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Demon Instructor RAW novel - Chapter 203
훈수 두는 천마님 202편
“……당신의 자리를요?”
[그래.]
“신이 되라는 말입니까?”
[그렇다.]
박현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몰랐다.
자기 대신에 신을 하라니.
신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 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니 제안한 존재가 우주 최고 신이었다.
최고 신이란 표현도 무색하다.
애초에 우주에 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목소리의 주인뿐이었다.
“애초에 저 같은 평범한 인간이…….”
[네가 평범하다고? 그리고 인간? 너는 이미 종을 초월한 존재다. 굳이 종족을 따지자면 순환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겠지.]
“그건 종족이 아니라, 별명? 그런 거잖습니까.”
[누가 그러디?]
누가 그러고를 떠나서 그냥 들을 때부터 칭호 혹은 멋진 별명 정도로 들렸다.
[싫어?] “싫은 걸 떠나서…….”박현수는 찝찝했지만, 그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거래 같은 거, 기가 막히게 하시네요.”
[조물주 아닌가.]
웃음기 가득한 신의 목소리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말 제가 당신의 자리를 잇는다면, 모두를 되살려 주는 겁니까?”
[네 생각은 전부 알고 있으니,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신이라.”
일국의 대통령이나, 왕도 아니고 신이라니.
지구의 영웅이라는 타이틀도 매우 부담스러웠던 박현수였다.
[지루하니까. 너희 기준으론 억겁의 시간을 존재해 왔다. 좀 지쳤구나.] “……제가 신이 된다면 얼마나 긴 시간을 머물러야 합니까?”
[그건 모르겠구나. 근데 막상 신 위에 앉게 된다면 그 권능에 중독될 수도 있다. 그때가 되면 돌려 달라고 해도 네가 싫다고 할 수 있어.]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런 부담스러운 자리, 애초에 취향이 아니거든요.”
[그건 모르는 거다. 겪어 보지 않았으니까.]
그건 맞는 말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신으로 지낼지는 모르겠지만, 전지전능을 맛본다면 그곳에 중독된다고 이상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안 좋은 쪽으로 뒤틀려 우주를 망치지 않는다면 다행이었다.
“맡겠습니다.”
박현수가 대답했다.
선택권은 없다.
소중한 사람들을, 그리고 허무하게 죽어간 자들을 부활시킬 수 있다면 뭔들 못하리.
그 순간, 빛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손이 하늘에서 나타났다.
엄청난 위압감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거대한 손에서 따뜻함과 포근함이 느껴졌다.
박현수는 눈을 감았다.
신이란 게 된다.
무지의 영역이었기에 두려웠지만, 그로 인해 많은 걸 지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신의 손이 박현수를 덮었다.
그리고 휘황찬란한 광채가 무의 공간을 휩쓸었다.
* * *
5년이 흘렀다.
킹의 군세 침공 이후 온갖 외계 세력이 지구를 노렸다.
지구란 별이 생명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잔뜩 소문난 탓이었다.
덕분에 뉴 월드는 꾸준히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이 있었으니.
“멜타족이라고 했던가? 귀찮은 녀석들.”
박현태는 챙 모자를 벗으며 상공에 떠 있는 거대 비행체를 보았다.
5년 전, 지구를 공격해 온 군세의 우주선과 비교하면 턱도 없이 작은 크기였지만, 각성자가 없던 시절의 지구였다면 허무하게 침략당했을 것이다.
“학센 씨. 들리세요?”
-들린다.
“어떻게 할까요? 슬슬 배고파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이건 놀이가 아니다, 애송아.
“놀이는 아니지만, 그렇게 심각한 일도 아니죠.”
-그것도 그렇군.
심드렁한 박현태의 대답에 학센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현재의 지구엔 두 명의 초월자가 존재했다.
바로 박현태와 학센이었다.
초월자는 필멸자를 초월하여 막대한 힘을 손에 넣은 존재를 일컬었는데, 행성에 군집하는 종족 중 초월자를 보유한 곳은 극히 드물었다.
보통 차원 단위로 넘어갔을 때 그곳의 지배자가 초월자인 경우가 많았다.
한데 지구 같은 작은 행성에 초월자가 둘이나 있는 건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선공하시죠.”
-안 그래도.
저 멀리서 거대한 은색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힘은 그대로 우주선을 관통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상공을 가득 채웠다.
