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57
외전 207화. 일원만화(一元萬化) (7)
탁자를 두들기는 손가락은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손톱. 나이 든 사람의 손임이 분명하나, 세월의 거친 풍상을 잘 피해 갔는지 젊은이의 그것처럼 깨끗했다. 밤의 어둠이 몸 대부분을 가렸기 때문에 더더욱 정갈한 손가락에 눈길이 갔다.
연등은 생각했다. 백수를 코앞에 둔 세상 모든 늙은이를 모아도 저토록 깨끗한 손을 가진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저렇게 희고 깨끗한 손을 지닌 자가 과거 최악의 살인마라 불렸다는 사실이 묘한 흥미를 유발했다.
연등 역시 젊은 시절, 저 하얀 손의 살인마가 구사하는 살벌한 무공을 본 적이 있었다. 정파 무림인들의 심장을 뽑고 목을 뜯어 버리던 저 손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뛰어난 재능으로 승승장구하던 연등에게 있어 최초로 공포라는 감정을 알려 준 손.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결국 그 공포에 몸을 맡기게 된 스스로의 처지가 기괴한 희극처럼 느껴졌다.
“이보게, 자소.”
하얀 손의 주인은 그 손처럼 맑고 깊은 목소리를 지녔다.
연등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우리, 얼마나 되었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연등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래되었지요. 얼추 오십 년은 되지 않았습니까?”
“오십 년이라…… 참 오래도 되었군. 지천명을 코앞에 둔 때였나. 그때는 나도 늙어 가는구나,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였지. 가늠할 수 없는 열정과 패기가, 적어도 그 시절에는 존재했어.”
“저도 그렇습니다.”
탁자를 두들기던 검지가 멈추었다.
“자소.”
“말씀하십시오.”
“열정과 패기를 상실한 인형이 죽지 못해 살면서, 이 기괴한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알고 있나.”
“…….”
“나는 더 이상 속세의 다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네.”
거짓말.
연등은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물론 그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귀다툼을 벌이며 뜨거운 열정을 불사르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일세. 오직 열정과 패기만으로 살아온 고목(枯木)은, 죽을 이유가 없어 살아갈 뿐인 늙은이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대할 수밖에 없네.”
“…….”
“하지만 자네는 젊어. 나처럼 공허와 허무를 느끼려면 족히 이십 년은 더 남았네. 한데 어찌하여 광혈이나 백골에게 가지 않고 내게 몸을 의탁하였나?”
연등이 고개를 저었다.
“저 역시 속세의 아귀다툼에 끼어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재미있는 말이야. 마치 스스로를 제삼자처럼 여기는군. 나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일 수밖에 없는데도.”
“…….”
“장난감 하나가 길을 벗어났더군.”
“예.”
너무나도 단조로운 대답이었다. 별일이 아니라는 듯, 한가로움마저 느껴졌다.
잠시 침묵했던 그림자 속 노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광혈이 나와 비슷한 시도를 하다가 실패했음을 아네. 오히려 조직의 크기만 따지자면야 압도적이랄 수 있지만, 바로 그래서 실패할 수밖에 없어.”
“나아가, 광혈신마는 선배님처럼 ‘관전’이 아닌 권력을 위해 조직을 꾸렸습니다. 조직을 만든 동기부터가 불순하니 실패를 아니 맛볼 수가 없지요.”
“자네는 어떤가?”
“…….”
“자네도 권력을 원하나?”
연등이 미소를 지었다. 자소대마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미소였다.
“글쎄요. 어떨까요.”
“허허.”
쏟아지는 웃음소리가 어둠을 뒤흔들었다.
“오십여 년 전, 자네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르는군. 그때의 자네는 여물지 못한 독사였지. 마치 나와 비슷했네.”
“그랬습니까.”
“그 독사가 이무기가 되어 버렸으니, 이제는 나조차 자네의 속내를 읽기가 힘들군.”
“선배님께서 원하신다면 다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저를 똑바로 보지 않으시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보이나?”
