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going to retire just to save the world RAW novel - chapter 223
누나치고는 제법 똑똑해 보이는 말이었다.
‘아냐, 그렇게 말하면 낭만적으로 느껴지잖아.’
금방 지능이 낮아 보이는 말을 하긴 했지만.
‘…하수구가?’
‘미쳤냐? 도시 전설이라고 하면 그럴싸하게 들린다는 말이었어!’
참고로 이 던전의 핵은 저… 진흙인지 악어의 배설물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운…… 그 속에 있다.
유지은, 누나가 질색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다니까?
“여기 공략하고 싶다고 하셨죠?”
“어? 아니, 안 해도 될 것 같네.”
“핵은 저 안 어딘가에 있습니다.”
“몇 년 뒤까지 안 터진다고 했지? 잠깐 놔둬도 괜찮겠군.”
홍석영은 손수건을 다시 단단히 묶었다. 풀리지 않게.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든 공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낼 걸 그랬나. 하지만 나도 그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니다. 그리고 던전을 없애도 몸에 묻은… 오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같은 차를 타고 귀가해야 하는 건 나였고.
“그래서. 자네가 이러고 있는 걸 보니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겠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바리바리 챙겨 온 것들을 하나씩 꺼냈다.
이렇게 말해도 준비물이 많지는 않다. 큰 말뚝 몇 개와 로프. 참고로 이 로프도 김채민이 제공한 것으로….
‘이건 어디에 쓰시게요?’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정화한 물이야 그렇다 치지만, 이건 아라크네의 실로 만든 거라고요.’
‘홍 선생님 앞으로 달아 두세요. 길드 일입니다.’
김채민이 당장 가지고 있는 게 많아서 다행이다. 내가 구하려고 했다면 시간이 제법 걸렸을 거다. 홍석영이나 이미선을 거치는 것보단 김채민이 더 간편하기도 했고.
말뚝에 로프를 단단히 묶었다. 몇 번을 잡아당겨 풀리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다른 말뚝에도 같은 작업을 했다. 말뚝과 로프를 본 홍석영은 내가 할 작업이 무엇인지 알았는지 옆에서 묵묵히 내 일을 도왔다.
“위치는?”
“대략적으로만 압니다.”
“어두워서 가늠하기가 어려운데.”
헌터가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한다. 마법사도 아닌데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재주는 없다.
…김채민을 데려올 걸 그랬나? 하지만 똑같이 생긴 검이 왜 이 던전에 있는지 변명할 거리가 마땅찮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태경을 데리고 여길 오려고 했던 것도 생각이 짧았다.
“그래서 또 따로 준비했죠.”
“준비성이 아주 철저하고 좋아. 근데 이 아빠한테도 미리 말해 준다면 더 좋을 텐데.”
“서프라이즈?”
심드렁하게 대꾸한 다음 길게 자른 종이를 로프에 묶었다. 한쪽을 길게 뺐더니 당산나무에 걸어 놓는 금줄 같은 모습이 되었다. 어쩔 수 없지. 혀를 한 번 차고, 마력펜을 쥐고서 종이에 룬을 그렸다.
종이에 그린 룬은 금방 망가지는 편이니 이렇게 즉석에서 그릴 수밖에 없다. 내가 이렇게 하나하나 다 손을 쓰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완성된 룬이 빛나기 시작했다. 홍석영은 눈을 반짝 빛내며 내가 그린 룬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펜이 있으면 나도 룬을 그릴 수 있는 거지?”
“하나 드려요?”
“남는 게 있어? …아니, 나중에. 어차피 당분간 혼자 던전 들어갈 일은 없어서.”
남 앞에서는 쓸 수 없는 물건이지.
홍석영과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으며 룬을 그렸다. 대낮처럼 환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수십 개의 빛나는 룬을 매단 로프는 제법 쓸 만한 광원이 되었다.
“악어는?”
“저 눈은 장식입니다.”
“좋아.”
홍석영은 말뚝을 들고 손안에서 무게를 가늠하다가 별다른 준비 동작 없이 반대편을 향해 던졌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로프가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전구처럼 빛났다.
