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85
‘율리오?’
벽 너머로 느껴지는 진한 현기에 율리오 대주교가 찾아온 것인가 생각했지만, 율리오의 육중한 몸에 비해 발소리가 너무 가벼웠다.
똑똑똑.
“테온, 들어가도 될까요?”
‘……!’
놀랍게도 문밖에서 들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우레오였다. 풍기는 현기만큼이나 깊이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들어와.”
내 허락에 아우레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평소처럼 단정한 예복을 입었고, 헐렁한 오른쪽 소매는 곱게 접어 은실로 동여 두었다.
아우레오의 눈빛은 심유하고, 호흡은 정제되어 있었다. 땅을 딛는 걸음이 한층 단단해졌고, 전신에서 은은한 광채가 흐르는 듯했다.
‘기대 이상이군.’
무공으로 비교하긴 어렵지만, 한눈에 보아도 대단한 심득을 얻은 것 같았다. 성직자들이 말하는 성인(聖人)의 풍모가 어떤 것인지 몸으로 보여 주는 듯했다.
고승 같은 덕 향에 아우레오의 앳된 얼굴이 더해지니, 그 부조화가 신비감을 일으켰다.
“테온이 대교구에 오셨다는 이야기는 진작에 들었는데, 생각을 정리하느라 마중이 늦었네요. 명상에 깊이 빠져 있었거든요.”
“괜찮다. 오히려 내가 사과할 일이지. 깨달음의 변곡점에 서 있는 너를 불러낸 셈이니.”
“하하, 그런 말은 말아요. 어차피 마무리하던 중이었어요.”
나는 아우레오와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함께 뒤뜰로 나갔다. 초겨울 아침 공기가 쌀쌀했지만, 그만큼 상쾌하기도 했다.
“어제 연회에서 술을 엄청나게 드셨다고 들었어요.”
“아, 그거? 큭큭, 안주가 좋으니 술이 술술 넘어가더라고.”
전날 연회에서 나는 성기사들과 술 내기를 벌였고, 혼자서 성기사단 하나를 무찔렀다. 모처럼 유쾌한 연회였다.
그렇게 아우레오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한참을 걸었다. 몇 주 동안 쌓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걸렸다.
“중부에 얼마나 머무를 생각이세요?”
“오늘 떠난다. 애초에 중부에 온 건 나후타야를 넘겨주기 위해서였으니, 볼일은 진작에 끝났어. 단지, 네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갈 생각으로 기다렸던 거야.”
“그래도 먼 길을 오셨는데, 고작 하루만 쉬고 곧장 떠난다니……. 테온은 참 신기해요. 평소 언행을 보면 먹고 마시는 걸 즐기는 한량 같은데, 정작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고 부지런하지요.”
“원래 사람이 늙으면 입으로는 죽는다는 소리를 버릇처럼 하고, 엉덩이는 점점 가벼워지는 거야.”
“하지만 테온은 별로 늙지도 않았잖아요.”
그때 부제 한 명이 안뜰로 들어왔다. 그는 나한테 용건이 있는 듯, 망설임 없이 걸어와 소식을 전했다.
“크로우 백작 각하, 대주교 예하께서 각하를 찾으십니다.”
“율리오가? 알겠다. 아우레오와 함께 가겠다.”
“저, 대주교 예하께서 각하를 독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우레오 사제님께는 송구하지만, 각하 혼자서 가셔야 합니다.”
“……?”
율리오가 나를 따로 부를 이유가 있을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고개만 갸웃했다.
하지만 아우레오는 이유를 알겠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대주교 예하께서 테온에게 성물을 주시려나 봐요.”
“아, 그걸 잊고 있었군.”
아우레오의 말을 듣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중부 대교구에서는 오비데우스를 처단한 포상으로 주요 공적자 세 명에게 성물을 하사하기로 했다.
테오도르와 아우레오는 진작에 받았고, 나만 아직 받지 못한 상태였다.
‘예기치 않게 현경에 오르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전 같으면 특별한 공능을 가진 성물이 탐났겠지만, 이미 이 세계에 적수가 없는 몸이 되었다.
그래도 신병이기는 받아 두어 나쁠 게 없으니, 대주교의 부름은 반가운 일이었다.
“하사받은 성물이 무엇인지는 테온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해요. 그러니 수여식도 혼자 가서 하는 거죠.”
“그렇군. 다녀올 테니 잠시 기다려라. 남부로 출발하기 전에 밥이나 한 끼 같이 먹자.”
