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388
388화 희생 2
* * *
“이상하다고 여긴 적 없어?”
아무리 마르한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해도 그가 슈발체베인가에 자리잡은 과정은 순탄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누군가 설계해 준 것처럼 권력체계와 정치역학의 빈틈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이브가 새삼스럽다는 듯 턱을 긁적였다.
“하긴 자기 보신을 최우선시하는 인물이 이런 레이스에 참가한다고 했을 때부터 미심쩍긴 했습니다.”
방금 전에 호기롭게 지껄인 것도 그러했다. 뒷배가 없다면 그리 자신 있게 나설 리 없었다.
피아가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자연스레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그러면 배후는 누구일까요?”
“아마도 가주님을 시기한 이가 등을 떠민 걸 테죠.”
별거 아니라는 듯 이브가 대답했다.
호른도 그녀의 의견에 찬성하는 바였다.
“다만 그게 누구냐는 건데 말이야.”
위치가 위치인 만큼 적이 많았던 카인이었다. 그의 부재를 틈타 수작을 부릴 만한 사람은 슈발체베인 성을 빙 두르고도 남았다.
하지만 함부로 행동에 옮길 수 없는 사안이기도 했다. 사실 관계가 밝혀지면 그 여파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니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얻는 것만큼 잃는 것도 많은 판이었다. 그럼에도 나섰다는 건 그러한 페널티를 무시할 정도로 원한이 깊다는 뜻일 터.
누가 되었든 조용히 넘어가긴 글렀다.
“일단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어.”
* * *
야심한 시각, 침대맡에 앉은 마르한이 조심스레 품속을 뒤적거렸다. 그의 손에 잡힌 건 탁구공만 한 단말기.
헬 게이트 이후로는 소지하고 있는 것조차 금지된 신기였다. 들킨다면 실수라는 말로는 끝나지 않았다. 하나, 마르한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모든 걸 무시할 수 있는 권력자가 있었으니까.
“삼황자 저하.”
예정된 시간에 맞춰 신기를 조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어떻게 되었지? 일은 예정대로 흘러가고 있나?”
“믿고 맡겨주신 덕분에 차질은 없습니다.”
1년 전, 하이렌의 제안을 받았을 때만 해도 마르한의 머릿속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슈발체베인가가 제 손아귀에 떨어질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긴가민가 잣대를 재던 시절은 지나갔다.
인생 최대의 도박이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나같이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을 텐데?”
“비록 제가 후보일지라도 상하 관계는 확실합니다.”
호른이나 오리올의 존재는 분명 거슬렸다. 그들이야말로 슈발체베인가를 끌고 가는 쌍두마차였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가신이라는 태생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레서 왕국은 전통적인 계급 사회의 표본.
가문을 승계할 때 우선시되는 건 능력도 인맥도 아닌 혈통이었다. 제아무리 세라가 여왕이라고 해도 함부로 손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복병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알게 모르게 베리타 제국의 원조를 받고 있는 마르한으로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궁금하긴 하군요.”
“무엇이?”
“삼황자 저하께서 이리 나서는 이유가요. 엄밀히 말하자면 저하께 득이 되는 건 없지 않습니까? 애당초 타나 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다간 경을 칠 텐데요.”
비록 자작이지만, 대륙의 정세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애당초 타나가 카인을 아낀다는 소문은 세간에도 떠돌아다녔다.
“그래서 말할 텐가?”
“그럴 리가요.”
양심선언 하는 것보다 입 다물고 공작이 되는 게 몇 배는 더 이득이었다.
이 날만을 위해 달려왔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1년 동안 슬금슬금 간을 보기까지 했다. 카인이 무사히 귀환이라도 한다면 곤욕을 치를 게 불 보듯 뻔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돌다리도 이만큼 두드려 보았으면 되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잊지 마라, 우리는 한배를 탔다는 걸.”
“항상 명심하겠습니다.”
* * *
시작은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
자의식을 잃은 무의식 집합체는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태초를 구상했다.
그것은 귀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
태동을 향한 발악이 본디 이루어질 리 없는 기적을 일으켰다.
흩어졌던 육신이 재생되고, 감각이 부상한다.
따사로운 햇살과 차가운 땅바닥.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흙냄새.
귓가에 울리는 바람 소리.
오감으로 세상을 인지한 순간, 정신이 맑게 깨어났다.
“……?”
허리춤에 닿을 정도로 길게 자란 머리칼을 뒤로 넘긴 카인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분명 반물질 축퇴로와 함께 산화했건만, 눈앞에 비치는 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어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모든 게 어색했다.
팔을 휘젓는 것도, 무게 중심을 잡는 것도. 심지어 숨을 쉬는 것조차도.
그래도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저승이 아닌 이승이었으니까.
“살아난 건가.”
극에 달한 정련정심은 육신이 사멸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했다. 그리고 기어코 날아가 버린 육신을 재구성했다.
카인은 자신이 무엇을 한 건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원자 단위의 의식 제어.’
무의식을 총괄하는 탈아와 미시 세계를 관조하는 극진의 영향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가히 신의 영역에 도달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부활하는 데 만만치 않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으니까.
관건은 얼마나 흘렀냐는 것.
