 주거나 주문을 외울 시간을 주면 안 될 것 같았다.
‘문답무용! 일단 제압하고 대화는 나중에 한다!’
답허성실을 펼쳐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삼십육 요혈을 향해 연달아 권풍을 쏟아 냈다.
퍼퍼퍼퍼펑!
몰아치는 권풍의 폭격.
오크들을 상대하던 마법사가 내 쪽을 바라봤다.
후우웅-.
마법사는 별다른 주문이나 시동어도 없이 보호막을 수십 겹 만들어 냈다.
내가 쏟아 낸 연환권이 보호막에 부딪혀 허공에서 폭발했다.
“시동어도 없이 마법을 써?”
역시 상대의 정체는 용인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즉시 진신내력을 끌어 올렸다.
온몸에 호신강기를 두르고, 손에 든 운철묵검에서 태허도룡검강이 타올랐다.
“시커멓게 차려입은 꼴을 보니, 네놈은 동방의 검은 용이로군!”
검은 용이 대체 왜, 어떻게 동방을 벗어나 북해의 오덴세섬까지 쳐들어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찾아온 놈을 곱게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어디 그 추한 도마뱀 면상 한번 보자!”
거리가 좁혀지고, 변칙적인 환검이 펼쳐졌다. 하지만 검은 마법사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기계적으로 마법을 시전하며 뒤로 물러섰다.
“흥, 다른 용들보다는 싸울 줄 아는 놈이구나!”
나는 일부러 창룡후를 아끼며 초식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단 한 번의 마법 파훼로 승부를 결정지을 셈이었다.
하지만 검은 마법사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른 행동을 했다.
우웅-.
차분히 내 공격을 받아넘기던 검은 마법사가 봉인 석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느새 모든 봉인이 해제된 석관의 뚜껑이 힘없이 열리고, 오비데우스의 분신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도망칠 셈이냐?!”
즉시 숨을 들이마시며 창룡후를 준비했다. 상대가 공간이동을 시전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검은 마법사는 품에서 스크롤을 뭉텅이로 꺼내 한 번에 찢었다.
벼락과 불덩이, 얼음 송곳과 돌풍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내가 호신강기의 강도를 끌어올리는 사이 검은 마법사는 이미 공간이동의 빛에 휩싸여 있었다.
‘뭐야, 백골이잖아?’
스크롤을 찢는 순간 드러난 상대의 손은 뼈밖에 없었다.
마법의 여파로 벗겨진 로브 아래에는 용인 특유의 도마뱀 대가리가 아닌 사람과 비슷한 해골이 있었다.
파앗!
검은 마법사가 사라졌다. 공간이동 스크롤을 사용했으니, 창룡후는 시전하나 마나였다.
그나마 놈이 사라지기 직전에 생김새를 확인한 게 유일한 수확이었다.
“용이 아니었잖아? 뼈다귀가 산 사람처럼 움직이다니, 몬스터의 일종인가?”
단순한 몬스터라기에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내가 겪어 본 몬스터 중 용과 아룡족을 제외하면 데스나이트가 가장 강하다고 평할 수 있는데, 섬에 쳐들어온 백골 마법사는 데스나이트보다 한참 윗길로 보였다.
“그나저나, 저놈은 처음부터 오비데우스의 분신을 노리고 온 것 같은데…….”
백골 마법사는 나와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비데우스의 분신 말고도 더 가져간 게 있는지는 차차 확인해 보아야겠지만, 일단 놈의 주목표는 오비데우스의 분신이었던 것 같다.
‘그 말인즉, 백골 마법사는 이곳에 오비데우스의 분신이 있다는 걸 사전에 알고 왔다는 뜻이다. 이건 상대의 정체를 유추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야.’
이곳에 오비데우스의 분신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확실히 알고 있는 건 나와 오크들뿐이고, 그나마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건 서부에서 함께 싸운 성직자들과 엘프들, 그리고 엘프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던 늪의 조언자뿐이다.
‘백골 마법사는 언데드의 일종 같으니, 성직자들이 보낸 건 아니겠지. 교회에서 내게 이런 짓을 할 리도 없고.’
결국 남은 후보는 늪의 조언자가 유일했다.
‘이름이 나후타야라고 했지? 그 백골 마법사가 나후타야였던 걸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백골 마법사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
“모두 모여 보거라.”
나는 오크들을 불러 모아 몇 가지 당부를 했다.
앞으로도 종종 외적의 침입이 있을 수 있으니, 차원 관문 주변으로 마법 결계를 강화하고, 경보 마법을 다중 설치하도록 명했다.
“각하, 취익, 그러자면 각하에게 필요한, 취익, 마력 토템 생산이 또 지연될 거다.”
“괜찮다. 어차피 바깥일을 대부분 해결했으니, 토템 생산은 몇 달 늦어져도 무방하다.”
실제로 당장 마력 토템이 급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체내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두 용마주를 통제할 방법을 찾는 게 급했다.
“주술에 필요한 마법 재료는 목록을 만들어 가져와라. 다음에 올 때 사다 주마.”
“취익, 고맙다, 각하.”
마지막으로, 카심과 이자벨라가 지내던 오두막을 잘 보존하라 명했다. 언젠가 이자벨라가 돌아오면 머물러야 할 곳이니까.
한데 막상 오크들을 이끌고 오두막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뚱보 어디 갔어?”
뚱보가 사라졌다.
뚱보가 퍼질러 앉아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오두막 주변에는 발자국도 없었다.
* * *
오크 거주지에서 큰 사건이 있었고,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았지만, 나는 일단 장원으로 돌아왔다.
당장 그곳에 머무른다고 정보가 더 나올 것도 아니니, 오크 거주 지역 주변으로 곤륜의 삼원진만 깔아 두고 미련 없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데, 그사이 장원에는 의외의 손님이 와 있었다.
“테온! 외출을 다녀오셨군요!”
“테온 경! 이런 꼴로 찾아오게 되어 면목이 없네.”
찾아온 손님은 아우레오와 테오도르, 그리고 함께 중부로 떠났던 정예 성직자들이었다.
“너희가 왜 여기에……?”
꼬라지만 보아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성직자들은 이곳저곳 깨지고 다쳤으며, 머리칼은 불에 타 꼬불거렸다.
무엇보다도, 오비데우스의 본체를 실었던 마차가 보이지 않았다.
“적습을 받아 오비데우스의 사체를 빼앗겼습니다. 몬스터가 나타나서 우릴 기습했어요.”
“멍청한 몬스터에게 당해 오비데우스의 사체를 빼앗겼단 말이냐? 대교구의 정예 성직자라는 놈들이 손가락만 빨고 있었어?”
나도 방금 몬스터에게 오비데우스의 분신을 빼앗기고 온 마당이지만, 그런 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테온, 우릴 습격한 건 예사 몬스터가 아니에요. 리치라고요!”
“그게 뭔데, 이 자식아.”
“아이, 참. 리치는…….”
아우레오는 리치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데스나이트가 지옥에서 온 기사라면, 리치는 지옥에서 온 마법사라고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육체 능력은 별 볼 일 없지만, 어지간한 엘프보다 훨씬 강력한 마법을 보유하고 지치지도 않는 언데드 마법사. 그것이 바로 리치였다.
‘주로 백골의 모습이고, 공중을 떠다니며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곧장 머릿속을 스쳐 가는 모습이 있었다.
오크 거주지를 습격한 백골의 마법사. 어쩌면 그놈이 성직자들을 습격한 리치와 같은 녀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