가만히 놔두면 지상에까지 큰 피해를 끼칠 게 분명해 보였다.
그때 박현태가 움직였다.
그는 가볍게 들어 올린 손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미친 듯이 팽창해 나가던 폭발이 일순간 멈추었다.
그리고 반 시계 방향으로 다시 돌리자,
쿠우우우우우-
폭발이 역행을 시작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팔을 더 이상 못 비틀 정도가 될 때까지 회전했다.
폭발이 한 점으로 응축되는 순간,
딱!
손가락을 튕기자 거대한 우주선과 그곳에서 비롯한 폭발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전 가 보겠습니다.”
-괴물 같은 놈.
“당신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네요.”
박현태는 통신을 마치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간이 순식간에 바뀌더니, 꽤 커다란 갈비찜 식당 앞으로 이동되었다.
모자에 묻은 먼지를 털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 아, 당신이야?”
“아, 당신이야? 요즘 당신 사랑이 너무 식은 것 같지 않아?”
“헛소리 그만하고. 솔이 좀 데리고 와 줘.”
“……네.”
차윤은 시무룩한 박현태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올해로 4년이었다.
귀엽고 예쁜 3살짜리 딸도 있었다.
박현수가 사라지고 꽤 긴 시간이 흘렀다.
그만큼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다녀올게.”
박현태는 차윤에게 손을 흔들었다.
차윤은 그를 보며 히죽 웃더니, 손을 입술에 대고 쪽~ 하고 뽀뽀를 날려 주었다.
“……나도.”
그에 화답하듯 그가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 보이곤 식당을 나섰다.
“귀여운 사람.”
“사장님네는 정말 금실이 좋아 보이네요.”
“어맛! 깜짝 놀랐잖니!”
차윤은 뒤에 갑자기 나타난 알바생을 보며 가슴을 쓸었다.
“설거지는 다 했어?”
“다 했으니까 이곳에 있겠죠.”
“말대답은. 그냥 했다고 하면 되지.”
“했어요.”
“에휴.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니. 조금 쉬고 있어. 손님들 오려면 조금 여유 있으니까.”
“넵!”
알바생은 휴식하라는 말에 신나게 뒷문으로 달려갔다.
“꽁초는 깔끔하게 치워야 한다!”
“걱정 마세요!”
“걱정 말기는.”
차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허리를 폈다.
남편이 딸을 데리고 오려면 1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능력을 사용하면 10초도 안 걸리겠지만, 하원하는 딸과 놀아 주는 걸 워낙 좋아하는 남편이었다.
“나도 좀 쉬자.”
그녀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5월 7일이다.
내일이면 어버이날.
“카네이션 준비해야겠네.”
5년 전 어느 날, 세상에 기적이 일어났다.
차윤은 그날 벌어진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도 생생하고, 죽는 그 순간까지 그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엄마, 아빠는 뭐 하시려나?”
약 10년 전 벌어진 포탈 임팩트로 인해 그녀의 부모님은 목숨을 잃었다.
그녀와 두 동생은 그날부로 고아가 된 것이다.
힘겨운 나날이었다.
두 동생을 위해서 매일매일 돈을 벌어야 했다.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부모님에게 기대고 싶은 매일이었지만, 아무도 안 계셨기 때문에 기댈 수 없었다.
특히 강동구에서 벌어졌던 참사는 두 동생마저 앗아가려고 했다.
만약 박현수가 아니었다면 차윤은 완전히 혼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동생들은 살아남았고, 5년 전 기적이 벌어진 그 날 분명 돌아가셨던 부모님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건 박현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이야. 형이 내려 준 기적이야.’
오열하며 말하던 남편의 얼굴이 지금도 아른거렸다.
차윤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이 지나고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그래, 아가. 무슨 일이니?
“그냥 시간 좀 나서 전화 드렸어요. 헤헤.”
-바쁠 텐데 전화는 무슨 전화니. 너도 참. 그래도 고맙구나. 아들놈보단 역시 며느리가 최고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네!
“식사는 하셨어요?”
-이제 먹으려고 하는데, 가게는 좀 어떻니?
“곧 저녁 시간이니까 손님들이 몰릴 시간이에요.”
-고생이 많다.
통화 상대는 박현수, 박현태의 어머니이자, 차윤에게 있어선 시어머니였다.
“고생은요.”
-주말에 오니?
“네. 헤헤.”
-오랜만에 힘을 좀 써 봐야겠네. 알겠다! 꼭 와야 한다?