세대가 바뀔 정도로 지체되었다면 낭패였다. 가주도 바뀌고, 동료들도 뿔뿔이 흩어졌을 테니까.
곧바로 칼라만티아 협곡을 빠져나온 카인은 게일 왕국 근방에 있는 숲속에 들어갔다.
뭐, 걸칠 게 없나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카인은 맨몸이었다. 이대로 도심지로 들어가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
등을 돌린 카인의 눈에 비친 건 검치호를 닮아 송곳니가 인상적인 마수였다.
필시 현지인에게는 위협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괴물일 터.
하지만 카인에게는 오늘 하루 일용할 양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십검, 창상.
눈 깜빡할 사이에 양단된 마수는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가까이 다가간 카인은 아무렇게나 가죽을 벗겨, 몸에 걸쳤다. 크기가 커서 그런지 언뜻 코트처럼 보이기도 했다.
만족스럽게 웃은 그는 마지막으로 녀석의 힘줄을 끊어 머리카락을 묶는 데 사용했다.
채비는 다 갖추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이게 뭡니까?”
“자네도 눈이 있을 텐데. 현실을 외면하지 말게. 보는 그대로지 않나.”
이기죽거리는 마르한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본 호른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가 손에 쥔 건 명단이었다. 마르한을 지지한다는 서명이 담긴.
슈발체베인가의 방계 일동이 협조한 거야 상정 내였지만 세 후작가까지 합세한 건 예상 밖이었다.
아마 모종의 거래가 오갔으리라.
물론 슈발체베인가 내부의 일에 다른 이들이 참견할 명분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마르한이라는 창구를 통한다면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월권이라고 느껴지는 이 문서에 효력이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그렇다, 라고 밝힐 수밖에 없는 게 작금의 현실.
이번만큼은 세라도 막기 어려울 게 자명했다.
그녀의 권위는 카인의 영향력과 비례한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카인이 부재중인 이상, 세라가 오롯이 서길 바라는 건 무리한 요청이었다. 귀족들이 사정없이 몰아붙이면 그녀라도 한 발자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으니까.
‘유언장이라도 쓰게 했어야 했나.’
카인을 떠올린 호른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최악의 경우엔 세라에게 작위를 하사받아 슈발체베인가를 다스려야 할 수도 있었다. 결국 공작위가 탐이 났던 거냐는 오명까지 뒤집어쓰면서.
“솔직히 이렇게나 많은 서명을 받는 건 반장 선거에 나가는 기분이라 썩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공작위를 물려받으려면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나?”
의기양양한 어투에는 이런데도 인정하지 않겠냐는 속뜻이 담겨져 있었다.
외통수였다.
기껏 잡은 실마리를 풀기도 전에 마르한이 비수를 집어 들었다. 조금만 더 조사하면 배후의 실루엣이 보일 것 같은데 그 조금의 시간이 모자랐다.
문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
기사단이라도 지나가는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 확실해졌다. 점점 커졌던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집무실로 몰려오고 있었다.
덜컥.
아차 하는 사이에 문이 열렸다.
이내 요근래 가장 밝게 웃고 있는 피아의 얼굴이 보였다. 늘 울상이었던 아리아조차 이때만큼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이게 웬 소란인가 싶어 입을 열려던 호른은 두 눈을 부릅떴다. 두 사람을 따라 들어오는 이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게 이해가 됐던 것이다.
“가주님.”
마수의 가죽을 뒤집어쓴 카인이 모두의 시선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짙은 피냄새가 역할 만도 하건만, 지금은 오히려 그게 그의 존재감을 부각시켜 주었다.
그건 마르한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너무나 효과적이어서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이다.
여태껏 준비한 공작이 어그러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그를 흔들어 놓았다.
“자, 자네는…….”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소란이 있었다지?”
카인이 상석에 다가가자 호른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그 뒤편에 섰다.
“너무 늦었잖아.”
“이것도 빠르게 온 거다.”
심드렁하게 답하며 앉은 카인이 턱을 괴었다. 그리고 마르한을 향해 고갯짓했다.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묻겠다. 네 뒤에 누가 있지?”
다 알아보고 왔다는 듯한 어투였지만 마르한은 당황하지 않았다. 무언가 알고 있었다면 호른이 진즉에 반격했을 테니.
이제 막 도착한 카인이 내막을 자세히 알고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일단 잡아떼기로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슈발체베인가가 주축을 잃고 갈팡질팡하길래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 주기 위해 온 거라네.”
“순전히 네 의지라는 건가.”
“그래, 그렇고말고. 설마 내가 누군가의 나팔수라 생각하는 건가? 심히 불쾌하군.”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도리어 화를 내니 의심이 드는군.”
카인과 눈이 마주친 마르한은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애써 무시했다.
“뭐, 이제라도 슈발체베인가가 바로 서면 된 거 아니겠나. 아쉽지만 나는 이만 물러나겠네.”
“그런가. 어쩔 수 없지. 싫다는 사람, 억지로 붙잡아둘 수도 없고 말이야.”
마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니, 이 자리만 모면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만의 착각이었다.
처음부터 카인은 마르한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억울하지 않겠나?”
“무엇이 말인가?”
“혼자 죽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