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84
사파에서 온 용사
짧은 꿈
사부의 대답에 웃고, 주변을 둘러보고 또 한 번 웃었다.
낯익은 풍경이 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그 시절에 함께 살던 초옥이구려. 나 기분 좋으라고 일부러 이렇게 꾸며 놓으셨소?”
“…….”
“오랜만에 본다고 이런 준비까지 다 하시고…… 안 어울리는 짓을 하시는구려. 나한테 뭐 부탁할 일이라도 있소? 무슨 용무가 있길래 이런 거창한 준비까지 해 가면서 옛 제자의 꿈에 찾아온 게요?”
“부탁은 무슨. 이 사부는 무공이 하늘 끝에 닿은 사람인데, 너 같은 애송이한테 무슨 부탁이 있겠느냐?”
사부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춘서를 뒤적거리며 답했다. 괜히 손동작이 빨라지는 걸 보니, 내심 민망한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도 꿈을 통해 찾아왔던 걸 알고 있소. 사실 한동안 까먹고 있었는데, 요한나란 계집이 기억을 끄집어내 주었지.”
“그래, 너 말 잘했다. 그때 내가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아느냐? 중요한 사실을 일러 주려 도력을 뭉텅이로 써서 꿈에 현신했는데, 잠에서 깨자마자 내가 해 준 말을 전부 잊어버리는 꼴이라니…….”
사부가 투덜거렸지만, 도력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산봉우리가 조금씩 운해에 잠겨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없군.’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부가 내 꿈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나는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빠르게 물었다.
“혹시 등선하셨소?”
“그래.”
“무슨 재주로 하셨소?”
“무인이니 당연히 무공으로 등선했지.”
사부가 대단한 고수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무공으로 등선을 할 정도였다니……. 예상은 했지만, 본인 입으로 들으니 더 놀라웠다.
어쩌면 내가 평생 쓸 운을 사부를 만나는 데 다 써 버려서 인생이 자꾸 꼬이는 건 아닐까 싶었다.
“오늘은 왜 오셨소? 선계에서 뚱땅거리다가, 문득 하나뿐인 제자가 잘 사는지 궁금해서 찾아오신 게요?”
“뚱땅거리긴 누가 뚱땅거린단 말이냐? 선계 군기가 얼마나 센 줄 아느냐? 천외천의 늙은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나 같은 하바리는 말만 신선이지, 대감댁 종놈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이야.”
“하, 하바리……?”
사부의 언행이 천박한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신선이 되어서도 말하는 본새가 저 모양이라니……. 어찌 보면 참 대단한 줏대였다.
“도력 높은 신선은 허구한 날 구름 위에 앉아서 바둑이나 두고, 나 같은 새내기 신선은 백날천날 천도(天桃)밭에서 잡초나 뽑고 있고……. 에이, 씨부럴…….”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선계의 이야기였지만, 어쩐지 사부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선계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것 같아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 제자 꿈에 푸념하러 오셨소? 쉰 소리 그만하고 왜 왔는지나 이야기해 주시오. 보아하니 내 꿈에 한번 찾아오는 게 사부에게도 보통 일이 아닌 모양인데.”
“그래, 시간이 없으니 용건부터 이야기하마.”
사부는 그렇게 말하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
“크흠, 미, 미안해서 왔다, 이놈아.”
“……?”
사부가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을까?
사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일곱 살 때 눈밭에서 홀로 얼어 죽었을 팔자였다.
사부가 아니었다면 강호의 고수로 이름을 떨치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 낯선 세계에서 칼 솜씨 하나로 떵떵거리며 귀족 행세를 하지도 못했을 터다.
“두 가지를 사과하러 왔다.”
“두 가지나?”
“그래, 첫째는……. 어린 널 두고 갑자기 떠나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
분명 그랬다.
사부는 나를 거두고 일 년 정도 열과 성을 다해 무공을 전수하더니, 어느 날 아침 사라져 버렸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린 것이다.
“말 나온 김에 이유나 좀 압시다. 갑자기 어딜 갔던 거요?”
“그때 등선을 했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깨달음이 찾아왔지. 돈오(頓悟)였어.”