“알겠어요.”
나는 아우레오와 헤어져 대주교가 있는 예배당으로 향했다.
* * *
예배당에 도착하니, 대주교 율리오가 사제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넉살 좋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속은 좀 괜찮은가? 듣자 하니, 어제 연회에서 각하가 포도주를 통째로 들고 마셨다던데?”
“그 정도는 거뜬하지. 중부의 술은 너무 연해서, 나에게는 물과 다를 바가 없다.”
“껄껄, 그 무거운 참나무 술통을 양손으로 들고 마시다니, 내가 봉마의 전당에 다녀오느라 진귀한 구경거리를 놓쳤군.”
귀한 선물을 받는 자리이니, 율리오의 시시콜콜한 농담에도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었다. 오늘의 율리오는 딱히 특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후타야의 봉인은 별 탈 없이 끝났나?”
“그렇다네. 교활한 푸른 용은 한 점 빛도 없는 지하에서 영겁의 세월을 보내게 될 거야. 지상에 강림한 악마도 가둬 두는 강력한 봉인이니, 자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탈출할 수 없지.”
율리오의 목소리에서 확신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의 사제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율리오가 봉마의 전당으로 가는 동안 그를 호위하던 전투 사제들이었다.
“대주교가 나를 따로 부르기에 내심 성물을 받는 줄 알았는데, 사제들이 함께 있는 걸 보니 그건 아닌가 보군?”
“아니, 정확히 맞혔네. 사제들은 이만 물러가시게.”
대주교의 말에 전투 사제들이 성호를 긋고 말없이 예배당을 나갔다.
예배당의 모든 문이 닫히고, 율리오는 뒤로 돌아 천천히 예단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근엄한 목소리로 성물 수여식을 시작했다. 앞뒤 설명도 없이 곧장 시작된 수여식이었다.
“용살기사 테온 크로우, 세속의 백작이자 교회의 성기사인 그대여, 그대에게 줄 성물을 오랫동안 고민했네.”
나는 율리오의 뒤를 따라 걷다가, 예단 앞에서 멈춰 섰다. 예단 위에는 율리오가, 아래에는 내가 서 있었다.
“그대는 앞으로도 교회에 헌신하고, 성경을 따르며, 빛을 찬양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한다.”
“그대의 신앙이 비할 데 없이 굳건하니, 아도나이 교회의 대주교, 성 율리오 3세의 이름으로 성물을 하사하노라.”
율리오가 엄숙하게 말하며 옆에 놓인 목함을 열었다. 그가 목함에서 꺼낸 것은 한 팔 길이의 붉은 비단 끈이었다.
“이 성물의 이름은 용기의 리본. 그대의 용기가 꺾이지 않는 이상, 이 리본은 절대 끊어지지 않으리니.”
‘호오, 저 얇은 끈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고?’
내심 감탄하고 있는데, 율리오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용기의 리본은 단지 질기기만 한 게 아니었다.
“용기의 리본에는 신의 엄격함이 담겨 있으니, 삿된 존재와 마주하면 무한히 늘어나 대상을 속박할지어다.”
파괴가 불가능한 데다 자동으로 적을 포박하는 오랏줄이라니, 당장 떠오르는 활용 방법만 해도 무궁무진했다.
다만, 용기의 리본이 작동하는 ‘삿된 존재’의 기준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게 단점이었다.
“용기를 잃는 순간 성물의 효용도 잃게 될 테니, 그대는 이 점을 명심하고 성물에 입을 맞추라.”
율리오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용기의 리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천천히 날아온 용기의 리본은 내 얼굴 앞에서 멈췄고, 나는 고민 없이 리본에 입을 맞췄다.
* * *
성물 수여식이 끝나고, 율리오는 곧장 예단에서 내려왔다. 그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각하, 듣자 하니 남부로 돌아간다고 하던데?”
“그래, 아우레오와 점심 식사를 마치면 곧장 떠날 생각이야. 남부에 볼일이 좀 남았거든.”
“푸른 용도 생포한 마당에 각하가 남부에 무슨 볼일이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급한 게 아니라면 중부에 좀 더 머물다가 동방 원정군을 이끌어 줄 수 없겠나?”
“……뭐라고?”
동방 원정군.
대주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폭탄 발언을 늘어놓았다.
“들은 대로일세. 대교구에서는 동방의 검은 용을 척살하기 위해 원정군을 조직하고 있어. 존재를 몰랐다면 모를까, 지상에 용이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지.”