“그렇습니다.”
검지가 다시 탁자에서 노닐었다.
“길을 벗어난 그 아이, 꽤 오랫동안 가르치지 않았나?”
“햇수로 오 년이 됩니다.”
“대단한 재능이야. 자네의 폭혈마공은 구결과 법문만 안다고 체득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손수 가르쳤다지만, 오 년 만에 그만한 경지에 올랐다면 가히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할 만하네.”
“향후 오 년 안에 상위 마장급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십 년 수련으로 상위 마장급이라…… 내게 그만한 재능이 있었다면, 인생을 조금 더 재미있게 살아왔을 터인데.”
“혹은 빛을 보지 못하고 이르게 거름이 되셨을 수도 있지요.”
“언제나 그렇듯, 자네의 혀는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군.”
“선배님은 뛰어난 재능과 혁혁한 공로, 그리고 누구보다 흉맹한 심성으로 위대한 마왕이 되셨습니다. 재능을 아쉬워할 필요가 없는 분께서 앓는 소리를 하시니, 저라고 기분이 좋겠습니까?”
“허허, 자네 기분이 안 좋을 이유는 또 뭔가.”
“삶을 부정하는 분께 몸을 의탁한 제 신세가 뭐가 되겠습니까.”
“부정이 아니라 아쉬움이라네. 하지만 아쉬워해 봤자 손에 쥘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후회는 없네. 자네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후우웅.
창가로 들어오는 바람이 그림자에 몸을 숨긴 노인의 머리카락을 희롱했다.
적당한 습기와 서늘함, 좋은 바람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노인이 미소 짓는 것을 연등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처럼 놀라운 재능을 지닌 아이라도, 이번에 새로 들어온 녀석에 비하면 새 발의 피로군.”
“그렇습니다.”
“이번에 들인 그 아이, 무명무서를 얼마나 익혔나?”
“다 익혔습니다.”
순간 그림자가 출렁였다.
“벌써?”
“그렇습니다.”
“그래도 일 년은 걸릴 줄 알았거늘…… 정말 대단하군. 너무 압도적이야. 그만한 재능이라면 시간의 부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구먼.”
“세상 어떤 싸움도 재능이 전부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공의 재능을 넘어서는 그릇이겠지요.”
“그 또한 맞는 말이지.”
스르륵.
하얀 손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길 잃은 그 장난감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고 있나?”
“내전 중앙 주루 인근으로 향했습니다.”
“녀석이 뛰쳐나간 이유는 아시는가.”
“회초리 하나 꺾지 못했던 어린아이가 어느새 바위도 공깃돌처럼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힘이 없던 자가 힘을 갖게 되면, 불붙은 욕망 하나에 이성을 쉬이 내주기 마련이지요.”
“같은 울타리 안에서 사냥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는 것은, 또 다른 무명무서의 후계를 만나러 갔다는 뜻이군.”
“그랬을 겁니다.”
“신교 내외부의 모든 지식을 가르치긴 했어도, 즉각적으로 들어오는 정보까지 전달하진 않은 것으로 아는데.”
“제가 알려 주었습니다. 자극 좀 받으라고.”
“역시 그랬군.”
연등은 노인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서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낙담도, 아쉬움도 없었다.
잠시의 침묵이 어둠과 손잡고 방 안을 희롱했다.
그렇게 일각이 지난 후.
“뛰쳐나간 장난감, 내일까지 오지 않으면 부숴 놓게나.”
오 년이나 공들여 가르친 녀석을 부수라고 하는데도 연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작정이었습니다.”
* * *
폭음과 함께 흙먼지와 나뭇잎 잔해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후방으로 몸을 빼면서, 이천상은 생각했다.
‘어떻게 만압금마장을?’
그의 눈이 여인을 좇았다.
젊은 여인이었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어려 보였다.
여인이 한 번 더 왼손을 휘둘렀다.
훅!
순간 이천상은 몸이 보이지 않는 쇠사슬로 결박당하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그것은 착각이되 착각이 아니었다. 어서 빨리 이 압력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실제로 신체의 자유를 잃어버릴 것이다.
