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52
아크리치
나후타야는 온 신경을 전생술에 집중했다.
흑마법에 몰두한 별종 키르케네스에 비하면 전생술의 성취가 낮은 그녀인지라, 꼼꼼하게 주문까지 외워 가며 마법을 완성했다.
우우웅-!
암흑 기류가 두 사체를 감싸고, 이자벨라의 불탄 백골에서 망령이 뽑혀 나왔다.
영혼을 강제로 뜯어내는 고통에 이자벨라의 망령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이자벨라만 고통에 몸부림치는 게 아니었다.
나후타야도 젖 먹던 힘까지 써 가며 마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전생술은 영혼을 다른 육체로 옮기는 흑마법의 극의.
아무리 마법의 종족인 용이라지만, 평소 흑마법에는 별 관심도 없었던 나후타야에게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투툭-.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이자벨라의 망령이 육신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나후타야는 주문으로 영혼을 인도해 오비데우스의 분신 쪽으로 끌어 들였다.
잠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이자벨라는 바로 옆에 준비된 텅 빈 육체, 오비데우스의 분신에 달라붙더니, 이내 강력한 육신에 만족한 듯 단단히 자리 잡았다.
파앗!
오비데우스의 분신, 아니 이제는 이자벨라의 새로운 몸이 될 적발 적안의 미녀가 밝은 빛을 뿜었다.
눈이 번쩍 뜨이고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태양이 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칠공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우드득, 우득!
이자벨라의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그녀에게 익숙한 체형으로 변했다. 붉은 머리는 물에 잠긴 듯 천천히 떠올라 나풀거리고, 빨간 눈동자는 크게 확장되어 흰자위가 아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서, 성공이다! 내가 아크리치를 만들었어!”
나후타야는 이자벨라의 변화가 뜻하는 바를 한눈에 알아챘다.
이자벨라는 리치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격을 가진 존재로 진화했다.
살았으되 동시에 죽은 자. 존재 자체가 모순인 언데드의 정점.
아크리치 이자벨라의 탄생이었다.
“이자벨라, 내 말이 들리니?”
빛이 잦아들고, 이자벨라도 비명을 멈추고 평정을 되찾았다.
나후타야가 급히 이자벨라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이전에는 나후타야가 무슨 말을 하면 고개를 돌려 쳐다보기라도 했는데, 이제는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이자벨라는 말없이 자기 몸을 내려다봤다. 양손을 들어 천천히 손바닥과 손등을 살피고, 자기 머리카락 끝을 문지르며 촉감을 느꼈다.
“이자벨라, 숲의 동쪽 경계에 적이 쳐들어왔다. 나는 널 만드느라 너무 많은 힘을 소모했어. 그러니 네가 가서 외적을 막아라!”
“…….”
이자벨라가 나후타야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크리치와 눈을 마주친 나후타야는 문득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었다.
‘내, 내가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을 만든 건가?’
핏.
그 순간 이자벨라가 사라졌다. 나후타야조차 마법의 전조를 느끼지 못했을 만큼 빠른 공간이동이었다.
‘멀, 멀어져 간다.’
나후타야는 이자벨라의 강대한 마력이 동쪽으로 향하는 걸 느꼈다.
이자벨라가 연달아 공간이동을 펼쳐 요정숲의 동쪽 경계로 향하고 있었다.
“휴우, 다행히 제대로 만들어졌구나. 시간도 늦지 않게 맞췄어.”
이자벨라의 묘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근본이 언데드이니 창조자인 자신을 거역할 순 없으리라.
“호호호, 아크리치를 손에 넣었으니, 이제부터는 내 세상이다. 일단 네가 보낸 괴수 병단부터 철저히 파괴해 주마, 아스칸다르.”
동쪽으로 날아간 이자벨라는 어렵지 않게 동방의 괴수들을 물리칠 것이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 나후타야가 밝게 웃었다.
‘이제 내 차례다.’
나후타야는 연구실을 치우고, 오비데우스의 분신을 놓아두었던 자리에 오비데우스의 본체를 눕혔다. 그리고 여성의 몸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 * *
사방이 어둡다.
주변으로 희끄무레한 연기 같은 것이 종종 내 몸을 스친다.