“현태 씨 등에 업혀서 한걸음에 갈게요!”
-자가용이 따로 없다니까. 그럼 끊으마. 몸조심하면서 일하고.
“주말에 뵐게요!”
차윤은 짧은 통화를 마치고 뿌듯하게 웃었다.
그녀의 엄마에게 먼저 연락해도 됐겠지만, 차윤은 꼭 시어머니에게 먼저 연락했다.
딱히 처가를 편하게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그건 박현수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현수 오빠.”
5년 전 우주로 떠난 박현수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구는 우주에 진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지만, 너무 먼 우주까지는 아직 무리였다.
가능하다고 해도 위치가 어딘지를 모르는데 무작정 우주로 출발했다가는 미아가 되기 십상이었다.
물론, 뉴 월드가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들은 박현수와 카본, 아이작의 힘의 주파수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실패하긴 했지만 말이다.
식당 밖으로 나가 보았다.
5월의 저녁 하늘은 매우 맑았다.
그녀가 한창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번쩍-
무언가가 하늘에서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 * *
하유락은 안경을 고쳐 쓰며 앞에 가득 쌓인 문서들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그녀는 5년이란 시간 동안 매일매일 일을 했다.
그냥 일만 했다.
일을 안 하면 매일 생각이 나서 종일, 밥을 먹으면서 일을 했다.
그녀가 일을 안 할 때는 잘 때뿐이었다.
잠도 오래 자지 못했다.
항상 꿈에 그가 나와서 슬픔에 눈물을 흘리면 눈을 떴다.
다행인 건 그녀가 초월자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라는 점이었다.
그 덕분에 매일 초췌한 삶을 살아도 무리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흠. 경제 성장세가 좀 더디네.”
대한민국은 작년부터 무역을 본격적으로 재개했지만, 아직 회복된 국가가 그리 많지 않다 보니 눈에 띄는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건설업에서 많은 나라가 대한민국을 찾는 추세였다.
“머리 아파.”
하유락은 안경을 벗으며 푹신한 의자에 몸을 뉘었다.
조그만 글자를 계속 읽다 보니 아무리 그녀라도 눈알이 뽑힐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질러 마사지를 했다.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가 아직도 많다.
대충 마사지를 끝낸 그녀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일 앉아 있었더니 치마가 구깃구깃 꼴 보기 싫었다.
하유락은 한숨을 쉬며 창가로 걸어갔다.
통유리로 된 탓에 서울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많이 좋아졌다.”
5년이란 시간 동안 그녀를 비롯한 한국 협회는 신정부와 협력하여 대한민국을 고쳐 나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울은 과거의 영광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기술적인 부분은 옛날보다 나은 것도 많았다.
대한민국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잃은 게 많아서 성장이란 표현이 조금 그렇지만, 이곳은 과거의 대한민국과는 다르다.
이 광경을 하루라도 빨리 녀석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박현수. 언제 오는 거야.”
그녀는 창문에 손을 올리며 슬픈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윽-!”
엄청난 빛이 석양을 뚫고 뿜어져 나왔다.
하유락은 갑작스러운 빛에 드래곤 모드를 발동시키려고 했다.
“뭐 해요?”
그리고 뒤에서 아주 익숙하고, 그립고, 또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유락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커진 눈은 격렬하게 흔들리고, 두 손은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꿈틀거렸다.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환청?”
한순간 허무함이 몰려왔다.
이렇게 선명한 환청을 들을 정도로 많이 피폐해졌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환청은 무슨.”
그녀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곳엔 익숙한 남자가, 아주 그리운 남자가 웃고 있었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박현수가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녀왔어.”
하유락은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어이쿠!”
박현수는 격하게 안겨 오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며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다.
“왜 이렇게……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하유락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제야 돌아온 자신의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그녀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맨날…… 맨날 나만…….”
그녀는 그의 옷깃을 꽉 붙잡고 주저앉듯 고개를 가슴에 파묻었다.
“미안해. 그리고…….”
박현수는 씁쓸한 얼굴로, 한편으론 기분 좋은 얼굴로 그녀를 꽉 안아 주었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
하유락이 오열하는 소리가 한국 협회 전체에 울려 퍼졌다.
* * *
“재밌었지? 아빠 좋지?”
“히히히! 아빠 좋아요!”
박현태는 4살짜리 딸의 손을 잡고 기분 좋게 걷고 있었다.