남겨진(1)
룬을 매달고 있는 로프가 공중에서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누나에게서 들은 건 왼쪽 아래쯤에 있는 작은 구멍이라는 정보뿐, 구체적으로 7시 방향, 툭 튀어나온 돌 아래라고는 듣지 못했다. 이미 공략을 끝낸 던전에 대해 누가 그렇게 자세한 설명을 하겠냐고.
게다가 누나는 더러운 악어 새끼들에 대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주야장천 떠들어 댔으면서도 정작 검을 주웠던 작은 공간에 대해서는 그랬었지, 하고 두루뭉술하게 말했었다.
그걸 의심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알지 못하고 순진하게 살아왔는지도.
“흠!”
홍석영은 가볍게 어깨를 돌렸다.
다행히 가져온 말뚝과 로프가 바닥나기 전 누나가 말한 그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시야를 확보할 셈으로 마구잡이로 말뚝을 던져 로프를 고정했다. 하지만 도중부터 어딜 노려야 하는지 알고 난 뒤에는 쉬웠다.
“좋아! 건너가 볼까.”
홍석영은 한 번 더 말뚝이 빠지지 않는지 확인했다. 반대편 벽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말뚝이 난잡하게 박혀 있다. 로프를 고정하기 위한 것들이라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서로 얽히지 않게 주의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고정한 말뚝은 벽과 천장이 아니라 바닥에 나란히 박혀 있다. 말뚝에 묶인 로프는 반대편의 말뚝과 연결되어 있다. 홍석영은 어깨너비로 나란히 있는 로프를 밟고 선 다음, 손쉽게 균형을 잡고서 달려갔다.
그 아래로 거대 악어가 우글거리는 진흙… 배설물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목숨을 건 기예이다. 여러 의미로.
로프가 튼튼하다고는 해도 성인 남성 두 명이 올라가도 괜찮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나는 홍석영이 건너가는 걸 얌전히 기다렸다.
다행히 홍석영은 로프에서 떨어지는 일 없이 건너편에 무사히 도착했다. 말뚝이 제대로 박혀 있는지 확인한 홍석영이 크게 손을 흔들었다. 이번엔 내가 로프에 올라섰다.
“이런 것도 재밌네.”
내가 도착하자 홍석영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매번 빠르게 공략하고 나오다 보니 이렇게 돌아 다녀보는 건 처음이야. 의외로 재밌는데.”
“그렇습니까?”
“룬도 쓸모가 많고. 잘만 쓰면 마법사 없이도 던전에 들어가도 되겠어.”
나는 희미하게 빛을 내는 룬을 보았다.
노아 미셀 때문에 실컷 준비해 놓고 아직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룬이 생각났다. 그것도 처리하긴 해야지.
“…뭐, 몬스터가 강하고 핵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다면 이런 잔재주도 써먹으면 편합니다.”
“잔재주가 아니라 현명한 거지. 무작정 몬스터에게 돌격하는 게 똑똑한 건가? 최대한 피해가 적게, 핵을 파괴할 수만 있다면 그게 베스트야.”
홍석영은 내 어깨를 툭 치곤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도 한 박자 늦게 홍석영을 따라갔다.
“이쪽도 꽤 깊어 보이는군.”
안은 여전히 어둡다. 길은 하나. 모퉁이를 돌자 로프에서 비치던 빛마저 사라졌다. 진흙에 던져 버렸던 형광봉 대신 다른 형광봉을 꺼냈다.
끊임없이 진흙이 흘러내리던 반대편과는 달리 이곳은 메말랐다. 벽에서도, 바닥에서도 물기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걸을 때마다 뿌연 먼지가 생길 정도였다.
“얼마나 들어가야 하나?”
“거기까진 저도 잘….”
누나는 비밀의 방에 숨겨진 희귀한 보물을 찾아냈다고만 했지, 그 비밀의 방이 이런 통로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홍석영은 형광봉으로 벽을 이리저리 비추며 물었다.
“그런데 여기 몬스터는 정말 악어뿐인가?”
“네.”
“그래? 이상한데.”
“…뭐가요?”
“여길 보게.”
나는 홍석영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긁힌 듯한 자국이 있다. 아까 반대편에서 보았던 자국과 비슷하다.
“여기 몬스터가 악어뿐이라면 이런 게 있어서는 안 되지.”