‘꿈이다.’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각몽(自覺夢)이다.
흥미롭게 주변을 둘러보는데, 저 멀리서 한 줄기 빛이 나타나 내 곁으로 왔다.
[선택받은 용사여, 용들의 싸움이 머지않았다.] [……?]빛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세상에 단 두 마리의 용만 남았노라. 용은 모두 죽거나, 둘 다 살아야 한다.] [어째서? 둘 중 한 마리만 살아남을 수도 있잖아?] [‘최후의 용’은 ‘맹약의 굴레’를 벗는다. 남은 용은 모두 죽거나, 둘 다 살아야 한다.]빛은 그때부터 같은 말만 반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은 ‘용은 모두 죽거나, 둘 다 살아야 한다.’였다. 이런저런 질문도 해 보고, 농담도 던져 봤지만, 다른 말은 없었다.
마음이 답답해진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이 아도나이인가?] [용은 모두 죽거나, 둘 다 살아야 한다.] [정해진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걸 보니, 아도나이는 아닌 것 같군. 당신은 아도나이의 말을 대신 전하러 온 졸개인가?] [졸개…….]빛이 피식 웃었다. 빛은 형체도 없고 표정도 없지만, 나는 나를 비추는 빛이 가볍게 웃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참 낯익고, 참 반가운 미소였다.
‘당신은 설마……?’
내가 빛의 정체를 짐작하는 순간,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 * *
얕은 선잠을 자다 눈을 떴다.
중부로 향하는 마차 안, 맞은편 좌석에는 아우레오와 테오도르가 앉아 있었다.
‘무슨 꿈을 꾼 것 같은데…….’
창밖을 슬쩍 내다보니 드높은 성벽과 날아오르는 흰 비둘기 떼가 보였다.
지난 몇 주 동안 보았던 중간 지대의 광야와 분명 다른 풍경이다.
아도나이교의 발상지이자 중부의 대도시, 르망에 도착한 것이다.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네요. 르망의 초입에 닿았으니, 여기서부터 대교구까지는 일사천리입니다.”
아우레오가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말한 대로, 입성 절차는 막힘없이 진행됐다. 마차에서 내릴 필요도 없었다.
일행의 정예 성직자 중 아무나 한 명만 신원을 증명하면 어느 관문이든 즉시 문을 열었다.
나는 마차 창문을 활짝 열고 바깥 경관을 즐겼다.
‘모처럼 깊이 잠들었군.’
아무리 아우레오와 테오도르가 곁을 지키고 있었다지만, 낯선 곳에서 꿈까지 꿀 정도도 깊은 잠에 빠지다니, 나답지 않은 일이다.
‘체내의 용마주 때문인가?’
백룡주와 화룡주의 다툼은 나날이 격해졌고, 종종 크게 싸움이 붙을 때는 진신내력을 동원해 짓눌러야 했다.
처음에는 이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벌써 몇 주째 용마주 통제에 내력을 쏟아붓고 있으니 점점 피로가 쌓였다.
‘용마주를 온전히 흡수하든, 체외로 배출하든 하루빨리 방법을 찾아야겠군. 이대로 계속 품고 있기는 불안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마차는 성문을 지나 도시의 중심가를 가로질렀다.
신성 도시 르망의 거리에서는 달큰한 꿀 내음과 꽃향기가 풍겼다.
아우레오에게 물으니, 중부인들이 즐겨 쓰는 향유 때문이라고 했다.
중부는 흰 대리석이 많이 나는 곳이라 도시 건물도 순백색이 많았고, 구석구석에 작은 교회와 성원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물이나 쓰레기 따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말끔했고, 오가는 사람들도 단정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담수가 풍부한 르망은 도시 전체에 상하수도가 설치되어 있고 청소를 전담하는 인력도 있습니다. 시민들은 목욕을 즐기지요. 도시 곳곳에 대중탕도 마련되어 있어요. 빛과 청결은 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다른 도시와 생활 수준이 다르군. 차원이 달라.”
이토록 진보한 도시는 중원에서도 별로 보지 못했다.
인구로 따지면 북경이나 남경에 비하겠느냐만, 도시의 미관이나 물자의 풍족함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았다.