“아…….”
참선 중 돈오해서 등선을 해 버렸다면, 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은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사부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탓에 내가 무슨 개고생을 했는지 아시오? 그런데 정작 사부는 돈오해서 선계에 올라가 있었다고? 지금 누구 약 올리시오?”
사부도 내 심정을 다 안다는 듯 자기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내가 떠난 뒤, 태오 네가 온갖 고생을 다 한 건 잘 알고 있다. 선계에서 너의 삶을 지켜보며 눈물을 훔친 날도 적지 않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는 지금도 눈물을 참고 있다, 흑흑.”
“거짓부렁을 하려거든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하쇼.”
“사실 눈물을 훔친 적은 없고, 입맛이 썼던 적은 많다. 이건 진짜야.”
“…….”
사부가 떠난 뒤, 나는 몇 달이나 텅 빈 초옥에서 사부를 기다렸다. 그리고 굶어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홀로 하산을 결심했다.
산에서 내려오던 중 산적과 마주쳐 와호채에 끌려갔고, 그때부터 내 삶에 핏물이 들기 시작했다.
“근데 솔직히 네 잘못도 있잖아. 산적을 만났을 때 네가 성질만 좀 죽였어도 그렇게 심한 꼴은 안 당했을 텐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오?”
“…….”
이번에는 사부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부가 떠난 이유가 등선이었다고 하니 마음이 편했다. 내심 기쁨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하산하던 그날, 아홉 살 먹은 능태오는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수천 번 되뇌었으니까.
-사부는 날 버린 게 아니야. 급히 떠나야 할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날의 독백은 공허한 자기 위로가 아니었다. 비록 수십 년이 걸렸지만, 사부는 끝내 나를 찾아와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늦었지만 등선 축하하오.”
“뭐 좋은 거라고 축하까지야……. 하계에서 천하제일인 행세나 하다가 명이 다하면 깔끔하게 뒈지는 게 제일 상팔자다. 신선놀음은 할 게 못 돼.”
신선이 되었어도 체통이 없기는 매한가지인 사부였다.
“떠난 건 떠난 거고, 두 번째 사과할 건 뭐요? 이건 도무지 짐작이 안 되는데.”
“아, 두 번째는…….”
이어지는 사부의 말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널 이세계로 던져 버린 걸 사과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하려 한다.”
“……방금 사부가 날 여기로 보냈다고 했소?”
“그래, 내가 널 이곳으로 보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콕 집어서 여기로 보낸 건 아니지. 어디든 중원이 아닌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했다.”
사부가 춘서를 덮고 상체를 일으켰다.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정좌한 그의 뒷모습에서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등선 이후, 나는 너를 계속 지켜봤다. 신선이라고 모든 걸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지상에 간섭하기에는 나의 도력(道力)이 부족했고, 나는 너의 시련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안 끼어들길 잘하셨소. 내 인생이니 내가 알아서 헤쳐 나가는 것이지, 웬 구름 위의 신선이 끼어들어 도와주면 사는 재미가 없지 않겠소? 앞으로도 그냥 지켜보기만 하시오.”
퉁명스러운 대답에 사부가 웃었다.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 낸 웃음이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큰 시련은 큰 성장으로 돌아오더구나. 하지만 네가 죽는 모습만큼은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사부가 내 삶에 개입한 건, 내가 흡성대법의 비급을 빼돌려 도망치던 순간이었다.
당시 나는 패도련주의 흉계에 속아 치명상을 입었고, 절벽에서 추락하는 와중에 백종일의 지풍에 맞아 숨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그날 사부는 그때까지 쌓은 도력을 몽땅 사용했고, 나를 이세계로 날려 버린 것이었다.
‘그때 나를 감쌌던 밝은 빛은 사부의 도력이었군. 어쩐지, 알게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다 싶었지.’
말을 하는 동안 사부는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춘서를 품에 넣고, 엉덩이를 툭툭 터는 모습이 곧 떠날 사람 같았다.