하원 이후 근처 호수에 있는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았다.
그건 두 부녀가 하루를 마무리 짓는 방법이었다.
그의 딸 박수린은 아빠가 사준 사탕을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근데 근데 이짜나요. 엄마가요. 요거 머그면 안 된대써요.”
“괜찮아. 아빠가 엄마 이겨.”
“아빠 엄마한테 맨날맨날 혼나자나요.”
“……아빠가 봐주는 거야.”
“진짜?”
“그럼 진짜!”
“진짜진짜?”
“그럼 진짜진짜.”
“사탕 머거도 돼요?”
“당연하지!”
어차피 박수린은 박현태의 딸이었기에 초월자의 DNA가 잔뜩 이어져 있었다.
사탕 좀 먹는다고 이빨이 썩거나 할 리 없었다.
“오늘 집 가서 아빠가 갈비 해 줄게.”
“갈비!”
딸의 눈이 반짝였다.
엄마인 차윤은 늦게까지 식당에서 일하기 때문에 저녁은 항상 두 사람만 먹었다.
해서 식사를 차리는 건 웬만하면 박현태가 했다.
“엄마가 우리 수린이 주라고 갈비 재어 놨어.”
“엄마 최고!”
“아빠는?”
“아빠도 최고!”
박수린이 방실방실 웃으며 쌍따봉을 날렸다.
“아빠도 우리 딸 최고!”
“우와!”
박현태는 자신의 딸을 높이 들어 올려 목말을 태웠다.
그게 정말 즐거운지 머리 위에서 꺄르륵 웃는 소리가 들렸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많은 게 바뀌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피폐한 삶을 살았다.
몇 년 만에 만난 친형은 1년 만에 다시 자취를 감췄다.
그때 느꼈던 슬픔과 후회는 스스로를 자책하게 했다.
몇 날 며칠을 폐인처럼 지냈다.
차윤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게 차윤 덕분이었다.
그녀가 먼저 결혼하자고 해 줘서 암울하던 인생에 한 떨기 꽃이 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태어났을 땐 한 떨기에 불과했던 꽃이 어느새 꽃밭을 이루었다.
부모님이 되살아나신 것도 그 무렵이었다.
‘형.’
그것은 형이 만들어 내준 기적이었다.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그의 형제였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형에게 나의 딸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나 이렇게 잘살고 있었다고.
요즘 정말 행복하다고.
그러니 어서 돌아와 달라고.
“아빠 아빠!”
그때였다.
박수린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빠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우리 딸, 아빠 왜?”
“저기요.”
아이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박현태는 천천히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었다.
“아빠?”
박수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빠 머리를 꽉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아이는 아빠가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저기 앞에서 아빠와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웃고 있는 아저씨에게서 친숙함을 느낄 뿐이다.
그때, 조용히 있던 박현태가 입을 열었다.
“형.”
“딸이야?”
“……응.”
박현태는 애써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았다.
딸 앞이다.
눈물을 흘리는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런 동생을 보면서 박현수는 말했다.
“우리 현태 다 컸구나.”
박현태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형!”
그는 자신의 딸을 품에 안고 자신의 형에게 달려갔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친형이 돌아왔다.
박현수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딸이 아주 귀엽다.”
“나랑 윤이의 딸이니까.”
박현태는 딸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딸에게 말했다.
“수린아 인사드려.”
“……인사?”
“큰삼촌이야.”
박수린은 아빠와 비슷하지만, 왠지 엄청나게 커 보이는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그런 아이를 위해 박현수는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반갑다.”
그리고 박현수가 먼저 인사를 하니, 박수린이 그를 따라 인사했다.
“안뇽하세요. 박수린이에요!”
“수린. 예쁜 이름이네.”
정말이지 예쁜 이름이지 않은가.
동생의 혈육.
박현수는 기분 좋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삼촌 박현수야.”
“삼촌…… 우와.”
“수린이 항상 삼촌 보고 싶다고 했지?”
박수린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삼촌에 관한 얘기만 들었다.
지구를 구한 영웅, 그리고 이젠 우주를 구하러 간 영웅.
아직 어린 그녀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고 귀에 딱지가 생길 만큼 아빠랑 엄마가 말해 주었다.
“이제 계속 볼 거야.”
“우와!”
박수린이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며 기뻐했다.
박현태가 딸의 등을 슬쩍 밀었다.