정갈하고 깨끗한 르망은 화려하고 알록달록한 중원의 도시와 다른 매력이 있었다.
우리가 탄 마차는 거침없이 달려 르망 중심부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성의 성문 앞에 도달했다.
“내리시죠, 테온. 이곳이 르망의 중심, 루아르토성(城)입니다. 세간에서는 ‘백색거성’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죠.”
내성 루아르토의 외관은 실로 아름다웠다. 생전에 이토록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은 본 적이 없었다.
성벽은 흰 돌을 정교하게 쌓고 표면을 세공해 우아함을 풍겼고, 난간마다 성원상이나 기타 교회의 상징물을 조각해 신에게 경외를 표했다.
심지어 일출몰에 따른 빛 반사까지 고려해서 만든 것인지, 백색거성에 부딪힌 햇살이 팔방으로 분열하며 거룩하게 빛났다.
그토록 정교한데 규모도 대단해서, 루아르토성의 넓이는 오르샤바 내성의 두 배가 넘었고, 높이는 바닥부터 첨탑 꼭대기까지 오십 장은 되어 보였다.
‘건물이 아니라 작품이군. 중원의 건축물과는 다른 멋이 있어.’
내가 입까지 벌리고 백색거성을 올려다보자, 성직자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특히, 이전부터 나를 중부 대교구로 초대하고 싶어 했던 아우레오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어때요, 테온? 대교구는 참 아름답죠?”
“대교구? 이게 대교구라고?”
중부 대교구는 다른 교구와 달리 건물 하나가 아니었다.
루아르토 성채, 즉 대도시 르망의 내성(內城) 전체가 교구의 소유였다.
내가 감탄하고 있을 때, 루아르토의 성문이 열리고 일단의 성직자들이 마중을 나왔다.
“테오도르 경, 돌아오셨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경!”
역시 대교구에 도착하니 테오도르의 위상이 하늘을 찔렀다.
그는 서부에서도 많은 활약을 했지만, 직접 용을 상대한 나보다는 존재감이 작았다.
하지만 대교구에서는 달랐다. 테오도르는 중부가 자랑하는 영웅이자 모든 성직자의 어버이 같은 존재였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변의 성직자들이 인사와 찬사를 건넸고, 그 뒤를 따라 걷는 나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백룡갑을 입고 왔는데 이토록 무관심하다니…….’
기분이 묘했다. 북부에서 명성을 떨친 이후로 가는 곳마다 너무 시선이 집중되어서 문제였는데, 여기서는 테오도르의 후광에 가려 철저히 조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오오, 테오도르! 테오도르 몬테파를로! 나의 오랜 벗이여!”
내가 모처럼 사람들의 무관심을 즐기고 있을 때, 성채 안쪽에서 백색 예복을 펄럭이며 뒤뚱뒤뚱 뛰어오는 거구의 늙은이가 있었다.
푸근한 인상의 노인은 풍성한 백발과 백미를 멋들어지게 길렀고, 목소리는 인자하고 부드러웠다.
반면 풍채는 어마어마해서 키가 칠 척(약 210cm)이 넘어 보였고 체중도 삼백 근(약 180kg)은 거뜬히 나갈 것 같았다.
“대주교 예하!”
달려오는 노인을 발견한 모든 성직자들이 고개를 숙이며 성호를 그렸다. 심지어 최고위급 성직자인 테오도르도 눈을 내리깔고 성호를 그리며 예를 표했다.
‘대주교? 저 푸짐한 노인네가 대주교라고?’
체통 없이 등장한 뚱뚱보 늙은이. 그의 정체는 루아르토의 성주이자 현 아도나이 교회의 수장, 대주교 성(聖)율리오 3세였다.
대주교라면 모든 주교의 정점에 있는 사내이니 한눈에 보아도 대단한 신성력이 느껴질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율리오 대주교에게서는 별다른 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소탈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이, 남다른 체격만 아니면 은퇴하고 탱자탱자 놀러 다니는 뒷방 늙은이로 오해할만한 인상이었다.
‘반박귀진(返璞歸眞)의 경지에 이른 건가? 하긴, 신성력은 불가의 내력과 비슷한 면이 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율리오 대주교는 나보다 높은 경지에 오른 사내라는 뜻이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중부 대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