“……!”
그건… 맞는 말이다.
이 던전에 대해서는 악어와 악취에 대해 투덜거리던 누나만 떠오른다. 차라리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진작 눈치챘을 텐데, 악어가 너무 기억에 남았던 탓일 수도 있다.
평소라면 절대 놓치지 않았을 단서였는데. 젠장.
홍석영은 손끝으로 벽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높이가… 딱 허리춤인데. 발톱이라고 치면 인간형일지도 모르겠군. 악어뿐이라고? 확실해?”
“그렇게 들었는데….”
눈이 찌푸려졌다.
누나에게서 이곳에서 악어 말고 다른 몬스터를 보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누나가 쓴 던전 보고서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다른 몬스터와 전투가 있었다면 그걸 생략하진 못했을 텐데. 누나 혼자 공략한 던전도 아니었다고.
…일부러 누락한 건가?
“최근에 난 흔적은 아닌 것 같다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새끼 악어일 가능성은요?”
“반대편이라면 모를까 이쪽은 아닐 거야. 진흙을 뒹구는 몬스터인데 여길 걸어 다녔으면 바닥에 묻기라도 했을 테니까.”
“…그렇겠군요.”
“게다가 그러면 이렇게….”
홍석영은 손가락을 세워 벽을 긁는 시늉을 했다.
“남기진 못했을 거네. 저놈들이 이족 보행을 하는 게 아니라면 악어의 신체 구조상 위아래로 긁혔을 거야.”
벽에 남아 있는 자국은 가로로 나 있다.
“하지만 다른 몬스터가 있다고 해도 여길 사용한 지는 오래되었을 거네.”
“먼지 때문입니까?”
홍석영은 마스크를 살짝 내려서 코를 킁킁거렸다.
“퀴퀴한 냄새가 나잖나. 뭔가가 여길 계속 쓰고 있다면 이런 냄새는 나지 않을걸.”
“으음….”
“오히려 이 냄새는….”
“……?”
홍석영은 말을 멈췄다.
“왜요?”
“아니….”
말하는 내용이야 진지했지만 목소리는 다소 가벼웠던 홍석영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뭐야. 왜 이래. 불안하게.
“왜 그럽니까?”
“…….”
홍석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님?”
“…그게. 아니, 이건 확인해 봐야 알겠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홍석영이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말이 걸어가는 거지, 종국에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나는 허둥거리며 홍석영의 뒤를 따랐다.
“도대체 뭐냐고요!”
몬스터가 있을 수 있으니 크게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몬스터가 있다면 이렇게 움직이면 안 되는데. 진짜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
한참을 그렇게 뛰어가던 홍석영은 뛰기 시작했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췄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다.
“선생님?”
“하.”
홍석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 던전 공략했던 게 지은이라고 했지?”
“네.”
“여기까지 들어온 건? 혼자 공략하진 않았을 거잖아. 지은이네 공략대도 여길 왔었나?”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홍석영이 왜 그런 걸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서 기억을 더듬었다.
“아이템 소유권으로 분쟁이 있었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여기는 혼자 오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이런 구조의 던전에서 공략대가 따로 움직인다고? 그러진 않았을 텐데.”
“어….”
“그 지은이, 여기 한 번만 들어왔나?”
“…….”
뭐지? 그저 당혹스러운 마음뿐이다.
누나가… 아니, 누나가 던전 공략에 대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데. 그럼 뭐지? 뭐야?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딱히 내가 잘못한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잘못한 기분이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입 안이 퍼석해졌다. 문득 마스크를 뚫고 코 안쪽을 자극하는 냄새를 느꼈다. 톡 쏘는 듯, 바늘로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
홍석영이 말한 먼지 냄새와는 다른….
“내리지 마.”
마스크를 내려서 제대로 냄새를 맡으려던 찰나, 홍석영이 내 팔을 붙잡았다.
“…왜 그럽니까?”
“이게. 하…. 그러니까.”
홍석영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아저씨답지 않게 망설인다. 눈썹이 꿈틀거리며 아래로 처지는 것이 보인다.
“왜 그러냐고요.”
“그러니까….”
“뭔데요.”
홍석영은 결국 포기했다.