“너를 이계로 보내서라도 일단 목숨을 살려 두고, 최대한 빨리 찾아내 중원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한데, 막상 일을 저지르고 보니 도력을 다시 쌓는 게 쉽지 않더구나. 산 사람을 이계로 보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어.”
“그래도 괜찮은 곳으로 잘 골라서 보내 주셨구려. 난 이곳이 썩 마음에 드오.”
“내가 골라서 보내 준 게 아니라니까? 난 너를 차원의 틈새로 집어 던졌을 뿐이다. 네가 많고 많은 차원 중에 하필 이곳으로 온 건, 아도나이란 놈이 너를 냉큼 끌어당겼기 때문이야.”
“아도나이가 나를……?”
생판 남인 아도나이가 무슨 목적으로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을까?
설명을 더 듣고 싶었지만, 사부는 이미 흐릿한 신기루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떠나려고 하시오?”
“그래,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만남 뒤에는 헤어짐이 있는 법이지.”
“찾아와 주어 고맙소. 그나저나 사람을 차원의 틈새에 던져 놓고, 용케 다시 찾았구려. 사이비 같아 보이긴 해도, 신선은 신선인가 보오.”
“껄껄, 사실 못 찾을 뻔했다. 미리 ‘표식’을 남겨 두어 다행이었지.”
그러면서 사부는 손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 초옥 기둥에 운철묵검이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었다.
“태오야, 네 검을 소중히 간직해라. 그 검은 내가 너를 찾기 위해 안배한 것이다. 너와 나의 연결 고리라고나 할까?”
“운철묵검이…… 사부의 안배였다고?”
“그 흑검은 내가 선계의 흑도목(黑桃木)을 깎아 만든 것이다. 나는 나뭇가지를 깎아 목검을 만들고, 새로운 운명을 부여했지. 능태오의 검이 될 운명을 말이야. 아무리 초짜 신선이라도, 목검 한 자루의 운명 정도는 좌지우지할 수 있거든.”
사부가 씩 웃었다. 뒤돌아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보지 않아도 우쭐하는 표정을 예상할 수 있었다.
“네가 검을 지니고 다니는 한, 나는 너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이승과 저승을 통틀어 그 어떤 차원에 있더라도 말이지. 흑도목에서는 흑도향(黑桃香)이라는 독특한 향기가 나거든. 하계의 인간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운철묵검은 사부의 마지막 안배였다. 그가 나를 찾아오기 위해 준비해 둔 차원의 이정표였다.
“만년한철보다 단단한 운철묵검이 사실은 목검이었다니, 깜짝 놀랐소.”
어쩐지 낯이 붉어지는 기분에 괜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사부는 다 안다는 듯 웃더니, 작별을 고했다.
“이제 네가 죽거나, 등선을 하지 않는 이상 다시 만나긴 어려울 게다. 이 사부는 도력을 너무 끌어다 써서, 최소한 오백 년은 꼼짝없이 선계의 허드렛일을 해야 할 것 같거든. 하지만 언제나 너를 지켜보마.”
사부가 진중하게 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이내 장난기를 숨기지 못하고 농담을 덧붙였다.
“내가 보고 싶어도 웬만하면 등선은 하지 말아라. 선계에 와도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차라리 평범하게 늙어 죽고, 저승의 문턱에서 다시 만나자.”
사부의 몸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산봉우리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어와 사부의 몸을 흩어 놓았다.
“태오야, 잊지 마라. 너의 선한 본성을 아는 사람, 너를 믿는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걸…….”
사부의 마지막 말은 메아리처럼 허공을 맴돌았다.
한밤의 꿈은 그렇게 끝났다.
참으로 짧은 꿈이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성장한 아우레오
꿈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꿈속에서 나눈 대화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내가 왜 이 거짓말 같은 세계로 오게 되었는지, 운철묵검이 부러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사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나를 두고 떠난 것에 미안함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 늙은 제자 걱정일랑 접어 두고, 천외천에서 허드렛일이나 열심히 하시오. 남이야 술을 퍼먹든, 왈패 짓을 하든 신경 끄시고.”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입꼬리는 씰룩씰룩 올라갔다.
기분 좋게 침상에서 내려와 의관을 갖추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