아이는 총총걸음으로 삼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앞에 섰을 때 잠깐 움찔했지만, 곧 배시시 웃으며 삼촌의 품에 안겼다.
“가볍다.”
“이제 4살이니까.”
“그렇구나. 4살. 4살이구나.”
박현수는 그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솜털 같은 아이는 그게 기분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두 형제는 아주아주 오랜만에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집으로.
에필로그 1
“현수야!”
“현수 이놈아!”
“다녀왔습니다.”
박현수는 자신의 품에 안겨 오는 부모님을 꼭 안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무려 10년 만에 뵙는 부모님이었다.
평생을 못 볼 줄 알았는데, 신의 기적으로 그들을 이렇게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대체 어디 있다가 온 거니. 밥은 먹고 다닌 거야?”
“연락이라도 한 통 해 주지 그랬어! 우리도 그렇고, 모두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죄송해요.”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사과뿐이었다.
부모는 자신들의 아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건강하면 됐어.”
“일단 들어와라. 할 얘기가 아주 많구나.”
“얘기는 나중에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어딜 가는 거니?”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손을 꼭 붙잡으며 물었다.
아버지도 또 어딜 가냐면서 가지 말라고 말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멀리 가는 건 아니에요. 아니, 멀다면 멀 수 있는데 금방 다녀올 거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보다 두 분 잠깐만 앉으세요.”
박현수는 두 사람을 반강제로 앉힌 다음 두 보 떨어진 거리에 섰다.
그리고 웃으며,
“다녀왔습니다.”
부모님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런 자식을 보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에필로그 2
“괜찮냐?”
“……응.”
카본은 커다란 묘비 앞에서 이제야 눈물을 그친 셀리를 보았다.
혼돈의 마왕에게 살해당한 그녀의 아버지 필리포스의 묘비였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부활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부활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부활하지 않았나,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했다.
필리포스는 자신의 딸을 위해서 부활하지 않은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딸을 위한다면 부활을 해야 했던 것 아닌가.
그러나 딸을 위했기에 아버지는 부활을 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을 발판 삼아 딸이 성장하길 바라서였다.
레비니안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종족이었다.
“그만 돌아가자.”
카본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셀리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말했다.
“나 너무 외로워.”
“…….”
“이럴 줄 알았으면 계속 아빠 곁에 있어 줄걸.”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같이 보낼걸.
셀리는 그게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카본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러다가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내가…… 내가 있잖아.”
“응?”
“내가 곁에 있잖아.”
셀리의 커다란 눈동자가 껌뻑였다.
그리곤 피식 웃으며 몸을 더욱 깊게 그쪽으로 기울였다.
카본은 갑작스러운 무게감에 움찔했지만, 이윽고 웃으며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함께 지내자.”
“응.”
항상 투덕거리며 지냈지만, 그게 이런 감정으로 자라나게 될 줄은 몰랐다.
둘은 저물어 가는 석양을 등진 채 필리포스의 묘비를 바라보았다.
에필로그 3
“여기냐?”
[너 진짜 도전할 생각이야?]
마검이 약간 두려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작은 특유의 무감정한 얼굴로 그를 꽉 움켜쥐었다.
“도전이라…….”
그는 칼날을 문지르며 웃었다.
“그 정도 상대가 된다면 좋겠군.”
[미친놈. 상대는 마왕이야. 네게 힘을 준 마왕!]
“흥.”
현재 그들이 와 있는 곳은 마검이 만들어진 곳이자, 아이작에게 힘을 부여한 ‘포식의 마왕’의 거처였다.
마왕은 이명의 직관력에 따라 그 강함이 결정됐다.
포식이란 아주 직관적인 단어였고, 따라서 포식의 마왕의 강함은 전 우주에서도 상위에 들 정도로 강력했다.
아이작은 마검의 말을 무시하고 거대한 성문을 열었다.
그곳엔 엄청난 수의 마족이 붉은 안광을 번쩍이며 흉포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그들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마족 너머 거대한 왕좌에 앉아 있는 핏빛 머리카락의 미남자.
그의 관심은 오직 그 미남자에게만 향해 있었다.
미남자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두 물러나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족들이 홍해의 바다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아이작은 덤덤하게 그곳을 가로질러 포식의 마왕 앞에 섰다.
“끊임없이 내 제안을 거절하더니, 인제 와서 내 앞에 선 이유가 무엇이냐?”