이천상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양손을 휘둘렀다. 끓어오르는 마기가 양손에 집약되어, 만압금마장을 뿜었다.
쿠구궁!
주위의 땅이 움푹 팼다. 동시에 그는 몸을 결박한 무형의 쇠사슬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훅!
땅을 박차 하늘 높이 날아오른 그는, 이내 약간의 난감함을 느꼈다.
여인이 자신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만압금마장이 아니었다. 장검으로 자신을 겨누며 돌진하는데, 속도도 대단했지만 위압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이 무공은?!’
익숙한 무공이다. 아니, 익숙하다기보다는 분명 기억에 있었다.
퍼엉!
허공에 장력을 터트려 방향을 전환한 이천상이 다시 대지를 향해 몸을 쏘았다.
퍼퍼퍼펑!
여인의 검첨에서 솟구친 검붉은 검기가 이천상이 있던 허공에 강맹한 폭발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신비로운 무공이었다. 질량을 가진 물체에 닿지 않았는데도 검기가 알아서 폭발을 일으켰다. 압력도 상당해서, 마치 육중한 추를 달고 떨어지는 듯 온몸이 무거웠다.
쿠웅!
온몸을 웅크리며 땅을 구른 이천상은 순간 등 뒤에서 은밀한 살기를 느꼈다. 어느새 땅에 내려선 여인이 손을 뻗어 이천상의 등을 공격했다.
회전으로 회피를 감행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찌이익!
여인의 손톱에 등 상부 의복이 찢어졌다.
‘빠르다.’
공격과 이동, 모든 부분에 있어서 자신보다 빨랐다. 굳이 살기를 숨기진 않았기에 충분한 대응이 가능하나, 그 대응은 회피에 국한되어 있었다.
파라라락!
물러나는 이천상, 따라붙는 여인.
‘…….’
짧은 순간, 이천상은 여인의 두 눈에 떠오른 강렬한 신광(神光)을 볼 수 있었다.
안광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살기가 대단한 게 아니라 이룬 경지가 대단했고 품은 마기가 강렬했다. 살의를 품지 않은 공격조차도 어떤 살기 넘치는 공격보다 사나웠다.
화아아악!
여인의 몸에서 검붉은 마기가 넘실거렸다.
‘……!’
그제야 이천상은 여인의 무공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폭혈마공!’
자소대마의 독문무공이다.
비급을 읽고 구결을 해석했던 적이 있다. 그 기억은 이천상의 머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처음 여인의 검법을 보고 익숙함은 느꼈으나 어떤 무공인지 상세하게 떠올리지 못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해석만 했을 뿐, 저 마공을 이용해 검법을 구사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그렇다면 저 검은 폭혈마검(爆血魔劍)이다.’
검기에 적중한 부위가 베이면, 침투한 공력이 혈관을 폭발시킨다.
천마신교 안에서도 악랄함으로는 손에 꼽힌다는 검법이었다. 일격만 허용해도 목숨이 위험하다. 목이나 장기가 아닌 말단 부위라도 침투경을 제거하지 않으면 쏟아져 들어온 마기가 연쇄 폭발을 일으킨다.
‘일격도 허용해선 안 된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만압금마장을 어떻게 구사할 줄 아는 건지에 대한 의문도 접어 둬야 했다.
‘당하지 않는 게 아니야. 제압해야 한다.’
우우우웅!
이천상의 마기가 출렁이며 순식간에 사지로 뻗어 나갔다.
훅!
물러나던 그의 몸이 순식간에 여인 뒤 허공에서 나타났다.
금강마권으로 목덜미를 공격하려던 이천상은, 순간 여인의 몸 전체에 둘러쳐진 무형의 갑옷을 볼 수 있었다.
콰앙!
주먹을 내리친 이천상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전진을 멈춘 여인이 날아간 이천상을 보며 투덜거렸다.
“뭐야? 이 정도밖에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