홍석영은 내가 안쪽을 볼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며 손에 든 형광봉을 던졌다.
톡. 도르륵.
형광봉은 바닥에서 몇 번 튀더니 멈췄다.
막다른 길은 아니다. 길은 계속해서 있다. 모퉁이. 살짝 통로가 넓어졌을 뿐이다.
어지럽게 흔들리며 벽과 천장을 비추던 형광봉의 불빛이 고정되니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보였다.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형광봉이 부딪친 신발. 검은색 군화. 왼발. 신발 끈이 꽉 조여져 있다.
입고 있는 옷은 특수대원들 같은 검은색 옷. 주머니가 많은 조끼를 입고 있다. 으레 이런 옷차림이면 가슴에 소속 마크를 달고 있을 텐데 그저 일관된 검은색 차림새였다.
축 늘어진 손은 반쯤 썩어 가고 있다. 의식하고 나자 방금 맡았던 냄새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홍석영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맨살이 보이는 건 한 손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고 있다. 하지만 다른 피부도 썩고 있는 손과 똑같은 상태일 것이다.
“희재 군.”
홍석영이 나를 부른다.
“희재야.”
나는 덜덜 떨며 시체의 얼굴을 보았다.
삐뚜름한 까마귀 가면이 웃고 있다.
* * *
당연하지만 이걸 두고 돌아 나갈 순 없다.
“체구가 작은데요.”
익숙한 까마귀 가면에 당황했지만, 크게 심호흡하고 진정하고 나면 어둠 속에 가려졌던 사실들이 눈이 들어온다.
“옷이 두툼해서 한눈에 알아보기가 힘들지만… 여자 아닙니까?”
“난 우리 아들이 너무 씩씩해서 좋아.”
“아, 시끄러워요.”
홍석영은 형광봉을 하나 더 꺼내다가 나를 보았다.
“이건 너무 어두운데. 좀 더 밝은 거 없나?”
“제가 챙겨 왔을 것 같습니까?”
“응.”
챙겨 왔다.
어쩐지 진 기분이 들었지만 없다고 거짓말할 이유는 없었다. 손전등을 꺼내서 홍석영에게 주었다.
“아까 이걸 꺼내지 그랬나.”
“이건 방수가 아니거든요.”
나는 엉거주춤 홍석영의 뒤에 서서 시체를 살폈다.
“…몬스터라면 그럭저럭 분석하는 시늉이라도 내 볼 텐데, 사람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 죽은 건 본 적 있어?”
“저 헌터입니다만.”
아무 피해 없는 공략은 존재하지 않는다. 홍석영은 어깨 너머로 나를 흘깃 돌아보았다.
“그냥 물어봤네.”
홍석영은 다시 시신에 집중했다. 이쪽은 너무 익숙해 보여서 물을 수가 없었다.
“…뭐 합니까?”
“신분을 알 수 있는 걸 찾아 봐야 하지 않겠나.”
홍석영은 조끼 주머니를 뒤지며 뻔뻔하게 말했다.
“저 가면은 방주 물건이라니까요. 그런 놈이 어쩌다 여기서 죽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보면 모릅니까? 제대로 된 신원이 없어요.”
“아. 지갑이군.”
“…….”
“보자, 뭐라도 있으려나.”
홍석영은 손전등을 입에 물고 지갑을 열었다. 당연하지만 신분증을 비롯한 신용 카드는 한 정도 없었다. 만 원권 지폐만 두어 장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홍석영은 그 지폐 사이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으득.
“뭡니까?”
손전등에서 수상쩍은 소리가 났다. 황급히 홍석영을 보자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이 사이에 갇힌 손전등이 위태로운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홍 선생님?”
홍석영은 그대로 지갑을 떨어뜨렸다.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이 아저씨가 이렇게 동요하는 건 처음 보았다.
“선생님!”
홍석영은 그대로 가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말리기도 전, 가면이 시신의 얼굴에서 툭 떨어졌다.
툭.
홍석영의 입에서 손전등도 떨어졌다.
손전등이 굴러가며 그림자가 우리 위로 내려앉았다. 홍석영은 거의 들리지 않는, 슬픔과 분노가 한데 뒤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유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