“도전하러 왔다.”
도전이란 말에 마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포식의 마왕은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 참 건방진 놈이로군. 나에게 힘을 받은 주제에 말이야.”
“그건 고맙게 생각한다.”
“하하하하! 고맙다라! 재밌는 놈이군. 그보다 나의 검을 들고 도전할 작정인가?”
[주, 주인님.]
“물론.”
[얌마!]
마검이 발작하듯 소리쳤지만, 아이작은 그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포식의 마왕이 조소를 지으며 양손에 핏빛 기운을 응집시켰다.
“뭐. 상관없겠지. 권능으로 회수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러기엔 아이작이 너무 강했다.
그때, 아이작이 그에게 말했다.
“한데, 당신.”
“무엇이지?”
“고작 그 정도가 전부인가?”
술렁이던 장내가 한순간에 침묵했다.
마왕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착각했는지 되물었다.
“뭐라?”
“고작 그게 다인가?”
[미, 미친놈아!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렇다고 하면 좀 실망스러운데.”
아이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말을 이었다.
마왕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왔구나.”
“이 정도라면 더 할 말이 없군.”
“오냐. 이 몸의 힘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
그러나 포식의 마왕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다섯 자루’의 심검이 그의 급소를 모조리 꿰뚫었다.
아이작은 볼 일 없다는 듯 뒤돌아섰다.
절명한 마왕이 그대로 쓰러졌지만, 돌아선 그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마족들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그의 힘은 이미 그들이 거주하는 행성 전체를 압박할 정도였다.
“다음은 어디로 가 볼까.”
[……뭔 놈의 도장 깨기를 이런 식으로 하냐.]
마검이 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놈에게 도전하려면.”
아이작은 ‘신’이 된 박현수를 떠올리며 말했다.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 하니까.”
전 우주를 누비는 아이작의 무사 수행.
그리고 먼 미래.
그는 훗날 우주 최강의 검사가 되어 박현수에게 도전하게 된다.
물론, 그게 얼마나 먼 미래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에필로그 4
고즈넉한 연못 주변을 노인 한 명이 거닐고 있었다.
고급 비단으로 제작된 흑포 위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황금색 용이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 같았다.
“날이 조금 쌀쌀해졌군.”
그는 길게 펼쳐진 만장단애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곧 가을을 넘어 겨울이 시작된다.
한 해가 또 저물어 가는 것이다.
시간이란 참 야속할 정도로 빨랐다.
“나도 곧이겠군.”
천경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그는 초월자였지만, 여타 초월자들과 달리 영생을 살진 못했다.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무림의 모든 초월자가 그러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은 순환의 이치를 벗어난 곳이었다.
정확히는 초대 천마가 벌인 짓이었다.
그는 천마신공의 유대를 위해 ‘승천’을 막아 놓았다.
만약 승천하게 되어 모든 천마가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면, 유난부터 이어져 온 천마의 역사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었다.
역사란 죽어서 이어져야만 했다.
잔인한 현실이었지만, 모두가 그걸 받아들였다.
그것이 천마가 되기 위한 자격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천마에게만 한정된 게 아니라 무림 전체까지 퍼졌다는 거지만.
물론, 등선한다면 영생을 거머쥘 수 있지만, 역대 천마는 전원 등선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내려진 사명을 알기 때문이었다.
천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더 이상 삶에 대한 집착 같은 건 없었다.
우주를 멸망시킬 정도로 강력한 적과 직접 맞서 싸웠다.
그것으로 족했다.
그냥 마지막으로 소원이 하나 있다면 5년 전 사라진 제자를 보는 것이었다.
“현수 녀석. 어디에 있을꼬.”
혼돈의 마왕과 싸움이 끝나고 박현수는 의식을 잃었다.
처음엔 지쳐 쓰러진 건 줄 알았는데, 서서히 몸이 빛에 물들더니 그대로 입자 단위로 깨져 흩어졌다.
영락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직감이 제자가 살아 있다고 알려 왔다.
“보고 싶구나.”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경은 화들짝 놀라 돌아서니,
“……현수야!”
그곳에 그토록 보고 싶던 제자가 서 있었다.
“하하, 하하하!”
스승은 오랜만에 본 제자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인자하게 목소리로 말했다.
“잘 왔다.”
“다녀왔습니다.”
박현수가 환하게 웃으며 스승님에게 큰절을 올렸다.
– 완결 –