“그냥 두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용을 생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생포할 필요는 없네. 대교구는 검은 용을 척살할 생각이야.”
“검은 용을 죽이면 나후타야가 최후의 용이 된다. 최후의 용이 어떤 힘을 되찾는지는 예하도 알고 있을 텐데?”
“나후타야는 이미 봉마의 전당에 갇혔으니, 그녀가 최후의 용이 되어 옛 권능을 되찾아도 소용이 없을 거야. 용이 아니라 악마라도 봉마의 전당에서 탈출할 수는 없으니까.”
율리오의 자신감이 대단했다. 그는 진심으로 검은 용을 죽일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제아무리 악마도 잡아 두는 봉마의 전당이라지만, 절대 시전의 용언마법과 충돌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위험한 생각을 하는군. 검은 용은 동방에 처박혀 있으니, 뜨거운 사막에서 혼자 떵떵거리며 살게 놔둬. 만에 하나라도 최후의 용이 된 나후타야가 봉마의 전당을 탈출하면, 중부는 폐허가 될 거다.”
“허허, 천하의 크로우 각하가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은가?”
“…….”
율리오 대주교의 말투가 묘하게 거슬렸다. 슬쩍슬쩍 사람 심기를 긁는 꼴을 보니, 방금과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새끼 진짜 뭐야? 교회의 대주교란 놈이 양의분심결이라도 익혔나?’
율리오의 행동은 말로만 들었던 다중 인격 같았다.
무림을 대표하는 검파 중 하나인 무당파에는 사람의 마음을 쪼개는 심법이 있는데, 혹시 율리오도 비슷한 기술을 익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별도의 기술을 익힌 게 아니라, 선천적인 특징일지도 모르겠군. 문득 떠오른 가설이지만 가능성은 있어 보이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율리오의 머릿속에는 여러 의식이 혼재되어 있다.’
그럴싸한 가설을 세우자, 율리오의 상태를 좀 더 정확히 관찰할 수 있었다.
율리오는 뚫어지게 쳐다보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헛기침하며 눈을 피했다.
“크흠, 각하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봉마의 전당은 강력한 곳이네. 각하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지. 그리고 정 불안하면 각하가 직접 나서서 검은 용을 생포하면 될 일 아닌가?”
“생포라…….”
내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율리오가 매력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사파에서 온 용사
대주교의 제안
“검은 용을 생포하는 건 어떤가? 나는 가능하면 척살하길 바라지만, 각하의 반대가 확고하니 한발 물러서겠네.”
율리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도 구미가 당겼다. 생포라면 진지하게 고려해 볼 만한 제안이었다.
‘나후타야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지만, 검은 용이 신격을 얻을 방법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
아스칸다르는 애초부터 동방인들의 신앙을 이용해 신격을 얻을 계획이었고, 그 계획은 지금 이 순간에도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동방은 이미 하나의 제국으로 결집한 상태고, 제국은 아스칸다르가 창시한 동방회교를 국교로 삼고 있다.
동방회교는 검은 용을 신으로 추앙하고, 대륙에 검은 용은 아스칸다르가 유일하니, 결국 동방 전체가 아스칸다르를 섬기는 셈이다.
‘아스칸다르는 이미 동방인의 추앙을 한 몸에 받고 있어.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신격을 획득할지도 몰라.’
예측 불가능한 시점에 강적이 등장하는 걸 예방하려면, 당장 동방회교를 분열시키는 공작에 착수해야 한다. 그들의 신앙을 사분오열 찢어 놓아야 내가 오덴세섬에서 마음 놓고 지낼 수 있을 터다.
‘하지만 동방회교는 아스칸다르가 직접 통치하고 있지. 그놈이 스스로 칼리파의 자리에 앉아 구심점 역할을 하는 이상, 간자를 심어 분열시키는 건 어려울 거야.’
게다가 중부 대교구는 유독 이간계나 간첩계에 재주가 없었다. 정면으로 부딪쳐 쓸어버리는 방식을 정의롭다고 여기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무력으로 불안 요소를 없애야 한다는 소리인데……. 봉마의 전당이라는 게 꽤 믿을 만한 모양이니, 검은 용도 이참에 잡아다 봉인해 버리면…….’
봉마의 전당이라는 강력한 감옥이 있는데, 굳이 아스칸다르가 동방에서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둘 이유가 없었다.
아스칸다르를 죽이면 나후타야가 탈출할 우려가 있다지만, 생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이모저모 따져 보니, 먼저 손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